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2006
바늘과 거울은 여성성과 연계되어 있다. 그것들은 타인을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을 나타낸다. 하지만 김수자의 손에서 이 단순한 오브제들은 우주적 은유가 된다. 가정의 고요한 울타리를 초월하여, 우주 속 우리의 자리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리킨다.
바늘을 예로 들어보자. 김수자는 '바늘여인'의 역할을 맡으며, 어머니와 함께 바느질하던 기억, 할머니가 정성스레 꿰맨 이불을 덮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바늘여인>은 일상을 지속하게 하는 단순한 행위들이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고 결속시킨다는 개념을 제시한다. 바늘 여인의 페르소나에는 김수자가 바늘을 천에 꽂을 때 느낀 특별한 경험도 반영되어 있다. 당시 그는 온 우주의 에너지가 바늘 끝에 모여든 것처럼, 놀라운 에너지를 느꼈다. 이 경험은 공간, 시간, 에너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아인슈타인 이후의 개념으로 그를 인도했다. 그 각각의 존재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통찰이 <바늘여인>(1999-2001) 같은 작업의 이면에 깔려 있다. 이 작품에서 김수자는 어지럽고 혼잡한 일련의 도시 풍경 안에 멈추어 선 한 점이 된다. 이 <바늘여인> 연작에서 우리는 델리, 라고스, 런던, 멕시코시티, 도쿄, 카이로, 상하이 등지의 도시인들이 거대한 무대 위에 오른 배우처럼 그의 앞으로 주변으로 스쳐가는 와중에,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선 그의 뒷모습을 본다. 목 뒤에서 묶어 등으로 곧게 떨어뜨린 검은 머리칼은 하늘과 땅을 가르는 수직의 선이 되어 그녀를 이 세계에 뿌리내리게 한다. 작품은 세 가지 양상의 시간 경험을 제공한다. 우리의 참조점이 되는 작가의 시간, 평소의 일로 바삐 움직이는 주변 도시인들의 시간, 그리고 이 두 가지 상이한 양상을 동시에 경험하는 관객의 시간이다.
김수자는 이러한 개념을 다른 여러 작품에서 확장해 갔다. 2001년 라고스와 나이지리아에서 촬영한 <구걸하는 여인>에서 그는 걸인처럼 양 손바닥을 펴고 거리에 앉아 있다. <집 없는 여인>(2001)에서는 델리의 분주한 길거리에 움직임 없이 무방비하게 누운 채로 있다. 일상적 시간을 초월한 그의 모습에 정치적 색채가 묻어나는 것은 그가 자신을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바늘여인'으로서의 심적 상태를 설명하며, 김수자는 이렇게 말했다. "천을 꿰뚫는 것은 바늘 끝이고, 바늘 구멍에 꿴 실로 천의 다른 두 부분을 이을 수 있다. 바늘은 신체의 연장이고, 실은 마음의 연장이다... 바늘은 매개이며, 신비이고, 현실이자 남과 여를 품은 이중의 존재, 하나의 척도이자, 선(禪)의 순간이다." 하나의 바늘로서 그는 세상의 힘을 자신 안에 끌어모아, 다시 그것을 세상으로 되돌려 보낸다.
거울 역시 복잡한 상징을 품고 있다. 흔히 거울은 여성의 자기애를 드러내는 도구로 여겨지지만, 거울은 더 깊은 실재를 엿보게 하는 반사면이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회화라는 개념은 서구 미술 전통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거울은 외부 세계가 아닌, 내면 세계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거울은 신뢰하기 어려운 도구이다. 거울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심지어 기만적일 수도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이 속성을 이용해 관객의 눈을 속이는 장치를 만들어 왔다. 유명한 사례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왕가의 초상을 담은 그림 속 배경에 걸린 거울이 그림의 반대편을 비추는데, 거울에 담긴 것은 반대편에 있을 법한 현재의 관객이 아니라, 애초 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 후원자들이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여종업원이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지만, 뒤편 거울 속에서는 남자 손님을 응대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보다 최근에는 미술가들이 아예 실제 거울을 작품에 들여왔다. 공간을 배가하거나 확장하기 위해, 관객과 주변 환경의 거리를 무화하기 위해, 혹은 관객이 있는 공간의 안정성을 흔들기 위해서이다. 거울 미술의 주요 인물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와 쿠사마 야요이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피스톨레토는 고도로 연마한 강철판 위에 남성과 여성의 사진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입혀, 말 그대로 관객을 이미지 속으로 끌어들여 "현실"과 재현의 영역을 붕괴시킨다. 한편 쿠사마는 완전한 거울방에 수백 개의 작은 조명을 채워 관객의 거울상을 증식하는 동시에 왜곡하였고, 결국 관객은 자아 감각을 잃기 시작한다.
