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2013
장소는 김수자의 작업에서 중요하다. <망명의 보따리 트럭(Bottari Truck in Exile)>(1991)은 길 위에서 찍은 작업으로, 트럭이 화려한 비단 천으로 감싼 옷가지와 이불 보따리를 가득 싣고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담았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의 영상 작업에서 작가는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2001), <빨래하는 여인(A Laundry Woman)>(2000)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최근에는 마드리드의 크리스탈 팰리스(Crystal Palace, 2005), 베니스의 테아트로 라 페니체(Teatro La Fenice, 2006)와 같은 기존 장소를 빛과 색채의 우아한 조화로 변형시키는 장소 특정적 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김수자의 예술은 장소의 본질에 관한 탐색적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장소란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되며,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누가 만드는 것이며, 장소와 신체의 관계는 무엇인지, 장소는 어떻게 경험되는지 등의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영상 작품 <집 없는 여인(A Homeless Woman)>(2001)과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2001)은 회색 옷을 입은 익명의 어떤 여인이 북적이는 도시 군중 속에 자리한 모습을 기록한다. 침묵한 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데, 그의 존재는 정신없는 보행자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방해한다. 어떤 이는 여인을 살펴보기 위해 멈춰 서고, 어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촬영하는 카메라에 곤혹스러워한다. 또 다른 이 여인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데, 이들은 그를 출근길에 서둘며 스쳐간 흐릿한 풍경으로만 기억한다.
비판의 징후는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혹은 민족성이나 성에 관한 것이든 쉽게 포착할 수 있다. 김수자가 펼치는 장소의 예술을 정체성 정치, 성 및 인종의 사회적 구성, 권력과 주체성의 경제학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로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연하게도, 장소의 형성은 근본적으로 권위, 사회적 관계, 민족 및 인종, 성에 기반을 둔 계층이라는 좌표에 의존한다. 작가 본인의 정치적 작품 해석을 뒷받침하는 내용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망명의 보따리 트럭>을 당시 코소보(Kosovo) 전쟁 난민에게 헌정했다. 망명은 고향이라는 본래의 환경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므로, 장소와 관련 짓기에 적절한 주제다. 비엔날레를 위해 김수자는 한국에서 베니스로 보따리가 가득한 트럭을 가져왔다. 이 작품은 단순한 트럭이 아니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그 과정 자체였다. 작가는 망명자들이 존재의 흔적을 실어 나르는 빨래 꾸러미를 운반하기 위해 수많은 국경을 넘나들었다. 이는 초국적주의와 노동의 세계적 흐름, 강제 이주, 국제 밀수 거래, 시장 네트워크를 통해 박동하는 자본의 세계적 순환을 떠올리게 한다.
권력과 무력감, 상실과 절도의 정치학이 여기에 존재하지만, 이러한 체계가 작품이 제시하는 바와 지향점을 완전히 포괄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김수자는 자신의 작업을 이끄는 특수한 관심사로 “순수한 인간성의 차원”을 꼽은 바 있다.[1] 그는 정치 및 경제 체제를 고발하는 대신, 자신이 “인간 조건과 그 현실”이라 칭하는 것을 고찰한다. 그러므로 코소보 전쟁의 난민을 애도할 뿐, 전쟁이 존재하는 조건을 면밀하게 분석하지는 않는다. 작가로서 그에게 사회적 제도와 정치적 의지의 실패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다. 물론 예술가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수자는 비판과 한탄 대신 예술과 도덕적 감수성의 친밀한 관계성을 탐구한다. 그는 인간을 바라보는 열정적인 관찰자다.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작품은 인간 삶의 일상에 주목하는 시선을 증명하며, 이를 통해 “인간 조건과 그 현실”에 대한 애틋한 감각, 나아가 애틋하게 아름다운 감각을 담아낸다.
