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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한국 태생의 뉴욕 기반 작가 김수자의 예술 세계에서 우리는 익명의 존재라는 개념 위에 세워진 하나의 전체 커리어를 본다. 익명의 존재라는 개념은, 자아의 솔직한 주장에 통상 반하여 작용하는 힘과 환경에 어우러지려는 소망을 드러내는 메타포다. 김수자의 예술은 항상 예상을 뒤집으며 이것은 그가 세계를 포용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김수자의 자아 퍼포먼스는 대립인 동시에 묵종이며, 운명의 순응인 동시에 의지의 표출이다. 김수자의 명백히 익명적인 행위에는 엄청난 힘과 주장이 있으며, 그것은 도전인 동시에 운명의 인정이다. 김수자가 대립물로서 제시하며 다루는 바로 그 환경들은 자아가 자기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전체가 부분을 규정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에서 말이다. 김수자는 어떤 통합된 알아차림(awareness)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 속에서 이름 없이 홀로 서 있다. 이 알아차림이라는 말의 정의들은 경계 없는 흐름 속에 있기에 어쩌면 불교적으로 보일 것이다. 익명성을 정교하게 구축함으로써 김수자는 자아를 지우려는 욕망, 그리고 그가 침묵 속에서 웅변적으로 맞서는 환경을 대면하기 위해 필요한 결단 사이의 대립적 모순들을 예리하게 알아차리는 감수성을 보여준다.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2001) 퍼포먼스에서 김수자가 도쿄의 시부야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 한가운데 서 있을 때 그의 위치는 안티테제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는 인간의 회복력에 대한 무언의 긍정, 심지어—자기 자신에게 익명성의 조건을 부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개인의 가치에 대한 무언의 긍정이 된다. 놀라운 가치의 전환 속에서 김수자의 행위들은 말 그대로 죽음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점점 더 인식해가는 자아의 발전을 구현하고, 그는 마치 언제나 제 시간보다 한발 앞서 존재하는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김수자의 시각에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지향점은 어둡거나 섬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김수자의 예술은 삶의 환경을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통찰적 인식을 드러내며, 그가 다양한 문화와 교류하는 것—김수자는 <바늘여인> 퍼포먼스를 전 세계 여덟 개 도시에서 선보였다(순서대로 도쿄, 상하이, 델리, 뉴욕, 멕시코시티, 카이로, 라고스, 런던)—은 어느 환경에서든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김수자가 예술가로서 성장한 과정은 꾸준하고도 분명했다. 1957년 한국 대구시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1984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반년간 프랑스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며 프랑스에서 지냈다. 1992~3년에는 뉴욕 P.S. 1 현대미술관(P.S. 1 Contemporary Art Center) 레지던스 입주 작가로 미국에 왔다. 문화적 망명을 선택한 그는 1998년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고 이후 미국에 정착해 이곳에서 점차 더 큰 인정을 받으며 국제적 명성을 누리는 예술가로 성장했다. 화가로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는 줄곧 표면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에 예술가로 활동하는 내내 이 질문에 대한 탐구를 이어왔다. 실제로 김수자가 말하길 "이러한 [표면의] 탐구는,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는 나의 의지와 더불어, 나의 예술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표현 방식의 변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일찍이 1983년, 그러니까 아직 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김수자는 "1983년 나는 전통적인 이불보를 바느질하던 중에 예술과 삶을 질문하는 수단으로서 바느질이라는 방법론을 처음 발견했다." 김수자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직물을 새로운 종류의 캔버스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바느질이라는 행위는 애도와 뗄 수 없는 개인적인 행위이기도 했다. "나는 헌 옷을 바느질하는 작업을 한 해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긴 옷가지로 처음 시도했다."
김수자는 캔버스 표면을 "화가가 극복하기를 소망하는 장벽이며 장애물"로 보고 이것에 관해 질문하는 화가로서 시작했다. 10년의 세월에 걸쳐 김수자는 다양한 매체와 전략—비디오와 퍼포먼스—을 통합하는 새로운 단계로 이행했고, 이 과정에서 작품의 강조점은 표면의 문제에서 이제 그가 새로 인식한 언어인 둘둘 만 헌 옷과 이불, 즉 이미지 봇짐(an image bundle)으로 이동했다. 김수자 예술의 변화는 갈수록 더 상징적인 재료의 사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어째서 이불보를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김수자는 이렇게 답한다. "이불보는 상징적인 장소다. 우리가 태어나고, 쉬고, 사랑하는 곳이며, 꿈꾸고, 앓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다. 그것은 몸의 기억을 살아 있게 하고, 그 기억들은 또다른 차원을 만든다." 이제 김수자는 퍼포먼스와 비디오의 세계에 집중한다. 자신의 환경을 더욱 알레고리적으로 읽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러한 독해 안에서 김수자의 삶과 행위는 우리의 삶과 행위를 대표하는 한 존재로서 기능한다. 김수자는 우리의 행위가 내면 깊은 곳의 고립을 드러내며, 우리의 유한한 시간 앞에서 행동은 전형적(paradigmatic) 의미를 띤다는 인식을 우리 모두가 공유한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인간의 조건을 본질적으로 익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김수자의 예술에서 우리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그가 한 개인으로서 관객을 위한 매개체가 되어줌으로써 명료해진다. 김수자의 행위들은 관람자와의 존재론적 대화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관람자에게 울림을 준다. 이 대화는 죽음의 현존이 연상시키기 마련인 높은 도덕적 진지함으로 가득하다.
