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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거기엔 일찍이 아득한 평원과 숲, 건조한 파스텔 톤의 광활한 사막, 그리고 빽빽한 수직수평의 빌딩 숲이 있다. 그 사이사이에 투명한, 때로는 반투명한 하늘과 구름이 이른 아침의 햇살과 저녁 노을에 물들고 있다.
궁극적으로, 캔버스라는 그녀의 지평 위에서 수평과 수직, 그리고 오로지 그 사이의 빛으로만 함축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아그네스 마틴의 추상성은 이렇게 그녀가 몸담았던 서스캐처원(Saskatchewan) 주의 맥클린(Macklin), 뉴멕시코(New Mexico)의 타오스(Taos)나 밴쿠버(Vancouver), 또 뉴욕의 맨하탄이(Manhattan)의 자연과 도시를 닮아있다. 그 터가 바로 자신의 몸을 받치고 있던, 또 빛이 떠오르고 지기까지 끝없이 그녀의 시선이 닿았던 지평선(horizon)과 수직선(vertical)이었다. 우연히도, 아니면 운명적으로 한때 사랑에 빠졌던 그녀의 동성연인의 이력이 자신의 근간인 수평선과 수직선을 직조하는 텍스타일 아티스트였다는 사실까지도 경이롭기만 했던 그녀의 편집적인 선 긋기 작업에 더욱 확신을 더해주는 듯하다.
그녀의 수평선과 수직선은 체화된 지평면과 도시의 구조였으며, 직선의 반복성과 규칙성은 아마도 끝없이 고독한 삶의 자기독백의 반복적 리듬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을 등진 채, 타협을 불허하며, 예술적 실천을 내적 깨달음을 위한 것으로 지탱해 왔던 그녀의 청교도적이면서도 선불교적인 사유와 또 수신의 집합체로써의 그녀의 일생이 읽혀진다. 사실 그라파이트가 넘나든 울퉁불퉁한 캔버스 천의 날실과 씨실을 타고 최소한의 물질적, 감정적 바이브레이션만을 허용하는 그녀의 직선 아닌 직선은 행위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이자 비표현의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다.
그녀가 무척 운동신경이 발달한 한때의 국가대표 수영선수였다는 사실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몸’이라는 대상과 생명체로서의 그녀의 물리적 생물학적 정체성을 얼마나 처절하리만치 소거했는지를 보여준다. 그 소거에 시선의 끝이 닿는 순간 우리는 일시에 숙연함과 겸허함, 또 깊은 체념에서 오는 평온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 작업의 힘은 바로 이 극단적 소거의 능력과, 더 이상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수학적 치밀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극단적인 소거의 과정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그 가느다란 선 위에서 지평선과 수평선을 향하여 무한대로 확장된다. 마치 자유자재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수많은 가닥의 소리의 실들을 늘이고 압축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