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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하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베르나르 피비쉐

2002

  • 김수자의 무성 비디오 작품에 대한 반응은 작품만큼이나 실로 말 한마디 없이 고요할 때가 많다. 화면에 나오는 것을 알아보는 데 어려움은 거의 없다. "플롯"이랄 것도 없고, 시퀀스 중 새로운 정보가 튀어나오는 순간도 없다. 요컨대 논의할 거리가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이 한국 작가의 작업에 관한 일종의 해설을 찾아내어, 그의 작업을 특정한 예술이나 철학의 전통과 연결 지어 언어로 정의하고 싶은 유혹이 커진다. 이런 목적에 걸맞게, 특히 매력적인 출발점이 될 키워드가 몇 가지 있다. 선불교, 명상, 요가, 신체의 정지, 마음의 비움, 고행을 통한 황홀경, 우주적 힘과의 합일 등이 그렇다. 김수자의 작업이 그 모두 아니면 일부와 실제 닿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접한 대중의 반응이 거듭 증명하였듯, 동양 철학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김수자의 작품에 공감할 수 있다.

  • 이런 맥락에서 김수자의 작업을 서구의 실존주의나 현상학처럼 보편을 주장하는 경향의 사조와 연결지을 수 있다. 김수자 본인이 자신의 비디오 안에 "현-존재(Da-Sein)"(즉 그곳에 + 있음)한다는 사실만으로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분석한 "탈-존(Ek-sistenz)"의 개념과 어느 정도 연관 지을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안에-있음(being-in-the-world)"이란 언제나 이미 선행하여 존재해 온 있음의 상태, 즉 세계 안에 실존함—실존은 자기 자신의 바깥에 서 있다는 뜻의 라틴어 ex-sistere에서 파생된 말로, 그래서 실존은 나아가 탈-존이 된다—을 뜻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그대로가 되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삶의 가장 평범한 일상성이다. 순수한 "현재 존재와 미래 존재"가 나타나게 하되, 동시에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의 문제는 수수께끼로 남겨둔다. 하이데거에게 신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으로, 행동의 단순한 배경일 뿐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으니, 그에게 신체는 초월의 도구이다. 비디오에 등장하는 김수자의 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저서 『지각의 현상학』을 쓴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정반대로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때 언제나 특정한 견지, 즉 우리 몸의 관점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특정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Etre corps, c'est être noué à un certain monde..."). 그리고 그 세계는 내가 나의 몸을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모든 사물이 쳐다보는 인식되지 않는 종점(le terme inaperçu vers lequel tous les objets tournent leur face)"이자 "세계의 중심축(le pivot du monde)"으로 인식하게 한다. 김수자의 4부작 비디오 설치 <바늘여인>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 몇 가지 미술사적 배경이 김수자의 작업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가령 중국의 전통 풍경화는 고체와 액체의 변증법적 관계를 활용한다. 풍경은 바위와 물, 산과 구름이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붓과 먹의 상호작용을 통해 포착한다. 비록 회화가 김수자의 매체는 아니지만, 앞서 거칠게 요약한 원리를 실제로 따르는 듯하다. 경직된 몸을 제시하여 자연이나 인파의 흐름과 상호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 서양 미술사에도 김수자의 작업을 위치 짓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틀이 있다. 퍼포먼스와 신체예술 분야의 "선구자"들이 쉽게 떠오른다. 예를 들어 인체의 기본 자세(서기, 눕기, 앉기)를 가지고 함께 실험을 진행했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 혹은 마치 조각상처럼 아우라를 발산하며 서 있는 역할을 직접 본인이 즐겨 하였던 제임스 리 바이어스가 있다. 하지만 미술사학자들은 김수자가 비디오에서 보여준 자세를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1818년 경 자주 그렸던 뒷모습의 인물과 연결 짓기도 한다. <석양 앞의 여인>(에센 폴크방뮤지엄 소장),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쿤스트할레 함부르크 소장)의 주인공 모두 전신이 보이는 상태로 그림과 평행한 방향을 보며 그림의 전경, 즉 작품 정중앙에 서 있다. 두 사람 다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고독한 개인으로서 끝없이 넓고 가늠할 수 없이 거대한 자연을 마주한다. 김수자의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뒷모습의 그들은 익명성을 통해 그림 안에서 관객의 대리자가 된다. 그들은 우리의 시선을 대신하는 주체이자 우리의 응시 대상인 객체이다.

  • 이런 생각 중 몇 가지를 깊이 파고들어 보거나, 숭고 또는 보들레르가 말하는 "군중 속의 산책"처럼 또 다른 개념을 살펴보는 것도 분명 흥미롭겠지만, 이 글의 목적은 비디오의 이미지 자체에 집중하여,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그 매혹의 요체를 찾아내는 데 있다. 김수자의 작품 대부분에 나타나는 공통된 요소는 움직임 없이 뒷모습만 보인 채 서 있거나 기대어 있는 여인이다. 우선 이 인물은 접근할 수 없는 존재인데, 그 이유는 관객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늘여인> 비디오에서 "바늘여인"을 정면으로 보는 이는 그를 향해 다가오는 군중으로,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을 그들은 본다. 만일 우리가 여인의 자리에 선다고 해도, 관객으로서 이미 본 것 이상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저 뒷모습의 인물에 대한 동일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오히려 행인 중 한 명의 시점을 취하는 편이 훨씬 흥미로울 것이다. 결국에 장면 전체의 핵심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저 인물이 쥐고 있는 듯하다. 행인들이 여인을 쳐다본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무시한다면 또 그 까닭은 무엇일까. 여인은 울고 있을까 웃고 있을까, 무언가 말하고 있을까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눈은 뜨고 있을까 감고 있을까. 여인은 아름다울까 그렇지 않을까. 행인들의 응시는 이런 질문에 아무런 실마리도 주지 못한다. 이 여인은 구체적인 인물이 아니라(여인은 증식할 수 있다) 추상적인 이미지이다. 회색 옷을 입은 그 여인은, 실루엣처럼 비물질적으로 존재하며, 우리 자신의 그림자이자 도플갱어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녀는 군중에 맞서 자리를 지키며, 말없이 그러나 강력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지키고 있는데, 그는 자기 자신인 동시에 "타자"가 되는 셈이다.

