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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마 다코스타 ⎹ 화합

세마 다코스타

2016

  • 최근 수십 년의 놀라운 변화로 한국은 세계의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 단시간에 한국은 생존경제 국가에서 21세기 산업 및 기술 강국으로 탈바꿈했다. 삼성, 현대, 기아, LG 같은 기업이 현 한국 산업계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195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은 내전으로 황폐한 나라였다. 평균 생활 수준은 아프가니스탄과 비슷했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보다 열악했다. 당시 한국의 인구는 문맹 내지 반문맹의 소작농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두 세대가 지난 후 한국 청년은 세계에서 가장 준비된 경쟁력 있는 쪽에 속한다. 이러한 변화의 주요인은 단연 교육을 경제 성장의 기초로 보고 이에 주력했다는 데 있다. 정부도 가정도 교육을 개인 삶의 목표와 야심을 이룰 가장 확실한 방도로 여긴다. 따라서 학생 개개인의 노력을 애국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터, 국민이 능력을 갖출수록 사회 전체가 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이다. 교육에 대한 투자는 빈곤을 떨치고 자원 부족을 만회할 인적 자본의 생산 수단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은 매년 더 나은 성과를 거두어 미국이나 유럽 같은 경제 대국과의 경쟁을 가능케 하는 수출 기반의 전진형 발전 모델을 세웠다. 만약에 직업적 명성이 최고의 기준이고, 근면성과 사업 수완이 평가의 잣대이며,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면, 한국은 성공한 국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또 그들의 감정과 정서는 어떨까? 일터에서의 쓸모를 넘어 그들의 개인적, 사적인 삶은 어떠할까?

  • 김수자(1957년 한국 대구 출생)의 작품은 한국의 급격한 변화 과정에서 간과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전부터 자리한 곳에서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되어 오다가, 갑작스럽게 중단과 희생을 겪은 삶의 본질적이고도 연약한 측면을 말이다. 집단성은 사람을 과거와 이어주는 의례와 전통, 불가해한 일에 대응할 수 있게 일종의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상징적 행위나 의식에 의지하여 유지된다. 언뜻 비합리적이지만 이러한 행위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다지고 연대와 공감 같은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기존에 확립된 일련의 의례를 통해 죽음, 삶, 자연의 순환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기린다. 그러한 인간 본연의 흐름이 시장 경쟁, 개인주의, 기업 이익의 추동 원리에 기반한 새로운 구조로 갑자기 대체되면, 목표 달성에 실패한 이들은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가장 약한 이들이 가장 취약하다. 뿌리를 잃고 방향을 상실한 그들에게 붙잡을 무언가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렵다. 많은 이가 감당할 수 없는 광적인 속도에 휩쓸려, 초연결되어 있지만 애석하게도 인간적 접촉을 결여한 세상에 삼켜져,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길 잃은 자신을 발견한다. 고립되고 지치고 낙담한 그들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스스로 생각할 힘이 없다. 그들에게는 김수자의 작업이 인도하는 두 가지 근본적 태도인 성찰과 자기 인식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 김수자의 작업 중심에는 타인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불어넣고 우리 모두가 가진 인간성의 감각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제안은 사람들 사이에 접점을 마련하고, 긍정과 심지어 치유의 감각을 전하는 다리가 될 보편적 언어를 성취한다. 예술은 분명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초월적 도구이다. 유럽으로 밀려드는 수천 명의 난민이 처한 것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에도 비양심과 무관심, 폭력과 무감각의 태도로 일관하는 현실에 맞서,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미디어와 인터넷으로 초래된 전반적인 무기력을 깨뜨릴 대안이 존재한다. 무관심을 떨쳐내기 위해서 자기 발견을 첫걸음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로 향하는지를 묻고, 이웃과의 차이를 존중하고 또 그들로부터 배우며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나이, 인종, 언어, 부, 문화, 신조와 관계 없이, 인간은 똑같은 욕구와 관심사를 가지고 있고 공통의 본질을 공유한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고 울고 웃고 괴로워하고 기뻐한다. 이런 존재 본연의 요소를 우리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도 알아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조장하는 수동적 태도에 사로잡혀, 불편하다거나 나와 무관한 일을 회피하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변화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행동일지라도, 올바른 방향에 놓인 움직임이라면 분명 유의미할 것이다.

