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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수자와 오랜 우정을 나누어 온 사람으로서, 나는 우정과 우정에 내재한 공생(symbiosis)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일치(congruence)라는 단어는 라틴어 어원인 con(함께)과 gruere(돌진하다)를 떠올리게 한다. 우정은 함께 떨어져 내려오는 것, 서로에게 돌진하는 것이며, 그것은 알아봄과 인정과 연민이 맞닿는 자리이다. 우정은 함께 경험하는 경험을 시험하고, 서로 세계를 상상하고 주목하는 것을 통해 일치성을 획득하며, 이는 실존적 존재의 내재성(immanence)에 주의를 기울일 때 가능해진다. 각각의 사람은 존재의 발현으로서 세계 속에서 살아있는 기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정을 생각하면, 서로 마주한 얼굴들은 타자에 의해 읽히는 세계의 텍스트이고,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마음을 열면, 그 다름은 우리에게 강하게 다가와 영향을 준다.[1]
일치성(congruence)과 내재성(immanence), 모든 것의 안팎에 자리한 근본적 에너지의 현존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곧 공간을 무한히 늘어나고 줄어드는 탄력적인 대상으로 보고 그 안에 관계가 맞닿아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인접성(contiguity)과 연결성(connectedness)을 논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 자아와 타자, 그리고 개별 존재들과 존재 사이에서 가능한 관계의 성격과 양상을 규정한다. 함께-있음 안에서 함께 낙하한다는 것은 공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거리를 제거하여 가까워지고,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 접촉의 상태로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는 현대적 사고와 경험에서 공간을 물건을 놓는 습관이나 길을 찾는 실용적인 방식, 사람들 사이의 소외에서 친밀함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연속, 또는 저장이나 유통 같은 기술적 문제로 주로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 공간에서 우리가 느끼고 살아가는 특별한 기운이나 역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내재성이라 부를 수 있는 초월적이면서도 일상에 스며든 존재의 기운은 우리가 인지하는 주위 환경 속에 남아있다.
이러한 공간성(spatiality)과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한 사유는 김수자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치, 함께-있음, 우정과 그것들이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공간적, 물질적 요소는 특히 천의 형태로 드러나며, 이 직물은 우리가 앞서 언급했듯이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의식이 직조되고 감싸지는 매체로 기능한다. 김수자는 천을 물질적 재료이자 은유적 기표로 사용해왔고, 이를 항상 이동성의 조건 속에 배치하여 존재와 존재(Being)의 에너지적 본질을 암시하고 타자와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로써 타자성에 대한 인식의 관계적 감수성에 주의(attention)를 기울이게 된다. 이것의 기저에는, 특히 친구로 함께-있음이라는 구체적 태도에서 타자와 타자성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는 결국 ‘돌봄(care)’으로 향한다. 여기에서 돌봄은, 특정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과, 이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 그리고 친구처럼 함께 있는 상태가 만들어내는 공유된 존재감을 지키는 태도까지 포함한다.
타자와의 연속성에 대한 감수성, ‘함께-있음’의 인접성과 일치성, 일상적 존재 및 ‘존재’와의 더 깊은 연결로서의 천이라는 요소는 김수자의 여러 작품에서 제시되었다. 김수자의 보따리 설치 작업도 마찬가지다. 보따리는 여러 장소에서 모아온 사람들의 옷가지를 한국의 전통 보자기로 싸서 꾸린 천 꾸러미로, 신체의 일시성, 사회의 유동성, 움직임과 혼란, 변하는 것과 잔존하는 것을 은유한다. 내가 제시한 해석의 틀 안에서, 김수자의 보따리는 잔존하는 존재를 담은 그릇과 같은 것으로, 잠시 내려놓은 꾸러미이지만 언제든 들고 옮길 수 있게 준비된 물건이다. 김수자는 <떠도는 도시들(Cities on the Move)>(1997)에서 그 덧없음을 더욱 직접적으로 포착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 짐칸에 앉아 11일 동안 고향인 한국을 돌아다녔다. 우리의 존재가 직조되고 감싸지는 직물이라는 이 감각은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2009)이라는 불리는 여섯 편의 영상 작품에서 은유적으로 확장된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추후 더 논의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영상 속에서 김수자 곁을 지나가는 보행자의 흐름은 작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표지(sign)이며, 여기에서 의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제시된다. 하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외부”에서 보는 의식이며, “내부”에서 느끼는 작가의 자신의 의식이다. 이 둘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며, 작가는 바늘로서 때로는 타인과 함께 그리고 때로는 혼자서 사회적 공간을 꿰매는 존재로 표현된다.