<바늘여인>은 군중 한가운데에서 본래 사색적 성격을 띠는 울림 있는 침묵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느끼는 고립을 행위로 구현한다. 김수자는 불교 수행자가 아님에도 최근의 퍼포먼스에서 선불교와 친연성을 발견한다. 김수자의 예술은 자신의 수행을 오롯이 알아차리는 명상하는 정신을 연상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감각을 거부하고, 세계의 에너지—또는 소음—을 흡수함으로써 치유하고 결속시키는 태도를 선택한다. 김수자 스스로 말하듯 "[1983년부터] 10년간의 바느질 수행 끝에 나 자신을 자연의 직물을 엮는 바늘로 여기게 되었다."
작가는 바늘과 실크의 정밀한 메타포로 표현되는 무아(selflessness)의 행위로서 실재의 이질적인 부분들을 한데 모으고자 한다. 김수자가 여덟 개 도시에서 군중과 나누는 말없는—심지어 기도하는 듯한—상호작용은 완강한 목적의식뿐 아니라, 부동의 상태와 침묵이 자아내는 다양한 반응을 안전하게 흡수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지운 자아를 보여준다. 비디오는 김수자의 활동을 직접 보면서 상호작용들의 아카이브를 창출한다. 흥미롭게도, 김수자는 여러 도시에서의 활동을 기록하는 비디오의 활용 역시 메타포적으로 바라본다. "관객들이 내 퍼포먼스의 결과물인 비디오를 볼 때 또다른 마주침이 발생한다. 내 몸은 바로미터의 역할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사람들을 잇는 바늘의 역할을 한다." 퍼포먼스가 지속되는 내내 김수자는 자아가 가장 우선한다는 환상을 소멸시킴으로써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매듭을 강조하려고 한다.
김수자의 11일에 걸친 서사시적 여정 〈떠도는 도시들 – 2727km 보따리 트럭(Cities on the Move—2,727 Kilometers by Bottari-Truck)〉(1997년 11월)은 그의 기억 속 장소들을 되짚는다. 김수자는 색색의 보따리를 트럭 가득 싣고 과거에 살던 도시와 마을을 여행했다. 김수자는 이 퍼포먼스가 "기억과 역사를 싣고 있는 사회적 조각(social sculpture)으로서 물리적·정신적 공간을 찾아내고 동등화한다"고 여긴다. 김수자가 태백산을 지나는 모습을 목격하는 이 비디오는 그가 과거와 마주하려고 애쓰면서 지고 가는 문자 그대로의 짐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퍼포먼스는 김수자의 여행을 우리 존재의 서사에 대한 메타포로 제시한다. 이 전시회 도록에서 김수자가 말하듯 "'보따리 트럭'은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는 과정적 오브제(processing object)로서 그곳/우리가 떠나는 곳/우리가 가는 곳에 우리 자신을 데려다놓는 동시에 그로부터 떠나게 한다." 비유적 언어는 관객을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끌어들여 그의 여정을 우리 여정의 상징으로 읽기를 요구한다. 김수자의 탁월함이 특히 잘 드러나는 때는 그의 이미지들이 알아차림의 상징적 표현으로 제시될 때다. 길을 따라 이동한다는 개념은 그 사람이 사라지면 그 길도 끝난다는 불가피한 결말과 깊이 공명한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프로젝트들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는 질문에 김수자는 도록에서 이렇게 답한다. "나는 내 프로젝트들을 내 몸 안에 갖고 있으며 내게는 몸이 내 스튜디오입니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기억하거나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진술은 김수자는 창조성의 원천을 자신의 몸 안에 갖고 있으며, 그것은 그가 그토록 세심하게 제시하는 익명적인 공적 자아의 대응물로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환기한다. 우리가 김수자의 퍼포먼스 비디오에서 그의 얼굴을 결코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김수자의 익명성이 그를 둘러싼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우를 만큼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김수자가 머문 기억에 남겨진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밟는 길(道, path)—이 자체로 불교 용어다—의 함의는 불교와의 깊은 친연성을 시사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김수자가 "관조하는 자세와 방법은 불교 수행자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작가 스스로 언급한다. 동시에 김수자는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관조하고 자기 자신만의 길이 이따금 사유의 드넓은 흐름과 만날 수 있는 독립된 개인"으로 남아 있을 권리를 간직한다. 작품의 고립 속에서 김수자는 세계와의 보편적 조응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한 그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서다. 