  •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김수자는 점점 물질적 짐과 불필요한 의무를 내려놓고 보편적 유목민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목이나 관심을 끌지 않으면서 귀를 기울이고 바라보는 법을 익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게 두고 장소의 맥을 짚어 주변의 환경과 친밀한 교감을 형성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정치 전략에서처럼, 그의 작업에서 무위는 특정 상황을 부각하는 심오한 몸짓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연작인 <바늘여인>(1999-2001)이 이를 잘 보여준다. 도쿄(일본), 상하이(중국), 뉴델리(인도), 뉴욕(미국), 멕시코시티(멕시코), 카이로(이집트), 라고스(나이지리아), 런던(영국) 등 세계 최대 인구 도시의 분주한 거리에서 촬영한 영상 속에서, 김수자는 미동 없이 카메라를 등지고 주변 행인의 에너지를 관찰하며 서 있다. 그는 군중 한가운데 홀로 가만히 집중한 상태이다. 2005년 김수자는 새로운 판본의 <바늘여인>을 제작하여 같은 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였는데, 빈곤과 내전, 종교 갈등으로 얼룩진 여섯 개의 도시, 파탄(네팔), 하바나(쿠바), 리우데자네이루(브라질), 은자메나(차드), 사나(예멘), 예루살렘(이스라엘)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김수자는 주민들이 매일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위태로운 이 대치 지역의 삶의 조건을 고발하려 했다. 영웅인 척하지 않고, 어느 편을 들거나 어떤 식의 개입도 피하면서, 김수자는 이입하기 쉽지 않은 불편한 현실로 우리를 가까이 이끈다.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그의 작품 속에는 인류학적 함의가 담긴 복합성과 깊이의 층위가 숨겨져 있다.

  • 놀랄 만큼 다채로운 정체성이 공존하는 전 지구적 세계에서, 김수자는 우리에게 비판적 사고를 발전시킬 발판을 제공한다. 그의 작업은 하나의 미학적 오브제로 정의되는 단 하나의 목적을 넘어, 국경이나 출신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감정을 강조하는 수렴의 지점을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소유할 수는 없으나 공유할 수 있고, 그렇게 우리의 삶과 현실 경험 속에 뒤섞인 진술처럼 기능한다. 그의 가르침에서 단 하나의 도덕적 교훈을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화합일 터, 인간주의, 대화, 성찰, 존중과 같은 가치를 아우르는 단어이다.

  • 이번 전시의 제목인 《호흡: 0의 지점(To Breathe: Zone of Zero)》에 담긴 유달리 포괄적이고 열린 태도를 고찰하면 전시를 더 폭넓게 잘 이해할 수 있다. "호흡"이라는 말은 몸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숨을 마시고 내쉬는, 인간의 기본 행위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 처음으로 하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다. 어떤 이상이 생겨야 주목할 만큼 평소 아무 자각 없이 행하는 이 자동적 행위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며 생명의 기적에 참여하는 큰 행운을 누리고 있음을 뜻한다. 아무리 기본적이고 평범하다 해도, 호흡은 우리가 성장하고 활짝 피어나 삶을 누리게 하는 초월적 사건이다. 더욱이, 호흡은 무형의 것과 신체적인 것을 잇는 연결고리이다. 많은 사상학파, 특히 동양 철학에서 호흡을 명상과 연관 짓는다. 바람직한 호흡은 건강에 이로울 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의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감정과 신체 기능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느릿하고 규칙적인 깊은 호흡은 차분한 마음으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고, 생각을 더 잘할 수 있게 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이 한국의 작가는 잠시 멈추어 가만히 자신의 몸을 느끼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라 청한다. 숨을 들이쉴 때 수축하는 가슴과 등의 움직임을 인식하고, 팔에 내려앉은 옷의 가벼운 압력을 느끼며, 발에 가해지는 몸의 무게를 알아차리는 그 고요의 순간, 우리를 둘러싼 작품이 발하는 공기 속에 깃든 미묘한 결을 감지할 준비가 된다. 그의 설치에서는 감각적인 것이 오브제적인 것에 앞선다.

  • 김수자는 작품을 새로이 전시할 때마다 특수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관한 깊은 고민을 아우르는 형이상학적 상태로, 장소의 특수성에 대해 작품이 내놓은 개념과 김수자의 내면적 측면을 연결한다. 동시에 그것은 흘러가며 굽이치는 하나의 강줄기처럼 이전 프로젝트와도 유대를 맺는다. 더 큰 범주라 할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이번 전시에서는 "호흡"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은 10년 이상 김수자의 예술에 반복적으로 등장해 왔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그의 작업은 하나의 연속체로, 한 번도 잠긴 적 없는 땅에 범람하는 물길로 이해해야 한다. 김수자의 전시는 결코 단발적이지 않다. 항상 배경이 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니, 각각의 전시는 길게 이어지는 일화의 사슬을 이루는 고리와 같다.