김수자는 <호흡(To Breathe)>이라 명명한 작품에서 천의 은유와 ‘함께-있음’의 근접성을 더 추상적이고 가볍게 표현한다. 이 작품도 전 세계 여러 장소에 설치되었는데, 관객은 한 공간에 모인 존재로, 각자 다르면서도 비슷한 몸으로 팽창하는 들숨과 날숨의 행위에 참여하고, 김수자의 호흡을 녹음한 소리를 듣는다. 작가와 관객은 서로에게 연결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몸이라는 물성에 감싸여, 존재의 발현이 오르내리는 가운데 타자와 함께 있음의 경험 사이를 오가며 타자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어쩌면 우정의 관점에서 서로를 돌보는 일치성으로서 함께-있음에 이른다.
각각의 작품은 공간, 운동, 지형, 장소, 시간, 사람들을 동원해 세계를 이러한 방식으로 가시화하고, 타자와 함께 있음의 여러 표현과 함께 함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긴 사유의 실에 덧붙여진 이곳 스웨덴 바노스 콘스트(Wanås Konst)에서의 또 다른 작업은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작품 <씨 뿌려 그리기(Sowing into Painting)>(2020)다. 이 작품은 같은 제목으로 열린 김수자의 더 큰 전시의 중심을 차지한다. 제목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우리는 김수자의 “바늘여인”을 알고 있다. 파종한다는 의미의 ‘소잉(sowing)’은 바느질한다는 의미의 ‘소잉(sewing)’과 운이 맞고, 경작을 의미하는 ‘컬티베이션(cultivation)’은 창조를 의미하는 ‘크리에이션(creation)’과 운이 맞다. 이를 확장하면, 예술가와 관객은 ‘존재(Being)’와 함께 존재하면서(being), 장소(site)와 광경(sight)의 환경 속으로 직조되어 들어간다. 이 작품을 위해 김수자는 밭을 갈고 아마 씨를 뿌렸다. 아마는 화폭으로 쓰이는 린넨 캔버스를 만드는 재료이고, 아마 씨앗에서 짜낸 기름은 물감의 색소를 고정하는 데 사용된다. 캔버스가 그렇듯 땅도 그림이 그려지는 장소다. 캔버스를 팽팽하게 펴서 고정하는 목재 프레임을 뜻하는 기술적인 단어 ‘지지대(support)’는 특별히 돌봄을, 즉 땅 그 자체만이 아니라 땅에 그려진 것을 돌보기 위한 기반을 환기한다. 땅은 세계-그리기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광활한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서 김수자는 타자들과-함께-있음의 복잡성과 그것이 약속하는 것을 보여주며, <씨 뿌려 그리기>라는 작품을 통해 돌봄 그 자체를 경작하는 장소와 광경을 추적한다. 생성하는 땅, 생산의 땅은, 우리가 소속된 장소 ‘토포스(topos)’인 동시에, 우리가 열망하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상의 장소 ‘우토포스(utopos)’인 세계의 그림을 펼쳐 보인다.
