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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라는 수련

데이비드 모건

2005

  • 김수자의 영상 작업 <빨래하는 여인>(2000)은 관객을 고요한 화면 앞에 세운다. 강물이 화면을 가로질러 흐르고, 그 위로는 보이지 않는 강둑에서 쓸려온 나뭇가지와 풀잎, 꽃, 그리고 쓰레기가 떠내려간다. 화면 위쪽에서는 하얗게 번진 빛과 함께 강이 사라진다. 아마 강 위에 드리워진 아침 햇살인 그 빛은, 델리의 야무나 강가에 빨래하러 나온 이름 모를 인도 여인을 비춘다. 우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화면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직 이 여인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객은 그가 정말 그곳에 있는 것인지 묻게 된다. 어쩌면 어떤 기계적 과정을 거쳐 비디오 테이프 위에 새겨졌거나, 디지털 편집을 통해 삽입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포토샵의 시대에, 과연 진짜라는 것은 있는가? 머리카락 한 올조차 흔들리지 않고, 옷자락에도 바람의 자취는 없다.

  •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인간이다. 우리의 시선은 자꾸만 단단하게 중심을 채운 여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그는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이는 이른바 뤼켄피구어(Rückenfigur), 즉 화면의 전경에 뒤돌아 있는 인물을 배치하는 기법이자 19세기 초반 유럽 낭만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장치의 아시아적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관객을 회화 속으로 유혹하며, 시선을 이끄는 동시에 화면 가까이로 당긴다. 그리고 관객이 자신을 해당 인물과 견주기 시작할 때, 심지어 그 인물을 자기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나 작품 속에 존재하는 허구적 분신으로 여기게 될 때 그 평면은 점점 사라진다. <빨래하는 여인>은 인물을 영상 속에 정지시킴으로써 이러한 도상학적 장치를 떠올리게 한다. 김수자는 또 다른 무성 영상 작업인 <바늘 여인>(1999-2001)에서도 같은 모티프를 사용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도쿄, 상하이, 델리, 카이로, 라고스, 런던 등 세계 여러 도시의 붐비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는 회화와 영상이라는 두 매체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데, 이때 소리의 부재는 그 효과를 한층 더 뚜렷하게 한다.

  • 작가는 왜 이러한 매체의 모호함을 감수하는가? 그저 예술이 예술을 다루는, 지겨운 자기반복의 또 다른 예시인가? 아마 이보다는 훨씬 생산적인 목적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김수자는 자신의 매체를, 말하자면 존재론적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그는 비디오가 더 이상 본래의 특성을 유지할 수 없을 듯한, 이 경우엔 회화로 변모할 듯한 지점까지 확장한다. 작가는 영상을 침묵으로 감싸 소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효과를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소리란 비디오를 정지된 시각 매체와 명확히 구별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며, 흐릿한 표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떠다니는 부유물들로 방해받지만, 나는 그것이 강이라는 사실을 재발견하곤 했다. 화면 상단을 가로지르는 하얀 빛은 이미지를 강하게 평면화시키는데, 물속에서 그림자나 깊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 움직임 없는 인물은 마치 눈보라 속을, 혹은 얇은 장막 너머를 바라보는 듯하지만 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수련잎과 식물, 비닐봉지, 그리고 새의 그림자가 그것이 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물방울 소리, 물벌레가 미끄러지는 소리, 보이지 않는 물가 어딘가에서 조용히 밀려오는 물결의 소리 등을 덧입히게 된다. 김수자는 이토록 많은 것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욱 치열하게 바라보게 하고 '보는 행위' 자체를 되묻게 한다. 시각 매체를 한계점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통해 예술가는 보는 행위의 본질을 시험하고, 특히 매체가 의식의 미묘한 결에 스스로를 잇는 그 희미한 경계를 탐구한다.

  •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매체란 결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상상력은 그림과 사진, 영상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덧붙이고, 존재하는 것을 외면하며 때로는 기대하거나 보고 싶어 했던 것마저 전복한다. 이 사실은 의식의 근본적 매체인 마음에도 적용된다. 마음이란 현실의 확고한 형태나 원리가 새겨진, 돌처럼 단단한 판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김수자가 영상 속에서 그려낸 물의 표면 그 자체다. 나아가, 마음은 절대 안정적인 것이 아니다. 가장 오래되고 널리 존경받는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법구경』 은 마음을 “흔들리고 불안하며, 지키기 어렵고도 억제하기 힘든 존재”로 묘사한다. 또한, “마음은 변덕스럽고 가벼워,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념을 좇아 날아간다”고 말한다.[1] 그러나 여러 종교가 통찰하듯,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곧 구원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마음과 신체는 훈련될 수 있다. 힌두교는 개인의 자아를 더 큰 자아인 아트만(atman)에 비유하는데, 이는 모든 것의 존재이자 본질로서 브라만(Brahman)이라는 궁극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실재를 드러낸다. 기독교에서는 개인적 자아를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존재로 말하며, 그리스도가 곧 자아의 참된 측면이 된다고 본다(골로새서 3장 3절). 또한 신약의 다른 구절에서는 구원받은 이들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베드로후서 1장 4절)이라고 묘사한다.