  • 이번 전시의 경우, 그 기원을 직물 전통으로 유명한 폴란드의 도시 우치(Lodz)에서 찾을 수 있다. 2004년 우치 현대미술 비엔날레에 초청된 김수자가 배정받은 전시 공간은 사실 옛 직물 공장이었고, 알다시피 직조는 김수자의 작업과 강력한 연관성을 지닌다. 이곳에서 김수자는 한때 완전히 가동되던 공장의 소리를 다시금 상상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 중요한 경험을 계기로 김수자는 본인의 숨소리를 녹음하여 설치의 주 요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첫 녹음은 <직물공장>(2004)에 쓰였는데, 여기에서 김수자는 다른 속도로 크게 숨을 쉬고 코로 여러 음을 허밍하며,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가 어떻게 자아 감각을 변화시키고 기분을 전달하는지를 탐색했다. 이후 두 곳의 상징적 극장에서 선보인 장소특정적 프로젝트, 즉 베니스 라 페니체 극장의 <호흡>(2006)과 파리 샤텔레 극장의 <호흡 – 보이지 않는 거울/ 보이지 않는 바늘>(2006)에 이어,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산하의 전시 공간으로 마드리드 엘 레티로 공원에 소재한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세 번째 프로젝트 <호흡 – 거울여인>(2006)을 선보였다. 이후로도 김수자는 음향적 측면을 작품에 종종 도입하였는데, 퐁피두 메츠에서 선보인 최근의 <호흡>(2015)에서처럼 주역을 맡기도 하고, 이번 말라가 전시에서처럼 내재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로투스 – 0의 지점>

  • 말라가 현대미술센터(CAC Málaga)를 위해 준비한 대형 설치에서 김수자는 미술관 중앙 홀을 천으로 된 700여 개의 등으로 가득 채운다. 둥근 모양의 등은 분홍색이고 아래로는 초록색 받침이 있다. 묘하게도 등 안에 광원은 없다. 완연한 꽃잎과 가운데의 꽃받침 모양으로 보아, 피어난 연꽃을 닮게 만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공의 꽃들은 철선에 매달려 바닥에서 4.5m 높이에 길게 퍼져 있다. 마치 천장처럼 균일하게 펼쳐진 연등의 막 외에도, 그레고리오 성가, 이슬람 찬송, 티베트 불교의 독경 소리를 동시 재생하는 대형 스피커가 설치의 일부를 이룬다. <로투스 – 0의 지점>의 전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어서, 2004년 프랑스 릴의 팔레 드 라모에서 첫 선을 보였고, 이후 2008년 벨기에 브뤼셀의 갤러리 라벤슈타인의 원형 홀을 비롯해, 2011년 한국 서울의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도 전시된 바 있다.

  • 이번 전시와 이전을 가르는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이곳 말라가에서 연등은 사각의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반면 이전에는 항상 원형의 패턴으로, 밖에서 안으로 동심원을 이루며 모여들어 연등의 대열이 만나는 중앙 지점에서 끝이 났다. 공간의 중심에 자리한 그 텅 빈 핵은 그라운드 제로이자, 해당 장소의 온 에너지가 흘러드는 소용돌이였다. 이러한 배치는 의도적으로 만다라를 닮게 디자인되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만다라는 우주를 다스리는 힘을 표상하는 복잡한 구조물이며, 특정한 유형의 명상을 돕는 도구로도 쓰인다. 본래 이 작품은 2003년 3월 발발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응답으로 구상됐던 것이다. 김수자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조화롭게 한데 모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사색을 유도하는 중립의 지대를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우리를 가르는 모든 차이는 흡수하고 우리를 하나로 결속하는 것들은 키우는 특이한 무반향실을 고안한 것과 같아서, 김수자는 성공적으로 우리를 서로에 대한 존중과 평화로운 명상을 촉진하는 불편부당의 지대로 이끈다.

  • 이 작품의 선례를 신비적 성가를 도입한 첫 작품인 <만다라 – 0의 지점>(2003)에서 찾을 수 있다. 1998년 처음으로 뉴욕에 온 김수자는 음악이 나오면 불이 켜지는 화려한 주크박스를 보고, 자신의 출신지와 이 새로운 환경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음을 느꼈다. 그에게 주크박스 스피커의 둥근 모양은 불교 전통의 만다라(우주의 알레고리)와 형태적으로 유사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서양 대중문화의 사물에 동양 종교의 함의를 효과적으로 불어넣었다. 심지어 표면에 불이 켜지는 방식조차 고딕 양식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데, 성당에서는 신성을 상징하는 빛이 전례 성가의 반복적인 소리와 결합한다.

