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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게이치 (미술평론가)
2000
어두운 색의 검소하고 수도승 같은 옷을 입고, 길게 늘어진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한 여성이 화면 중앙에 서 있다. 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그는 바로 작가 김수자이다. 그만이 홀로 무채색이고, 그만이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은 거기에, 이를테면 도쿄의 붐비는 시부야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의 앞뒤를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행인들의 다채로운 흐름이, 움직임 없는 그의 형상을 집어삼키면 그는 이따금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것은 근거 없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그는 어디로 간 걸까?—돌연, 마치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길을 내준 듯, 그 누구도 착각할 수 없는 그의 뒷모습이 다시금 형체를 드러낸다. 그녀의 존재는 군중 사이를 가르며 하나의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마치 그녀만을 비추는 조명이 켜진 듯하다. 공간 속 찰나의 공허함, 그러나 영원한 공간. 그녀가 사라졌을 때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어느새 한 줄기 고요함이 관람자에게 스며든다.
하지만 군중 속에 그저 서 있을 뿐인 그의 이미지에 우리는 어째서 그토록 사로잡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의 뒷모습에서 뿜어져나오는 순전한 의지의 힘, 그 결연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퍼포먼스에서 그의 존재 전체가 거기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거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 사이를,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관람자인 우리는 그 이행의 순간에 우리 존재의 근본적 불확실성을 투영한다. 그녀가 인파의 물결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질 때, 우리는 존재의 덧없음을 느끼며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녀의 형상이 다시 떠올라 고요히 서 있는 순간, 우리는 생명력의 변함없는 흐름 속에서 조용한 안도감을 얻는다.
시부야 영상에서 행인들은 일반적으로 빠른 걸음으로 걷고, 그 누구도 멈춰서서 작가 쪽을 보지 않는다. 각자의 볼일에 몰두한 채, 일이든 재미든 어떤 목표를 향해 바삐 서둘러 간다. 반면 상하이에서는 사람들이 비교적 느린 걸음으로, 제각기 불규칙한 경로를 따라 어슬렁대는 듯 보인다. 대부분이 그를 어깨 너머로 힐끗 돌아보고, 심지어는 가던 길을 멈추고 빤히 쳐다보기도 한다. 델리의 번잡한 뒷거리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호기심과 똑같이 거리낌 없는 태도를 목격한다.
그렇지만 도시별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건들의 “장소”는 부차적인 문제다. 심지어 가장 무질서한 도시의 브라운 운동 속에서도, 심지어 보행자들의 무의식적인 산만함이 기묘한 규칙성을 띠는 시부야에서도, 그가 하는 일은 그저 거기에 서 있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재차 휩쓸려 잠기고 재차 사람들의 물줄기 위로 떠오르면서, 그는 거리의 직물에, 사람들의 직물에 찬찬히 수를 놓는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한데 꿰매고 이어 붙이는 “바늘 여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한다.
그의 숨은 형체가 다시 영상에 나타나는 순간, 관람자는 깨어남을 경험한다. 이는 그가 자신의 현존을 확립하는 순간, 그리하여 관람자의 내면적 존재를 채우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자신을 비워내자 세상이 투명하게 열린다. 당신은 느닷없이 당신 자신을 보지 않겠는가? 그것은 가히 에로틱하다 할 만한 존재와의 마주침, 하이데거의 탈자(Ekstase), 존재론적 현시(epiphany)다.
이는 도시에서의 영상보다 자연을 배경으로 찍은 두 영상에서 더욱 확연하다. 한 영상에서 김수자는 거대한 바위 위에 한 팔을 뻗은 채 누워 있다. 물론 움직임은 없다. 마치 완전한 열반의 상태(parinirvana), 비스듬히 누운 붓다의 이미지를 보는 듯하다. 재미있게도 우리는 이를 뒤에서 보고 있지만 말이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마치 관능적인 환상들을 명상하는 듯 그 거대한 바위 위에 누워 있고, 배경에서는 구름들이 느릿하게 지나가며 빛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바위는 움직이지 않지만 시간은 분명히 지나간다. 작가가 인도의 야무나 강을 바라보며 서 있는 <빨래하는 여인>에서는 처음에 거의 정체된 듯 보였던 물은 떠내려가는 쓰레기들이 나타나면서 실은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흐르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쓰레기가 떠 있는 이 강이 그를 지나 흐르는 동안, 강은 마치 그를 관통해 흘러가는 것처럼, 그리하여 그가 강물에 씻기고 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작품에서 작가는 자연의 시간과 동화함으로써 자신만의 내면적 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관람자의 시간 또한 작가가 이해하는 우주적 시간과 합일한다. 김수자의 비디오 작업들은 단순히 도시와 시골 같은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한 시청각 기록도, 그 자체로 완결된 영상 작품도 아니다. 이 작업들은 시각적 이미지와 관람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신신체적(psychosomatic)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모니터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작품들은 특별히 조성된 공간이나 환경에서 투사되어야 한다. 관람자와의 이러한 정신신체적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고, 뒷모습으로 나타나는 작가의 형체와 그의 주변을 흘러가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비디오를 보는 행위가 곧 그의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애초에 이 비디오가 촬영될 때 작가는 홀로 퍼포먼스를 펼쳤지만, 설치 미술의 일환으로서 이 비디오가 투사될 때, 그것은 또 다른 관람자-참여 퍼포먼스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관람자는 그 자신만의 의미를 창출하게 되기 때문이다.
