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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래폴트 ⎹ 김수자, 뉴 노멀

마크 래폴트

2020

지난 5월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 봉쇄 조치(lock down)로 집에 머물던 때, 한국의 미술가 김수자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스웨덴과 덴마크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말뫼(Malmö)의 북동쪽, 중세의 성과 유기농 농장이 있는 숲 속에서 말이다. 나무들 사이로 새하얀 이불보 100장이 마치 붙잡혀버린 만화 속 유령처럼 빨랫줄에 매달려 바람에 펄럭인다. 이불보는 얼룩이 씻겨나간 자리,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 완전한 청결과 깨끗하게 지워진 과거를 연상시킨다. 지역 장인의 솜씨가 새겨진 수놓은 장식과 더불어 이어져 온 오래된 제작 방식과 가사 노동의 전통은, 도시화된 생활과 빠른 대량생산, 편리한 가전과 세탁기가 일상인 지금의의 세계에서는 우리에게 낯설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흰색이란 애도, 순수, 재탄생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흔적에 불과한데, 우리가 그것을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하지만 생각을 많이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지난 몇 달 동안 마음껏 빠져들 기회를 누린 소일거리였다. 봉쇄 조치 이래, 우리의 일상은 송두리째 바뀌었고, 타인을 두려워하고, 외출을 꺼리게 되었으며, 평범함 속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고, 전 세계 정치인들이 부추길 때마다 '정상(normal)'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정의했다. 마치 그 용어가 애초부터 주관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 그의 이불보는 <빨래터(A Laundry Field)>(2020)라는 제목의 작품을 구성한다. 영어 제목의 관사 'A'가 암시하는 것이 여러 개 중 하나라는 뜻이라면, 실제로 그러하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의미에서 그렇다. 먼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새로울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 세계 많은 사람이 빨래를 널어 말린다. 빨 것이 있고 널 데를 가진 이래 쭉 해오던 일이다. 만일 이곳 바노스 콘스트(Wanås Konst)에서 이 빨래와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저 평범한 일과가 갑자기 멈춘 흔적이라고, 이를테면 세계적 보건 위기로 빨래를 걷으러 나올 사람이 없어서 빚어진 광경이라 생각한다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빨래터>는 <뭄바이: 빨래터>(2007-08) 같은 전작의 연장선에 있다. 이 다채널 비디오 작품은 뭄바이를 촬영한 영상을 통해, 인파로 붐비는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 항구를 옷 입은 사람과 옷을 빨고 말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하나의 터(field)로 그린다. 두 작품 모두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을 바탕으로, 그 일상성과 평범성으로 무언가를 환기하게 하며, 관객의 투영과 해석을 수용하되 이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옷을 인간의 역사와 흔적을 담은 것으로 보기를 원하는가? 좋다. 단지 평범한 삶으로 보이는가? 그 또한 진실이다. 이처럼 뭐라 단정짓기 어려운 태도는 김수자의 작품의 중심에 자리한다. 그리고,어쩌면, 그것은 수많은 훌륭한 예술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나는 삶에서 예술을 보았고, 예술에서 삶을 보았다.' 김수자는 2008년 수전 솔린스(Susan Sollins)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그 둘을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질문은 항상 삶 자체와 연관되어 있다.'

  • 김수자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에는 보따리가 등장한다. 보따리란 한국에서 예로부터 손으로 들고 갈 수 있게 물건들을 천으로 싸서 묶은 꾸러미를 말한다. 보따리에 쓰는 천(종종 색색의 이불보를 재활용하여 만든다)은 시간이 흐르며 성별화된 노동, 가정과 사회 권력의 역학,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분리 같은 문제와 연결되었고, 한편 보따리는 이주와 강제적 실향(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전쟁과 기근이 빚어낸 결과일 때가 많다)을 연상시키며, 집을 나타내는 동시에 집의 상실을 상징한다.