종교, 도덕, 전통 철학의 공통적이고 주요한 기능은 고통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 혹은 적어도 그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인간 조건을 설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수자는 자신의 예술이 종교나 도덕, 철학처럼 관객을 끌어들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깊이 있는 미학적 성찰을 이끌기 바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가 다루는 모든 대상은 인간 손길의 흔적을 지닌 것이다. 여인들이 모아 씻고 빨래하여 바람에 말리기 위해 펴둔 것, 마치 제2의 피부처럼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옷과 이불, 싸맨 채 이곳저곳으로 옮기는 것, 마을이 불타고 경제가 붕괴될 때 우리가 간신히 챙기는 것, 우리가 떠난 뒤 남겨지는 것, 그리고 땅에 흩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예시로 <바느질하여 걷기(Sewing into Walking)>(1994)나 <초상(Portrait)>(1991)에서는 버려진 천으로 만든 거대한 망토가 기념비적 묘비처럼 솟아오르며, 버림받은 유물은 빽빽하게 뒤엉킨 더미 속 살갗의 흔적이 새겨진 이들을 추모하는 상징이 된다. 이 흩어진 옷가지는 결국 모든 육신의 운명이다. <바느질하여 걷기>는 시간 속을 거니는 길을 흩어진 기억이 드문드문 흩어진 이불보로 그려내는데, 그마저도 온전한 형상이라 하기 어렵다. 애조를 띤 이 작품은 작가가 말한 “인간 조건(the human condition)”에 대한 감각을 많은 이에게 환기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것, 모든 감정은 무상함의 흔적을 지니며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사라진다. 불교 사상에서 무상함(Impermanence)이란 고통(suffering), 무아(non-self)와 더불어 존재의 세 가지 특성으로 여겨진다. 한 학자가 이에 관해 요약한 바와 같이, “변화, 퇴화, 비본질주의는 모든 것의 근본적인 특징이다.”[2]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만족시키는 데 실패하고, 그 위에 머무는 영혼, 자아, 실체란 없다. 간단히 말해, 해탈의 법칙이나 열반을 제외하면 모든 곳은 결국 무너져 다른 무언가로 변해버릴 것이므로 우리를 붙잡아줄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종종 인간의 조건을 묘사한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같은 방법이나 수많은 구원적 신앙이 신자들에게 약속하는 구원의 방식을 통해, 그들은 고통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자는 신성한 수단이나 인간의 정치로 우리의 구원을 목적에 두는 예술을 만들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설교적이거나, 선전적이거나 교조적이지 않다. 김수자의 예술을 진정으로 이끄는 것은 생각을 자극하고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려 하는 애매하고도 신비로운 무언가에 고정시키는 사물의 힘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것에 관해 스스로 자각하는 힘을 기르고자 한다. 또한 상실, 갈망, 아름다움, 일상, 노동 등 인간다움의 본질을 탐구하며 이를 일상의 장소를 정의하는 예술의 감각적 언어로 풀어낸다. 예술은 고양된 감각적 의식이자, 바라보고, 듣고, 만지는 행위가 열어주는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평생 명상을 해본 적 없지만, 내게는 매 순간이 그 자체로 명상이었다. 삶과 예술, 나아가 그 실천에 대한 나만의 명상 방식을 통해 선불교와 유사한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3]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이 되는가? 예술은 제도화된 종교를 위해 봉사하며 신앙 생활에 이바지하고, 교회와 신전, 순례지의 제단을 장식하며, 서약과 은혜, 간구와 보상의 신성한 경제 속 지상의 인간과 천상의 권능 간 일상적 교류에서 성스러움을 구현하곤 했다. 오늘날 평소의 종교 생활 속 대중적 이미지는 여전히 신자들에게 유사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난 2세기 동안 순수예술은 서양 문화에서 차별화된 영역을 차지하며 등장했다. 어떤 이들에게 예술은 위로와 오락, 희망과 기쁨을 주는 일종의 치료법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유익함은 김수자가 암시하는 명상적 몰입의 관점에서 설명되어야만 한다. 예술은 자기 성찰의 수단이자 사회문화적 렌즈로서 지각을 정제하거나 연마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접근에서 ‘미적인 것’이란 그저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적 인지, 즉 세상의 무게와 열기, 혼돈을 관통하는 통찰을 위해 세계를 자세히 살피는 감각의 정교한 세공에 가깝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조건에 대해 김수자가 예술적으로 상정하는 내용이다. 이는 종교도, 정치도, 설교나 도덕 개혁도 아니다. 결국 이것은 변연계(邊緣系)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며, 감각을 더 거대한 세계로 투사하여 작품이라는 피부로 간접 체험하려는 시도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수자의 예술은 바라보는 행위의 문화적 작품이다. <바늘 여인>은 최소 두 가지의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다. 첫 번째, 몇 주간의 전시 기간 동안 갤러리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을 보는 법이다. 이 경우 영상은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의 인간 행위를 담으며 다큐멘터리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의 장면은 멀리 떨어진 곳, 즉 당신과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아닌 길거리다. 우리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 장소를 바라보게 된다. 갤러리 내 영상 설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벤치는 위로부터 투사되는 영상을 앉아서 볼 수 있게 하며, 이 사진은 마치 갤러리 벽면에 열린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을 통해 보이는 듯하다. 