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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공간, 빛, 그리고 몸은 김수자가 세계에 형태를 부여할 때 사용하는 요소이다. 그가 만든 이미지가 가진 순수성이 다른 곳 어딘가에 위치한 대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러한 특징은 실은 물리적 차원과 관련이 있다. 침대보로 만든 꾸러미인 그녀의 보따리는 무게가 없는 빛의 감각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 감각은 비단의 반사되는 성질에 기인한 것일 수 있고, 혹은 천 꾸러미가 가볍게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보따리는 몸의 은유이기도 하다. 침대보가 깔린 장소인 침대는 탄생, 수면, 꿈, 사랑, 죽음 등 존재의 근원적 사건들을 목도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보따리라는 조형물을 봉인하는 매듭은 이것들의 침묵을 강화하며, 들리지 않는 빛의 소리와 망명과 연결된 특정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한때 알았지만 잃은 줄 알았던 빛에 관한 기억이 갑작스럽게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공간–빛–몸의 상호작용 속에서, 영상에 등장하는 김수자의 형상은 창작자의 주체성을 가리키며 초월과 구체화된 현실 사이의 윤곽을 보여준다. 이것은 자화상에 국한되지 않고 (보따리가 함축하는) 바느질 또는 가사 활동과 같은 일상적인 제스처들을 복구하는 공간으로 존재와 사물을 잇는 연결 지점을 조명한다. 수천 년 동안 이것은 여성 정체성이 각인되는 상징적 경계대이자, 동시에 배제가 작동해온 장소였다. 김수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존재를 탐색하며,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에세이 「예술과 공간(Art and Space)」에 관해 썼듯이 “장소와 구역 사이의 유희, 즉 상호적으로 소속된 장소성 속 사물의 모임과 개별 사물이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광활하게 열린 장 사이의 유희”를 향해 나아간다.
하이데거에게 장소는 사물들을 배치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정의되며, 사물 자체가 곧 하나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장소성(locality)은 장소들의 집합(이는 트럭에 실려 집약된 보따리를 떠올리게 한다)인 반면 구역(quarter)은 광활하게 열린 장 혹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을 가리킨다. 그것은 동시에 각자가 자기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도 상호적인 “소속(belonging)” 속에 모일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여기서 우리는 <보따리>라는 제목을 지닌 영상 작업들이 보여주는 눈의 소용돌이, 폭풍, 떠오르는 태양, 바다를 즉시 연상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공간 만들기(making space)’의 행위로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의 공간이 이러한 상호 교환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김수자의 작업은 공간을 창출할 뿐 아니라, 그것이 자신이 출연하는 그 장소 자체가 되면서 동시에 “열린 광활함(open vastness)”의 시각을 연다는 의미에서 “공간을 만든다(make space)”. 하이데거가 공간 만들기, 공간을 떠나기, 장소 및 구역의 “공동 소속(co-belonging)”이 발생할 수 있도록 공백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조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김수자의 영상 역시 조각이다. 왜냐하면 장소를 규정하는 사물끼리 모이면서 사물의 순환이 발생하고 하나의 구역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시간은 이미지를 통합하고, 삼차원적 양상을 선명하게 만든다. 보는 이의 경험은 정지와 움직임의 교차 속에서 진행되는데, 이는 연속적인 시간 개념이 아닌 충만한 시공간 전체를 암시한다.
하이데거는 또한 “예술과 공간의 역동적 관계는 공간의 점유가 아니라 장소와 구역의 경험에서 출발해 사유되어야 한다. 조각은 공간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다. 조각이란 장소들이 스스로를 체화하여 구역을 열고 그것을 돌보는 것일 테다. 그 주변에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어떤 것을 남겨두고, 모든 사물에게 거처를 부여하며, 인간이 사물들 가운데 거주하도록 허락하는 방식이기 위해서 말이다.”[2]
나는 이러한 관계의 역동성을 김수자의 모든 영상 작업에서 본다. 그의 작업에서 형상을 이루는 것들은 작가의 형상과 상호적으로 서로에게 소속되는데, 이때 이들은 공간을 점유하고자 하지 않는다. 작가가 제시하는 대상과 그 장소를 구성하는 요소(작가가 보여주는 풍경과 사건)는 실제로 자신이 위치한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광활함은 재현의 장소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공동으로 속할’ 수 있도록 요구되는 공백을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은 관람자에게 거의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군중 속에서 바늘처럼 정지해 서 있는 김수자를 볼 때(<바늘여인>, 1999–2001),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서도 끌어당기는 것은 그의 몸과 장소성의 자기체현 사이의 관계이다. 이 장소들은 실제 교화를 위한 곳뿐 아니라 도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생성하는 정서적, 사회적, 이성적 장소들까지를 포함한다.