  • 뒷모습의 인물에 닿을 수 없는 두 번째 요인은 관객이 그녀의 시점을 공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바늘 여인"이 누운 바위는 관객의 눈높이보다, 또 지평선보다 높고, 거기까지 이어지는 길도 없다. 전경이 제거되어 깊이를 파악할 수 없고, 그녀 앞에 펼쳐진 풍경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녀가 잠을 자는지 눈을 감고 명상 중인지, 혹시 우리에게는 안 보이는 무엇에 잠시 눈길을 던지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여인은 자신을 보여주길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그의 시점으로 세상을 볼 가능성마저 거부하며,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그녀는 다다를 수 없는 거리를 상징한다. "빨래하는 여인"도 비슷한 공간적 문제를 제기하니, 과연 여인이 어디에 서 있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강기슭 바로 옆일까? 강보다 훨씬 높은 곳인가? 강물은 여인 앞에서 벽을 이루어, 작가의 모습을 비추는 대신 위쪽의 하늘과 날아가는 새 떼를 비춘다. 다른 한편으로, 관객은 그녀의 시점을 취할 수 없고, 그녀의 공간에 함께할 수도 없다 . 이 작품에서 여인은 허리 아래로는 보이지 않고, 상반신만 이미지 속으로 불쑥 솟아나와 있다. (기대어 누운 인물 역시 화면 안에 있다기보다, 화면의 옆쪽에서 자신을 화면 위로 영사하여, 마치 바위와 하늘 사이에 끼어든 것처럼 보인다.) 이 "상반신의 인물"은 정해진 어떤 공간적 용어로도 꼭 집어 규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인물은 문자 그대로 "균형을 잡고 있는(grounded)"듯 보이는데, 이 형상이 화면을 반으로 나누는 정중앙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여인이 공간의 좌표를 창조하고 결정한다. 모든 것이 그로부터 시작되고 연관을 맺고 있으니, 그가 곧 중심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 이 뒷모습의 인물에게 다가갈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는 공간 자체, 즉 그 인물이 마주하고 노출된 공간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이 공간은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유동적이다. 심지어 "바늘 여인"이 기대어 있는 기타큐슈의 단단한 바위들조차 오래 바라보면 "변화"를 겪고 있는 듯하다. 바위들이 이룬 능선은 마치 풀어놓은 머리카락의 흐름처럼 보이고, 의인화된 요소들이 바위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나뒹구는 두개골의 형상 같은 것들이 보인다. <떠도는 도시들 - 2727km 보따리 트럭>에서 보따리 위에 앉은 여인은 도로에 패인 구멍 때문에 몸이 조금 흔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퀀스에서 정적인 요소로 남는 이는 결국 그녀 자신이다. 굽이굽이 화면을 통과하는 길이 눈 앞에 펼쳐지고, 풍경이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공간의 불안정성—좀 더 긍정적으로 말하면 동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불안이나 위협감을 전혀 주지 않는다 (가령 보리스 비앙의 소설 『세월의 거품』에서 주인공의 거주 공간이 점점 변형되고 좁아지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이 여성 인물은 비등방적 공간에 존재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시간에 속해 있으니, 우리 세계의 시간을 극도로 느리게 한 슬로모션의 시간이다. 세계의 끊임없는 변화를 김수자는 피할 수 없지만 또한 자연스러운 전환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이 끝없는 변화에 노출된 개인이 지닌 힘은 ‘존재로 가득한 현존재(Da-Sein)’만으로 변화를 무력화할 힘을 지닌다.

  • 바로 여기에, 김수자의 비디오 작품이 주는 매혹의 핵심이 존재한다. 대조적 요소를 변증법적 관계의 긴장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대신, 양극의 요소를 전면에 불러내 조화의 자연스러운 기반으로 삼아 섬세한 균형을 성취한다. 그가 영상에 담는 것은 평범하지만, 그의 영상이 현실적이라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존재와 부재의 균형은 그의 이미지에는 물론 우리의 머릿속에도 존재해서, 영사기가 꺼지자마자 그 뒷모습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김수자는 우리 시선의 주제이자 객체이고, 개인이자 추상이며, 특정 여성인 동시에 모든 (여성) 인류이며, 도구이자 배우이고, 멈추어 있으나 결단력이 있다. 인간이 움직이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지 이론에서 자명한 이치로 통한다. 그러나 김수자의 작품에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부동성이다. 그는 자신을 이미지 중심에 세우면서도, 그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의 단순하면서도 힘 있는 등장은 놀라운 방식의 자기주장이며, 새로운 공간과 시간으로 나아가는 모험이 최소한의 수단으로 지금 이곳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 — 『김수자, 바늘여인』, 2001년 도록 수록 글,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이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