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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을 삶으로

셀린 웬트

2013

  • 예술가는 하나의 고립된 체계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해야 한다. (…) 이론적으로 예술가의 개입에는 제한이 없다. – 한스 하케(Hans Haacke)

  •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일, 그것이 김수자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수행해 온 일이다. 1980년대 초반부터 그는 예술과 삶의 직접적 관계와 그 상호작용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말 그대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바늘의 힘에 기대어 왔다. 이것은 김수자의 작업 전체를 꿰는 금빛 실이다. 작가는 서울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파리에서 단기간 판화 연수를 받았으나, 붓과 캔버스 대신 바늘과 천이 지닌 독특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침대보를 꿰매던 경험을 통해, 그는 천이 강력한 예술적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바늘로 천의 표면을 꿰매는 행위를 통해 그는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었고, 이 천이라는 비유 안에 철학, 예술적 과정, 역사가 모두 수렴되는 듯했다.

  • 김수자가 처음 바느질을 시작했을 때, 그는 회화의 한정된 표면 너머로 가기 위해 그 반대편에 도달하고자 했다. 작가는 바늘을 통해 천의 막 속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나아간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 이어서 그는 실로 천을 감싸는 행위로서 바느질이 가지는 의의를 생각했다. 김수자는 반복되는 의식과 같이 오가는 바느질의 움직임과 그것에 내재한 창조적이고 (보수한다는 의미에서의) 치유적인 목적에 흥미를 느꼈다. 처음부터 김수자는 바느질로 꿰매어지는 대상에서 자신을 보았으며, 이는 곧 자아의 확장을 의미했다. 바늘과 실을 쥔 손이 정교하고 단조로운 수공의 동작을 반복하는 동안, 생각은 멀리 자유롭게 떠돌게 된다. 다시 말해, 김수자는 삶 속에 의미를 꿰매어 넣는 것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 처음부터 김수자의 작업에 있어 전통 한국 천의 문화적 의미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의 작업 전반에 사용된 천은 수많은 개인적 이야기의 강력한 흔적으로, 이 이야기가 한 데 취합되었을 때 그것은 인류 전체의 궁극적인 상호연결성을 제시한다. 천의 형식적 구조, 그리고 그 표면을 가로지르는 바늘과 실의 의미에 대한 김수자의 관심은 천과 나누는 무언의 대화로 나타나며, 이 대화는 공예와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관한 쟁점을 탐구하는 일과도 관계가 있다. 김수자의 초기 작업은 대부분 콜라주와 유사한 기법을 이용한 작품이 많아 개념적이기보다는 형식적인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섬세하게 꿰매어진 초기 작업은 이후에 펼쳐질 중요한 요소를 암시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빨강·노랑·초록색 천 조각을 거칠게 꿰매 장식된 베이지색 티셔츠는 색채, 형태, 구성을 탐구한 작품이며, 여기 보이는 느슨한 실들과 미완성처럼 보이는 거친 마감에는 숨은 의미가 얽혀 있다. 고통, 상실, 취약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텍스타일 작업에 종종 패치워크, 퀼팅, 자수, 박음질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바느질(sewing)이라는 행위 자체는 목적이 아닌 표현의 방법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느질에 대한 작가의 접근은 점점 더 개념적으로 변화했으며, 이후 작업에서 실과 천이라는 물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이전의 작업에서 시각적으로 화려한 텍스타일을 사용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은유로서의 바느질, 특히 바늘에 부여된 상징성은 정체성과 실존이라는 보편적 문제들과 맞닿아 있으며, 이는 김수자의 작업 전반을 하나로 깔끔하게 엮어내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연역적 오브제> 연작은 일상 사물을 통해 삶의 이야기를 소통한다는 면에서 이후 작업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연작에서 김수자는 연, 얼레, 삽, 포크, 창틀 등 문화적으로 특수한 일상 사물을 한국의 이불보와 옷감 조각으로 감싸며, 형식적·개념적 경계를 확장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처럼 ‘이미 만들어진 사물(already-mades)’은 가정성과 여성의 노동과 깊이 연결된 것으로 풍부한 사회적, 문화적, 미학적 함의를 가진다. 김수자는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사물, 특히 이불보를 다루는 자신의 작업에서 그것이 ‘사전에 만들어진(pre-made)’ 것이 아니라 ‘사전에 사용된(pre-used)’ 것이라는 사실에 가장 큰 관심을 둔다고 강조한다. 또한 작업에 사용된 이불보의 역사는 그것을 바느질하여 만든 익명의 사람보다도 그것을 소유해 사용했던 사람과 연결되어있다는 점 또한 강조한다. 그가 사용하는 사물과 천이 지닌 영혼, 아우라, 기억은 영적·개념적 차원 모두에서 궁극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 김수자는 이후 <연역적 오브제> 연작의 맥락을 확장하여, 어떤 사물이 그 주변 공간과 맺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1993년, 그는 뉴욕의 PS1에서 중요한 전시에 참여했는데, 그중 한 설치 작업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의 작업에서 종종 보이는 ‘복합적인 단순함’이 바로 그 작업을 강력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곳곳에 작은 구멍이 나 있는 하얗게 칠해진 거친 벽돌 벽을 상상해보자. 대부분의 예술가와 큐레이터들이 아마도 평평하게 만들거나 가리고 싶어 할 만한 그런 전시장 벽이다. 김수자는 개입으로서의 바느질이라는 개념을 아름답게 소개하는 제스처로 이 벽과 직접적으로 마주해 관계를 형성했다. 벽의 틈새 속, 그리고 작품의 천 조각들 사이사이에는 김수자의 작업이 나아가는 방향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담겨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느질을 삶으로(sewing into life) 여기는 개념이다. 벽면 곳곳에 끼어 있는 다채로운 천 조각은 바느질의 개념을 탐구한 결과다. 벽의 각 구멍은 마치 작은 천 조각이 바늘구멍에 꿰어진 듯한 모습이다. 일견 전체적인 작업의 패턴은 텍스타일 작업의 발전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진정한 본질은 틈새 공간과 인류를 서로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실들이 만들어내는 연결에 있다. 물질보다는 은유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김수자는 실존적 문제에 관한 지속적 탐구의 과정을 드러내는 한편 텍스타일 및 바느질의 실천적 가능성을 수용하는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시험한다.