이러한 장소와 작가의 몸이 접촉하는 순간, 새로운 존재의 “장소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추상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몸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다. 델리, 라고스, 도쿄, 멕시코시티, 뉴욕, 런던, 상하이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사람의 몸, 김수자가 퍼포먼스를 수행한 각 장소의 몸, 그리고 여전히 남성/여성 이분법 안에 존재하는 심리적 몸 말이다. 김수자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바늘은, 여성적 정체성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공백을 인식하는 데 필요한 경계가 된다. 건초 더미 속의 바늘처럼, 알아보기 어렵고 잃어버리기 쉬우나, 그 좁은 공간이 사람들 사이에 홀로 조용히 서 있는 여성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 순간, 거대한 공간이 열린다.
이렇게 김수자의 바늘은 경험의 가장자리를 꿰매는 상징적 행위를 강조하는 내적 이미지에서, 지구의 축이라는 은유로 이동하며 반구들을 연결하고 회전을 가능케 한다. 이 모든 것이, 영상 프로젝션이라는 부피 없는 조각 안에서—그러나 가장 탁월한 부피, 즉 인간 형상을 제시하는 조각 안에서—가시화된다는 사실은 곧 초월과 체현된 현실의 관계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 이곳은 예술이 실현되는 장이자 생의 지속성과 죽음을 잇는 신비가 깃든 영역인 것이다.
라 페니체 극장에서 공개된 <호흡(To Breathe / Respirare)>(2005)에서 색채 스펙트럼의 프로젝션은 공간을 포섭하는 동시에 공간이 독립적으로 호흡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예술이 만드는 공간에 내재한 공백에 형태를 부여한다. 극장 안에 상영된 영상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발퀴레(The Valkyrie)>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객이 공연을 기다리는 한 시간 동안 무대의 방화막에 투사된다. 아직 공연에 의해 변모되지 않은 극장은 비어 있는 상태에 머문다. “장소”라고 규정할 수 있는 좌석, 무대, 발코니, 설비들은 곧 음악, 노래, 춤, 연기로 형성될 “구역”에 자리를 열어줄 것이다.
김수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 <호흡>으로 개입한다. 이는 라 페니체를 위해 제작된 두 편의 영상 <보이지 않는 거울>과 <보이지 않는 바늘>이 결합된 작업이다. 작업이 비추는 색채 스펙트럼은 객석과 무대의 공백을 나누는 막에 침투한다. 색이 천천히 변화하면서 그것은 라 페니체 극장 내부를 비추는 일종의 거울이 된다.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바늘의 반복적 침투처럼 반복적으로 색이 변형된다. 숨결과 같은 상징성을 지닌 시각물이 공간의 경계를 둘러싼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보호받고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는 이 흉곽 안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 결과는 비물질적 조각으로,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듯 “장소들의 자기체현”은 “모든 것에게 거처를 허락”하는 구역과 직접적인 관계 안에 있다.
김수자의 작업 속 색은 기존 이미지 위에 덧붙여진 이미지로써 배열되지 않는다. 그것은 극장 자체를 담아낼 수 있는 장소로서, 극장의 고유한 성질을 담고 있다. 그가 시각적으로 번역한 호흡은 공연이 없는 그 한 시간의 공백 동안에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와 뒤얽히게 된다. 이것은 무대 장치나 배경이 아니라 서로 다른 표현들이 함께 흐르며 서로로부터 빛을 끌어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그러나 김수자가 설계한 이 구성에는 숨겨진 연결 고리가 있다. 그것은 1월 27일 <발퀴레> 공연이 없는 날, 극장이 작가의 영상 상영만을 위해 개방될 때 드러난다. 오케스트라의 악기 조율 소리가 없어, 또 다른 공백이 생기는 상태로 돌입한다. 극장 자체가 하나의 이벤트가 되기에 관람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길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다. 그날 저녁 <호흡>은 사운드 조각 작업 <직물공장
(The Weaving Factory)>(2004)과 함께 전시된다. 사운드는 점진적으로 가속되는 작가의 호흡을 담고 있으며, 이 호흡은 이미지와 연동되어 마치 만질 수 없는 거품처럼 공간 속으로 퍼져 나간다. 이와 같은 감각은 공간의 점유에서 거리를 두는 “자기체현”의 감각 그 자체다.
