2015
한 사람이 고요히 서 있는 모습을 마주한다. 오고 가는 이름 모를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지도 않고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정갈한 부동의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다. 김수자의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인 〈바늘여인〉(1999-2009)에서 하나의 ‘몸’은 시간과 공간의 척도가 된다. 작가의 몸은 지나가는 군중과 겹치면서 우리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가 벗어나기를 반복한다.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몸이 그 인물에 전이돼 있음을 느끼고, 작가의 시선을 빌려 시간 앞에 선 덧없는 자기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
〈바늘여인 – 우주는 하나의 기억이었고, 지구는 하나의 기념물이다(A Needle Woman: Galaxy was a Memory, Earth is a Souvenir)〉. 비슷한 제목의 그의 최근작은 이전 작업의 연장선에서 건축적 형태로 관람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코넬 대학교 첫 비엔날레에서 발표될 이 작업을 위해 김수자, 나노 과학자 울리히 위즈너(Ulrich Wiesner), 건축가인 필자가 긴밀히 협업했다. 대학교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아트 쿼드에, 투명한 아크릴 패널로 감싼 높이 14m, 지름 1.3m의 강철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각각의 아크릴 패널은 무지갯빛 나노 폴리머가 코팅되어 있어, 밝은 빛을 받으면 파빌리온 전체에 연속적인 스펙트럼의 색을 입힌다. 위즈너 그룹(Wiesner Group)의 사이 히로아키(Sai Hiroaki)와 퍼디난드 콜(Ferdinand Kohle)이 나노 입자의 배열 방식을 설계해 만들어낸 이 ‘블록 폴리머’는 빛의 다양한 파장을 보는 각도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굴절시킨다. 파빌리온 내부의 거울로 된 원형 바닥은 하늘을 땅으로 반사해 양자를 무한 연장하는 역할을 한다.
코넬 대학교는 장소 특정적 예술에 관한 오랜 역사가 있다. 1969년 윌러비 샤프(Willoughby Sharp)가 큐레이팅한 ‘대지예술(Earth Art)’ 프로젝트에서 한스 하케(Hans Haacke), 리차드 롱(Richard Long),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 귄터 우커(Günther Uecker)가 캠퍼스에 새롭게 설치한 작업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이 작가들은 대지 자체를 하나의 캔버스이자 작업의 질료로 받아들였다. 김수자가 지구를 하나의 ‘레디유즈드(readyused)’ 오브제로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는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readymade)’, 피에로 만조니(Piero Manzoni)의 1961년 작 〈세계의 주추(Socle du Monde)〉와 유사하다. 뒤샹의 태도에 더 가깝게, 김수자의 작업은 시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경배를 경계한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사물이나 현상, 비물질적인 것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끌어낸다. 하지만 두 작가가 형식적으로 동일한 오브제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김수자에게 바늘은 “하나의 매개체, 신비, 현실, 자웅동체, 하나의 지표와 순간, 그리고 하나의 선(Zen)”이다. 이는 이성적 지각이라기보다는 자각과 통찰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가 말하는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정신과 더욱 유사하다. 다시 말해 이는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는 특정 사실의 본질과 의미를 탐색하려는 의지”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브제를 ‘만드는 것’을 거부해 온 작가로 하여금 14m의 ‘조각’을 잉태하도록 이끌었을까? 협업자들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김수자는 무지갯빛 물질을 담고 있는 작은 유리병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구조색’으로 알려져 있고 울리히 위즈너가 ‘블록 혼성 중합체’로 구현한 이 물질은 화학적으로 단일 구조의 단위체를 발전시킨 것으로, 분자의 연속적인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빛을 굴절시키는 속성은 나비의 날개나 딱정벌레의 껍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하며, 전자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실로 짜인 직물처럼 보인다. 천을 통해 삶과 세계의 진실을 탐구해 온 김수자의 한결같은 관심사가 여기서 또 다른 스케일의 현실을 찾은 것이다. 이 같은 나노과학의 현상과 그의 예술적 실험 사이의 깊은 일관성이 그가 인간의 감각과 지각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현상을 작품화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업을 경험하며 새로운 현실을 마주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속해 온 탐구의 태도이다.
김수자는 “나노기술은 천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외향적, 거시적 관점과 상반되는 내향적, 미시적 방향성을 갖는 표현 방식”이라고 말한다. 전자는 하나의 소실점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예리하게 하고, 내부 공간이 최대한 소거될 만큼 공간을 무한으로 나누고 재정의한다. 동시에 후자는 기하학적 상상력을 넘어 외부 공간의 한계를 확대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기하학으로 공간의 내구성을 유지하는 건축은, 인간의 경험으로 가늠하기에 너무 큰 공간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스케일의 틀을 제공한다. 완성된 파빌리온의 형태가 조각물처럼 보이지만, 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를 잇는 구조물로서 도출된 결과일 뿐이다.
바늘이라는 형태는 건축 역사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수 세기 동안 인간과 우주 사이의 종교적 중심축의 역할을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도 알려진 이 기념물은 이집트 신화에서 신성한 구조물로 등장하고, 뜨고 지는 해를 상징한다. 이는 탄생과 완성의 은유로서 태양의 신 ‘라(Ra)’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바늘의 형태를 통해 자신과 우주를 잇는 매개인 빛과 시간을 드러내 왔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김수자의 바늘이 갖는 시각적 현상은 나노물질이나 건축 구조, 또는 예술적 의도로 구현되기보다는, 미묘한 빛의 변화에서 인지할 수 있는 끊임없는 천체의 운동 안에서 이루어진다. 파빌리온의 표면을 감싸고 있는 분자 구조는 물리적으로 빛을 굴절시켜 가시적인 파장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표면을 만들고, 우리가 그것을 응시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현상은 김수자의 퍼포먼스 비디오 작품에서 보듯, 서 있는 작가와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과도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또한 ‘바늘’은 대지와의 수직적인 관계와 달리 우리 몸과는 평행한 대상으로 마주하게 된다. 캔버스 표면의 붓질로 이루어지던 의식의 흐름은 오랜 기간 김수자의 작업에서 개념화되어 왔다. 붓에서 바늘로, 바늘은 몸으로, 몸은 시선으로. 결국 빛의 공간으로서의 시선만 남을 뿐이다.
이로써 우리 시선은 거리, 시간, 물질, 그리고 천체에 내재한 기억을 잇는 하나의 바느질 행위로 전환된다. 바늘 끝이 닿는 찰나와 영원의 교차점을 끊임없이 오가며.
— 『공간』, 2015년 1월, 11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