  • 1990년대 초, 김수자가 보따리 작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예술과 삶을 하나로 엮는 개념적 문제가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작업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갔다. 김수자는 전통 한복천으로 만든 다채로운 색상의 보따리(소지품을 싸서 운반하는 한국의 전통적 방식)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보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천으로도 만들 수 있지만, 김수자는 신혼부부를 위해 제작되었다가 버려진 한국의 혼수 이불을 선택했고, 누군가가 사용했던 옷을 모아 그 안에 싸맸다. 이처럼 그의 <보따리> 작업에는 흥미로운 이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한국의 전통에서 자신의 소유물을 감싸매는 관습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예술 오브제로서 이동 혹은 이주를 암시하며, 개인적 의미를 지녔던 물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 ‘보따리’의 기능을 한다. 순수 형태와 기능 사이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그의 작품은 예술과 삶의 경계 위에 절묘하게 놓여있다. ‘보따리’에 대한 김수자의 관심은 곧 표면에 대한 회화적 탐구에서 조각적 물성으로의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이 과정은 점차 더 추상적인 영역으로 나아가 바느질은 여러 공간과 환경이라는 맥락 속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즉, 김수자는 전통적인 의미의 바늘에서 자신의 사유를 시작했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이 물리적 바늘이 만드는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바느질의 과정을 해체함으로써, 결국 바늘, 실, 천과의 직접적 연결 관계가 거의 감지되지 않는 형태에 다다랐다. 궁극적으로 실제 바느질과 관련하여 남은 것은 바늘의 개념적 흔적, 혹은 자율권과 해방의 수단으로서 바늘이 가지는 은유적 의미뿐이다.