마찬가지로 만질 수 없는 벽, 아치형 구조물, 바닥, 창문이 극장의 내부와 주변에 솟아오르고, 색채 스펙트럼은 발코니의 순서를 표시하는 조명에 반사되며 때로는 스포트라이트를 점화한다. 작업의 이미지와 사운드 속의 호흡 행위는 극장의 공간을 재정의한다.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우리가 쉽게 인식하는 반면 식물과 물, 대지도 소리는 없지만 호흡한다. 김수자가 자신의 흉곽을 드나드는 공기에 (시청각적) 부피를 부여했을 때, 우리는 마치 우리가 어딘가에 담겨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무언가에 도달했을 때 확장감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이 있는가? 그 생각과 마음의 확장은 커다란 호흡과 같지 않은가?
라 페니체에서 전시된 세 편의 작업과 베빌라쿠아 라 마사 재단(Fondazione Bevilacqua La Masa)에서의 전시를 관통하는 “호흡”이라는 말은, 공기, 빛, 색으로 부피를 만드는 제스처를 상기시킨다. 이는 시적 은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유형의 사물뿐 아니라 생각, 감정, 두려움, 불안, 기쁨과 같은 여러 공기 조각(airy sculptures)을 만들어내는 삶의 활동에도 해당한다. 이것들의 일관성은 우리 존재를 가득 채우며, 예술이나 시, 지적 사유 행위라는 제한적인 영역 안에서 그러한 활동을 할 수 없는 이들까지 포함한다.
라 페니체를 위한 이 프로젝트에서 김수자는 자신의 과거 작업과 연결되는 하나의 길을 만들어 보여준다. 점점 더 가시적인 것은 원근의 한계를 잃고, 추상으로 해소되지 않는 확장을 향해 나아가지만 동시에 존재 안에 깃든 열려있는 차원을 놓치지 않으면서 자기체현된 예술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틀도, 미리 설정된 공간도 없지만, 경험의 이동성에 대응하는 사물의 끊임없는 배열이다.
이는 종종 예술적 발명의 특수한 성격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가장 엄중히 완결된 작업조차 그 안에 변화를 품고 있으며, 때때로 관찰자의 존재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김수자는 지각의 유동적 물질 안을 보는 자신의 시선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인간 존재와 자연 안에 놓인 열린 상태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으로 번역된다.
김수자는 하나의 길, 하나의 경계, 하나의 지속적 순간의 일부가 되고, 또 그것을 기록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요컨대 그는 기꺼이 바늘이 된다. 저울의 바늘처럼 정확하면서도 동시에 가늘고 보이지 않는 바늘이 되고자 한다.
“바늘”이라는 단어가 그의 많은 작업 제목에 등장하는 사실은 가시적인 것과 그것을 규정하는 것 사이의 연결을 강조한다. 후자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며, 여기에는 여성의 물질문화를 형성하는 수작업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포함한다. 바느질은 배제의 행위이다. 그것은 어딘가에 정박한 채로 수행되어야 하는 노동이지만, 틈이 열리는 것을 지각하는 것까지 제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잊으려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찌르고 따끔거리는 느낌을 준다.
베빌라쿠아 라 마사 재단의 전시에서 김수자가 새롭게 공개한 여러 편의 영상 작업은 그의 작업이 새롭게 이행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이 모든 작업은 흐르는 시간의 부동성이라는 역설을 마주하게 한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실이다. 시간의 덧없음을 지각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보통 일상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단절의 요소를 필요로 한다. 김수자는 이 정지된 이동성을 조명한다. 그는 기다림의 노력, 시간과 이미지가 우리를 통과하도록 허용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안내한다.
