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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이 된 보따리

《김수자 ― 보따리 쾰른 2005》(쾰른 케베니히 갤러리, 2005. 1. 29.~4. 23.) 전시에 부쳐

프리데만 말슈

2005

  • 1980년대 후반 이후 서구 미술에서 ‘부재(不在)’의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영향력 있는 주제로 다루어졌다. 서비스 아트, 큐레이팅으로서의 예술, 유목적 존재, 집단 창작으로 인한 작가 개인의 익명화 등은, 1960년대 이후 서구 미술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온 자기지시적 체계를 벗어나고자 지난 수년 간 예술가들이 기울여 온 노력을 보여주는 지표다. 여기서 부재는 개인화된 예술의 증가 추세를 약화시키고, 다시금 예술과 그 사회적 차원 간의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영역에 접근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략은 언제나 자기반영의 구조(matrix of self-reflexiveness) 내에서 작동한다.

  •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서구 미술이 다른 대륙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국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서구 미술시장을 겨냥한 안전한 담론을 넘어서서, 예술이 현대적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인간 삶의 근본적 물음에 다시 응답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 김수자는 1957년 한국에서 태어나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다. 그는 지난 15여 년간 동시대 미술의 이러한 방향 재설정에 상당한 기여를 해 온 작가다. 그는 유교적 전통이 뿌리 내린 문화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삶을 둘러싼 직접적인 환경은 가톨릭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한 가족의 반복적 이사는 그로 하여금 ‘뿌리 뽑힘’을 일찍이 경험하게 했다. 이는 20세기 서구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던 정서이기도 하다. 게랄트 마트(Gerald Matt)와의 인터뷰에서 김수자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종종 여행을 해야 했다. 여행은 내가 어릴 때부터 늘 내 삶 안에 있었다. (중략) 정착하기와 이곳저곳을 옮겨다니기, 만남과 헤어짐 같은 주제는 언제나 나와 함께했다. 나는 국경 위에 사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내가 작업에서 사용하는 재료는 그러한 성향에 부합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리움’과 ‘향수’, ‘기억의 공백’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라는 문제를 늘 안고 살았다.”

  • 이 같은 개인적 경험은 김수자의 예술 세계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작업 세계는 1980년대부터 꾸준히 발전해 왔다. 작가는 처음에는 할머니의 물건을 앞서 언급한 재료로 사용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김수자는 할머니의 옷과 천을 대형 벽화 형식의 작품을 위해 사용했는데, 이는 당초 그가 한국에서 공부했던 회화적 정신에 입각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기억에 물든 이 재료의 사용은, 추상적 구성을 만들어 내는 개별 재료들의 색채와 함께 그 자체로 이미 부재(즉 돌아가신 할머니의 부재)를 핵심 주제로 제시한다. 동시에, 그러한 천을 사용하는 일은 그 자체로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 옷은 생전에 그것을 입었던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같은 이중의 ‘부재’(하나는 할머니의 정신-신체의 부재, 다른 하나는 전통에 대한 위반), 즉 양가성은 김수자의 작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적인 예술적 수행 방식이다.
    이 글에서 김수자의 작업 전체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므로, 그의 작업 전반을 개괄하는 책이 최근에 출간되었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 그렇지만 김수자가 지금까지 제작한 모든 작업에서 ‘부재’라는 모티프가 일관되게 발견된다는 사실은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주목해 볼 점은 작가가 부재를 결핍의 모티프가 아니라 건설적인, 변증법적 전략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뉴욕 P.S.1 아트센터 레지던시 입주 이후 처음으로 선보인 새로운 작업에서 김수자는 무엇보다도 사물에 남겨진 사용의 흔적에 집중했다. 바로 〈연역적 오브제〉였다.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그간 자신의 시각 작업의 중심에 있었던 회화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자신의 조형 언어를 설치, 비디오, 사진, 퍼포먼스로 빠르게 확장해 갔다.