어스름한 공간에서 관객은 조용히 앉거나 서서 그 장면을 응시하게 된다. 시간이 있다면, 당신은 흥미로운 것과 전에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이에 몰두한다. 무언가 벌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는 결국 예술 작업이니, 뭔가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이 작품을 바라보는 두 번째 방법이 모습을 드러낸다. 당신은 전시장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슬쩍 훑어본다. 시계를 쳐다보며, 이게 얼마나 계속될지 궁금해한다. 불가피하게, 당신의 지각은 벽면의 창문과도 같은 장면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곧이어 당신은 신체에 느껴지는 불편함을 자각하게 된다. 명상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 느낌이 익숙할 것이다. 장면은 벽 너머 저곳에서, 당신 내부와 주변의 이곳으로 이동하고, 당신은 자신이 예술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당신의 시간과 신체, 인내심을 가져간 이 작품은 이제 당신을 포함하는 작업으로 전환된다. 아마 당신은 문을 찾고 싶을지도,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당신은 화면 속 시선과 이 방 안의 시선이라는 두 종류의 바라보기에 매료되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해할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예술 작품의 경계는 사라졌다. 예술은 벽에 걸리고 좌대 위에 놓이던 것에서 사막과 고물 처리장, 길모퉁이, 심지어는 인체 위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변모했다. 전통적 경계의 해체와 함께 예술의 장소 역시 재정의되었다. <바늘여인>과 <빨래하는 여인>을 바라보며 우리는 묻게 된다. 작품은 어디에 있는가? 군중 사이에 서 있는 무신경한 존재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혹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무지 속에 있는가? 아니면 여기, 우리 사이에 있는가? 어쩌면 이 둘은 사실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무표정한 여성 노동자가 서 있는 또 하나의 군중일 뿐이다. 방황하는 우리의 시선은 도쿄, 카이로, 멕시코시티, 런던, 델리의 도시 군중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김수자가 우리를 전시장으로 이끄는 것은 예술이라는 세계를 저 멀리 떨어진 도시의 거대한 직물 속에 꿰매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작업을 보는 것이란,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비추어 보여주는 하나의 세계적 예술 작품 속으로 이동하는 경험이다. 이 예술의 장소를 구분하는 경계는 혼란스럽고도 절묘하다. 그곳에서 벗어날 수도, 멀어질 수도 없다. 그 장소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며, 깜빡이는 시선의 교차점에 굳건히 서 있는 작가의 회색 형상을 축으로 삼아 회전하는 시각적 영역에 의해 드러난다.
이러한 영상 작업에서 작가가 꾸준히 보여주는 특징은 우리의 시야를 구성하는 구조에 있다. 그가 군중에 무심코 에워싸일 때도, 작가는 우리의 기준점이 된다. 김수자는 망설이며 우리 쪽으로, 즉 여기로 등을 돌린 채, 저 바깥 세계를 초월한다. 카메라는 결코 잊히지 않는다. 그곳의 사람들은 우리 앞에 펼쳐진 무대에 올려지는데, 이들은 다른 곳에서의 상영을 위해 촬영된 것이다. 현장으로서의 장소는 단일하지 않으며, 오직 작품의 관객만이 볼 수 있는 거대한 장소의 집합체 중 일부가 된다. 델리의 사람들은 멕시코시티나 상하이의 사람들, 혹은 우리를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 김수자의 등 덕분에 우리에게는 가능해진 일이다. 그가 단지 바늘이 되어 자신의 몸을 무생물로 변환하고자 했다면, 작가를 옆이나 정면에서 보든 다른 어떤 각도에서 보든 크게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이 장치는 전시장에서 작품이 관람되어야 할 올바른 방면을 보여줌으로써 작품을 구조화한다. 예술의 장소는 시공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새롭게 바라보는 중대한 순간이다. 김수자는 예술이 세계를 비틀어 놓음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장소, 타인의 장소, 그리고 문화의 틈새에서 생겨나는 예술의 장소 등을 자각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에게 장소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고 관찰에 몰두하게 한다는 예술의 묘한 매력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술적 목적을 위해 장소를 차용하는 것은 김수자의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쿠바 현지에서 제작된 10분 길이의 무성 영상 작업 <앨범: 하바나(An Album: Havana)>(2007)는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바다와 구름 낀 수평선이 내려다보이는 부두를 따라 카메라가 거의 3분간 움직이는 동안, 연인, 관광객, 어부들은 한가로이 거닐거나 돌담에 앉아 있다. 영상은 두세 번 반복되지만 매번 초점이 흐려지고, 마지막으로 재생될 때 화면에는 서서히 밝은 빛으로 전환되는 하얀 섬광이 등장한다. 두 번째로 반복될 때는 인물을 여전히 알아볼 수 있으나, 세 번째 시퀀스에 다다라 그들은 갈색빛 실안개 속으로 차츰 사라져 버린다. 사운드와 초점이 사라진 결과, 천천히 사라져가는 장소의 초상이 지극히 아름답게 완성된다. 처음에는 단단해 보이던 것이 공기로 녹아내릴 때, 관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와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장소에 관한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확실하지 않다. 재생이 반복될수록 우리가 한때 마주했던 것은 희미해지다가 결국 없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보는 이가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해진다.