  • 말라가 전시에서 그 중심점은 이제 하나의 추상이, 분명한 경계가 있는 지대라기보다 광범위한 영역으로 퍼져가는 전반적 분위기가 되었다. 이전 버전과는 달리, 에너지는 중심을 향해 흐르지 않고 전시실 전체로 흩어지고 반향하며 넓게 퍼져나간다. 마지막으로 이 설치를 원형으로 선보인 2011년 그해 12월에 이라크 전쟁이 끝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무력 충돌과 함께 만다라로서의 작품 주기도 함께 막을 내렸다는 가정이 타당해 보인다. 이라크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와 러시아의 중간 지점에 마치 신경 중추처럼 위치한 국가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라크 지역에 깊은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라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지로, 두 개의 강(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의 땅이자 서구 문명의 요람이었다.

  • 이번 말라가의 장소특정적 설치에서 보듯, 김수자의 작품이 지닌 본질적 특징 중 하나는 계속해서 진화하는 능력이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장소에 놓일 때마다 그곳의 요구와 주변 환경에 맞추어 미묘하게 변화해 간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자신이 놓인 새로운 생태계에 매번 적응하듯, 김수자의 작품도 무엇도 요구함 없이 선택된 장소에 순응한다. 그의 작업은 침묵의 대화를 모색하며, 관객에게 잠시 멈추어 사색의 태도를 가져보라 권한다. 공간과의 만남은 강요된 것도 의무적인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로, 주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의 세계 내 존재 방식을 강화할 올바른 질문을 찾는 문제이다. 이처럼 예술 언어의 유연한 측면으로 인해 그의 모든 작품은 영원히 진행 중인 열린 소산이 된다. 작품이 전시되는 도시와 조건은 변하고, 관객의 유형과 환경도 그렇다. 그리하여 각각의 전시는 프로젝트의 의미를 풍성히 하는 새로운 장이 되어, 작품의 폭을 넓히고 보편화한다. 새로운 설치는 끝없이 긴 과정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단계로, 그 과정이란 멀리 뻗어나가 작품의 메시지를 세계에 펼치고 전파하는 길과 같다.

  • 이번 설치를 "0의 지점"이라 부르기로 한 것은 시의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결정으로, 필연적으로 "그라운드 제로"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이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5년,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지점을 가리키기 위해 처음 쓴 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완전한 폐허 지역을 뜻했다. 이후 한동안 쓰이지 않다가, 2001년 9월 11일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뉴욕 쌍둥이 빌딩이 붕괴했을 때,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남은 텅 빈 구덩이를 미국 정부와 언론 매체가 그렇게 부르면서 수십 년 만에 되살아났다. 그 후로 이 말은 재앙적 파괴의 최대 범위 내지는 지역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 되었다. 우리는 "그라운드 제로"라는 말에서 슬픔과 고통이 집약된 장소, 감정과 경의를 발산하는 거대한 규모의 지역을 자연스레 연상한다. 아마도 이 비어 있는 공간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면 그러한 공백을 형성한 사건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일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 공백은 부재를 통해 어떤 일이 발생했음을 거듭 주장한다. 동시의 우리는 그곳을 재생의 장소이자 새로운 출발점으로, 실로 다시 태어나 과거의 잘못을 거듭하지 않을 기회로 보아야 한다.

  • 김수자가 제안하는 이 0의 지점 혹은 무인 지대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충돌해 온 문명들이 화합의 유대를 맺도록 돕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여러 종교의 기도를 겹쳐 만든 하나의 흡인력 있는 멜로디가 배경에서 쉼 없이 재생되며, 우리의 주의를 끌고 감정에 말을 걸어 마음을 사로잡는 분위기를 창출하는 데 일조한다. 들려오는 최면적 성가는 기독교, 이슬람, 불교의 기도를 한데 결합한 것이다. 서로를 보완하며 겹쳐져 아름답고 은은하면서도 범세계적인 운율을 자아내지만, 서로 다른 목소리와 음악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진 않다. 그레고리오 성가, 이슬람 기도, 불교의 경문 또는 만트라 모두 각자의 종교 전례 안에서 행하는 역할은 비슷하다. 신자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스러운 경전의 시가나 구절에 힘을 싣는 것이다. 발상과 의미 면에서, 이들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많다.

