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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無心)의 영속

로버트 C. 모건

2002

  • 김수자의 작업을 거의 10년에 걸쳐 지켜보며, 나는 그가 예술을 통해 독창적인 세계관을 세워가는 데 집중하고 헌신해 왔음을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의 비전은 물론 그 자신으로 나오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정신과 몸의 결합(conjugation) 가운데 드러나는 ‘주관성’의 산물이다. 이 주관성이 정제된 형태로 발현되면서, 작가는 눈앞의 환경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종의 깨어있음의 상태를 의식적으로 따른다. 도시의 번잡한 거리이든, 광활한 자연 한복판이든, 카메라 앞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 그는 늘 고요하고 안정된 아우라를 유지한다. 그의 태도는 세심한 관찰력과 어우러진 의도적 긴장감을 드러낸다. 예술을 통해 세계에 대한 감각을 확장하는 것, 나아가 자기 자신을 더욱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관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성찰(reflection)의 과정을 거쳐, 눈앞의 대상을 현상학적으로 환원하는 단계로 이어진다. 본질적으로 이는 의도성(intentionality)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화려한 색채의 천을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루면서, 김수자는 최근 자신의 사유를 펼칠 수 있는 토대를 찾아냈다. 표면 위에 혼돈이 개입하더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질서를 찾는 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연역적 오브제(deductive objects)’라 불리는 천 설치 작업과 보따리(천으로 감싼 꾸러미)의 의미를 확장시켜,〈바늘여인(A Needle Woman)〉이라 명명된 일련의 탁월한 비디오 퍼포먼스로 이어갔다. 김수자는 도쿄, 상하이, 델리, 뉴욕, 멕시코시티, 카이로와 같은 특정한 장소와 문화, 곧 타인의 세계와 연결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초 문화적 (transcultural) 리얼리티를 찾기 위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다.

  • 예술가로서 김수자는 과거 근대주의에서 차용한 가상의 보편성을 되풀이하는 데 관심이 없다. 이는 그의 입장, 그의 예술적 윤리와는 명백히 반대된다. 그의 지속적인 작업인 <바늘여인(A Needle Woman)>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구조적 비가시성을 탐구한다. 개인 차원, 이는 동시에 영적인 차원으로 깊이 들어갈 때, 예술은 비로소 초 문화적 수준에서 의미 있는 소통, 곧 인간적 교감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자기 안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 서구적 개념의 나르시시즘을 넘어서, 우리는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그 자아는 은폐된 듯하지만, 역설적으로 초 문화적이고 초 세계적인 맥락 속에서 오히려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낸다.

  • 종종 그렇듯, 특히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사례를 떠올리게 된다. 예술에서 가장 급진적인 변용은 오히려 전통적 사상과 혼동되곤 한다. 다시 말해, 옛것과 최첨단 (l’ancien et l’ultramoderne)은 특정한 순간에 서로 뒤엉켜 인식되는 것이다. 변화하는 것은 사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체험되는 맥락이다. 예술 속 특정한 사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화의 환경 속에서 진화하면서도 가속화되는 힘을 유지하기도 한다. 김수자의 보따리 작업은 바로 그러한 잠재력을 가진다. 그것은 이동의 행위, 개인의 역사,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사적인 시각,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유목적 공간을 지칭한다. 이 이동의 과정에서, 현재의 전환과 맞물리며 특정한 긴장과 에너지가 생성된다. 철학자 후설(Husserl)이 ‘내적 시간 의식(internal time-consciousness)’이라 불렀던 이 현재적 전환 속에서 그 순간을 담고 있는 공간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선불교에서 이는 삼매(samadhi)의 자리, 곧 하나의 생각을 관조하며 일체감을 체험하는 자리로, 명상 수행에서 자주 실천된다. 삼매는 온전함의 감각을 느끼고, 생각을 집중시켜 하나의 생각으로 모아 그 생각의 공간 속으로 완전한 의식을 지닌 채 진입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브 클라인은 이를 김수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비록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두 작업 사이의 유사성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다.

  • 무엇보다도 〈바늘여인(A Needle Woman)〉은 정관사 ‘The’가 아닌 부정관사‘A’를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익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어떤 차원에서는 삼매의 공간과도 관련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차원일 뿐 작품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입장과는 달리, 모든 예술이 철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삼매의 정신은 〈바늘 여인〉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작품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병렬적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체계, 다시 말해 작가가 내적으로 느끼는 개인적 동기일 뿐이다. 본질적으로 선불교는 김수자의 작업, 특히 〈바늘여인〉에서 유사성을 제공할 수 있지만, 곧바로 그의 예술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김수자는 자신의 작품에 이론적 수사학을 덧씌우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특히 서구에서 유입된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이 그의 예술이 자체적 조건으로 말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다른 평행적 사유 체계를 제안할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김수자는 자신의 예술을 빈틈없는 논리 구조로 만드는데 관심이 없다. 그의 예술이 젠더의 사례가 되는 것도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의 예술은 혼돈스러운 세계 속에서 인간 존재가 지니는 의미를 묻는다. 그것은 정신과 신체의 자각을 새롭게 일깨움으로써, 가상적 과잉과 자아의 상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는 정신과 신체의 자각을 새롭게 일깨움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따라서 서구의 이론적 선입견을 따르기 보다, 김수자는 자신의 역사와 기억, 그리고 감각적 지성(intelligence of feeling)에 근거해 자신만의 사회적·정치적 참여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 최근의 미술에서는 서구적 수사학이 지나치게 전면에 부각되어 왔다. 그것은 경험의 현상학보다는, 이른바 ‘탐구’나 시각 인류학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김수자의 입장은 이와는 다르다. 그의 위치는 오히려 유목적 예술가, 곧 난민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으로서, 세계화된 현실의 맥락 속에 자리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갖가지 과잉, 과잉 정보로 인해 이미 낡아버린 구조, 그리고 일상적 노동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느끼며 역사 의식을 상실한 대중과 마주한다. 이로써 그의 예술은 오늘날 만연한 냉소주의, 패션계에서 보편화된 극단적 무관심, 그리고 시간의 지속도 기억도 미래에 대한 인과도 없이 흘러가는 쇠퇴한 현재와 뚜렷이 대조된다.