<깊은 숨(Deep Breathing)>(1998): 하늘은 비어 있고 습기로 가득 차 있다. 안개 같은 유령이 소용돌이치며 비틀리고, 두 마리의 새가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하늘을 가로지른다. 제목의 “숨”은 깊이 잠겨 있으면서도 마치 비행처럼 가볍다.
<보따리 – 안개를 좇다(Bottari – chasing the fog)>(2000): 멕시코의 레알 데 카토르세(Real de Catorce). 옅은 안개로 둘러싸인 낮은 관목과 평원이 보인다. 안개가 짙지 않지만,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 안개를 헤쳐 “파내듯” 카메라는 수평 방향으로 짧게 움직인다. 그리고 응축된 물과 공기와 같은 부드러운 재료로 조각을 깎아낸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미지를 절단하며 덧없는 부피를 쪼아 만들고 있다.
<보따리 – 일출을 기다리며(Bottari – waiting for the sunrise)>(2000): 다시 레알 데 카토르세. 사막 같은 곳의 울퉁불퉁한 길. 새벽의 빛은 이미 도착했지만, 연분홍 구름 사이로 태양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혹은 아직은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다. 5분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장면이라면 매우 길게 느껴진다. 무언가의 광활함을 상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집중력을 끌어모아 보는 노력이 요구된다. 점차 눈이 마음을 대신해 시간을 받아들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수용한다. 영상의 끝에 구름은 완전히 밝아지고, 지평선을 따라 움직이는 등대의 불빛이 보인다. 길을 따라가는 자동차의 모습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 다시 깨어나고 태양이 완전하게 떠올랐음을 인지한다. 비디오는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그렇듯 예고 없이 끝난다. 맨 처음 스쳐 간 빛이 오랜 기간 지속되다가 갑자기 머리 위의 하늘에 침투한다.
<보따리 – 지구를 던지다(Bottari – throwing the globe)>(2000): 멕시코의 레알 데 카토르세. 대지는 공중으로 던져진 마그마가 되어 하늘과 평원의 옆모습과 함께 끌려가듯 회전한다. 이 모든 것은 금빛의 무언가로 인해 헤져있다. 이것은 중력의 물리 법칙과 무관한 비현실적인 우주의 움직임으로, 우리를 자연과의 공생적 순환 속으로 내던지는 욕망에 의해 작동한다.
<보따리 – 눈 그리기(Bottari – drawing the snow)>(2001): 뉴욕. 보는 이와 하늘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눈송이들은 소용돌이치고, 빽빽하게, 얇게, 잎사귀처럼 흩어지며 소용돌이치다가 이내 멈춘다. 이것은 인간의 제스처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낙하다.
<보따리 – 알파 해변(Bottari – Alfa Beach)>(2001): 대지와 하늘의 관계가 전복된다. 화면의 하단에는 해변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늘이 보이고, 상단에는 바다가 있다. 그것은 무한히 광활한 지평선을 따르는 하나의 절단선에 의해 나뉜다. 이 중력의 전도 속에서 파도의 영원한 교차는 자연스러운 결속의 의미를 잃고 방향 감각의 상실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에 자막이 나타난다. “이 비디오는 나이지리아 알파 해변, 노예 무역의 수많은 항구 중 하나에서 촬영되었다.” 이러한 전복은 어쩌면 자유가 노예제로 뒤집히는 부자연스러운 반전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 우주의 좌표조차 교란을 겪게 된다.
<바람여인(A Wind Woman)>(2001): 강렬한 회색의 돌풍과 푸른 색조의 덩어리들이 번갈아 화면을 가로지르며 유동적인 회화를 만들어낸다. 수 세기 동안 여성은 자연의 은유로 해석되어 왔다. 그리스 문명이 태동하기 이전의 고대 사회에서 위대한 인류학자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가 썼듯이 여성적 존재는 숭배되었고, 전쟁이 없는 사회 속에서 발전의 주축이었다. 관계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한 역동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계 사회가 아니라, 생명의 재생산에 얽힌 신비에 대한 알아차림이었다.
