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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라 드 체코 ⎹ 진공을 경험하기

엠마누엘라 드 체코

2005

  • 인간의 발이 땅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작지만, 발이 닿지 않은 자리가 있기에 인간은 광대한 땅을 걸을 수 있다. — 장자

  • 지난 10년간 몇몇 예술가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상 중 하나는 미니멀리스트적 언어를 통한 대화로의 회귀와 연관이 있다. 모나 하툼(Mona Hatoum),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미로슬라프 발카(Miroslaw Balka)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작업이 어떻게 이러한 언어적 기반에서 모종의 공통분모를 찾는지 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관계는 그 기반을 종속이나 인용의 형식에 두지 않는다. 그들의 작업에서 의미심장한 점—과거와의 결별을 나타내는 동시에 당대의 긴급한 문제와 다시 강력하게 연결될 가능성을 제기하는 신호—은 전통을 수용하되 그 의미를 내부에서부터 완전히 전복한다는 데 있다. 미니멀리즘은 ‘보편적’이라는 환상을 통해 중립적인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근대의 서구적 지배적 사유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현실과의 직접적 접촉을 되찾으려는 욕구와 맞닥뜨릴 때, 우리는 미니멀리즘을 다시 읽고 재해석하며 다시 제안해야 한다. 단순하고 수용적인 것으로 보이는 형식적 요소는 실제로 극적이고 친밀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으며, 예리한 주제를 제시한다. 이러한 형식은 자기 과시적 성향이 강한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정면으로 부딪치는 항의 방식은 횡단적(transversal) 접근으로 대체되며, 이는 더 정교한 전략을 취한다. 이러한 전략은 예술가가 자신의 담론적 목적과 예술적 언어와의 대화 두 가지를 동일한 비중으로 집중하도록 한다.

  • 김수자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맥락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는다. 그의 작업은 지난 10년 동안 알려지고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는 여러 관점 중 하나일 뿐이지만 김수자의 여러 작품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 1990년대 초 미니멀리즘을 다시 돌아보는 흐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역사 전반에 걸쳐 침묵 속에 머물러 있던 다양한 차이—비서구적 맥락에서 온 사람들의 문화적 차이, 성적 차이, 일부 어려운 주제(죽음·분쟁·질병)를 다루는 정보의 방식 차이, 신체·감정·사적 영역을 대중매체(예컨대 웰빙과 지상낙원을 약속하는 광고)가 다루는 방식의 차이—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예술가들이 드러낸 이 비범한 경로는 미술사 교과서에 실린, 언뜻 완성된 듯 보이는 언어의 규칙을 다른 방식으로 해체할 또 다른 길을 제안한다.

  • 지난 수십 년간 제작된 작품들은 분명한 "반(anti)-" 서사를 담고 있었던 것과 달리—이를테면 초기 페미니즘 미술에서 여성은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해야 했다—여기서는 혁명이 "동지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를 극복하는 가운데 발전한다. 전통을 따를 것인지 혹은 떠날 것인지의 선택 옆에 제3의 가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대 그들’이 아닌 ‘우리와 그들’이다.

  • 이 예술가들 덕분에 비서구적 시선, 성적 차이, 개인사, 죽음, 폭력 등 소수자에게 국한된 주제가 새롭게 중심에 놓였다. 작품들은 공적, 사적 영역을 동시에 포함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내면과 집단에 모두 닿는 언어로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데, 이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 김수자의 설치 작품에서, 마모되지 않는 재료로 만들어진 차갑고 미니멀리스트적인 바닥은 한국 가정의 이불보 조각을 이어 붙인 패치워크로 이루어진 색색의 표면이 된다.

  • 이 이불보는 한때 그것을 소유하고 매일 사용했던 사람의 기억, 소망, 이야기를 품고 있다. 동시에 김수자가 설치 작품에서 선보이는 단색의 캔버스는 널어놓은 빨래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캔버스는 한국 문화에 속하는 이불보이자 표면적 실체로 존재하면서도, 기존에는 가시화되지 않았던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친밀성의 영역을 환기한다.

  • 김수자의 작품은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김수자의 개인적 조형 어휘는 자신의 문화에서 온 오브제로 가득하다. 그중에는 이불보뿐만 아니라 사용한 옷을 채운 보따리(bottari)도 있다. 김수자는 캔버스로 헌 옷을 싼 보따리를 만들어 전시 공간 곳곳에 임의로 배치함으로써 작가 개인의 유목적 상태 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의 유목적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 이러한 존재는 특정 문화를 잘 아는 사람들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 주제를 다룰 때, 이들 모두에게 전달되는 강력한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 개인적 경험의 도입, 김수자의 작품에 나타나는 출생·죽음·친밀함에 관한 시적 고찰,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닿는 거대한 목소리를 빚어낸다. 구체적인 것에서 출발해, 더 이상 근대적 프로젝트가 지향하던 추상적 보편성이 아니라, 그 물건을 한때 소유했던 이의 고유한 서사로 충만한 동시대적 보편성으로 이행된다. 그 물건은 작품의 일부가 되어 관객에게 다가온다.