  • 지금 안달루시아에서 김수자가 보내는 문화 간 이해로의 초대는 스페인 역사에서 사람과 땅의 현대적 정체성을 형성했던 결정적 시기인 알-안달루스(Al-Andalus) 시대의 모범적인 관용과 평화적 공존을 기억하고 되살리자고 촉구한다. 수 세기 동안 모사라베, 이슬람교도, 유대인, 기독교인은 이베리아 반도에 넓게 걸쳐 나란히 살아가며, 이웃과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번영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 유산은 코르도바의 대모스크/대성당이다. 이슬람에 큰 의미를 지닌 이 건물 본래의 아랍 양식은 오늘날 가톨릭 미사 전례와 융합되어 있다. 말라가주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조화의 사례로 세 문화 축제(Three Cultures Festival)가 있다. 악사르키아 지방의 마을 프리힐리아나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알-안달루스의 정신을 누구보다도 성공적으로 지켜가고 있다. 반면 남한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밀접한 북한 및 특히 중국에서는 종교적, 정치적 박해가 만연하다. 반세기 넘게 조직적인 인권 탄압이 자행되어 온 티베트에서 주민들이 겪은 압제는 독립의 목소리는 물론 무엇보다 민족적 정체성에 가해진 수치스러운 폭력이다. 김수자의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불교 음악이 티베트 독경으로 이뤄진 것은 우연이 아니어서, 수십 년간 해결의 기미 없이 계속되는 분쟁에 대한 암묵적 언급과 같다.

  • 말라가 현대미술센터의 중앙 홀에 들어서면, 머리 위로 연등이 설치된 트인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무어라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묘하게 익숙한 소리가 주변을 감싼다. 김수자의 예술 언어는 덜어냄의 언어이다. 그는 본질만이 남을 때까지 불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제거해간다. 이번 설치에서 남은 것은 일정 패턴으로 천정에 펼쳐진 녹색과 분홍색의 구체가 자아내는 연쇄적 배열로, 보는 이의 마음에 무언가를 환기시킨다. 전시실을 완전히 비움으로써, 김수자는 관객이 오브제보다는 감각과 감정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불안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 처음에는 다소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이 작품의 목적은 관객으로 하여금 몸과 마음이 빚어내는 감각에 자신을 조율하여, 기존의 환경과 단절하고 이곳의 분위기에 깊이 잠겨 자기 인식을 고취하는 데 있다. <로투스 – 0의 지점>은 내밀하고 개인적인 작품이지만, 역설적으로 타인에 둘러싸인 채 사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잠시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특별한 공간에 들어선 느낌으로, 파도를 헤치고 바다에 걸어 들어가 해안을 등지고 먼 수평선을 응시하며, 바람의 손길을 느끼고 출렁이는 파도 소리를 듣는 기분에 비견할 만하다.

  • 스마트폰 화면에서 단 1분도 눈을 떼기 어려운 오늘의 첨단 기술 사회에서,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는 점점 더 어렵다. 우리는 실제의 일상을 즐기지 못하게 가로막는 지속적인 주의 분산의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많은 이들이 어떤 일을 실제 경험하기보다 카메라에 담는 데 매진한다. 쉴 새 없이 주의를 재촉하는 정보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왓츠앱, 스냅챗, 이메일 등 피상적인 메시지들의 집중포화에 맞서, 김수자의 섬세한 설치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인식을 드높이는 성찰의 작은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 어떤 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고 매일의 번잡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평화의 안식처와 같다.

  • 이탈리아의 철학자 알레산드로 바리코(Alessandro Baricco)에 따르면, 청년 세대의 경험 방식은 21세기에 접어들며 크게 변했다. 그들에게 경험이란 가능한 많은 장소나 현장에 닿으려 피상적 관계를 맺는 방식에 불과하다. 이는 구글의 검색엔진이 촉진하는 상호연결 링크의 궤적과 같고, 검색의 결과는 지식과 해법의 전형이라 칭송받는다. 청년들은 편리함, 적당함, 간소함, 속도에 가치를 둔다. "언제나 이러했던 것은 아니며, 지난 수 세기 동안은 그렇지 않았다. 가장 지고하고 가치 있는 차원의 경험은 한 번에 하나씩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 숨겨진 가장 깊은 곳을 열어낼 만큼 친밀함을 쌓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종종 인내의 노고였고, 심지어 학식과 연구의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험은 마법 같은 찰나에 일어날 수도 있다. 깊게 파고들어 의미의 상징을 건져 오는 돌연한 직관으로, 실제 겪은 체험으로, 생생한 강렬함으로도 경험은 순간 일어난다. 어떤 경우든, 그것은 인간과 현실의 한 조각 사이에 벌어지는 밀회, 한정된 장에서 일어나는 결투이자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1] 바리코는 개인적 조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며, 깨달음으로서 경험이 지닌 가치를 옹호하려 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김수자의 작업을 이루는 기반과 일맥상통한다.