김수자의 <거울여인>은 감각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그의 작업에서 거울은 내면과 외부 현실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여, 개인의 의식이 보다 거대한 우주와 융합될 수 있도록 한다. 2002년의 설치작 <거울여인>에서 김수자는 전면이 거울로 된 전시실 안에 한국 전통 이불보를 쌍으로 엮어 걸었다. 이 설치물은 관객이 직접 걸어다닐 수 있는 미로를 만들어냈고, 관객의 몸과 천이 서로 합쳐진 듯한 효과 속에서 만화경 같은 분열의 감각을 자아냈다.
이처럼 ‘바늘여인’과 ‘거울여인’은 김수자가 추구하는 우주적 융합의 두 가지 양상이다. 바늘 여인이 풍경을 가르는 것은 다시 꿰매기 위함이며, 거울 여인은 내부와 외부의 차이를 무화한다. 두 페르소나는 두 개의 공공 설치 작업에서 가장 온전히 구현되었는데, 라 페니체 극장 설치의 전조와도 같았다. 먼저 <등대여인>은 2002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열린 스폴레토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김수자는 컴퓨터와 동기화된 야간 디스플레이(김수자: "이 작품은 실제 광원을 쓴 조명 설치였고, 라 페니체 극장의 경우는 조명 설치라기보다 컴퓨터로 생성한 색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비디오였다.")를 선보였는데, 쉼 없이 변하는 유색광의 시퀀스가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등대의 외관을 물들였다. 금색, 진홍색, 연청록, 보라색의 장막이 우아한 19세기 등대탑을 천천히 뒤덮는 광경은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다. 여기에서 등대는 김수자의 몸을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을 이 구조물에 투사하였고, 그것은 수년 동안 바다로 떠난 이들의 안전한 귀환을 기다려 온 수많은 여인들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이 작품은 에너지를 수집하는 매개체로서의 바늘 개념을 상기시키는데, 여기에서는 그 바늘이 등대의 기둥으로 표현됐다. 또한 보따리가 등장하는 이전 작업과도 공명하는 부분이 있어서, 보따리가 회화이자 캔버스로서 공간을 변형하고, 기억과 역사 그리고 의식을 하나로 엮어냈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등대여인>에서는 빛이 과거와 현재, 하늘과 바다, 마음과 물질이 어우러진 색의 태피스트리가 되어 비슷한 효과를 창출했다.
한편, 지금까지 거울 여인을 가장 완전히 구현한 작품은 《크로싱 2003: 한국/ 하와이》의 전시작 <거울 여인: 어디에도 없는 땅>이다. 호놀룰루의 식민지 시대 시청 내부, 지붕 없이 개방된 아트리움 중앙부에 약 18m 높이의 흰 천으로 된 수직 원통이 들어섰다. 작품 설치를 위해 김수자는 관계자와 조율하여 오랫동안 닫혀 있던 아트리움 지붕의 개구부를 재개방했다. 천 기둥은 주변 공간과 차단되어 있는데, 기둥 바로 윗부분만은 자연 환경에 열어 놓았다. 기둥 안에는 바닥에 거울을 설치하여, 모슬린 천으로 된 벽 안으로 들어선 방문객들은 한 조각 하늘 위에 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천은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리며, 방문객에게 살아 숨 쉬는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선사했다.
