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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006년 김수자가 친구들에게 보낸 연하장에는 짤막한 실화 하나가 담겨 있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여아 쌍둥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기 한 명은 생존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병원 규정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간호사는 아기 둘을 인큐베이터 하나에 같이 넣기로 마음먹었다. 아기들을 나란히 눕히자 둘은 서로를 껴안았다. 더 건강한 아기가 약한 아기의 체온과 심박동 조절에 도움이 되었고, 덕분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허약했던 아이는 살아남았다. 이 은유적 사건만큼 이 책, 즉 라 페니체 극장과 베빌라쿠아 라 마사 재단의 두 번째 협업의 산물을 더 시적으로 소개할 수는 없다. 한 달 동안 라 페니체 극장을 찾는 관객은 오페라 공연에 앞서 김수자의 비디오 신작을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감상할 기회를 누리게 된다. 자랑스럽게도 베빌라쿠아 라 마사 재단은 오페라 하우스와는 처음으로 이런 종류의 협약을 맺은 최초의 이탈리아 예술 기관이다. 라 페니체 극장과 재단의 갤러리 공간 두 곳에서 김수자의 비디오 작품들을, 특히 극장 공간을 위해 선택한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묻기에 더없이 알맞은 환경으로 보인다. 실로 이번 상영은 현대 미술과 오페라의 해석 방법론이 서로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오페라를 보고 최초에 느낀 직관적인 즐거움은 악보와 대본을 알고 난 후 더 깊고 온전해진다. 첫 번째 감상을 마친 다음에야, 더 잘 알고 충분히 이해할 두 번째 독해의 준비가 되는 법이다.
상영작으로 선택된 비디오의 제목은 <호흡(To Breathe / Respirare)>이다. 차례로 스크린을 채우는 색의 스펙트럼이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차분하게 변화하는 호흡의 리듬을 예견하며 이어진다. 이 영상은 어떤 이미지도 보여주지 않으며, 오직 색채만을 표현한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기 위한 공기, 비어있음,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호흡은 삶이 던지는 크고 작은 괴로움에 대한 치유의 반응일 뿐 아니라 생존의 행위이다. 호흡이라는 본질적인 행위는 왜 이 영상이 이미지의 본질저구요소, 즉 “빛”으로 환원되었는지 설명해 준다.
김수자 본인도 인정하듯 예술적, 이론적 관점에서 몬드리안에게 받은 영향이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김수자는 무엇보다 한국의 삶과 미학에 연원한 자신의 전통을 저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호흡>의 기원을 김수자의 이전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 김수자는 할머니의 천과 옷을 재료로 삼아 기하학적 패치워크 작업을 하였는데, <하늘과 땅(The Earth and the Heaven)>(1984)에서 보듯 십자 형태를 자주 만들었다. 이후 <대지를 향하여(Toward the Mother Earth)>(1990-91)와 <마음과 세계(The Mind and the World)>(1991) 같은 작품에서는, 기하학적 형태는 부서지고 구성의 우연성이 강해진다. 재료의 조각들은 빠른 붓질처럼 배열되어 있지만, 동시에 거리에서 수집된 삶의 단편들처럼 보이며, 어딘가에서 다시 생명을 얻은 듯하다. 1990년대 초에 제작된 시리즈 <연역적 오브제>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천 조각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닥에 흩뿌려져 다채로운 흔적을 남기거나, 작은 바 테이블 위에 식탁보처럼 걸쳐진 형태로 제시된다.
