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비움과 채움: 자아를 버리고 세계를 얻은 거울여인의 보따리

안소연

2026

  • 선혜원이 관객을 맞이하는 방식은 단정하면서도 신중하다. 잘 깎은 돌담 너머의 공간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몇 굽이의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동선을 의도적으로 연장하려는 듯, 얕은 계단들은 구태여 여러 번 방향을 바꾸며 도착 시간을 유예한다. 그 돌로 다듬은 작은 오솔길을 따르면서 우리는 아직 눈앞에 펼쳐지지 않은 전경을 기대하며 외부로부터 가져온 부산한 기운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 그렇게 해서 마주하게 된 활짝 열린 공간에는 잘 가꾸어진 잔디 마당이 펼쳐진다. 시선 높이에서 눈에 들어온 초록의 풀이 마침내 발아래로 느껴질 즈음, ㄷ 자 형태로 배치된 세 채의 한옥 경흥각(京興閣)과 하린당(賀隣堂), 동여루(同與樓)의 위풍당당함이 드러난다. 시각적으로 우러러보이는 이 건물들은 경치를 관망하는 누각으로서 누하주(樓下柱) 위에 높이 세워져 있기에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렇게 닫힌 공간으로부터 열린 공간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여러 차례 신체적, 감각적 변화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다른 차원의 시공간에 들어설 마음의 준비를 한다.

  • 선혜원의 본관 격인 경흥각의 문이 열리는 순간, 문 너머 펼쳐진 별세계 앞에서 잠시 머뭇거림의 순간이 다가온다. 높은 천장과 바닥 아래의 깊이가 하나로 연결되어 완성된 세상, 발을 디딜 지면이 존재하지 않아 공간 한가운데 부유할 것만 같은 몰입의 공간 앞에서, 우리가 세계의 전체상을 눈으로 온전히 상상해 볼 수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이 아닐까 자문해 본다. 무심한 듯 반복되는 고주(高柱)와 동자주(童子柱), 그것들을 가로지르는 대들보(大樑)와 도리(桁)들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격자를 이루며 굳건히 이 세계를 지배하는 내적 법칙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물의 존재감을 두 배 이상으로 증폭시킨 이, 자아를 지우고 무심하게 거울 뒤편으로 한 발자국 물러난 작가의 존재, 김수자는 이곳에 어떠한 색도 형태도, 움직임도 제시하지 않은 채 공간 자체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도록 깊은 생명의 숨결만을 불어넣고 있을 따름이다.

  • 바느질과 보따리로 선명히 각인되는 작가 김수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오늘날까지 무려 40여 년간을 언제나 현재진행형의 작가로 존재해 왔다. 그것은 동시대라 불리는 첨예한 순간들이 끊임없이 갱신되고 작가들의 생애와 작업 역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진화하는 점에 비추어 매우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김수자의 통찰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것에서 비롯됨으로써 특유의 진정성을 담보하면서도 출발 시점에 이미 궁극을 향해 개안(開眼)한 것처럼 시간에 구속되지 않는 보편성을 내포한다. 그런 점에서 김수자의 작업은 진화가 아니라 변모와 확장 중에 있으며 수많은 현재적 담론에 대한 응답이 된다.

  • 작가의 작업은 다양한 관심사와 견해를 가진 수많은 평론가나 큐레이터들에 의해 끊임없이 다른 관점에서 재정의됨으로써 현재성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잘 알려진 대로 1983년의 바느질에서 비롯된 하나의 ‘사건’은 회화의 종말이 논의되던 시점에서 김수자가 찾은 조형적 탈출구로서 회화의 평면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씨실과 날실 사이로 바늘이 관통하는 순간, 회화의 평면에 대한 고정관념이 열리고 2차원의 캔버스는 네 귀퉁이를 가진 보자기 회화로, 그것을 묶은 부드럽고 둥근 조각으로, 오방색의 의미를 담은 빛의 회화로, 모든 빛을 응축하고 흡수한 검은 ‘메타 회화’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김수자의 작업은 모더니즘 이후에 전개되는 조형의 조건이 무엇이고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예술 실험으로서 주목된다.