이와 완전히 다른 작품인 <만다라 – 0의 지점(Mandala: Zone of Zero)>(2003)에서는 티베트, 그레고리오, 이슬람 성가의 소리가 반짝거리는 물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 물체는 거울, 천, 유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표적 모양의 커다란 동심원이다. 모래 형상을 정교하게 만드는 승려들이 (주로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시간의 수레바퀴’ 의식 덕에, 원형 만다라는 북미에서 친숙한 개념이다.[4] 김수자의 <만다라>는 불교 교사들이 교리 설명을 위해 순회하며 펼쳐 보였던 티베트 육도윤회도(Wheel of Existence)와 유사하다. 만다라의 사방(四方)을 나타내는 크롬 장식은 티베트 탕카(tangka)에서 법륜을 쥔 죽음의 신의 턱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아가 부처가 돌린 법륜, 윤회의 순환, 육도윤회도에서의 원형 배열과 같이, 김수자의 법륜 또한 회전한다.
그러나 <만다라>에서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가를 사용한 것은 작가가 전통적인 티베트 만다라보다 더 넓은 무언가를 염두에 두었음을 시사한다. 작품 자체는 종교적인 장치라기보다 거대한 룰렛처럼 보인다. 특히, 별 모양 모티프는 룰렛 테이블 중앙에 있는 네 갈래의 금속 축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서 반짝이는 거울, 호화로운 천, 환하게 빛나는 크롬, 선명한 색채는 감각의 덧없음을, 좋아하는 노래로 가득 찬 주크박스를 떠올릴 때 애틋하게 흔들리는 감정을 예찬한다. 이 모든 것은 끝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길들이고 다스리기 위해 명상 수행이 필요하다고 진단하는 불교적 관점과 매우 다르다. <만다라> 속 주크박스의 아르데코풍 크롬 장식은 명상실보다 옛날 미국식 음료 바나 댄스홀을 연상시키지만, 대중적인 불교 사당이나 사찰과도 닮아 있다. 누군가는 빛나는 황금 보살상이나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 매년 사찰에 걸리는 화려한 등불 줄도 떠올릴 것이다. 불가의 노랫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고, <만다라>는 눈부시게 밝은 턴테이블처럼 회전하며 번쩍인다. 예술에 어떤 사명이 있다면, 아마 내면의 성찰을 다시 신체와 감각에 연결하는 일일 것이다. 디스코장에 있든 선방(禪房)에 있든, 당신은 당신의 몸 안에 있으며, 바로 그 몸을 통해 종교, 명상, 예술이 이루어진다.
<하바나>와 <만다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교적 전통을 소환한다. <만다라>는 티베트 탕카에서 익숙한 모티프를 차용하며, <하바나>는 모든 현상의 세 가지 특징인 무상, 불만족, 무아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가 불교 수행의 도구로 자기 자신을 제시하며 불교를 모방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현대 삶 속 예술의 힘과 위치를 다룬다. <하바나>가 장소의 감각을 흐리게 하고 결국 지워버린다면, <만다라>는 관객을 상상의 신전이라는 정신적 건축물 안에 모신 부처의 몸으로부터 감각에 휩싸인 인간 신체의 찬란함으로 옮겨놓는다. 결국 핵심은 치료나 종교, 명상법이 아니라 지각의 정교화, 즉 감각되는 공상적 삶을 미학적으로 가꾸는 데 있다. 김수자의 작품은 종교를 대신하는 예술이 아니라, 삶이 나름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장소에 대한 감각적 성찰로서의 예술이다.
[1] Gerald Matt, “Interview,” in Kimsooja. To Breathe/Respirare (Milan: Charta, 2005), 87.
[2] Brian Black, “Senses of Self and Not-Self in the Upanishads and Nikayas,” in Irina Kuznetsova, Jonardon Ganeri, and Chakravarthi Ram-Prasad, eds., Hindu and Buddhist Ideas in Dialogue: Self and No-Self (Abingdon, England: Ashgate, 2012), 18.
[3] Matt, “Interview,” 91.
[4] Pratapaditya Pal, Himalayas: An Aesthetic Adventure (Art Institute of Chicago in association with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and Mapin Publishing, 2003),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