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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의 미술가 김수자의 <떠도는 도시들 - 2,727km 보따리 트럭>(1997)은 많은 평을 불러일으켰고,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정확한 인용과 반쪽짜리 사실이 가득했지만, 상상력 넘치는 해석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을 두루 여행한 김수자의 체류기를 담은 비디오 루프 작품"이라는 이야기가 있다(출처 언급은 일부러 피하는 중이다). 하지만 영상 어디에도 대도시 서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평을 보면 "1997년 김수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은 옷감으로 수많은 '보따리'를 만들어 트럭에 싣고 11일 동안 한국을 여행했다"고 한다. 이런 범세계적 해석은 지역사로 좁혀 들어가는 또 다른 글과 대치된다. "트럭 뒤 색색의 동여맨 옷감이 이룬 산이 한국사의 험난한 사건들을 암시하니, 당시 사람들은 도농을 막론하고 모두 비슷비슷하게 큰 "보따리"에 귀중품을 싸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영상에서 보따리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는 없으며, 또 적어도 문외한의 눈으로 트럭 여정의 퍼포먼스에서 한국인이 겪은 강제적 노마디즘의 역사를 유추해내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방식을 시도하려 한다. 이미지 자체가 스스로 말하게 하되, 동시에 작가가 작품 속에 담은 정보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한 여인이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 위에 앉아 있다. 두꺼운 줄로 꽉 묶어 안전히 실은 보따리는 여인의 앉을 자리 역할도 한다. 영상 내내 여인은 오로지 뒷모습만 보인다. 이따금 길이 굽어질 때면, 옆모습이 잠깐 드러난다. 여인은 시대와 지역을 이 가늠하기 어려운 중립적인 검은 옷을 입었고,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었다. 그를 따르는 카메라는 최대한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항상 그를 프레임 중앙에 두려 애쓴다. 그래서 프레임 하단에는 색색의 보따리 더미가(딱 한 번 트럭 후미가 흔들리다 잠시 화면 안에 들어온다), 프레임 상단에는 여인과 스쳐가는 풍경이 보인다.[2] 초반에는 트럭이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고개를 넘고 나면 다시 골짜기로 내려간다. 급하게 꺾이기도 하는 굽이진 길이 풍경을 통과하는 가운데, 오르막에서는 꽤 척박해 보이던 주변이 내리막에서는 우거진 숲으로 변한다. 길가와 몇몇 건물 주변에 눈 내린 흔적도 남아 있다. 지리적으로 어느 곳의 경관인지 특정되지 않아서, 세계 어느 대륙에라도 이런 곳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스쳐간 도로표지판에 적힌 글자들이 이곳이 아시아 지역임을 내비친다.
작품에 나오는 일부 텍스트가 영상의 직접적 정보에 보탬이 된다. 약 7분 길이의 영상이 페이드인으로 시작하고 곧이어 "떠도는 도시들"이라는 제목이 나온다. 이는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 즉 후한루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기획한 전시 《움직이는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제에 맞게 맞춰 다양한 도시와 대륙에서 서로 다른 형식으로 전시되었다.[3]
영상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이 페이드인은 도시가 어떻게 발전해 가고 있는지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를 시사한다. 이 작품에서 "떠도는" 것은 구체적으로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이다. 그러니 트럭은 "도시"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화면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산길이다. 보따리는 도시에서 실어 온 걸까? 아니면 도시로 나르는 길일까? 작품 내내 "도시"라는 단어가 우리 마음에 이물처럼 박혀, 내내 배경을 이루는 풍경의 개념적 대응을 이룬다. "떠도는 도시"라는 일반적 제목은 이 여정이 도시와 시골을 모두 통과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2,727km 보따리 트럭"이라는 작품의 실제 제목이 등장한다. 그제야 우리는 이 7분의 시퀀스가 훨씬 긴 여정의 발췌본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 올라가는 크레딧에 실린 감독(김수자), 촬영 연도(1997년), 장소 같은 정보 덕분에 상황이 진행되는 시점은 지금이고 장소는 한국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 영향을 미치기에, 도시와 시골, 부분과 전체, 현재와 (거의) 모든 시간, 여기와 (거의) 모든 장소 간의 긴장 - 즉 현대적인 개념으로는 로컬과 글로벌 사이의 긴장이다. 게다가 영상과 여정의 선형적 구조는 반복(영상은 루프로 반복 재생된다)으로 인해 약화된다. 작품의 중심 주제가 여정이기는 하나, 정지 상태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이다.