  • 연등은 집단성, 즉 유사한 특성을 공유하는 공동체에 속한다는 소속감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함께 모인 연등은 공간을 점유하고 변형할 수 있는 군집을 형성한다. 멀리서는 연등 하나하나를 거의 구별할 수 없다. 연등은 진정한 생활 자체에서 가져온 평범한 사물이다. 한국에서는 여러 형태의 색등을 자주 사용하는데, 특히 싯타르타 고타마가 태어난 석가탄신일을 기념해 사찰과 거리를 장식하는 데 쓴다. 실제로 석가탄신일은 이 아시아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중적인 축제일 중 하나다. 음력 4월 8일로 매년 양력 날짜가 바뀌기에, 어떤 해에는 5월 초에 어떤 해에는 5월 말에 오기도 한다. 매년 이맘때면 서울에서 다양한 활동, 무용, 공연으로 구성된 연등제가 열린다. 축제의 백미는 단연 대규모 퍼레이드로, 서울의 대형 사찰 중 하나인 조계사에서 마무리된다. 이날이면 인근의 방문객, 관광객, 주민은 종일 스님들이 외는 염불과 진언을 들을 수 있다. 만일 어느 사찰 마당에 펼쳐진 연등의 바다 아래를 거닐다 독경 소리를 듣는다면, 이곳 말라가의 설치와 자연스레 이어지는 고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울이 김수자가 오랜 시간을 보낸 도시 중 하나임을 생각하면, 이 축제가 작품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타당해 보인다.

  • 한국의 불교 종파는 일본의 선불교와 상당히 가까워서, 명상, 영적 균형, 정서적 안녕을 강조한다. 그것은 종교라기보다 철학이자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동양에서 연꽃은 부처의 형상 및 가르침과 연관되는 신성한 꽃으로, 영적 순수성, 우아함,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그중에서도 분홍 연꽃이 가장 특별해서, 신성한 존재와 연결된다. 아시아의 여러 종교에서는 종종 신적 존재를 연꽃 위에 신중히 앉은 모습으로 그린다. 실제 요가에서도 명상할 때 연꽃 자세, 즉 파드마사나를 자주 취한다. 한국 문화의 여러 측면과 세부를 세심하게 읽는 김수자의 태도는 그의 작업에서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호흡 – 국기>

  • 말라가 현대미술센터에 전시된 김수자의 두 번째 작품은 <호흡 – 국기>이라는 이름의 2012년도 비디오 작품이다. 작품에서 우리는 246개[2] 국기가 하나씩 천천히 화면을 가로질러 행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시퀀스는 총 40분 41초 동안 이어진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의미의 비디오라기보다 사실상 스틸 이미지들의 중첩 몽타주이다. 서사적 흐름도 보이스오버도 배경음도 없이, 작품은 절제된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 있다. 마치 내용이 천천히 계속 변하는 하나의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공통된 이목구비를 이용해 하나의 얼굴을 다른 얼굴로 변환하는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법인 페이스모핑과 유사한 효과를 자아낸다.

  • 이 작품은 앞서 다른 곳에서 전시된 바 있다. 2012년에는 현대미술트레일축제 기간에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거리에 등장했고, 2년 뒤인 2014년에는 대만의 타이베이현대미술관에서 이곳 말라가와 유사한 전시 환경으로 선보였다.

  • 본래 국기는 개인이나 집단을 대표하는 천으로 된 물체이다. 유럽에서 국기는 아랍인의 유럽 진출과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에야 보편화되었는데, 왕과 봉건 영주의 국기에 비단 같은 가벼운 천을 쓰는 방식이 동방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이후, 유력 가문의 구성원을 구별하기 위해 국기를 쓰는 관습이 널리 퍼졌다. 지리적 지역 혹은 영토의 집단적 상징이라는 개념의 국기는 비교적 최근의 산물로, 근세에 등장하여 지난 두 세기에 걸쳐 정착하였다. 현재까지 사용되는 가장 오래된 국기는 덴마크의 것으로, 그 디자인은 14세기에 채택되었다. 하나의 상징으로서 국기는 오늘날 국가를 대표하는 표상 중 하나로, 존중은 물론 심지어 경의를 표해야 할 국가의 환유물이다. 그것은 선진 사회에 필수적인 자유, 독립 같은 기본 인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국기는 종종 애국심을 집약시키고, 어떤 상황에서는 민족주의적 열기를 고취하기도 한다. 국기는 원래 구체적인 물리적 사물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대체로 출신지나 원산지를 나타내는 가상의 무형적 아이콘이 되어, 저녁 뉴스의 통계 인포그래픽부터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행사까지 어디에나 등장한다. 여전히 관공서의 공식 지위를 강조한다거나 중요한 날을 기리기 위해 실물 국기를 게양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용도는 과거의 자취에 지나지 않는다.