  • ‘바느질하며 걷기’와 ‘보따리’, 그리고 ‘빨래하는 여인’ 연작의 일부 작품에서 천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아가 2004년에는 판화 작품 〈일곱 가지 소망〉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는 보따리 작업과 ‘빨래하는 여인’ 연작의 여러 설치 작품에 사용됐던 한국 이불보의 다양한 문양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를 결합한 ‘만남’ 연작과 사진 작업 〈묘비명(Epitaph)〉 같은 작품은 이 주제를 김수자가 얼마나 능숙하고 주도적으로 다루는지를 잘 보여준다.

  • 또 다른 작품군에서 ‘부재’는 시공간적 질문과 맞물린다. 이 작품에서는 강한 회화적 성격을 지닌 비유의 기능이 약화되고, 작품과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에 더욱 초점이 맞춰진다. 이와 관련해 특히 언급할 작업은 퍼포먼스 비디오 연작 ‘바늘여인(이 연작의 두 번째 시리즈는 아직 진행 중이다)’, 서로 연관된 작업인 ‘집 없는 여인’과 ‘구걸하는 여인’, 그리고 ‘빨래하는 여인’ 연작 중 일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김수자는 항상 화면 중앙에서, 보는 이를 등지고 움직임 없이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모든 일은 그녀 주변에서 일어난다. 그는 여러 대륙의 대도시 속에서 인파에 둘러싸이거나, 천천히 흐르며 자기 앞을 지나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이들 작업에서 나타나는 ‘부동(immobility)’과 ‘이동(mobility)’의 변증법은 김수자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부재’를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작가 역시 이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움직임은 존재의 근본 조건이다. 각 순간의 진동(oscillation)에는 그 나름의 리듬이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이동과 부동의 차이가 비교적 작게 느껴진다. 나는 내 몸을 이동과 부동의 미세한 경계를 구분짓는 예민한 기압계의 한계점에 맞춰 두었다. 그러니까 어떤 길이나 도시, 어떤 대륙에 위치한 내 몸의 이동은 부동의 한 사례가 되는 반면, 이동하겠다는 내 결정은 완전히 갑작스럽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결정은 서로 다른 두 요소, 즉 내 몸과 외부 세계 사이의 역동적 긴장 속에서 일어난다. 대부분의 예술가나 배우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보여주려 분투하지만,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하거나, 더 만들거나 새로 창조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 그러므로 부재는 작가가 자기 자신의 경험과 성찰에 상응하는 경험을 관객에게 전하기 위한 중요한 예술적 수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김수자의 예술적 접근이 ‘실존적 미니멀리즘’이라 불려 온 것은 충분히 타당하며, 작가 자신도 이 용어를 자신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는 표현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개념 아래에서 동시대 서구의 한 예술적 경향은 선불교의 변하지 않는 관습(timeless practices)과 조우한다. 불교에서 ‘공’(空), 즉 부재는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함을 뜻한다. 빈 공간이야말로 삶을 명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김수자의 작업을 여러 문화 사이에서 드물게 이루어지는 특별한 융합 사례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이는 그의 예술이 지니는 특별한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김수자 ― 보따리 쾰른 2005》

  • 김수자는 쾰른 소재의 케베니히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를 하나의 설치 작업으로 구상했다. 전시의 중심에는 보따리를 실은 오래된 트럭 한 대를 두고, 그 주변으로 개별 보따리들, 보따리 소재와 연관된 판화 작품인 〈일곱 가지 소망〉, 그리고 비디오 프로젝션 네 점을 배치했다. 전시 제목은 이 전시의 과도기적 성격을 분명하게 지시한다. 이미 세 가지 언어적 요소, 즉 ‘보따리’라는 용어 그 자체, 날짜, 그리고 장소와의 결합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보따리는 한국 사람들, 특히 여성이 필요에 의해서든 자발적으로든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소지품을 천으로 싸서 묶어 들고 다니던 꾸러미를 뜻한다. 보따리를 싸기 위한 천으로는 전통적으로 혼수품으로 받았던 이불이나 이불보를 사용했다. 따라서 이 천들은 주인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대개 생애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대상이었다. 이는 천에 새겨진 문양이 그것을 선물로 준 사람의 축복을 나타내며, 이 축복이 인생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소망〉에서 김수자는 이러한 다섯 가지 모티프를 선보이며,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두 개의 대형 추상 모티프로 이를 보완한다.