<떠도는 도시들 - 2,727km 보따리 트럭>은 미니멀 로드무비로 볼 수 있다. 고전적인 로드무비는 물리적 여정과 정신적 여정을 동시에 묘사한다. 한 사람 혹은 대부분 아니면 대체로 두 사람이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나라를 여행하며 ‘진정한 미국’과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는 과정을 그린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나라를 여행한다.[4] 로드무비가 과거를 언급하고 미래를 암시하기는 해도,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사이 공간(in-between)’, 즉 과거와 미래, 도시와 시골, 문명과 자연, 정지와 운동 사이의 거리이자 도로이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김수자는 이렇게 말한다. " '보따리 트럭'은... 짐을 싣고 있는 ‘사이 공간’이다."[5]이다. 도로는 과거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모험을 약속한다. 누군가를 도로 길 위로 이끈 이유는 로드무비의 플롯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김수자의 작품에는 행위도 동기도 없다. 검은 옷의 여인은 홀로 여행 중이다. 그는 앉은 채로 아 있으되,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론'에서 유목민의 ‘정지 속의 진행’을 언급한다. "유목민은 자신을 매끄러운 공간에 분배한다. 유목민은 그 공간을 차지하고 거주하고 유지한다. 그것이 그의 영토 원리이다. 그러므로 유목민을 단순히 ‘움직이는 존재’로 정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 토인비는 유목민을 움직이지 않는 자로 정의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옳다... 물론 유목민은 움직이지만, 움직이면서도 앉아 있으며, 앉아 있는 동안에도 움직이는 것이다.(베두인족은 안장 위에 무릎을 꿇고 발바닥을 세워 그 위에 앉아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달린다.)."[6] 우리는 검은 옷의 여인이 어디에서 왔는, 혹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왜 여정에 나섰는지 보따리를 동여맨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들은 바 없다. 여인은 길에 의해 구성된 사이의 공간에 그저 존재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사이 공간이 유목주의의 심층적 특징이라 강조한다. "유목민에게는 영토가 있다. 그는 관습적인 경로를 따르며,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데, 각 지점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급수 지점, 거주 지점, 집합 지점 등). ... 경로는 언제나 두 점 사이에 있지만, 그 사이는 일관성을 취하며, 자율성과 자기만의 방향을 즐긴다. 유목민의 삶은 간주곡이다."[7] 고전적인 로드무비는 공간과 장소의 대립으로 작동한다. 공간(추상적 공간, 훤히 열린 공간)은 헤아릴 수 없는 자유를 상징하는 반면, 장소(정확히 국지화된 장소)는 문명, 규범, 규율과 같은 제약을 상징한다. 김수자의 작품에서 두 용어는 보따리라는 개념 안에서 동시에 공존한다. 이 임시적 장소, 즉 여인이 앉은 보따리는 공간이자 운동이다. 그렇기에 보따리는 정지와 이주, 구속과 자유 같은 대립된 개념들을 통합한다. 오브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김수자는 이와 같은 역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보따리 트럭'은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는 전개의 오브제이자, 우리가 왔던 장소로부터, 또 우리가 돌아가게 될 장소로 우리를 데려가는 오브제이다."[8] 김수자는 단순한 보따리—말 그대로 "일시적 오브제" —를 장소성과 무장소성을 나타내는 복잡하고 모순된 상징으로 사용한다.