  • 국가를 정의한다는 것은 민감한 일로, 조심스레 다뤄야 할 까다로운 지점이 있다. 상황마다 개별적으로 고려하고 분석해야 할 구체적 요소가 있으니, 탈식민주의, 문화, 정치, 경제의 측면이 전략적 이익에서 군사적 이익까지 폭넓은 이해관계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국가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인지조차 논쟁거리이다. UN은 193개의 주권 국가와 바티칸시국과 팔레스타인 두 곳의 상임관찰국을 인정하고 있다. 대만, 홍콩, 서사하라, 코소보 등 UN이 "분쟁 지역"으로 간주하는 곳에는 그러한 지위가 부여되지 않는다. 어떤 나라들은 수 세기 전에 세워졌지만, 수립된 지 겨우 몇 년 되지 않는 나라도 있다. 가장 큰 국가는 수억 명의 인구와 대륙만 한 영토를 자랑하지만, 가장 작은 국가는 5만 명도 되지 않는 인구에 소도시 하나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이다. 또 어떤 나라들은 극도로 부유하지만, 어떤 나라는 터무니없이 빈곤하다. 우리가 하나로 묶으려 하는 실체는 분명 지극히 다르다. 사실상, 이질성과 지위의 격차야말로 이 잡다한 집단을 정의하는 특징인 듯하다.

  • 이처럼 역력한 불평등과는 정반대로, <호흡 – 국기>에서 김수자는 국가를 아이콘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모든 국가를 똑같이 기본 층위에 둔다.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세계 어디에서나 이해 가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최소한의 표현을 고안한 것이다. 그의 목표는 국경이란 인위적 구성물로, 편의에 의한 약속임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존재하는 현실은 단 하나이며, 그것은 출신이나 민족, 언어, 종교와 무관하게 모두에게 똑같이 부여되어야 할 가능성으로 채워진 세계이다. 국기의 중첩은 이해심의 표현이자, 동등한 존재 간의 우애, 차이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다. 이처럼 중첩을 통해 국기를 시각적으로 종합한 것은 특권적 지위에 있으면서도 전쟁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난민의 인도적 망명 요청을 외면하는 국가에 대한 무언의 항의와 같다. 연대는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주제 중 하나로, 작품은 부정이 아니라 상호 보완을 택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미지가 우선 순위나 사전 순서 없이 동일한 방식으로 제시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차이를 부각하는 제1세계나 제3세계 같은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 국가의 관계는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인 것이어야 한다. 위계는 의존과 복종을 동반하는 고압적인 강요일 뿐이다. 국가의 상징을 하나씩 차례로 융합하며, 김수자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를 하나의 공동 존재로, 배타적인 애국주의를 버리고 합심하여 조화롭게 한 목소리를 내는 존재로 묶어낸다.

  •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비슷한 지역에서는 비슷한 특징의 국기를 만든다. 북유럽의 경우 직사각형의 색면 바탕에 십자가를 왼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한 국기가 많다. 스칸디나비아 십자라 불리는 이 상징은 북유럽 국가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채택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앙의 원이 공통으로 쓰이는데, 지역마다 의미는 달라서, 일본의 경우 떠오르는 태양을 인도의 경우 정의의 수레바퀴를 나타낸다. 중동 지역의 국기는 빨강, 초록, 하양, 검정의 범아랍 색상을 사용한다. 비슷하게 동유럽의 범슬라브 국가는 빨강, 하양, 파랑을 쓰는 경향이 있다. 오세아니아 지역의 몇몇 국가는 영국연방의 일원이던 역사를 기리기 위해 국기에 유니언잭을 쓴다. 중앙아메리카에서는 파랑과 하양이 지배적인데, 스페인 제국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이 지역 국가들의 공유 역사를 상기시키는 색상 조합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의 국기에 쓰인 동일 색상은 세 나라가 공통의 기원을 가진 국가임을 뜻한다. 공산주의 체제의 상징도 익숙할 터, 보통 붉은 색에 망치와 낫 같은 상징이 등장한다. 서아프리카에서는 빨강, 노랑, 초록의 조합이 기니만 인근 7개 나라의 국기에서 발견된다. 해석하면 빨강은 식민주의로 흘린 피를, 노랑은 이 지역의 금과 광물을, 초록은 풍부한 숲과 농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논리적으로 볼 때, 국기를 구성하는 요소 중 어느 것도 우연히 들어온 것이 아니다. 각각의 디자인은 여러 요인을 종합한 결과이며, 한 국가의 국민적 정체성과 영토의 역사적 경험을 망라하는 전서와 같다.