  • 김수자의 작품은 자신의 문화적·역사적·젠더적 조건에 기인한 강한 주관적 관점을 가지는 동시에,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게 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김수자의 경우, 미니멀리즘의 유산은 바로 문제의 핵심에 집중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만을 남기는 본질적 언어의 채택에 있다.

  •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사실 김수자는 이 관계를 상대화하는 자율성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출처를 가진 레퍼런스를 동원하여 발언한다.

  • 여러 연구자들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은 한국 문화와 선불교적 수행과 적극적으로 소통한다. 작품은 비어있음과 충만함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드는 긴장을 통해 작가의 존재와 부재 사이에 드리워진 모순을 해소한다.

  • 김수자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2001)은 카이로, 라고스, 도쿄 등 전 세계 주요 도시 8곳에서 촬영된 퍼포먼스로 구성됐다. 이 퍼포먼스에서 김수자는 군중 속에 서서 그저 ‘있다’. 군중은 그의 존재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 이 작업에서 김수자는, 다른 모든 퍼포먼스에서와 마찬가지로 1인칭으로 노출되지만, 카메라를 등진 채 부동의 자세로, 아무런 보호 조치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존재는 주관적 의미를 잃고 ‘타자’가 된다. 사라짐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존재하기인 자아의 축소 안에서, 김수자는 자신을 행위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규정하고, 주인공이 아닌 전달자, 중심이 아닌 연결자로서의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

  •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의 제목은 상징적이다. 2003년 프랑스 리옹 현대미술관(Contemporary Art Museum in Lyon) 전시회 도록에 실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와의 인터뷰에서 김수자는 '바늘여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바늘은 "몸의 연장이고, 실은 마음의 연장이다. 마음의 흔적은 천 위에 새겨지지만, 바늘은 매개가 완성되는 순간 자리를 떠난다. 바늘은 매개체이자 수수께이자 현실이고, 양성적 특성을 가진 존재이자 기압계 같은 지표이며, 순간이며 선(禪)이다."

  • 작가가 아무것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기 때문에 주변 풍경이 주인공이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고요한 존재 앞에서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 카메라의 시점은 영상을 볼 때 우리가 행인 무리의 일부라는 느낌을 주도록 설정되어 있다.

  • 김수자의 작품 앞에 선 우리는 자기 자신과 조우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불교적 사유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개인의 ‘나’를 구성하는 이유를 해체하는 것은 그 주관적 ‘나’의 전제로부터 생긴 모든 정신적 구조를 무너뜨리고, 그 구조가 일으키는 정신적 신체적 해악을 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공(空)을 받아들이고 실천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모든 대립과 돌이킬 수 없게 느껴지는 모든 갈등, 절대적으로 보이는 모든 이원성의 무게를 덜어 내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몸과 마음을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의 성좌(星座)로, 상호의존적인 부분들의 구조로, 상호연결된 매듭을 그물로 변형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 안에서 상호의존과 연결성이 다중적 '나'의 부재, 절대적 정체성의 사라짐, 고정된 동일시의 소거를 보장한다." 마치 이 말은 김수자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쓰인 것 같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욕망"의 주된 형태가 "소비 욕망"이며, 소속과 정체성에 대한 주장의 확대가 위험한 배제의 논리를 부추기는 시대에, 그가 침묵으로 암시하는 다른 방식의 존재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 또한,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에서 작가는 행인에게 돈을 구걸하며 한 손을 내민 채 앉아 있고, <집 없는 여인(A Homeless Woman)>에서는 노숙인처럼 군중 속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김수자의 엄격한 증언, 의도적으로 세계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 행위, 그가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방식은 역동적 세계를 위한 공간을 의도적으로 남긴다.

[Note]

  • [1] Giangiorgio Pasqualotto, Estetica del vuoto, Venezia, Marsilio, 2004, p. 50.

    — 개인전 도록 수록 글. 《Kimsooja: Journey into the World》, 아테네 국립현대미술관(EMST) 아테네, 그리스, 2005, pp.20-23.
  • 도너 폭스 페이지(Donna Fox Page)가 이탈리아어 원문에서 번역.
  •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홍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