  • 물론 세계의 종교를 하나의 맛으로 녹여내 스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만 모든 종교가 결국 동일한 주제, 즉 인간이 자기중심성, 고통, 그리고 필멸성과 씨름한다는 사실을 다루므로 서로 다른 종교 전통 사이에서 어느 정도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이 놀랍지는 않다. 앞서 언급된 모든 종교에서, 언젠가 죽는 육체에 자리하는 인간의 자아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시작되는 장소이자, 매우 다른 방식으로나마 그것이 실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기독교인에게 있어 몸과 마음이란 고통을 그리스도 안 하나님의 현존을 본받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힌두교에서의 몸과 마음은 요가, 식이 규범, 기도와 의례적 봉헌 등을 통해 신체를 훈련함으로써 고통의 원인을 줄이는 데 관여한다. 『법구경』에 따르면, “욕망의 집착에서 벗어나 평온한 자기 절제력을 지니고, 선악을 초월한 자는 깨어 있으며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불교의 엄격한 수행은 육체의 나약함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련하고, 두려움, 욕망, 분노, 무지에서 비롯되는 숱한 집착을 해체하여 자기중심적 자아의 환상을 거두어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 위 세 종교에 대한 간단한 비교만으로도 우리는 김수자의 비디오, 나아가 종교의 여러 측면을 탐구하거나 예술과 종교 간 유사성을 다루는 오늘날의 수많은 예술 작품을 성찰해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종교를 비교할 때와 비슷하게, 중요한 점은 예술을 종교로, 혹은 종교를 예술로 환원하는 일이 아니라 두 영역이 어떤 방식으로 유사하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요즘의 예술 실천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 것이다. 예술은 종교를 대체하는가? 이러한 주장은 새롭지 않다. 19세기 초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두 가지 초월의 길을 제시했다. 하나는 미적 관조, 다른 하나는 금욕적 삶이었다. 둘 다 그가 ‘의지’라고 부른 것, 즉 우주 만물을 움직이는 맹목적인 충동을 내려놓는 방식이었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해 제시함으로써, 쇼펜하우어는 추후 예술과 종교를 평행하되 동일하지는 않은 실천 영역으로 사유할 기반을 마련하였다.

  • 그가 주장하기로, 미적 관조란 의지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방식, 곧 의지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식 주체가 되는 길이다. 이는 예술 작품이나 자연의 대상을 의지의 영향력 너머에서 바라보며 사물의 본질, 즉 시간을 초월해 현상 속에 드러난 존재만을 보는 시선이다.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 초월적 실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미적 경험이 작동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했는데, 이 대목은 길게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 ”사람들이 정신의 힘이 고양됨에 따라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찰 방식을 포기하고 […] 또한 추상적인 사유, 이성의 개념,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모든 것 대신에 자기 정신의 모든 힘을 직관에 바치고 이러한 직관에 완전히 사로잡혀, 그것이 풍경, 나무, 암석, 건물 또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러한 현재의 자연적인 대상에 대한 고요한 관조를 통해 의식 전체를 채운다면, 즉 의미 있는 독일어의 표현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에 완전히 빠져서, 즉 바로 자신의 개체, 자신의 의지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순수한 주관으로서만, 객관을 비추는 맑은 거울로서만 존재한다면, 대상을 지각하는 그 누구도 없이 대상만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되고, 따라서 사람들이 더 이상 직관으로부터 직관하는 사람을 구분할 수 없고, 의식 전체가 하나의 유일한 직관적인 상에 의해 완전히 채워지고 받아들여지면서, 양자는 하나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대상이 어떤 것에 대한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면, 즉 주관이 의지에 대한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게 되면, 인식되는 것은 더 이상 개별 사물 자체가 아니라 이념, 즉 영원한 형식, 이러한 단계에서의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성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동시에 이러한 직관 속에서 파악되는 것은 더 이상 개체가 아니라 순수하고 의지가 없고 고통이 없으며, 시간과 무관한 인식주관이다.”[2]

  • 쇼펜하우어는 이어서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에 언급된 풍경과 영혼의 일체성 체험기와 『우파니샤드(Upanishads)』에서 브라만이 선언한 “이 모든 피조물은 나이고, 나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3] 『우파니샤드』나 베단타(Vedanta)는 절대자 브라만을 만물의 기원으로서 모든 현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불멸의 영혼(아트만)이라고 제시한다. 바로 이 현실이 쇼펜하우어가 미적 경험으로써 달성되는 의식 상태와 동일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술은 의지를 부정하는 출가자의 방식만큼 영구적이지는 않다. 결국 예술은 종교와 동등하지 않으며, 종교의 일시적인 형태에 불과했다.