  • 어떤 국기의 기본 구조에 담긴 상징적 함의를 잠시 제쳐두고 보면, 이미지 자체는 색상과 형태로 이뤄진 단순한 코드이다. 각각을 살펴보면, 어떤 국기의 미학적 잠재력은 색면회화에 버금가는데, 과잉의 수사를 삼가고 불필요한 표현을 피하며 계산된 중립성을 드러내는 추상 구성과 비슷하다. 어떤 국기는 바넷 뉴먼의 "지퍼" 회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국기를 명확히 분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국기들은 서로의 위에 중첩되어, 자신을 규정하는 본래의 색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다. 문장, 상징, 별, 태양, 반달에 동물 도식까지도 화면을 가득 채운다. 작품에서는 네다섯 개의 국기가 한 프레임 안에 투명도를 달리하며 등장하는데, 앞쪽 상위 레이어의 국기들을 더 투명하게 처리하는 방식으로 중첩 효과를 자아낸다. 개별 프레임이 지극히 정적이고 내부에 움직임도 없어서 국기의 맞물림은 그리 역동적이지 않다. 비록 시퀀스가 진행되면서 강렬한 리듬이 느껴지기는 해도 말이다. 이처럼 어지러운 다성성으로 인해 국기가 지닌 의미는 더 큰 그림 안에서 희석되어 지워진다. 국기를 하나하나 판독할 수 없을 때, 국기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 이 뒤죽박죽 섞인 국기 속에서 남한의 국기(태극기)를 따로 떼어 주의 깊게 분석하면, 김수자의 작품과 태극기에 표현된 가치 사이에 합당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이는 김수자의 작업이 지닌 의미가 그가 성장해 온 사회가 장려하는 원칙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태극기가 정신적 개념에 기반한 디자인의 국기라는 점도 흥미로운데, 한국이 공동체가 감정 및 철학적 개념을 중시하는 공동체임을 뜻한다. 태극기를 보면, 평화를 상징하는 흰 바탕 위로 각각 음과 양을 상징하며 균형을 이루는 두 개의 부분이 원을 이룬 모습이다. 도교에서는 우주의 이원성을 만물에서 발견되는 서로 대립하지만 상호 보완적인 두 가지 힘으로 요약한다. 음(파랑)은 여성, 땅, 어둠, 수동성, 흡수, 부정성, 차가움을 뜻하고, 양(빨강)은 남성, 하늘, 빛, 능동성, 관통, 긍정성, 뜨거움을 의미한다. 2006년 올리바 마리아 루비오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수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1970년대 후반 대학 시절로 거슬러, 화가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이미 세계의 구조 안에 존재하는 이원적인 것, 음과 양의 조합에 끌렸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세계의 구조를 이런 시선에서 바라보았다. 초기 바느질 작품인 <너의 초상(Portrait of Yourself)>(1991)과 <하늘과 땅(The Heaven and the Earth)>(1984)에는 수직과 수평의 요소 혹은 십자의 형태가 들어 있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인식과 창작의 구조를 정립했다. <대지(The Mother Earth)>(1990-1991)나 <마음과 세계(Mind and the World)>(1991)처럼, 1990년대에 진행한 무작위적 형태 기반의 아상블라주 연작에서는 음양의 '이원성'이 숨은 구조를 이룬다. [...] 하지만 그렇다고 수학적이나 논리적으로 예술 작업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내 작품 대부분은 이론이나 논리 자체를 쌓아 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비합리적이고 돌연한 직관으로 태어났다. 또한 나는 창작 과정 안에 존재하는 감각의 논리를 믿어왔다. 세계의 구조를 둘러싸고 정의하는 요인들은 많지만, 이원성을 세계의 존재를 이해하는 하나의 시작점으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창작이 시작되면, 이론은 작동을 멈추며, 창작은 논리를 넘어 자체의 삶과 과정을 이끌며 나아가게 된다."[3] 태극기 중앙의 원은 네 개의 괘로 둘러싸여 있는데, 각각 땅, 물, 공기, 불이라는 고전적 4요소를 상징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김수자는 2009년 열린 제5회 란사로테 비엔날레에서 그와 동일한 생명의 네 가지 초석에 바치는 대형 비디오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비엔날레를 위해 특별 제작된 이 작품의 모든 영상은 카나리아 제도의 란사로테에서 촬영되었다.

[1] Baricco, A., The Barbarians: An Essay on the Mutation of Culture, New York: Rizzoli, 2013, p. 7
[2] <호흡 – 국기>의 원 버전에는 103개의 국기만 있었으나, 2012 런던올림픽조직위원회로부터 올림픽을 위한 작품을 의뢰받으면서 143개의 국기가 추가되었다. 이번 말라가 전시판에는 세 개의 국기가 새로 포함되었는데, 당국의 인정이나 공식 승인을 받지 못한 국가를 나타내는 국기들이다.
[3] Oliva María Rubio, Arte-Contexto, no. 11, March 2006, p. 66 [인터뷰 영역본 작가 웹사이트에 게재. http://www.kimsooja.com/texts/rubio_Interview.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