중심적 은유이자 장소로서 이 작은 바노스(Wanås)와 이전 작업 및 전시에서 반복되는 주제—공동체와의 교감, 손의 노동이 지닌 보상적이면서 해방적인 성격—를 드러낸다. 손의 노동은 모임(gathering), 생산(production), 분배(distribution), 확산(dispersal)의 과정에서 존재를 함께 있게 하는 사회적 직물을 직조한다. 다른 글에서 나는 ‘무엇 내에서 존재함(being-in)’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통해 김수자의 작품을 다룬 바 있는데,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이 개념을 “무엇 안에서 무엇과 함께 무엇이 되는 것(something with something in something)”으로 간단히 정의했다.[2] 앞서 나는 <바늘여인>에 관해 쓴 글에서, 이동하는 몸들의 흐름 가운데에 정지해 서 있는 작가가 지시침(gnomon)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제안했다. 지시침은 해시계에서 수직으로 꽂혀 있는 바늘로, 햇빛을 받으면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시간의 지속적 존재 표명을 되풀이한다. 여기서 시간은 공간성과 완전히 결합된다. 김수자의 몸은 통로의 자(尺)가 되어, 시간은 하나의 이어진 물질, 즉 존재의 직물로 이해되고, 개별 신체는 그 직물 안에 바늘과 실처럼 꿰매어지는 것이다. 영상 작품에 담긴 측정되고 기록된 존재들은 과거의 시간 속에 살지만, 작가의 고정된 형상 옆을 흘러가는 모습은 상징적으로 연속성을 시사한다. 군중의 사회성(sociality)은 거의 변하지 않는 가운데 현재로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올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작가를 등 진 모습으로만 보는데, 지나가는 얼굴들이 그를 읽는 동시에 그에게 읽힌다. 일부는 호기심 어린 듯하고, 일부는 확연히 적대적이며, 일부는 무관심하다. 작품은 존재들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도전적이고 복합한지를 부각시킨다. 또한 파탄(Patan), 하바나(Havana), 엔자메나(N’Djamena),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사나(Sana’a), 예루살렘(Jerusalem)에서 제작된 이 비디오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함께 서로를 꿰매어 하나로 잇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이곳에서 김수자는 이방인으로서 타인의 문턱에 서 있는 존재이며, 그의 타자성을 통해 그들의 타자성을 되비춘다.
우정이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는 언제나 환대(hospitality)라는 특정한 공간, 즉 문턱을 넘는 그 장소에 의해 뒷받침된다. 다만 환대는 본질적으로 마찰의 상태에 놓여 있으며,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쓰듯이, 손님을 초대한 자는 언제나 주인(host)이면서 인질(hostage)이 되기도 다. 그는 환영, 예의, 관용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복잡한 관계 속에 놓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서로 가깝지만 존중하는 배려의 공간이 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그 속에서 주인과 이방인 사이의 닮음이 어렴풋이 빛난다.[3] 김수자의 작품에는 언제나 거울에 비추어진 자아의 감각과 반영적 자기인식, 그리고 내적 성찰의 전환이 공동체적 사회성의 매개가 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성을 만들어내는 노동이며, 함께-있음의 씨 뿌리기를 통해 ‘타자’를 인식해가는 과정이다. 우정은 그러한 씨뿌림을 땅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초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씨 뿌리기는 결핍이나 고립의 징표가 아니라, “친구가 되다(to friend)”가 복수형으로 작동할 때, 서로 다른 것들의 풍성한 관대함을 수확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름의 풍요, 타자성과 타자 간의 다름을 바탕으로 사회적 직물을 꿰매어 해를 완화하고 완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함께-있음에 관한 또 다른 시리즈 <실의 궤적(Thread Routes)>(2010-2016)을 살펴보자. 이 작품 역시 바노스에서 선보였다. 김수자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연작도 세계 곳곳에 흩어진 손의 노동의 지형도를 제공한다. 그것은 특정 지역의 기술 및 역사와 밀접히 연관된 복잡한 협업 노동을 이동하는 지도처럼 그려내는 것이었다. 이 지도에 담긴 풍경 속에서 노동하는 손이 속해 있는 장소들은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더 큰 지도를 향해 뻗어나간다. 우리는 이 공동체적인 것을 하나의 ‘토포스’로서, 공통의 소속 및 존재-속의-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실의 궤적>은 상품 생산과 그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고통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노동의 실천은 상호작용을 결속시키려는 방향을 지닌다. 이는 공동체적 교류를 표상하며, 친밀한 집단들이 시간·노동·풍경을 반복적으로 오가면서 타자와 함께 있음의 복잡성을 드러내고, 우정의 가능성과 함께 덕을 나누는 상태를 상상하게 한다.
