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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와 은유를 엮는 이

룰 아르케스테인

2024

  • 김수자는 최근 발표한 일부 작품에서 자신의 작업이 회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은근히 드러낸다.

  • “어렸을 때 나는 세잔풍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 다음 작업을 위한 올바른 구조와 방법론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십자형 기호에 관해 석사 논문을 썼는데, 고대부터 그 시기까지 십자형 기호가 시각예술에 나타난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십자형 기호는 인간 정신의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에 아주 근원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깨달은 후에 나는 바느질을 하나의 예술적 기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십자 형태로 짜인 캔버스의 구조를 발견했고, 이불보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1] 이후 등장한 작품들에서 그는 ‘캔버스의 한계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 보따리와 이불보는 작가의 일상에서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는 침구를 준비하는 한국 전통 방식을 따라 특정한 방법으로 이불 커버를 접고 펼치고 하면서 이부자리를 보곤 했다. 바느질은 이러한 가정 의례에서 늘상 반복되는 요소였다.

  • 수십 년이 지나 김수자는 ‘메타-페인팅’(Meta-Painting, 2020-) 연작에서 회화와의 관계를 다시 고찰한다. 하지만 이 탐색은 진정한 네오 다다(Neo-Dada)식으로, 붓에는 손 한번 대지 않고 이루어진다. 설치 작품 〈메타-페인팅〉은 스웨덴 바노스(Wanås)에서 열렸던 개인전 《씨 뿌려 그리기》(Sowing into Painting, 2020)와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속편이다. 작가는 이 전시를 위해 캔버스와 아마인유의 원재료인 아마를 직접 길렀다. 스트레처와 좁다란 나무 조각이 십자형으로 교차하는 나무틀 위로 바탕칠 없이 ‘비어 있는’ 캔버스들과 짝을 이루는 보따리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김수자가 심었던 바로 그 스웨덴 아마로 짠, 캔버스에 쓰인 것과 동일한 리넨으로 만든 것이다.

  • 베를린에서 최근 열린 개인전 《호흡》에서 작가는 갤러리 창에 붙인 회절 격자 필름을 통해 전시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이 ‘텅 빈’ 캔버스들을 비추게 했다. 1센티미터당 5천개의 미세한 스크래치가 가로 세로로 나 있는 이 필름의 ‘직조’ 구조는 무수히 많은 프리즘처럼 작용하여,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을 무지개색으로 회절시켰다. 레이던에서 작가는 관람객이 작품 사이를 거닐면서 바탕칠을 하지 않은 그 캔버스들에 자신만의 패턴을 구성해 볼 수 있도록 했다.

  • 대단히 실존주의적인 김수자의 작업은 다름 아닌 삶과 예술의 총체를 주제로 삼는다. 그의 작품과 전시의 제목들은 예술과 삶의 이같은 상호연결성을 반영하며, 그의 예술적 구상의 전개 과정과 작업의 핵심 과정을 모두 간결하게 드러내 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의 모든 제목을 한데 모아 보여주는 회고전을 언젠가 만들어 보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김수자는 작업의 중심이 되는 싸매기, 꿰매기, 짜기, 숨쉬기처럼 일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행위와 개념을 인간의 조건, 이주, 초문화주의, 영성에 대한 사유로 변환한다. 그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맥락에 잠재된 감각성과 은유를 탁월한 방식으로 분명하게 드러낸다.

  • 1990년대 이후 더욱 세계화를 지향해 온 미술계에서 김수자의 작업은 중요한 위치를 점해 왔다. 동양 철학과 한국의 문화적 전통에서 차용한 개념들을 통해, 김수자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유와 예술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었는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이다.

[Note]
[1] 이 인용문은 2024년 안트베르펜에서 KMSKA와 M HKA가 공동으로 펴낸 전시 도록 『예프 페르헤이언: 무한에의 창(Jef Verheyen: Window on the Infinite)』(안트베르펜, 2024)을 위해 필자가 9월 23일 파리에서 진행한 김수자와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이며, 본문 일부는 그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밝힌다.

  • — 『김수자 – 실의궤적』, 2024년 도록 수록 글,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문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