  • 바늘과 실의 유무와 상관없이, 김수자는 바느질이라는 개념과 관계된 이야기와 예술을 통해 삶에 뿌리내린 매혹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예술적 과정으로서의 바느질, 조용한 사유 행위로서의 바느질, 천의 표면과 나누는 대화로서의 바느질, 형식적 탐구로서의 바느질, 명상의 과정으로서의 바느질, 여성의 전통적 성역할과 관련된 바느질, 공예로서의 바느질, 개입으로서의 바느질, 감싸는 행위로서의 바느질, 그리고 연결 행위로서의 바느질까지 이 모든 것은 김수자가 예술에 접근하는 독자적인 방법이라는 복잡한 직조 구조를 구성한다. 삶과 예술에 대한 성찰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끝없는 실처럼 풀려나온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는 이 공간 안에서 하나로 융합된다.

  • 김수자가 보따리를 통해 예술과 삶의 총체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자각하던 즈음, 수지 개블릭(Suzi Gablik) 역시 ‘접속의 미학(connective aesthetics)’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유사한 주제를 탐구하고 있었다. 개블릭이 참여적이고, 공감적이며, 관계적인 참여 양식으로 설명한 것은 바로 김수자의 예술적 접근법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개블릭이 『미술의 매혹(The Reenchantment of Art)』에서 제시한 접속의 미학 이론은 마치 김수자의 예술 실천에 대한 헌사처럼 읽힌다. 예술이 세계 속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면, 사물의 역할을 넘어 우리의 현존과 진정 관계 맺을 수 있다면, 김수자의 접근법은 분명 개블릭이 추구했던 방향성을 띠고 있다. ‘마음 챙김(mindfulness)’, ‘의식(consciousness)’, ‘연민(compassion)’, 그리고 ‘공감(empathy)’은 개블릭의 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이며, 김수자의 작업 또한 이러한 단어들과 관련이 있다. 그의 작업에는 여성적 접근을 포용하는 관계적 비전을 찾고자 했던 개블릭의 탐구가 분명 존재한다. 개블릭은 자신의 글에서 “과거 관점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관계적 감각이 아닌 모든 것이 대립한다는 감각이었다면, 현재 새롭게 떠오르는 세계관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과의 합일로 접어들 것을 요구하여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촉구한다”라고 썼다. 이러한 맥락에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김수자의 예술은 여전히 연민의 시선과 유의미한 관점을 담고 있다.

  • 돌이켜보면, 우리는 김수자의 예술 실천에서 일관된 재료와 접근법을 의식적이고 단호하게 사용해 온 유무형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프로젝트 안에서 이 일관성은 다른 맥락을 지니며 새로운 층위의 의미를 촉발한다. 김수자의 작업이 빚어내는 정교한 패턴은 하나의 바늘에서 비롯된다. 이 바늘은 계속해서 안정적이면서도 유동적인 개념들을 가리키는 동시에 물질적이면서도 비물질적인 것,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인 것,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향하고 있다.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섬유에 관해서 그것이 거미가 짠 것이든, 물레로 감아 만든 것이든 모두 깊은 의미를 지니며, 그 실이 우리 모두를 위해 중요한 기억과 감정적 연결을 엮어준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섬유로 구성된 직물 속에 영구히 각인된 이야기들, 즉 김수자에게 계속해서 예술적이고 영적인 영감을 주는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매혹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 수년간 김수자의 <보따리> 작업은 세계 곳곳의 다양한 맥락 속에서 등장해 왔다. 그것은 마법처럼 그 어떤 전시 공간이나 자연환경에도 유려하게 스며든다. 노련한 세계 여행자처럼, 김수자의 <보따리>는 끊임없이 이동한다. 미술관이나 숲속에서 보따리는 홀로 혹은 군집을 이룬 형태로 놓여 있기도 하고, 정교하게 일렬로 놓이거나 다소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기도 하며, 완전히 정지해 있거나 트럭에 실려 2,727킬로미터를 이동하기도 한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이 형태는 그의 작업에 깊이를 더하고 또 의미를 펼쳐낸다.