  • 반면, 같은 사건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이자 몸의 체험으로 각인된다. 어머니와 함께 이불보를 꿰매던 일상적인 삶의 행위나 돌아가신 할머니의 한복 전부를 간직했던 경험으로부터 이불보나 헌 옷이 내포한 삶의 흔적과 체취를 보듬는 작업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탄생에서부터 사랑, 휴식, 질병, 죽음 등 인간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천들은 피부와 직접 맞닿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신체 담론과 연계되는데 이는 김수자 작업의 근간에 수행성(performativity)이 자리하는 이유가 된다. 보따리에 싼 헌 옷가지는 개인 차원의 경험을 넘어 집단과 공동체의 존재를 환기하며 삶과 죽음의 메타포로 다루어진다.

  • 또한 이동을 위한 가장 간편한 수단인 보따리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주거지를 옮겨야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작가가 된 이후 유목에 가까운 자신의 삶의 방식을 드러낸다. 아울러 본격적인 경제적 세계화나 전쟁, 자연재해로 인해 변방으로 밀려나고 이동하는 동시대의 이주와 난민의 문제를 생생하게 제시한다. 더 나아가 바느질의 직조 문화는 자연스럽게 여성의 노동을 소환해 내고 이불보의 전통적, 민속적 모티브는 주변부와 소수집단의 문화 정체성을 환기한다.

  • 언급한 바느질과 보따리에 얽힌 사회적, 문화정치적 함의들은 모두 동시대가 제기한 긴급한 의제들인데, 이 다양한 담론의 스펙트럼이 한 작가의 작품에서 모두 논의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지구촌 곳곳의 소외되고 미약한 삶에 대해 김수자가 건네는 연민과 애도의 시선 속에서 포착된 문제의식들인데, 작가는 그 다양한 의제를 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대를 통한 치유의 가능성을 일관되게 모색하고 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느질과 보따리의 개념에 내재된 연속성과 포괄성의 근본 정신이기도 하다. 바느질의 잇는 행위나 보따리의 싸는 행위는 서로 다른 물리적인 조각들을 직조하고 통합하는 것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개인과 사회를,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고 아우르는 행위로 확장된다.

  • 연결과 포용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범주를 확장한다. 오브제에서 공간으로, 물리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의 이행이 그것인데, 이때 작가의 행위는 점차 무위(無爲)에 근접하게 되고 작가의 자아 또한 세계의 일부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 초기의 대표적인 비디오 퍼포먼스 연작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2001)에서 작가의 몸이 걸어 다니는 바늘로서 세계의 현실을 비물질적으로 잇는 매개체 역할을 자처했던 때부터 이미 작가는 자신의 개별성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빨래하는 여인(A Laundry Woman-Yamuna River)〉(2000)과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2000-2001), 〈집 없는 여인(A Homeless Woman)〉(2000-2001)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에서 그는 세상 곳곳의 군중 속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익명의 뒷모습으로 존재하고자 했다. 2003년 성과 이름이 구별되지 않는 한 단어의 이름 ‘Kimsooja’의 성명서에서 그는 “성별, 결혼의 유무, 사회정치적, 문화적, 또는 지리적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로 천명하는데 이는 타자와의 관계를 직조하고 세계를 포용할 때 개별 주체는 궁극적으로 바늘 끝의 점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밝힌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자신의 자아를 투명에 가깝게 비우는 대신 타자를 수용하고 세계를 비추는 작업에서 거울이란 매체를 수용하게 된 것은 당위적 결과라 할 것이다.

  • 거울은 반사판을 장착한 2차원의 물리적 재료에 불과하지만 대상을 시각적으로 복제할 수 있다는 마법에 가까운 기능으로 인해 철학과 미술사의 지속적인 사유의 대상이었다. 현대미술에서도 다수의 작가들이 거울을 다루었는데 예를 들어 분절된 거울들로 시각을 교란하여 재현과 자기 동일시에 대한 믿음을 해체한 조안 조나스(Joan Jonas)나, 거울 위에 그려진 인물과 관람객의 조우를 통해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 오목 거울로 세계의 전체상을 축약적으로 보여 주면서도 위아래가 반전된 왜상(歪像)을 제시한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거울의 무한 반복과 환각적 공간을 다룬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등을 손꼽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거울을 자기 반영의 도구이면서도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감시의 장치로서, 반영된 이미지와 실재 간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작품에서 거울은 여전히 회화나 조각의 형식을 따르는 조형의 재료로 등장한다.