  • 불교의 특정 종파들은 예술 실천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해 왔으며, 회화, 도예, 서예, 꽃꽂이, 원예, 다도 등의 활동을 수행의 명상적 형태로 간주한다. 무언가를 만들고 행하는 것은 마음을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법구경』이 언급한 산만한 방해 없이 당장의 과업에 온전히 집중하도록 훈련시키는 몰입 활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적 명상의 목적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단순히 ‘예술’을 만드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니다. 불교를 고요한 미학이나 유쾌할 정도로 역설적인 재담으로만 바라보려는 이들에 의해 이는 종종 낭만화된다. 이러한 환상 속 불교는 실제 수행의 시험대에 결코 부응하지 못한다. 실천의 중심부에서 불교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종교의 겉모습만을 훑어내는 것은 상업과 손잡은 예술이 너무나도 능숙하게 해내는 일이다. 예술가, 큐레이터, 미술사학자들은 때때로 종교를 미학화하는 데 기꺼이 빠져든다. 마치 예술이 경건한 실천이라는 무관한 식물로부터 꺾어낼 꽃인 양, 예술이 종교와 깔끔히 분리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움직이기 때문이다.

  • 김수자의 비디오 속 열 번의 침묵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바로 이것인가? 불교나 힌두교, 혹은 이름 모를 노동자의 일상으로부터 우리 생활 속 시장에서 세계 관광 산업의 한 상품처럼 취급할 만한 보편적 핵심을 골라내라는 요구인가? 작가는 예술이라는 자유주의적 미명 아래 생활세계의 그림 같은 외피를 벗겨내고, 그와 무관한 내부를 흘러가는 강물에 내던지라고 권하는가? 지칠 줄 모르고 탐욕을 부리는 소비자들의 자아 구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상품화되는 초자본주의 시대에, 이들은 중대한 질문이 된다. 정녕 성스러운 것은 없는가? 시장이 대답한 바로는, 그 무엇도 신성하지 않다.

  • 엘리자베스 브라운(Elizabeth Brown)의 도록 에세이에 따르면, 강가에 있는 인물은 빨래하는 여인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다.[4] 또한, 작가는 수년간의 바느질 경험을 바탕으로 <바늘여인>에도 출연했다. 따라서 이 영상들은 민족지학적 기록이 아니다. 김수자가 브라운에게 말했듯이, <빨래하는 여인>은 탁한 강 물결 위로 흘러가는 힌두교 장례 의식의 흔적을 바라보며 인간의 운명을 고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작가는 예술 작품을 말 그대로 자신을 타인의 위치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구성하며, 관객이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한다. 이를 통해 그는 힌두교나 불교가 진단한 인간의 상황이 예술 실천의 엄밀함 속에서도 유효하다는 믿음을 지킨다. 작가는 이 둘을 구분하는 경계가 모호해졌다고 생각한 듯하다. 김수자가 참여한 는 웹사이트에 나와 있듯 불교를 종교로 이해할 필요 없이 마음의 과학으로 보는 프로젝트였는데, 그 원칙은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예술 작품에 생산적으로 적용해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5]

  • 인간 의식에 대한 불교의 분석이 만약 예술 실천과 놀랍도록 유사한 예리한 통찰을 낳는다면, 예술가들이 불교도, 혹은 힌두교도,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처럼 행동하는 것은 문화를 표면적으로 차용한 것에 불과한가? 쇼펜하우어 철학에 대한 간략한 탐구가 시사하듯, 예술의 독립적인 계시력과 예술적 천재성의 자율성을 확립하려는 현대적 프로젝트는 미적 경험이 인간 의식 기저의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종교적 경험과 유사하게 체화되는 작용이라고 단호히 주장한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그 본연의 방식으로 존재하는데 이는 인간 활동으로서 구축된 심신의 본성 때문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종교로 보지 않았다. 그는 예술을 삶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그 고통의 치료제가 아니라, 위안으로 간주했다. 예술은 세계를 무관심하게, 미적으로 바라본 결과에 불과하다. 따라서 예술은 종교보다 무언가를 더욱 정확히 파악한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뿐이다.