  • 시인이자 비평가인 T.S. 엘리엇은 “완벽한 예술가"란 자신의 예술에 끊임없이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헌신은 피할 수 없는 일관성을 지녔기에, 결국 예술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전해지는 바가 핵심이 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김수자와 관련하여 엘리엇의 패러다임이 흥미롭다. 김수자가 작업에서 강조하는 것은 언제나 ‘무(無)’라 할 수 있다. 존재의 제시 대신 부재(absence)가 주어진다. 그리고 이 부재는 언제나 더 심오하고, 더 미묘하며, 어떤 이유에서건 더 오래 지속된다. 그의 작업에서 부재라는 개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 적용된다. 그것은 1992년 그가 보따리를 일종의 ‘레디메이드’적 제스처로 재발견했을 때 분명히 확인되었고, 가장 최근에는 비디오 프로젝션 작업에서도 그렇다.

  • 부재의 감각은 그의 초기 작업에서도 확인된다. 1985년작 <당신의 초상(Portrait of Yourself)>에서 작가는 천 조각을 꿰매 만든 다채로운 색상의 헌 옷들을 보여줌으로서 관객의 시선을 기발하게 역전시켰다. 이 작품은 그가 그 헌 옷의 공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재현된 형태 안에서 그의 신체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관객은 작품의 내밀함에 공감하게 된다. 천이 꿰매지고, 채색되고, 구성되는 과정에서 기억이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부재는 기억의 조건, 즉 재현되는 것의 '흔적'으로 존재한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만드는 사람, 즉 만들어지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것을 만드는 장인 정신으로 귀결된다. 이는 단순한 사회적 행위라기보다 친밀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은 김수자가 1983년 어느 오후, 어머니와 함께 침대보를 꿰매던 경험을 회상하며 했던 말과도 맞닿아 있다. “저는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제 생각과 감정, 그리고 그 순간의 행동이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삶의 고요한 열정과 더불어 묻혀 있던 기억과 고통을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 서양미술사학자들은 흔히 어떤 예술가도, 어떤 미술운동도 보이드(void) 속에서 시작되지 않고 언제나 인과적 연결, 관계, 동기, 그리고 결과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 진실은 미술사라는 학문적 영역 안에 고립되어 있을 뿐, 예술가의 사고 과정에 반드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예술계’- 세계화의 초 문화적 위성- 에서 벌어지는 일들 또한 제한된 의미만을 가진다. 수많은 작품과 사건이 시장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학문적 담론 속에 파묻혀 잊혀진다. 그것은 첨단 기술과 사람들의 삶, 특히 서구 바깥에 살아가는 이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안녕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하다.

  •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예술가는 깊은 좌절감으로 가득 찬, 고도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휴대전화와 인터넷 데이터에 의존하며, 도심과 공항 터미널의 교통량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아졌다. 작업실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작업물이 쌓여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자신의 작업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이 작품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예술가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배는 종종 텅 빈 공허, 곧 자아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서구적 분열 속을 표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 김수자의 예술은 또 다른 차원의 보이드(void)를 지향한다. 그것은 미술사적인 보이드도 아니며, 오늘날 인간 의식의 분열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보이드(텅 빈 자아)’, 일본의 선(禪) 스승 스즈키 다이세츠(Daisetz Suzuki)가 말한 ‘무심(無心, no mind)’의 개념에 가깝다. 김수자가 촉각적 이미지와 가상적 이미지 사이에서 제시하는 물질적, 시각적, 개념적 요소를 살펴보면, 그의 비전을 감지할 수 있다. 보따리와 비디오 프로젝션이 교차하는 틈새 어딘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심오한 일관성이 존재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진정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피상적 자아를 구성해 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인지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될 때이다. 그러나 비어 있음을 피하려는 유혹도 항상 존재한다. 상하이, 델리, 이스탄불의 군중과 마주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김수자의 퍼포먼스가 선명하게 드러내는 보이드(void)의 감각이 혼돈의 과잉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얼마나 위협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김수자가 만들어낸 보이드(void), 곧 그 주변의 혼돈을 소거한 공간만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무한한 기쁨을 받게 된다.

  • — 베른 쿤스트할레(Kunsthalle Bern) 《김수자, 바늘여인》전시 도록, 2001년

  • 로버트 C. 모건(Robert C. Morgan)은 작가이자 비평가, 큐레이터, 시인이며 예술가이다. 그는 조각 전공으로 MFA 학위를, 그리고 현대미술사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약 1,500편의 에세이와 평론을 집필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Art into Ideas』(Cambridge, 1996), 『Between Modernism and Conceptual Art』(McFarland, 1997), 『The End of the Art World』(Allworth, 1998), 『Gary Hill』(Johns Hopkins, 2000), 『Bruce Nauman』(Johns Hopkins, 2000) 등이 있다. 그가 기획한 주요 전시로는 《Komar and Melamid: A Retrospective》(Ulrich미술관, 1979), 《Women on the Verge》(Elga Wimmer갤러리, 1995), 《Clear Intentions》(The Rotunda, 2003) 등이 있다. 또한 그의 퍼포먼스 작업은 1976년 휘트니 미술관을 비롯해 수많은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소개되었으며, 1990년을 끝으로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