  • 갤러리 입구에는 보따리 하나가 곧바로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 보따리는 주로 갤러리 지하의 작고 단순한 아치형 천장으로 구획된 공간에서 발견된다. 이 설치에는 언제나 고독함이 배어 있지만, 여기서는 그 쓸쓸한 분위기가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공간의 미적 특성 때문만은 아니다. 보따리는 언제나 한 개인의 성정이 깃들어 있는 삶의 증거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설치에서 김수자는 이 장소의 특별한 역사를 놀라울 만큼 강렬한 방식으로 환기한다. 케베니히 갤러리와 이웃한 건물의 일부는 나치 시대 비밀국가경찰이 체계적인 고문을 행하던 감옥이었다. 나치 정권이 추구했던 개인의 파괴는, 인간 영혼의 파괴 불가능함을 강조하는 김수자의 조용하지만 헤아리기 어려운 울림에 의해 상쇄된다.

  • 위층 갤러리의 중앙에는 1938년 생산된 오래된 삼륜 트럭 템포(Tempo) 한 대가 놓여있다. 짐칸에는 운전석 지붕을 넘는 높이까지 보따리가 가득 실려 있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서 관객은 뾰족하게 튀어나온 보닛 쪽으로 다가서게 되는데, 이 때 트럭의 형태가 뒤틀려 보이게 된다. 이 〈보따리 트럭〉은 1997년 작가가 11일 동안 한국을 종횡무진하며 펼쳤던 퍼포먼스에서 사용했던 원본 트럭의 새로운 버전이다. 원본 트럭은 이후 여러 전시에서 ‘망명 중’인 것으로 등장하는데, 쾰른 전시에서 김수자는 약간 작은 크기로 새 트럭을 제작해 보여준다.

  • 원본 퍼포먼스는 ‘떠도는 도시들’이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됐으며, 생활 형편상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고향을 떠나 이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특수한 심리 상태를 보여 주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주민들이 전형적으로 공간과 시간과 맺게 되는 특수한 관계, 대개 비이주민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 관계는 〈보따리 트럭〉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이에 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따리 트럭은 시간과 공간 전체에 걸쳐 있는 과정의 오브제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가 떠나온 곳과 우리가 향해 가는 곳에 위치시키고, 다시 그곳에서 이탈시킨다.” 이주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특정 방식으로 사로잡는 작품은 거의 없고, 그러면서도 특정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는 작품은 더욱 드물다.

  • 작가는 트럭이 놓인 갤러리 공간에 네 개의 비디오 프로젝션을 배치해, 〈보따리 트럭〉의 정서적 모티프를 보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수준으로 옮겨 놓는다. 네 점의 비디오 작업은 모두 2000년과 2001년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까지는 드물게 공개되어 왔다. 그중에서 단 한 작품에만 군중이 등장하는데, 이는 즉각적으로 퍼포먼스 연작인 ‘바늘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 퍼포먼스 작업과 〈보따리 – 조칼로〉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보이지 않으며, ‘바늘 여인’에서처럼 인파에 둘러싸여 있지도 않다. 군중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어느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개별 움직임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축구 경기장에서 열리는 대규모 콘서트에서처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영상 속 이미지는 빠르게 재생되는 동시에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기묘하게 추상적 효과가 발생한다. 구성 요소의 움직임의 기원이 불분명한 다른 추상적 사이클로그래피(cyclographic) 이미지와의 시각적 유사성은, 영상에 녹화된 사람들이 놓여 있는 특정 상황에 대한 인식을 일반적인 차원으로 전환시킨다. 그렇게 군중의 정적인 상태와 군중 속 개별 요소의 움직임 사이의 변증법을 더욱 강조한다.

  • 〈보따리 ― 눈 그리기(Bottari – Drawing the Snow)〉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겨울 밤에 눈 내리는 모습을 담아낸 이 작품에서 카메라는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앞서 살펴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이미지는 방향을 알 수 있는 아무런 좌표도 포함하지 않는다. 화면 속에는 각자 우연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눈송이들의 움직임과 그 뒤의 어두운 공간 속으로 사라지며 정지된 듯 보이는 눈송이의 대비만이 남는다. 이 이미지는 아주 높은 수준으로 추상화됨으로써 오히려 구체성의 차원에 이르게 되고, 감상자는 그 속으로 깊이 몰입하게 된다. 이것은 명상의 이미지인가?