화면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각적 이미지도 의미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조용한, 거의 정적인 영상들이 불확실하면서도 충만한 다양한 감정을 일깨울 때, 보는 이와 보여지는 이는 어느 독특한 현실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스크린에 다시 투영된 이미지들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관람자인 우리가 이들 작품에 도대체 어떻게 쌍방향으로 참여하는 것일까? 우리는 뒷모습으로-보이는-여성의 깨어남에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작가가 사용하는 방법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고안된 것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라는 데 그 비결이 있다. 무엇보다, 이 비디오 테이프들은 단 하나도 편집되지 않았다. 7분 남짓한 길이의 영상들은 모두 실제 시간의 조각들이다. 따라서 이 시간에 자기 자신을 추가하는 행위는 촬영된-그대로의-퍼포먼스에 참여하는 일이 된다. 게다가, 이미지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고정된 프레임으로만 촬영했기 때문에 이 영상들에는 비현실성이 개입할 여지가 조금도 없다.
더욱이, 모든 영상에서 김수자는 주로 상반신만 보인다.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만약에 작가의 전신이 화면에 잡혔다면 관람자는 이 영상을 외부자로서 객관성을 가지고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하반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관람자는 스스로를 작가의 바로 뒤에 위치시킨 채 신체적 동일시 안에서 이 장면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럴 때 이 이미지들은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서 온몸으로 체험한 현실이 된다. 따라서 작가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크게 투사되어서는 안 된다. 대략 관람자의 실물과 가까운 크기가 되게끔 투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는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1997년 작품 <바느질하여 걷기>는 현재 전시되고 있는 작품들의 실험적 전신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작업에서는 작가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고정된 카메라가 단지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분주한 거리를 기록할 뿐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점이 눈높이로 설정되어 있어 우리는 마치 작가의 바로 옆에 서서 지켜보는 듯한 기묘한 현장감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경험하는 현실을 관람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위성의 부재 덕분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이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거리 풍경은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 자체의 이미지들이 된다. 이 작업에서 우리는 나중에 발표된 <바늘 여인> 연작의 기원을 발견한다.
김수자의 이전 작업들은 "한국의 전통과 근대화", "여성의 역할과 페미니즘", 심지어 "노마디즘" 등에 대한 관심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분류되어 왔다. 김수자가 한국의 전통 이불 천을 오랫동안 활용한 것은 그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김수자는 초기 작업에서 이러한 천 조각들을 콜라주한 패치워크를 벽에 걸어 전시했다. 또 나중에는 이 다채로운 색깔의 이불보 겸 보자기 천으로 헌 옷을 꽁꽁 싸매어 만든 커다란 보따리들을 설치물로 전시하거나 트럭에 쌓고 11일 간 한국을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또한 그러한 천을 빨래줄에 걸기도 하고 미술관 카페 테이블에 식탁보로 펼쳐놓기도 했다.
물론, 이불보는 의미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불보로 신생아를 감싸고 임종한 시신을 덮는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 내내 자고 쉬고 사랑하는 공간에서 이불보를 본다. 더구나 작가는 언제나 누군가가 실제로 사용한 이불보만을 가져다 쓰기 때문에 그 이불보들은 그 자체로 이미 어떤 서사를 품고 있는 오브제이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어머니들로부터 바느질을 배우고, 집을 떠나며 집안의 물건을 쌀 때, 그는 모든 것을, 그러니까 온 세상을 천에 담아 사람들을 꿰매어 잇는 "바늘 여인"이 된다. 이는 아마도 어째서 김수자의 작업들이 "탈근대주의"와 "탈식민주의" 담론에서 의도치 않게 그토록 화제가 된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김수자의 목적은 더 보편적인 것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작품이 선의에서 비롯되었지만 실상 사소한 독해에 머물고 마는 해석을 만나는 부담을 져야 했다. 어떤 면에서 김수자가 천과 맺어온 관계는, 비록 장르는 완전히 다르지만, 트린 T. 민하(Trinh T. Minh-ha)의 영화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Surname Viet Given Name Nam)>을 생각나게 한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작품 자체를 향유하기보다는 그들의 작품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담론을 쏟아내는 데 더 열성적이었다.
천은 텍스트이며, 작가 자신도 천의 사용에 대해 적지 않은 발언을 해왔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붙은 그 수많은 꼬리표들은 반드시 틀렸다고만은 볼 수 없다. 하지만 김수자가 의미의 그 깊고 복합적인 층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지금도 여전히 천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천에서 출발했음을 스스로 인식하는 가운데에도, 그의 사유는 더욱 보편적인 차원에서 초월성을 추구하는 데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천에서 완전히 벗어난 김수자의 비디오 작업은 그가 그 모든 꼬리표를 떨쳐버릴 수 있는 수단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서 있을 뿐인 작가의 퍼포먼스를 군더더기 없이 간명한 미니멀리즘적 행위로, 존재론적 미니멀리즘으로 볼 수 있다.
비디오 속의 김수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보인다.
— 2000년 도쿄 ICC 전시 도록에서. 앨프리드 번바움(Alfred Birnbaum)이 일본어에서 영어로 번역됨.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홍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