<바람여인>을 통해 김수자는 통상적인 대지의 어머니라는 여성적 상징주의를 벗어나, 모든 살아 있는 종을 뒤흔드는 하나의 에너지인 바람으로 그것을 이동시킨다. 군중의 흐름 한가운데에 정지해 서 있는 <바늘여인>과 공중에 부유하는 <바람여인> 사이에 하나의 관계가 생겨난다. 이 둘은 모두 공존의 광활함에 더불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생물학적 구조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장소인 것이다.
베니스에서 전시된 김수자의 영상 작업에서 관람자가 느끼는 감각은 20세기 미술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주제인 추상, 즉 시각과 사유의 기원이 되는 순간을 재발견하게 되는 추상의 추구와 맞닿아 있다. 이와 관련해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는 “실제의 것의 경멸적인 표면을 넘어서”기를 원했으며, “태양의 빛 뒷면에 있는 침묵의 세계를 발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수자는 모든 것에 깃든 빛을 살피는 방법을 택하면서 말레비치의 발언과는 반대되는 길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에서 구상적 규범과 단절되고자 했던 충동은 근대 물리학의 탄생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오늘날 컴퓨터 기술은 과학적 발견과 그것을 일상적으로 인식하고 향유하는 방식 사이에 직접적인 접점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측면은 예전만큼 긴급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1969년 하이데거가 예견했듯, 예술의 공간과 “인간의 거주, 그리고 인간을 둘러싸며 그들과 관계 맺는 사물들이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 사이의 역동을 파고들고자 하는 필요”가 생겨났다.[3]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오늘날 거주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를 둘러싼 것들은 무엇인가? 인터넷은 지구 전체를 손에 닿는 범위 안으로 끌어왔다. 예술의 장은 확장되었고, 그 안에서 생성되는 형식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도상적 상호 의존성과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 예술가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거주의 개념과 남성 및 여성을 둘러싼 사물과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변형시켜 놓았다.
김수자는 한국인이지만 뉴욕에 거주한다. 그의 말처럼, 한국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베니스에 소개된 그의 많은 작업이 세계 여러 지역의 장면을 담고 있고, 보따리가 한국의 혼례 이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삶을 둘러싼 사물 사이의 관계가 급진적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단지 오늘날 우리가 더 유목적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사실, 그리하여 일시적인 존재 양상을 띤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설령 한 장소에 계속 머무는 사람에게조차 유목성은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생각이 함께 제기된다. 베빌라쿠아 재단과 라 페니체 극장에서 상영된 영상에서 원근의 경계가 사라져 있다는 점은, 한편으로는 삶의 이동성을 환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의 개념에서 떨어져나와 순수한 진실의 이미지로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진실은 작가의 출생지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불교문화와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것은, 그 진실이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장소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김수자는 자신의 기원과 자신의 작업이 품고 있는 여러 장소 사이에 하나의 결속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모두에게 일어나는 문제다. 남은 과제는 우리를 둘러싼 것들을 순수하게 만들어 타자가 그 안에서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삶의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그 안에 담긴 광활함을 붙잡아야 한다. 김수자에게 그 광활함은 색, 눈, 안개, 풍경, 대도시의 군중 사이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1] Martin Heidegger, L’arte e lo spazio, Genova: Il Melangolo, 1984, p. 11.
[2] 같은 책, p. 29.
[3] 같은 책, p. 33.
— 전시 도록 에세이, 《Kimsooja, To Breathe / Respirare》 개인전, 라 페니체 극장, 베빌라쿠아 라 마사 재단, 베니스, 이탈리아
프란체스카 파시니는 밀라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 비평가이자 독립 큐레이터다. 아트포럼, 테마 첼레스테, 플래시 아트, 리누스에 기고해 왔으며, 이탈리아 및 국제 작가들의 전시 도록 에세이를 집필했다. 토리노의 카스텔로 디 리볼리 현대미술관, MaRT 트렌토 로베레토 현대미술관, 밀라노 현대미술관(PAC), 베니스의 베빌라쿠아 라 마사 재단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기획했으며,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의 한 섹션인 《시테라섬으로의 여행 Voyage to Cythera》을 기획했다. 현재 피에르 루이지 에 나탈리나 레모티 재단의 예술감독이다.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임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