위에서 흘러가는 구름이 아래에 반사되며 역설적으로 훤히 트인 바다 위에 떠 있는 느낌을 자아냈고, 밤이면 별들이 위아래로 반짝였다. 하와이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제의 전시작으로서, <거울 여인>은 이민자들이 겪는 정체성의 불안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최면적인 설치 작품은 하늘과 땅과 하나가 되는 보편적인 체험 또한 제공했다.
위 두 작품이 김수자가 이번 라 페니체 극장에서 선보인 설치 신작 <호흡 - 보이지 않는 거울/ 보이지 않는 바늘>(2003-2005)의 토대를 이룬다. 이 작품 역시 디지털 영상 설치이다. 천천히 변화하는 유색광이 관객석과 관객을 적시며 지나간다. 그와 더불어 작가의 호흡 소리로 직조된 코러스가 나란히 들려온다. 하와이의 <거울 여인: 어디에도 없는 땅>과 찰스턴의 <등대 여인>에서처럼, 이 공간 또한 생명으로 가득찬다. 빛과 소리의 교향곡이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서, 시간은 더 이상 선형의 틀에 갇히지 않고, 공간과 자아, 타인의 경계가 해체된다.
김수자의 작업을 두고 이민자, 노마드, 서구 문화로 이주한 아시아 여성 등 그의 위치와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따리 같은 한국적인 재료로 인해 이런 생각은 더욱 강화되었으니, 김수자는 묶어 맨 꾸러미인 보따리를 자주 선보이며, 세간을 싸서 언제든 쉽게 떠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이런 이주의 감각이 <떠도는 도시들 - 2,727km 보따리 트럭>(1997)과 같은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 이 영상은 동여맨 보따리 더미를 가득 실은 트럭의 짐칸에 타고 한국의 산골을 여행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카메라는 변화하는 풍경 속에 정지해 있는 중심점으로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작업이 고향, 뿌리 같은 전통적 개념을 떠올리게 하고, 우리에게 장소감을 부여하는 전통적 여성 활동을 기리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김수자의 의도를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한편으로, 김수자의 작업은 정신/물질, 공간/시간, 자아/타자 같은 쌍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고 화해 불가능한 존재로 여기는 서구의 이원론을 분명히 거부한다. 대신 그녀는 불교에서 영감을 받은 시간의 순환적 성격과 욕망 및 신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유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그는 동양과 서양을 쉽게 이분화하는 태도 또한 거부하고, 오히려 서양에도 자신의 사유와 맞닿은 전체론적 전통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19세기 후반 탐구했던 지속이라는 개념이 있다. 베르그송은 지속을 체험된 시간(lived time), 즉 시간과 공간, 과거와 미래가 연속적 현재와 융합하는 경험이라 설명한다. 그는 지속을 춤의 지각과 연결지었는데, 춤의 경우 무용수가 이어지는 동작을 행하는 매 순간에 그 이전과 이후의 움직임이 내포되어 있다. 시간의 선형적 경험이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정해진 길로 우리를 밀고 나갈 때, 현재는 사라지고 만다. 대신 지속은 세계의 역동적 본연과 우리가 합일되어 있다는 의식을 창출한다. 이러한 사유는 <호흡> 연작이 일깨우는 경험을 설명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베르그송의 사상이 발표되고 수십 년 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으로 시간을 사유하는 혁명적인 방식을 제안했다. 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자족적이며 서로 독립된 실체로 보는 생각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시간과 공간을 상호작용하는 단일한 실체, 즉 시공간으로 통합했다. 최근 들어서는 전자통신의 발전으로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가 “평행적 시간"이라 부르는 경험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자기 몸에 머물면서 머나먼 어딘가에서도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감각을 의미한다. 빌 비올라는 뉴욕의 어느 로프트에서, 파리의 길거리에서, 아니면 중동의 전쟁터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분명 바늘 여인이 표현하는 시간과 공간의 다중적 경험과 공명한다.
이처럼 김수자는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철학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복잡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관객에게 제안한다. 바늘 여인과 거울 여인은 뒤를 그리고 앞을 바라보며 역사와 미래를 하나로 묶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 무한한 현재임을 일깨운다.
— 『김수자: 호흡』, 2006년 도록 수록 글,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이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