  • 보따리에 대한 관심이 한국의 문화적 유산—작가가 말한 자신의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기는 해도, 1992년 그가 MoMA PS1의 입주 작가로 뉴욕에 체류하며 고국의 유산으로부터 이탈했을 때, 보따리는 2차원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는 작업의 매체로 발전했다(작가는 회화를 전공했다). 그곳에서 미술관은 보따리에 싸인 문화적 짐을 받아들이고 또 전복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설치 <연역적 오브제(Deductive Object)>에서 김수자는 전시실의 벽돌벽 틈새에 이불보 조각을 끼워 넣고, 일련의 평범한 사물에 보따리 천을 덮어 정적인 조각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보따리는 현실과 추상으로 동시에 발전해 갔다. 지난 몇 달 동안 세계의 도시와 사회의 문화가 표류했던 방식과 비슷하게 말이다. <떠도는 도시들–2727km 보따리 트럭(Cities on the Move–2727 Kilometers Bottari Truck)>(1997, 작품의 제목이 유래한 단체전 《움직이는 도시》에서 첫선을 보였다)은 퍼포먼스이자 영상 기록으로, 작가가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 뒤 칸에 앉아, 한국 곳곳 개인적 연이 있는 장소를 방문하며 보낸 11일 간의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호흡–거울여인(To Breathe: A Mirror Woman)>(2006)에서는 마드리드의 크리스털 팰리스(Crystal Palace)에 반투명 회절 필름을 입혀, 건물 자체와 내부의 공기가 다채로운 포장이 되는, 즉 일종의 보따리가 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 동시에 김수자는 그러한 관심을 현재에도 진행 중인 <실의 궤적(Thread Routes)>(2010-) 같은 작업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유산 너머로 확장한다. <실의 궤적>은 2002년 브뤼허(Bruges)에서 전통 레이스 제작 과정을 보고 영감을 받아 시작된 비디오 연작이다. 첫 장은 직물 문화에 깃든 퍼포먼스의 요소를 주제로 삼아, 페루의 직물 공예와 더불어 그것이 전통, 젠더, 역사적·토착적 건축, 지역 풍경 등과 맺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 이어지는 챕터에서는 유럽, 인도, 중국, 북아메리카 원주민, 모로코의 관습을 탐색하는데,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한편, 카비르(Kabir) 같은 신비주의 시인의 시를 떠오르게 한다. 카비르는 15세기 인도에 살던 무슬림 직공으로, 그는 시를 통해 천을 짓는 과정을 명상과 신성에 대한 탐구와 연결시켰다. 실제로 그의 시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해하기도 쉬웠기에, 이슬람과 힌두교 문화는 물론, 바크티(Bhakti)와 요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수자의 <호흡–거울여인(To Breathe: A Mirror Woman)>과 인터랙티브 설치 <마음의 기하학(Archive of Mind)>(2016)과 같은 작품에는 설치 구성요소의 일부로 작자 자신의 호흡을 녹음해 포함시켰으며, 작가가는 <실의 궤적>의 영상을 "시각적 시(visual poetry)"라 부른다.

  • "나와 내 문화의 현실은 끊임없이 점진적으로 진화해 왔는데, 뉴욕으로 이주한 뒤로는 상당히 극적으로 변했다." 우리가 각자 런던과 한국에서 코로나 봉쇄 중에 나눈 이메일에서 김수자는 이렇게 말했다.