여기에는 불가피하게 위험이 따른다. 사회적 직물의 안팎을 드나드는 자아의 바늘은 여전히 날카롭고 뾰족한 도구, 그러니까 천을 꿰매기도 하지만 찢을 수도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감(commune), 공동체성(communal), 공동체주의(communitarian)라는 단어들은 단순히 돌봄의 확장이 아니라 정치적 조건으로서 함께-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점에 비추어 본다면 ‘친구 되기(to friend)’가 의미하는 것은 친화와 소속의 관계를 추구하고 맺는 것이지만, 이는 집단적, 식민적 상호작용의 원리로 뒤바뀔 수도 있다. 나는 이를 ‘동일성의 폭정(tyranny of sameness)’이라고 쓴다. 릴라 간디(Leelah Ghandhi)는 저서 『정동적 공동체(Affective Communities)』에서 “가장 급진적 차이의 공동체조차 유사성의 정치로 전락해 분리를 특권화하고 소속을 위해 획일성을 요구한다고 지적한다”고 썼다. 간디는 콰메 앤서니 애피아(Kwame Anthony Appiah)의 말을 인용한다. “인정의 정치와 강요의 정치 사이에 뚜렷한 경계는 없다.”[4] 하지만 그들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다면, 그 둘을 둘러싼 경계는 존재한다. 다시 말해, 동일성의 정치는 영토를 배타적으로 나누고, 항상 강제의 편협한 강도로 경계 지워지는 제한적 소유 개념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친구 되기”의 저변에 깔린 도전이며, 설사 이곳 바노스 콘스트에서 <씨 뿌려 그리기>에서 파종이 사회적 선의 결실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땅밑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떨림, 땅밑로부터 올라오는 질문을 마주하게 다. 인정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에서 다른 누군가와 친구가 되는 이는 누구이고, 그들 사이에 자리한 깊은 공모(complicity)는 무엇일까? 다른 누군가를 인정한다는 것은 오로지 ‘나와 닮은 것만’을 상호적으로 열망하는 상황에서 안락함과 투쟁적 방어를 동시에 움켜쥐는 일이며, 그 복종의 의지는 사법적 강제나 부족적 폭력과 같은 극단에까지 이를 수 있다. 강제의 형태와 유사성의 영토로 구분된 공동체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확인하는 요새의 윤곽선을 그려, 포용하는 만큼 배제하고, 동일성만큼이나 비동일성을 표시하면서 권력을 유지한다. 이는 우정과 공동체의 길을 주변화와 억압의 일련의 시험대(gauntlet)로 왜곡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노스 콘스트의 숲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돌며 심고 거두는 일은, 비록 그 아래에는 암류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장-뤽 낭시(Jean Luc Nancy)가 말하는 “공출현(compearance, ‘함께 나타남’)”이라 부르는 개념에 가깝다. 낭시는 “그 자체로서 ‘사이’(between): 너와 나(우리 사이)… 공출현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조합에서 그것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entirely other than)’’ 혹은 더 단순히 ‘너는 나를 공유한다(you shares me)’라고 쓴다.”[5] 소속을 배타적으로 보는 방식과 나와 타자가 본질적으로 나누는 방식은 접근법이 다르다. 낭시가 말하는 ‘너는 나를 공유한다’는 어떤 배타적 방식이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 이 환경은, 말하자면 언제나 함께-머묾(visiting-with)이며, 단독의 존재 방식인 배타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바노스의 나무들은 공유된 양분을 위해 뿌리를 뻗어 연결되는 모델로 이와 유사한 연결망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것은 바로 ‘나와는 완전히 다른(tout autre que moi)’이 ‘너는 나를 공유한다(toi partage moi)’임을 보여준다. 낭시의 ‘그리고(and)’는 김수자가 드러내는 개방성을 함축하며, 슬로터다이크가 유사하게 말하고 있는 ‘실존적 공간성(existential spaciousness)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의 곁에 있으며, 타자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다.[6]