김수자의 알레고리들이 성공적인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그것들이 실은 매우 개인적인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에서 김수자의 익명성은 하나의 속임수이자, 한계라는 개념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 경계가 확장된 자아의 감각을 이야기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김수자의 고립에서 특이한 점은 그것이 실제로는 관객과 온전히 교류한다는 데 있다. 김수자는 보편적 함의를 강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고독을 제시하는 동시에, 타자들과의 광범위한 연루로 나아가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자율성을 강조한다. 실제로 김수자의 외로운 행위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듯 보인다—2001년 라오스에서 촬영된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 비디오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김수자는 손을 뻗어 구걸한다. 누군가 그에게 동전을 건네고, 이 장면은 무성으로 제작되어 작가의 취약한 상태를 더욱 강렬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이 상호작용을 어디에나 있는 궁핍의 증거로 읽는다. 김수자는 결핍을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그리고 우리도—욕망들의 무아적 합성물, 완전한 빈곤의 구현으로 환원한다.
그리하여 김수자는 행위의 언어로 우리의 직관적 앎을 대상화한다. 이 언어에는 그 의도의 벌거벗은 본질만이 남겨져 있다. 그의 작품에는 물론 일부러 낮은 자세를 취함으로써 성취되는 페미니스트적 함의가 있다. 1999년 일본에서 <바늘 여인—기타큐슈(A Needle Woman—Kitakysuhu)>라는 제목으로 선보인 탁월한 퍼포먼스에서 김수자는 석회암 산의 정상에 드러누워 있고, 몸의 곡선은 바위의 솟음을 반향한다. 이 비디오는 예술가의 방법론을 확인해준다. 영상에서 김수자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들과 나누는 상호작용은 그것들을 하나의 통일된 의지로 감싼다. 어머니 대지에 대한 암시가 도입되고, 여기에는 자연과의 무한한 동일시의 감각이 있다. 아울러, 일부 다른 퍼포먼스에는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 <구걸하는 여인> 또는 김수자가 분주한 거리의 보도에 누워 있는 <집 없는 여인—델리(A Homeless Woman—Delhi)>(2000)가 그러한 예다. 사회 변화를 옹호하는 직접적인 메시지의 부재는 이 두 작품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들 작품은 고통을 우리의 본질적 조건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실로, 김수자가 제시하는 전제의 간접성은 그의 표현을 오히려 더 강력한 것으로 만든다. 그의 표현이 그 보편성에 비추어 볼 때 불가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근의 설치 작품 <거울여인(A Mirror Woman)>(2002)에서 김수자는 뉴욕시 피터 블럼 갤러리(Peter Blum Gallery) 가득히 헌 이불보를 매달았다. 아울러 양 벽면에는 거울을 부착해 방문객이 색색의 천으로 이루어진 미로 속을 걷는 동안 그들의 모습이 비치게 했다. 음향적 요소 역시 사용되었다—티베트 수도승의 암송 소리가 전시회장에 흘렀다. 이 작품의 관람 경험은 전반적으로 불편하리만치 내세적이었다. 어쩌면,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김수자의 개입은 실제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김수자는 <묘비명(Epitaph)>(2002)에서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의 공동묘지 한가운데에서 이불보를 펄럭인다. 그 순간 삶은 그것과 명백한 대립을 이루는 죽음과 합쳐진다. 그렇게 이 작품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해석이 실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언뜻 이분법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한 관념의 두 측면일 때가 있다. 김수자가 예술가로서 발휘하는 강력한 힘은 열정과 고요, 능동과 수동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는 예술이 그릇된 이원성을 동등화하는 위대한 힘임을 우리가 이해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정신은 거의 모든 것이 담길 수 있는 장소다. 김수자는 자신의 넉넉한 비전 안에서 미지의 것에 관한 진실들—우리의 삶 위에, 그리고 우리의 삶 너머에 있는 것—을 반복해 말한다. 김수자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가져와 거기에 공적인 우아함을 입힌다. 김수자가 자신의 예술 안에서 커질수록 우리 역시 커지고, 그리하여 그의 넉넉한 상상력은 우리를 그 안에 그야말로 완전하게 포괄한다.
— 『아트 아시아 퍼시픽(Art Asia Pacific)』, 2003년 가을호.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홍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