  • 그에 반해 김수자가 거울을 대하는 방식은 지극히 중립적이다. 그의 작업에서 거울은 인식과 재현의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중립적인 반사판으로서 상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비춘다. 세계를 재현하거나 붙잡아 고정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까지도 허용하는 공간이며 복제나 모사가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이 상호 침투하는 현상학적인 장으로 제시된다. 작가는 〈거울여인(A Mirror Woman)〉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비어 있는 주체와 거울이란 매체, 그리고 세계를 반영하는 행위가 존재론적으로 상호 얽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피력한다.

  • 작가가 거울을 작업에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모든 것에 열린, 혹은 망명의 보따리 트럭(d'Apertutto, or Bottari Truck in Exile)〉을 설치했을 때이다. 아르세날레 전시장의 통로 마지막 벽면을 거울로 뒤덮고 보따리를 가득 실은 2.5톤 트럭과 마주 보게 한 파격적인 설치가 그것인데 거울은 트럭을 가로막은 벽면에 거대한 출구를 내고 길고 긴 통로를 열어 준 것 같았다. 이는 당시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피해자들인 코소보 난민들에게 헌정한 작업으로, 거울을 통해 현실로부터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제시했다.

  • 김수자의 거울 작업은 통상적으로 거울에 따라붙는 의문들, 즉 거울 재현의 허구나 가상성을 다루기보다는 반영을 통해 생성되는 새로운 관계와 존재가 머물 수 있는 장소로서의 확장 가능성에 관심을 둔다. 20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발표한 〈거울여인 – 어디에도 없는 땅(A Mirror Woman: The Ground of Nowhere)〉에서는 하와이 한인 이민 100주년을 되돌아보며 공존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10미터 높이에 육박하는 무명 천 커튼이 실린더 형식으로 직경 57인치의 둥근 거울 바닥과 직경 21인치의 하늘 구멍을 연결한 작업에서 채 1평이 되지 않는 작은 거울 바닥이었지만, 그곳은 치유와 정화의 공간이 되었다. 고단하고 외로웠던 노동의 역사를 배냇이불처럼 순수하고 따뜻한 천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은 거울 바닥에 누워 둥근 하늘을 바라보면서 현실 너머 긍정의 공간을 꿈꿔 볼 수 있었다. 하늘을 향한 둥근 거울은 해와 달 같은 우주적 요소를 상상하게 했으며 〈거울여인 – 해와 달(A Mirror Woman: The Sun & The Moon)〉(2008)로 이어지면서 자연의 상호의존성과 순환의 원리에 대해 작가의 관심을 이끌어 갔다.

  • 2006년부터 전개해 온 〈호흡(To Breathe)〉 연작에서는 보따리와 거울에 내재한 포용과 확장의 개념이 어떻게 건축적 공간에서 구현되고 그 공간이 어떻게 생명의 숨결을 간직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제시한다. 레이나소피아 미술관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의 개인전 〈호흡 – 거울여인(To Breathe: A Mirror Woman)〉(2006)과 이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2013),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 2023) 등지에서 펼쳐진 작업에서 작가는 건물을 빛의 직물이라 할 수 있는 회절 필름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그 자체는 투명하지만 빛의 굴절과 거울의 반사로 내부 공간을 무지개 빛으로 가득 채우는 작업에서 공간은 빛의 오방색으로 이루어진 직물로 감싸인 보따리가 되었다.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빛의 파동은 들숨과 날숨 같은 에너지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그 공간 안의 관객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빛의 보따리에 완전히 둘러싸이는 경험을 한다.