  • <보따리>와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는 또 다른 작업으로, 김수자는 천을 풀어내고, 펼치고, 바닥에 깔거나, 조심스럽게 어딘가에 걸어 놓은 반짝이고 생동감 있는 직물 설치 작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강렬한 색채의 텍스타일 작업인 <빨래하는 여인 A Laundry Woman>(2000)은 이러한 작업의 완벽한 예시다. 설치 공간에 들어선 관객은 직물에 완전히 둘러 쌓이게 되며, 패턴과 의미가 만나게 되는 지점인 정교한 색의 그물망 속을 걸어 나아가도록 초대된다.

  • 김수자는 종종 바느질과 걷기를 유사한 행위로 비유하며, 그 유사성을 처음 알아차리게 된 순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94년에 경주의 옥산서원 골짜기 부근에서 작업을 하던 매일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촬영했다. 이 영상을 보면서 바늘의 상징으로 나의 몸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영상을 <바느질하며 걷기 – 경주(Sewing into Walking - Kyungju)>(1994)라는 제목의 비디오 퍼포먼스 작업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나는 내 몸이 바늘의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자연 속에서의 이 걷기의 과정이 상징적인 바느질 행위로써 모든 이불보를 수집하고 모으는 것을 발견했다.” 설치 작업 <빨래하는 여인> 사이를 거닐며 관통한다는 것은 직물이 가지는 본질적인 소통의 힘과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함의를 이해하는 일이다. 작가의 한 걸음마다, 바느질 한 땀마다, 관객은 작품의 형이상학적 차원을 이해하는 데 점점 더 가까워진다. 이때 관객 또한 아름다운 직물 사이사이를 거닐며 그것들이 지닌 이야기를 엮는 일종의 은유적 바늘이 된다. 특히 작가가 장식적인 한국의 이불보를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고통, 상실, 사랑, 욕망과 연결된 삶의 이야기를 담은 누군가의 친밀한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직물들은 문화적, 개인적 역사가 스며든 서사로서, 그것을 마주한 관람자가 그것을 마주하고 풀어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술과 공예의 세계 사이를 조심스레 오가면서 말이다.