작가의 이후 여러 작품에는 라 페니체에서 상영된 영상에서 제시된 것과 유사한 개념이 드러난다. 이 영상에서는 천 조각이나 낡은 헝겊 대신, 한국에서 신혼부부에게 혼례 이불로 주어지는 귀한 직물로 대체되었다. 바로 보따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수자는 보따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무수히 활용하였는데, 때로는 평범한 의복처럼, 때로는 매우 장식적이면서 상호연결된 색의 층(<보따리(Bottari)>(2000), <빨래하는 여인(A Laundry Woman)>(2000), <거울 여인(A Mirror Woman)>(2002) 등)으로 표현되었다. 1990년대 초 김수자는 보따리를 또 다른 형태로 제시하였다. 바로 여행용 꾸러미로, 소지품 몇 가지를 담은 부푼 과일 모양의 오브제였다. 전시 《움직이는 도시(Cities on the Move)》에서 김수자는 19 97년 11월 트럭을 타고 나선 11일 간의 여정을 담은 퍼포먼스 비디오를 선보였는데,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기반이 되어준 옛 마을과 도시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그는 조만간 한국—그리고 한국에 대한 애착—을 뒤로 하고 작업을 하러 유럽, 미국으로 떠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퍼포먼스에서 김수자는 우리를 등진 채 보따리 더미 위에 몸을 꼿꼿이 세워 걸터앉은 모습 이며, 그를 지탱하는 보따리 더미는 김수자가 짊어진 짐을 심리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보따리는 얽매인 정체성의 상징이자, 보이기 위한 방식이자 동시에 보지 않기 위한 방식으로 작용하며, 퍼포먼스 <만남: 바라보며 바느질하기(Encounter: Looking into Sewing)>(1998/2002)와 <바늘 여인(A Needle Woman)>(1999-2005)에서 작가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쏟아지는 색채의 폭포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그의 몸은 바늘로 제시된다. 비록 정지해 있지만,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을 활용하면서 군중 사이를 뚫고 지나가고, 그들을 하나로 엮어낸다. 은유적으로 해석할때, 다양한 색과 천 조각을 결합하는 일은 사람들을 "모으고" "수집하는" 행위와 유사한 의미구조를 가진다.
호흡은 대칭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김수자의 작품 대다수—작가 자신의 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은 물론 오브제가 중점에 놓인 작품 모두—에서 발견되는 기존의 미학과도 유사하다. 릴의 거대한 온실 한가운데 설치된 <로투스 - 0의 지점(Lotus: Zone of Zero)>(2003)을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은 307개의 연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등에서는 티베트, 그레고리오, 이슬람 성가라는 세가지 문화적 원천이 서로 어우러진 소리가 ‘꿰매기’와 ‘묶기’의 정신을 담아 울려 퍼졌다. 이 대칭성은 좌/우, 상/하, 내/외 등 그 안에 존재하는 관계를 강조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호놀룰루 시청에서 선보인 <거울여인 - 어디에도 없는 땅(A Mirror Woman - the ground of nowhere)>(2003)에서, 손과 감정, 우정이 완전한 대칭을 이룬 거즈의 탑 안에서 함께 꿰매어져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곳에서 관객은 바닥에 설치된 원형 거울 위에 눕도록 초대되었는데, 그 거울은 거대한 거즈 원뿔 위에 위치한 원형 틈새를 통해 드러난 하늘의 일부를 반사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퍼포먼스에서 김수자가 취하는 자세는 대칭성을 띠고 있다. 이는 신성한 야무나강 강가에서 행한 고독한 명상(<빨래하는 여인>뿐만 아니라, 2005년 3월 11일 타임스퀘어 광장의 혼란 속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에도(<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도 동일하다. 첫 번째 경우, 자연과 자신의 깊은 내면에 맞닿아 충격을 받는 그의 모습은 <구걸하는 여인>에서 연꽃처럼 움직임 없는 자세로 땅에 앉아 있는 그를 예기치 못한 꽃으로 발견하는 군중의 반응과 맞닿아 있다. 대칭이 결여된 이미지에서조차 대칭은 재차 강조된다. <바늘여인(A Needle Woman)>에서 작가가 바위에 기대어 있는 장면이나 <바람여인(A Wind Woman)>의 어긋난 움직임을 담은 이미지에서 보듯, 조화의 부재는 조화를 회복하려는 간절한 마음과 더불어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낮과 밤이 반복적이고 순환적으로 교차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며, 작가는 여러 영상에서 이것을 ‘화해하는 대칭’이라는 특징으로 표현했다.
<호흡(To Breathe / Respirar)>은 김수자의 작업에 제시된 모든 주제를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색화보다 더 대칭적인 것은 없다. 전자 바늘이라 불리는 포스트프로덕션이 이 단색들을 한 땀 한 땀 꿰맨다. 그 색과 형태는 아시아의 비단과 유사하면서 동시에 서양의 모더니즘과도 닮아 있다. 그렇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이원성은 조화를 이루며, 머나먼 문화적 전통들이 마치 거울 속 서로를 비추는 쌍둥이처럼 서로를 도우며 하나로 이어진다.
—『김수자: 호흡 – 거울여인』, 2006년 도록 수록 글,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이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