이러한 실존적 공간성 속에서 이곳 바노스 콘스트에서 발표된 작품들—<씨 뿌려 그리기>, <메타-페인팅(Meta-Painting)>(2020), <빨래터(A Laundry Field)>(2020), <호흡>(2020), <실의 궤적>—은 데리다가 말한 우정의 본질적 특성을 공유한다. 여기서 우정은 공유된 언어와 함께 있음 속에서 숨쉬고, 김수자가 보여주는 나와 너의 합류는 오래된 우정의 본질을 되살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보다도 먼저 우정을 동의(consent)의 형식으로 이야기했다. 동의라는 단어는 “함께하다(to be with)”와 “감각하다(to sense)”가 결합된 것이다. 감각한다는 것은 맛보고, 만지고, 듣고, 보는 것으로, 그것을 함께 나누면서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갈등을 겪을 수도 있고, 다름을 포용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함께 심고 함께 숨 쉬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은 타자와 감각을 나누는 살아있는 실천이다. 그러한 실천은 김수자의 작품 속에서 반복되고 변주된다. 김수자의 작품 안에서 행위의 반복은 노동을 의례화하고, 작품 자체도 전시장마다 반복·변주되어 소속의 토포스와 탈근원적 개방의 유토포스가 결합된, 이동·동원된 친밀성의 공유장(commons)을 제안한다.
이러한 반복과 의례, 손의 노동과 공출현의 맥락에서, 이를테면 <씨 뿌려 그리기(Sowing as Painting)>와 김수자가 여러 차례 만든 다른 작업 <마음의 기하학(Archive of Mind)>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마음의 기하학>에서 사람들은 직접 손으로 굴려 만든 찰흙 공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고, 그렇게 이 테이블은 타자와-함께-있음이라는 행위, 땅의 물질에서 온 형상의 씨앗을 심는 행위를 떠받치는 타블로(tableau)가 되었다. 두 작품 더 일종의 의례적 노동, 곧 ‘유지’의 일을 보여주는데, 유지(maintenance)의 어원적 의미가 손(hands)과 돌봄(care)임을 떠올리면, 우리는 손으로 하는 돌봄의 실천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감각하고 합의된 형태로 나아가는 씨뿌리기이며, 결국 타자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 돌봄의 범위를 확장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우정이 ‘복수형의 우리(plural us)’를 만드는 것은 경험에 합의된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우정 이전의 나와 같지 않고 친구도 마찬가지이며, 우리 각자는 나(I)이자 타자(Other)로서 변이된 제2의 자아이고, 함께일 때는 혼성적 제 3의 자아를 이룬다. 이런 자신들의 얽힘(intertwining)과 증식(multiplication)은 노동·쾌락·헌신·생의 유한성이 의례적으로 공유되는 공동체의 소우주가 된다.
물론 우정과 공동체에서는 마찰(frictions)이 있다. 그러나 김수자 작품이 가진 이동성은, 타자와 함께 있음이 앞으로 향하는 능동적 움직임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상징적 시간과 일상적 현실을 구분하는 시간성의 차이에 있다. 내가 상상하는 우정의 끌림으로 인해 휘어진 함께-있음의 시 공간(curved space-time of being-together)은, 릴라 간디가 지적한 동질성의 정치적 선형성(linearity of similitude)에 맞서 작동한다. 동일성의 폭정은 장기간 통치에 의존해 사법적 관행과 편견을 생산·강제한다. 반면, 김수자의 작품은 그러한 법적인 틀보다는 순간적인 시간 감각과 상징적 체계에 기반을 둔다. 그 시간은 작품을 관람하는 중에 일어나는 우연한 마주침의 시간이며, 짧고 일시적인 체험을 따라가는 달콤한 시간이다. 그것은 어쩌면 깨우침의 시간이거나, 공동체적 존재에 촉각적으로 다가가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고착되지 않으며 징벌적이지도 않다. 최소한 그것은 하나의 윤리로서, 우정의 패러다임으로서 우리를 수호한다.