  • 〈호흡 − 선혜원(To Breathe − Sunhyewon)〉(2025)에서는 그런 감각적 동요와는 무관하게 오직 명징한 거울만으로 작가-건축물-관객으로 이어지는 삶의 호흡을 실험해 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 이전 해에 발표한 〈호흡 − 별자리(To Breathe − Constellation)〉(2024)에서와 마찬가지로 작품에서 호흡을 작동시키는 중심이자 유일한 매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 둘은 완벽한 쌍을 이룬다고 할 만큼 상호 대비와 조화를 보이는데, 그것은 원형과 직육면체의 공간 대조만큼이나 ‘감정이입’과 ‘추상성’의 모델로, 표면과 구조의 대비로, 보따리와 바느질의 상징으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 돔 양식의 전통을 따라 19세기에 건축된 프랑스의 상품거래소는 안도 다다오(Ando Tadao)의 손길을 거쳐 지름 29미터, 높이 9미터의 텅 빈 원형 홀로 재정비되었다. 거울과 달항아리(〈연역적 오브제 − 보따리(Deductive Object − Bottari)〉(2023)를 병치하면서 거대한 달항아리가 위아래 반구의 결합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착안한 작가는 반구의 중앙에 해당하는 건물 바닥에 거울을 놓음으로써 〈호흡 − 별자리〉라는 하나의 구의 형태를 완성했다. 건물의 천장에는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의 팽창주의를 반영한 이국적인 식민지들이 벽화로 구현되어 있는데, 그것이 거울에 반영되어 다시 한번 발아래 펼쳐짐으로써 높은 것이 낮은 것이 되고 마는 삼라만상의 덧없음을 일깨운다. 〈호흡 − 별자리〉는 역사의 시공간과 삶의 모습을 한 덩어리로 감싼 건축적 보따리로 간주할 수 있다.

  • 미술사가 뵐플린(Heinrich Wöfflin)이 분류한 ’추상과 감정이입(Abstraction and Empathy)’의 원리를 차용해 본다면, 〈호흡 − 별자리〉가 현실 세계의 감각적이고 유형적인 차원인 ‘감정이입’을 구현한 데 비해, 〈호흡 − 선혜원〉은 장식 없는 격자들로 원형(原型)적 차원, 즉 이데아의 추상성을 묵묵히 구현한 것으로 대조될 수 있을 것이다. 건축가 김봉렬이 한옥으로서는 예외적으로 7.2미터 복층 높이로 구현한 누각에는 단층 한옥의 두 배 이상의 기둥과 보가 자리 잡는데 그것이 바닥 거울에 반사됨으로써 다시 두 배의 높이와 깊이를 확보하며 격자의 연쇄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 수직과 수평의 선이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격자는 상반된 에너지가 대립하며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그것은 피상적인 세계의 보이지 않는 내부의 구조를 형성한다. 대립하는 에너지인 수직과 수평은 다시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빛과 어둠, 정신과 물질, 삶과 죽음, 들숨과 날숨, 씨실과 날실 등 이원론으로 나뉠 수 있지만, 상반된 두 요소는 교차함으로써 생성과 무한한 움직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캔버스 천의 씨실과 날실의 교차와 십자 구조에 일찌감치 눈을 뜬 김수자의 경우, 석사 논문으로 현대미술에서 십자형이 갖는 의미와 보편성에 대해 연구할 만큼 오랜 관심을 기울였기에 선혜원 경흥각의 격자 구조는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 건물에 어떠한 장치도 추가하지 않고 바닥에 오직 거울만을 배치한 것은 반복되는 격자의 연쇄가 작가의 직조에 대한 의지와 완벽하게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격자 스크래치로 구성된 회절 필름으로 건물의 표면을 다루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건물의 구조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상향하는 기둥들이 높을수록 거울과 만나는 발아래 심연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는데 지상과 지하의 두 공간은 거울을 기준으로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겹침을 통해 하나가 된다. 관객은 수평의 지면을 걸으면서도 수직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두 공간을 바느질하는 바늘의 역할과도 같은 것이다. 거울 작업을 ‘수직적 보따리(Vertical Bottari)’라 칭하는 작가는 "나는 거울을 통해 보이지 않는 보따리를 만든다. 그 보따리 속에서 하늘은 땅이 되고, 관객은 스스로 세계를 꿰매는 바늘이 된다."라고 말한다. 선혜원에서 우리가 본 것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질서(건축)가 보이지 않는 보따리로 변환되어 ‘존재론적 환원’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현장이었다.

— SK 선혜원, 『김수자, 호흡 — 선혜원』, 개인전 도록, (서울: SK주식회사, 2026), 3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