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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Whether we try to make it or not, the sound is heard" [1]
자연의 4원소 '물, 불, 흙, 공기'와 그것의 유기적 결합을 근간으로 하는 김수자의 신작 <Earth-Water-Fire-Air, 2009>는 시각적으로만 보면 전형적인 화산지대의 자연풍경들로만 구성되었다. 이 풍경들은 작가의 의도 적 개입, 인위적 변형, 혹은 그 어떤 연출도 가하지 않은 '자연현상' 그 자체를 포착한 것이다. 작가는 관객을 그 자연 앞에 말없이 데려다 놓는다. 도쿄, 상하이, 뉴델리, 뉴욕, 멕시코 시티, 카이로, 런던, 라고스 <바늘여인, (1999-2001)>, 파탄, 하바나, 예루살렘, 사나, 리오 데 자 네이로, 자메나 <바늘여인>(2005) 등, 세계 곳곳의 수 많은 사람들 속으로 관객을 데려다 놓듯이 말이다. 단, 세계 구석 구석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삶을 목도하며 그곳으로 관객을 안내하던 작가의 뒷모습이 여기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바늘여인>에서의 시점이 나 자신이 내 등을 바라보는 시점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의 나의 시점은 나와 관객의 몸 너머에 존재 하며, 단순한 풍경 이상을 바라보는 시점이다. 즉 '제 3의 눈'의 응시라고 할 수 있겠다." [2]
작가의 뒷모습은
-“물은 불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땅이 불 과 물, 공기의 요소를 가지고 있듯이, 각 원소들은 서로 순환하고 연계되 는 관계다. 그것을 4가지 원소로 각기 보는 과정에서 각 원소들의 '홀로 설 수 없음, 기대어 있음'을 드러내 보고자 했다.” [3]
이러한 사유를 연장하며, 김수자는
김수자 작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무엇을 다루든 간에 -도시, 사람 들, 삶, 세계 그리고 자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유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작가/주 체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으며, 작 가/주체가 보는 세계는 더 이상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를 향하고 있지 않다 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각기 다른 요소들의 복합적 집합체로서 이 세상의 '풍경'을 아우르는 '주체'는 그의 작업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전 세계의 다양한 도시들, 자연, 사람들, 그들의 삶에 주목하며, 그것을 향 해서 있는 이 '작가주체'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내면적 긴장과 갈등을 반 영하는 낭만주의적 주체도 아니고, 현세를 초월한 절대적 숭고를 추구하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영웅적 주체도 아니며, 감각적 경험과 시각을 연결하며 인지적 현상을 제안하는 현상학적 주체, 혹은 사회문화적 침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적 주체도 아니다. 김수자의 작업은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이러 한 '하나의 주체'를 모색하거나 반영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시공간 속의 다수 주체-관객의 공존과 그 익명의 주체들의 다각적 관점의 탄생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관객이 <바늘여인>, <빨래하는 여인>의 '뒷모습'에 주목하 는 순간 관객은 '작가의 몸'을 입고, 바로 작가가 선 자리에서 작가가 바라 보는 세계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 누군 가가 사용했던 이불보로 버려진 헌 옷들을 싸며, 그것을 싣고 이 세상 곳곳을 찾아 나서는 <보따리> 작업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김수자의 작업에서 관객은 더 이상 작가가 제시하는 하나의 관점을 수용 하는 수동적 주체가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관객은 능동적 주체로서 작가가 안내하는 삶의 형태들 안에서 적극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더 많은, 또 다른 삶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한 긴 여정을 작가와 함께 떠 날 수 있으며, 이 세계의 다양한 현실, 서로 다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김수자의 작품들은 대부분 극도로 정적이고 절제되어 있으며 지나치리만치 단순한 구성을 갖고 있다. 그 어떤 내러티브도 없으며, 극적인 플롯도 존재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작품들은 놀라운 웅변력을 갖고 있다. 그 것은 바로 김수자 작업 속의 사물들(보따리, 바늘, 거울)의 웅변을 통해서 펼쳐지고 있다. 그의 사물들은 마치 고대 수사학자들의 의인법prosopopoeia을 연상시키는 설득력으로 관객을 서서히 압도하고 있다. 이 '의인법'은 단순히 사물의 의인화된 이마주리에 멈추지 않고, 의인화된 사물들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하며, 사물들에게 말을 하게 한다는 보기 드문 수사학 가운 데 하나다. 일반적으로 사물들을 통해서 신의 지혜를 말하게 함으로서 인간 의자만 혹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었던 이 의인법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에서 출발하고, 인간과 삶을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김수자 작업의 사물들 의 체험을 통해서 그 효력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어머니와 함께 이불보를 꿰매던 어린 시절, 바늘 끝이 천을 꿰뚫는 순간, 작가는 자신 의 몸을 관통하는 알 수 없는 에너지를 느꼈고, 각기 다른 천 조각들을 하나 씩 연결하면서 탄생한 하나의 거대한 이불보에서 삶의 애잔한 냄새를 맡았다.