김수자 작품이 가지고 있는 에피소드적 시간성은 동일성 내의 차이를 수용하는 느슨한 사회적 직물의 직조를 촉진한다. 이는 처벌적, 법체계적 장치가 할 수 없는 것을 허용하는 사색적 여유로, 우리는 타자의 다양성을 사회적·공간적으로 수용할 수 있고, 가까이 있으되 서로 평행을 이루며,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병치시키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함께-하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실의 궤적>에서 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수의 지리적 지역과 사람들이 나란히 일하는 장면이 몽환적으로 반복해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그들의 노동은 하나의 공공적 연대 방식이 되고, 동의로 이루어진 공동 출현의 가능성은 밝은 대기 속에 떠 있는 전망으로 제시된다.
햇빛은 이 풍경과 인물 위로 쏟아지고, 밝은 빛은 생성의 기운, 즉 시간의 흐름, 함께-있음이 사건으로 펼쳐지는 징표로, 김수자의 작품을 가득 채우는 모티프다. 그리하여 <씨 뿌려 그리기>는 태양에 의존한다. 여기서 태양은, 씨앗과 꽃이 노동의 현장에 가져오는 결실과 협동, 공출현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양육의 빛이다. <메타-페인팅>에서는 아마씨에서 비롯된 캔버스들이 줄지어 걸려 때 묻지 않은 가능성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같은 천의 보따리가 아래에 놓여 있어 순수한 잠재력이 움직이는 동안 서로 동행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빨래터>에서 흰 이불보는 초록 나무들 사이에서 펄럭이며 새 것 같은 상쾌함을 불러일으키고, <호흡>의 거울 방에서는 반사된 신체가 두 배로 빛나며, <바늘여인> 속 군중의 얼굴에서는 작가가 낮의 빛을 가리키는 해시계처럼 자리한다.
모든 작품은 존재의 넓은 호흡과 스며드는 현재를 공유한다. 그 안에서 함께 있음의 공기가 타자의 빛과 고난을 한데 모으고, 미학과 윤리의 요구, 낭시의 ‘나는 너를 공유한다’의 과업은 바노스를 둘러싼 시간 속에서 김수자의 작업을 관통한다. 김수자의 씨 뿌리기와 꿰매기는 사회적 완전함을 향한 손의 행위이며, 여러 자아가 함께 있어 세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데리다의 말 “타자 안의 자신과의 관계-그 속에 진정한 무한이 있다”은 이를 뒷받침한다. [7] 이런 우연한 만남은 동일함과 비동일함의 무한성과 ‘친구됨’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1] 이 글은 내가 이전에 쓴 “김수자: 함께-있음의 과제(Kimsooja: The Task of Being-Together)”, <마음의 기하학> 展(서울: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2017)의 후속 에세이로서 김수자의 예술에 관한 나의 사유를 이어간다. 이번 글에서 나는 앞선 글의 제목에 포함된 용어 “함께-있음”을, 그 글에서 언급한 철학자들과 개념들 중 일부를 다시 참조하면서, 우정의 형식을 취하는 사회성과 상호성이라는 정교한 개념을 탐색하고자 사용하고자 한다.
[2] Peter Sloterdijk, Bubbles: Spheres Volume I: Microspherology, trans. Wieland Hoban (Los Angeles: Semiotext(e), 2011), 542.
[3] Jacques Derrida, “Hostipitality,” trans. Barry Stocker with Forbes Morlock, Angelaki, vol. 5, no. 3 (December 2000), 9.
[4] Leelah Gandhi, Affective Communities: Anti-Colonial Thought, Fin-de-Siècle Radicalism, and the Politics of Friendship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06), 25. 내 에세이를 참조할 것. “Exhibition of Friends,” Parse Journal, no. 13.1 (Spring 2021).
[5] Jean-Luc Nancy, The Inoperative Community, trans. Peter Connor et al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29.
[6] Sloterdijk, Bubbles, 542.
[7] Jacques Derrida, The Politics of Friendship, trans. George Collins (London: Verso, 2005), 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