  • 김수자의 작업에서 각 프로젝트는 실로 이어지듯 다음 프로젝트와 불가분하게 엮여 있다. 프로젝트마다 개념적 실이 발생하고 다시 꿰매어져 복잡하게 상호 교차적인 현실이 형성된다. 그 완벽한 예로, <빨래하는 여인>과 <거울여인(A Mirror Woman)>(2002)의 유사점과 차이점에서 이러한 연결을 볼 수 있다. 두 작품은 형식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매우 유사해 보이며, 모두 폭넓은 실존적 문제와 관련된다. 그러나 벽 전체를 덮은 거울을 추가한 것만으로 두 작품은 큰 차이를 갖게 된다. 거울은 무한한 공간에 대한 감각을 강화한다. 관람자는 눈앞의 직접적인 현실에서 끝이 없는 공간으로 초점을 옮기게 되며, 이러한 감각은 개인보다는 우주와 관계된 초월적 공간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정교한 직물을 구성하는 실 가닥들이 서로 맞닿지 않더라도 동일한 직물 안에 엮여 있듯, 모든 실 가닥들이 전체적인 효과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이 두 작품은 같은 천에서 잘려 나온 두 개의 조각처럼, 우주 속에서 각 개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메시지는 차고 넘치게 분명하다. 바늘이 없다면 천도 없으며, 개인이 없다면 사회라는 직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 바늘이 가장 추상적인 형태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바느질이 지닌 은유적 의미가 한층 더 분명해진다. 바늘은 신체의 연장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2채널 영상 설치작품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바늘은 완전히 이론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한쪽 화면에는 김수자가 다양한 도시의 거리 위에 정지한 채 서 있고, 다른 한쪽 화면에서는 거대한 바위 위에 누워 움직이지 않는다. 이 두 영상에서 나타나는 대조성은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강력한 대화를 형성한다. 도쿄, 상하이, 델리의 번잡한 거리 속에서도 그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 김수자는 홀로 바늘처럼 곧게 서 있다. 바늘을 상징하는 김수자는 자기 자신을 이용하여여 사회라는 직물을 꿰매고 있으며, 바늘이 그러하듯 일정한 때가 되면 잠시 사라진다. 반면 다른 화면에서는 자연의 한가운데 거대한 바위 위에 누워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 장면과는 대조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맑은 하늘 아래 떠가는 구름과 미세하게 달라지는 빛뿐이다. 이처럼 김수자는 두 개의 지점을 연결하고, 결국에는 사라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바늘의 은유 그 자체이다. 그의 역할, 혹은 그의 신체가 수행하는 역할은 사회라는 직물과 상호작용하며 특정 방향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그 후 바늘이 제 역할을 마친 뒤 사라지듯 스스로 모습을 감추는 것이다.

  • <바늘여인>에서 신체는 삶이라는 직물 속의 바늘로 나타난다. 김수자는 이를 중요하게 다루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로 다른 지리적·사회문화적 맥락 속에 놓이는 방법을 통해 내 신체의 이동성은 그것의 부동성을 나타내게 된다. 부동성은 이동성에 의해서만 드러나며,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이동하는 거리 위 사람들의 움직임과 그 자리가 원위치인 듯 부동의 자세로 존재하는 나의 신체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작동한다. 이 상호작용은 그 사회, 사람들, 도시의 성격, 거리의 특성 등의 맥락에 의해 좌우된다. (…) 나는 내 신체와 외부 세계를 공간/신체 및 시간/의식과 연관된 ‘관계적 조건(relational condition)’ 속에 병치하는 방식으로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다.” 이 말은 김수자의 작업 전반에 나타나는 예술적 접근을 효과적으로 요약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특이성이 끝없는 다중성의 일부라는 사유로 귀결된다. 김수자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바늘의 구멍을 통해 우주를 들여다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삶을 꿰매어’ 가면서, 동시에 그는 자신의 작업의 개념적 근간을 이루는 실을 푼다. 작업의 가시적, 비가시적 이음새들에는 이주, 전쟁, 문화적 충돌의 흔적이 누군가의 정체성과 현실 인식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접속의 미학의 힘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예술가에 의해 전달된다. 예술과 삶의 총체성을 향한 그의 상상력은 봉합하고, 치유하며, 연결하는 상징적 힘으로서의 바늘을 통해 아름답게 전해진다. 김수자는 문자 그대로 또는 개념적인 실천으로서 바느질을 대하며 만든 여러 작업과 태도를 통해 우리를 자각과 이해의 영역으로 이끈다.

[Note]
[1] 김수자는 의도적으로 ‘레디메이드(readymade)’ 대신 ‘이미 만들어진 것(already-mad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 Suzi Gablik, The Reenchantment of Art, Thames and Hudson, NY, 1991. Page 130.
[3] 올리비아 샌드(Olivia Sand)와의 인터뷰, Asian Art Newspaper, 2002년.
[4] 키아라 지오반도(Chiara Giovando)와의 인터뷰, 2012년, 김수자 공식 웹사이트 게재. https://kimsooja.com/texts/the-unaltered-reality-of-the-world

  • — 『김수자 – 펼침』, 2013년 도록 수록 글,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임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