  • "이주로 인해 내 문화를 다문화적 맥락의 일부로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선불교에서 '화두(Wha Du, 중국어로는 공안)'라고 하는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를 질문하는 연속체로서,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점이 아마도 작가로서의 삶에 일관성과 긴 호흡을 부여해 주었을 것이다." 김수자가 언급하는 것은 이야기나 진술, 질문을 통해 선불교 수행자의 마음에 의심의 위기를 일으켜 깨달음으로 가게하는 수행방식이다. 김수자의 작품 중에서 이러한 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2001)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김수자는 회색 옷을 입고 카메라를 등진 채 미동 없이,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 높은 대도시(상하이, 도쿄, 멕시코시티, 델리)의 분주한 보행자 교차로에서 인파의 유동을 거스른 채 서 있다. 나를 놓는 일이 나를 찾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피고, 또 개인과 집단을 탐구하는 이 작품은 군중이 새로운 두려움의 원천이 된 지금 더 큰 울림을 준다. 바로 앞 대목은 노벨상 수상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가 1960년 타자와의 관계를 분석한 저서 『군중과 권력(Crowds and Power)』에서 '미지의 것과의 접촉(the touch of the unknown)'이라고 설명했던 부분이다. 다만 '인간이 접촉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경우는 군중 속에 있을 때이다. 그것이야말로 공포가 정반대의 것으로 변하는 유일한 상황이다'라던 카네티의 주장은 지금으로서 다소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 "예술가는 일상에서 종종 예술을 발견하고, 그 일상을 미술관으로 가져와 미술사 안에서 맥락을 부여한다"고 김수자는 말한다. 실제로 소변기와 레디메이드가 미술관에 침투하고 근대 미술관의 시대가 열린 이전에도, 시각적이든 문학적이든 시를 짓는 이들이 작가 없는 일상의 시학에 참여했던 시도는 역사적으로 많았으며, 특히 회화에서도 단원 같은 조선 시대 화가나 17세기 네덜란드 대가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미술관이라는 장소에서는 일상과 미술사 사이에서 무엇이 무엇에 맥락을 부여하는가 혹은 무엇이 무엇에 응답하는가를 묻는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 또 미술관 속 작품과 삶의 경험 환경 중에서 무엇이 관객을 세상의 진실에 가까이 이끄는가에 대한 불안도 존재한다. 이 모두가 미술관으로 들어간 것은 살아 있는 삶과 단절된다는 일반적 편집증이 낳은 반응이다. 김수자 같은 작가가 평범을 끌어들이면 들일수록 비범하다는 찬사를 받는 상황이야말로 어쩌면 미술관 문화가 지닌 역설일 것이다.

  • <빨래터(A Laundry Field)>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수자는 대부분 미술관의 맥락 안에서 작품을 전시해 왔지만, 몇 가지 예외가 있다고 설명한다. 김수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선풍기, 조명, 소리로 그것에 진동을 주고, 관객이 천의 페르소나를 마주할 때 감각을 느끼도록 했다. 하지만 바노스 조각공원처럼 자연 속에 작품이 놓일 때, 바람과 빛, 나무 그림자, 새 소리가 세탁된 이불보를 색칠하듯 어루만지며 그것이 지닌 기억과 시적 풍경을 불러온다. 바노스 조각 공원에 설치된 <빨래터>가 일상과 미술관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관객의 상상과 경험을 극대화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읽고 나면, 그의 이번 신작이 미술관이라는 특권적 공간의 권위를 향한 도전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그 점에서 바노스에서 열리는 《씨 뿌려 그리기(Sowing into Painting)》라는 제목의 전시는 김수자의 전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전시는 그의 다양한 작품을 잇는 하나의 원을 그린다. 여기에는 <실의 궤적>의 챕터 1, 2, 4와 <연역적 오브제>(1993-2020) 시리즈, 팽팽하게 틀에 끼운 리넨 캔버스와 헌 옷으로 만든 보따리로 이뤄진 <메타-페인팅(Meta-Painting)>(2020), 마드리드에서 선보였던 작품의 발전된 형태인 <호흡(To Breathe)>(2020) 등이 포함된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동명의 작품 <씨 뿌려 그리기(Sowing into Painting)>를 통해 회화의 제작 과정을 하나의 원으로 이어서 보여준다. 김수자는 두 종류의 아마 씨를 밭에 심었는데, 하나는 수확해서 캔버스와 다른 직물을 만드는 종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결합제로 쓰이는 아마씨유를 얻는 종이다. 이 작품은 비범한 것을 평범한 것으로, 문화를 자연으로, 그리고 미술관의 ‘일상’ 그림처럼 관찰당하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삶으로 돌려놓는다.

  • —『아트리뷰 아시아(ArtReview Asia)』, 여름호, Summer, 2020, pp.48-55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이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