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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Woman's Serenity in the Thick of Things

켄 존슨 (미술비평가)

2001

  • 카멜레온 같은 순응성을 가진 예술 형태인 비디오는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에서 벽 한 면을 통째로 뒤덮는 프로젝터 투사 화면까지 당혹스러우리만치 다양한 형식으로 조정될 수 있다. 현실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부터 초현실주의적 몽타주와 할리우드식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서사적 접근법을 그대로 모방할 수 있으며, 디지털 추상화의 색상과 패턴을 무리없이 흡수해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P.S. 1 현대미술관(P.S. 1 Contemporary Art Center)에서 열린 <바늘 여인(A Needle Woman)> 전시에서 김수자의 작품들이 입증하듯이, 갤러리에서 비디오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벽에 직사각형 그림—오래된 방식의 사진이나 회화 같지만 일부는 움직이는 그림—을 만드는 것이다.

  • 1957년 한국에서 태어나 1998년 뉴욕으로 이주한 김수자는 그의 조용하면서도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기록하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한다. 그의 영상은 군더더기 없이 직접적이지만 독특한 우아함을 발산한다. 각 작품에서 작가는 카메라를 등지고 미동조차 없이 서거나, 앉거나, 누워 있고, 그동안 작가를 둘러싼 세상은 바쁘게 달려간다. 뛰어난 작품은 놀라운 정서적 충격을 안긴다.

  • 이번 전시의 가장 중요한 작품 <바늘 여인>에서 여덟 대의 프로젝터는 뉴욕, 카이로, 도쿄, 런던, 멕시코시티, 뉴델리, 상하이, 라고스 등 여러 도시의 분주한 보도에 서 있는 김수자를 보여준다. 보행자들이 바삐 지나가는 동안 검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수수께끼 같은 이 수수한 인물은 마치 조각상처럼, 인류의 강물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돌처럼 가만히 서 있다.

  • 대부분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일부는 의아한 얼굴로 힐끔 쳐다보고, 일부는 멈추어 서서 쳐다보거나 사진을 찍는다. 라고스에서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끌어내려고 궁리하는 듯 그를 유심히 관찰한다.
    군중의 다채로움과 전반적인 분주함 그리고 중심 인물의 고요함 사이의 긴장감은 이 작품을 회화적으로나 실시간 서사로서 매혹적으로 만든다.

  • 아울러, 이 고요한 여인은 신비로우며 기묘하리만치 애수 어린 존재감을 띤다. 그는 세계화된 근대성의 잃어버린 영혼일지도 모른다.

  • 다른 갤러리의 두 개의 대형 투사 화면에 비춰진 배경은 도시가 아닌 시골이다. 한 화면에서는 우리는 약간 높은 위치에서 작가를 내려다본다. 그는 우리를 등진 채 서서히 흐르는 잔잔한 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공간적으로 김수자 작품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영상이다. 반짝이는 강의 표면이 처음에는 멀리 있는 듯 보이다가 실제로는 작가의 발치에 거의 닿아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거리감의 붕괴에 숨이 멎을 듯하다.

  • 다른 영상에서 작가는 산 정상의 바위에 미동조차 없이 모로 누워 있고 하늘에는 구름이 서서히 흘러 간다. 두 영상 모두 보는 이를 진정시키는 명상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 우주적 공간을 마주한 고독한 작가의 이미지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er David Friedrich)가 그린 외로운 방랑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상은 여기에 시간이라는 차원을 더한다. 영상 속 주인공이 자연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숙고하듯이, 갤러리의 관람자는 영상 속에서 흐르는 강물과 서서히 지나가는 구름으로 표상되는 시간의 흐름에 더해, 영상 자체의 실시간 흐름 속에서 표상되는 시간의 흐름 또한 숙고한다. 그리고 다시, 군중-속의-작가를 보여주는 다른 영상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중심 인물은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결말 앞에 서서도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요한 평정을 품은 채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킨다.

  • 나이지리아에서의 퍼포먼스를 담은 작품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에서는 길이 어긋난다. P.S. 1 현대미술관에서 한 비디오 모니터는 작가가 길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치 돈을 구걸하듯 한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손에 돈을 놓아두고, 한 남자는 손에서 돈을 훔친다. 걸인의 이미지는 울림이 없지 않고 카메라가 포착한 사건들이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만의 요소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군중에 대해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행인들에게 도덕적 심문의 빛을 드리우면서 그들이 가난한 이들과 맺는 관계에 대한 은근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작가 자신의 행동에는 윤리적으로 여지를 남기는 이중성의 요소가 있다.

  • 누군가는 김수자가 여기에서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세계의 운동과 긴장 관계에 있는 부동의 이름 없는 여인이라는 이 아이디어를 넘어서는 모험을 할 수 있을까? 또는 그래야만 할까? 새로운 퍼포먼스 아이디어가 새로운 형식적 가능성을 이끌 수 있을까? 부동의 퍼포먼스가 지나치게 반복될 경우 어쩌면 얄팍한 장치로 보이기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것은 의례적인 반복을 통해 한층 더 확장되고 심화되어 강력한 정신적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2001년 9월 7일 금요일,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홍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