  • 위 내용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더라도, 김수자는 자신의 영상에서 힌두교도나 불교도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실제로 불교적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영상은 스스로를 한 점의 고요한 회화적 존재로 깎아내림으로써 안개 낀 호수 앞 사색에 잠긴 시인이 나오는 한국 및 중국 수묵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귀족 출신 시인을 평범한 노동자로 바꿔놓기도 하는데, 이는 아마 깨달음이란 시인이나 예술가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임을 말하기 위함일 테다. <빨래하는 여인>은 관객 그 누구라도 지속적인 응시 행위 속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이 상태에서 의식은 지각의 대상으로 가득 차 보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 자체가 되어 생각하게 된다. 이는 쇼펜하우어가 이성적 지식 또는 이성의 기본 구조로 규정한 주체-객체 구분을 극복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뿐만 아니라 해변을 거니는 이의 고정된 시선에서도 발견되는 이 몰입 상태 내에서, 자아와 그 작은 고통의 영역은 더없이 행복하게 사라져 버린다.

  • 느리게 움직이는 이 시야에는 단 하나의 프레임만이 존재하는데, 이는 부유물과 잔잔한 소용돌이에 의해 끝없이 관통당한다. 우리의 마음은 화면 바깥의 세계, 즉 지나가는 사물과 반짝이다 사라지는 반사광을 통해 간신히 추측할 수 있는 세계로 향한다. 통제되지 않는 수준에서 인간의 의식이란 단지 이 하나의 프레임, 다시 말해 여러 사건이 뒤엉킨 혼돈 위에 덧씌워진 연약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술과 명상이 추구하는 응시의 수련은 관객을 멈춰 세우고 침묵 속에 머물게 함으로써, 인간의 작은 틀 속에서 형태를 갖추어 가는 세계를 발견하게 한다. 잘 알려진 설법에서 부처가 말했듯이, “한 길 정도의 이 덧없는 몸 안에서 나는 세계와 세계의 탄생, 세계의 소멸, 그리고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본다.”[6] 고통의 도구는 고통을 끝내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부처는 더 높은 단계의 환생을 이루고 궁극적 해탈을 향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신성한 존재로 숭배되므로, 불교는 분명히 종교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불교적 명상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과학일 뿐 종교가 아니다. 후자에겐 오히려 예술 창작과 감상이 비종교적 명상의 형태로 작용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예술가가 원하는 바보다 예술과 삶을 더 엄격히 구분했을지라도,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명상처럼 작동하는 특별한 형태의 의식이며, 우리로 하여금 삶을 단순하게 하고 두려움과 욕망이 우리를 붙잡아두는 힘을 완화하도록 가르친다. 이러한 예술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이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명상과 같이, 명확히 바라보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 예술은 그 순간적 깨달음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하고자 한 바와 같이, 예술의 임무는 종교의 임무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술은 감각적인 사고, 즉 체화되거나 감각 중심적인 인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은 지각의 영역을 가득히 채우는 감각 내에서 사고하며, 우리가 실로 모든 경험에 적용하는 생각과 감정의 층위를 변화 및 심화시키려 한다. 종교 역시 초월을 다루지만, 그 궁극적 목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든, 다음 세상에서든 그곳에 머물게 하는 데 있다. 이처럼 비슷한 내용을 고려할 때, 종교가 이 이유나 다른 여러 이유로 예술을 항상 활용해 왔다는 점이나 예술가가 자신의 창작과 종교 신자의 방식으로부터 흥미로운 유사점을 발견한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서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수자는 우리를 믿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관찰자로 만들려는 것이다.

[Notes]
[1] The Dhammapada: The Path of Perfection, tr. Juan Mascaró (London: Penguin, 1973), 40.
[2] Arthur Schopenhauer,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tr. E. F. J. Payne, 2 vols. (New York: Dover, 1969), vol. 1, 178-79, §34. 강조는 원문을 따름. (역자 주: 국문본은 다음과 같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이서규 옮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세창출판사, 2024. 277-78.)
[3] 위의 책, 181. (역자 주: 국문본은 다음과 같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82.)
[4] Elizabeth A. Brown, “Exploring WOW; or, How Works of Art Work,” in WOW: The Work of the Work, exhibition catalogue (Seattle : Henry Art Gallery, University of Washington, 2005), 15.
[5] www.artandbuddhism.org, p. 1.
[6] 팔리어 대장경, 《앙굿따라 니까야》 인용. Walpola Sri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Oxford: Oneworld Publications, 1997), 42.


─ 『Curator: The Museum Journal』, vol. 49, no. 2, 2005년 가을.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전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