  • 〈보따리 ― 뇌우를 싸다(Bottari – Wrapping the Thunderstorm)〉는 〈보따리 ― 눈 그리기〉의 모티프를 이어 받지만, 이번에는 자연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감상자는 스크린이 적절한 신호를 받지 못할 때 화면에 생기는 전자적 ‘눈’만을 보게 된다. 작품 제목에는 쓰인 자연에서 가져온 용어는 이 경우에는 작품 해석의 출발점이 된다. 여기서의 ‘폭풍우’는 극도로 미세한 수준에서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지각에서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보따리 ― 눈 그리기〉에서는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던 화면 속 공간의 깊이도 이 작품에서는 온전히 감상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 그러나 네 번째 비디오 프로젝션 〈보따리 ― 알파 비치〉는 ‘자연 공간’을 특징으로 한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바다와 하늘 한 조각이 위아래가 뒤집혀 투사된다. 화면의 중앙은 수평선이 가로지르고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면 이 이미지를 만들어낸 좌표에 관한 질문이 떠오른다. 위와 아래, 표면과 깊이 ― 이런 용어는 이 단순한 반전의 동작을 고려할 때 의문이 생기고, 재확인을 요구하게 된다.

  • 〈일곱 가지 소망〉을 제외하면, 비디오 프로젝션을 포함해 이번 전시에서 소개한 모든 작품의 제목은 ‘보따리’로 시작한다. 이 묶인 ‘꾸러미’의 양가적 표상성—보따리가 한편으로는 이주와 더불어 이주민의 내적 상태를 은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이면서 거의 마법적이라고 할 만한 하나의 요소라는 점—을 의미적 토대로 인정한다면, 이번 전시의 설치는 다시 한번 의미를 부여받은 부재(不在), 즉 충만함으로서의 비어 있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김수자의 예술은 또 다른 종류의 공(空)을 향한다는 것, 미술사적 공백도, 오늘날 인간 의식의 분열이 만든 공허도 아닌, 자기의 비움, 즉 ‘무심’(無心)이라는 개념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 쾰른 케베니히 갤러리에서 열린 김수자의 전시를 고려하면 로버트 모건의 고찰은 예언에 가까운 성격을 갖게 된다. 그로써 ‘보따리’는 지금까지 김수자의 예술 세계에서 인식된 적 없던 또 다른 층위의 의미를 얻는다. 일종의 타임캡슐이 되는 것이다. 앤디 워홀의 〈타임 캡슐(Time Capsules)〉이 지닌 선형적 일시성과 대조적으로, 김수자의 보따리는 시간을 우리의 의식적이고 통제적인 접근을 벗어나는 차원과 연결한다. 김수자는 1997년에 이미 다음과 같이 이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시간은 그 물리적 현전을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정신적 공간이다. 우리는 그 공간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원할 때면 언제든 특정한 시간을 회상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에 맞추어 우리 몸의 위치를 옮길 수는 없다.”

  • 2005년 6월 파두츠에서

[Notes]
[1] Kimsooja talking to Gerald Matt, Gerald Matt (ed). 『김수자 - 바늘여인』, Vienna 2002, pp. 7-33, p. 8.
[2] 『Kimsooja – Conditions of Humanity』, 전시 도록 Musée d'art Contemporain, Lyon and Museum Kunst Palast, Düsseldorf, 5 Continents Edition, Milan 2003.
[3] Gerald Matt, pp.7
[4] 전시 도록 『김수자 -바늘여인』, Kunsthalle Bern, 2001, pp. 35-43, p. 36.
[5] 로버트 모건, 김수자 – 무심(無心)의 영속, 『김수자 - 바늘여인』, 전시 도록, Kunsthalle Bern 2001, pp. 47-56, here, p. 55.
[6] 『김수자 - 바늘여인』, 전시 도록, Kunsthalle Bern 2001, p. 36.

  • — 《Kimsooja - Bottari Cologne 2005》, 캐베니히 갤러리.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문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