처음 보기에는, <떠도는 도시들 - 2,727km 보따리 트럭>의 모든 것이 움직이며 흘러가는 듯하다. 보따리들을 줄로 고정시킨 트럭, 커브길에서 몸이 살짝 흔들리고 험한 길에 휘청하기도 하는 여인, 스쳐가는 풍경 모두 그렇다. 그동안 여인은 고정된 지점으로 간주된다(쌓여 있는 보따리들은 그저 "좌대" 구실을 할 뿐이다). 비록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라고는 몸을 덮은 옷이 전부이지만, 그가 바로 참조의 기준이다. 여인은 누구라 식별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렇기에 내용물을 감춘 보따리만큼 익명적이다. 그렇기에 그는 진정한 동일시의 대상이 된다. 여인은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그녀의 몸은 하나의 이 보따리이자, 많은 것을 담은 용기이자, 집합체이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김수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따리 트럭>은 짐을 실은 자아이자, 짐을 실은 타자이다."[9] 보따리로서의 몸은 "나"와 "내 안의 타자", "나"와 "타자" 사이를 오가는 이행을 가능케 한다.[10] 보따리 더미 위에 앉아 여행하는 여인은 원시의 인간과 현대의 인간, 노마디즘 그리고 이동성과 유연성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새로운 이상으로 떠오른 이동성과 유연성은 종종 비정체성, 비장소성, 이주, 문화적 혼종성 같은 가치와 연결된다. 하지만 동시에 여인은 거대한 고독을 발산한다. 멜랑콜리라 해야 할까? 마르크 오제는 현대 지도 제작의 외로움을 분석하며, 정체성, 관계, 역사를 특징으로 하는 "장소"와 아무런 인류학적 정체성이 없는 "비장소"를 모두 탐구한다. 오제의 결론은 이러하다. "움직임은 여러 세계의 공존에 그리고 인류학적 장소와 더 이상 인류학적이지 않은 장소가 결합된 경험에 특별한 경험, 즉 어떤 형태의 고독을 더한다." 이미지들이 스쳐가는 동안 고독은 "개인성의 초월로서, 과거라는 가설의 희미한 반짝임과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11] 어쩌면 고독이란 세상에 자신을 열어놓는 데 따르는 뜻밖의 대가인지도 모른다.
[Note]
[1] "Gerald Matt interviewing Kimsooja", p. 12, in: exhibition catalogue: Kim Sooja. A Laundry Woman, Kunsthalle Wien, 2002, p. 7-33.
[2] 뒷모습만 보이는 이 검은 옷의 여인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누더기를 입은 비너스>(1967)에서 찾을 수 있는데, 고전적인 여성 누드상을 모조한 조각상이 관객 쪽으로 하얀 등을 보인 채 돌아서서, 키보다 높이 쌓인 옷과 천 조각 더미에 바싹 다가서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상적 형상과 비형식의 매력 사이에 충돌이 빚어진다.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김수자에게는 이런 충격 효과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여성과 보따리가 이제 같은 우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3] Cities on the Move, exhibition catalogue Secession, Vienna, Musée d'art contemporain, Bordeaux, ed.: Hatje Verlag, Ostfildern, 1997/98.
[4] 해당 주제와 관련된 몇 편의 흥미로운 에세이를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The Road Movie Book, ed.: Steven Cohan and Ina Rae Hark, London, New York: Routledge, 1997.
[5] 해당 인터뷰는 다음 도록에 독일어 번역으로 재수록되었다. Kim Sooja. A Needle Woman, exhibition catalogue Kunsthalle Bern, 2001, no page numbers.
[6]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lated by Brian Massumi, London: The Athlone Press, 1987, p. 381, chapter 12, A Threatise on Nomadology: The War Machine. 국역본은 다음 참조.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중 12장 「127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7] Ibid., p.380
[8] Kimsooja, 2001.
[9] Ibid.
[10] 이런 매개체의 역할을 하필 여성의 몸이 맡는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11] Marc Augé, Orte und Nicht-Orte. Vorüberlegungen zu einer Phänomenologie der Einsamkeit, Frankfurt am Main, 1994, p. 103. 국역본은 다음 참조. 마르크 오제, 『비장소』, 이윤영 & 이상길 옮김, 아카넷,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