"바늘은 미디엄, 신비, 자웅동체, 추상, 바로미터, 샤만이다. 그리고 나의 몸도 그러한 것이다" [4] 라는 작가의 선언과 함께, 이 '바늘-몸'의 세계 를 향한 조용한 웅변이 시작된다. 바늘이 된 작가의 몸은 바느질을 한 땀 한 땀 뜨듯 세계 곳곳, 각기 다른 문화, 다양한 삶, 인간의 사랑, 연민, 번뇌, 외로움 등을 연결하며, 형형색색의 '삶의 보따리'를 탄생시킨다. 각양각색 의 인종, 문화, 그리고 그것의 '다름'의 흔적들은 이 보따리에 새겨지고, 또 다른 시공간에서 또 다른 이야기들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다.
바늘은 시공간의 '축'이 되고, 그 축은 또 다른 다수의 주체와 타자의 '연결' 을 허용하며, 관객과의 동시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보따리 에 담긴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함께(보따리 트럭 시리즈), 세상의 모든 인류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바늘'(<바늘여인>, <빨래하는 여인> 시리즈)은 나와 타자, 집단과 개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유를 가능 하게 하는 '거울'(<거울여인> 시리즈)과 조우하며, 관객을 이 사물들의 행 보에 다시 한 번 자연스럽게 동참시킨다. 크리스탈 팔라스 바닥 전체에 깔린 거울은 '펼쳐진 바늘'이 되어 거울의 허상과 실상의 바느질을 시도하며 <호흡: 거울여인>(2006), 같은 해 베니스 라 페니체 극장에서 공연된 <호흡: 보이지 않는 바늘/보이지 않는 거울>(2006)은 원색 모노크롬 프로젝션과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녹음한 사운드 작업과 함께 관객을 삶과 죽음 의 명상으로 초청하며 몸/바늘/거울의 완전한 비물질화를 통해 물질과 정신 의 합체를 지향한다. 그리고 이클립스eclipse 현상을 포착한 해와 달, 검푸른 바다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과 달빛의 자연현상을 담은 <거울여인: 해와 달>(2008)을 통해서 마침내 작가는 인간과 우주의 호흡과 합일을 시도하며, 만 물의 근원, 자연의 원리에 대한 질문을 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질문들이 바로
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관객들은 '바늘'과 '보따리'를 통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작가의 몸과 함께 김수자의 작업세계에 동참해 왔다. 그의 퍼포먼 스와 오브제들에서 포스트 모던적 유목주의 혹은 글로벌 컬처를 읽는 사람 들도 있고,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한국적 오브제들과 색깔, 동양문화에 대 한 참조들을 민족적 정체성, 페미니즘 등과 연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동, 다문화주의, 다름을 지향하는 오늘날, 각각의 문화적 코드와 참조들은 소 속 집단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하지만 각기 다름의 자율성을 보존하려는 시 도들, 또 그것의 평이한 공존만을 지향하는 것이 오늘날 예술의 현주소라고 생각한다면, 역설적으로 이러한 정체성들은 민속적 혹은 이국적 요소들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작가들은 그들 고유의 문화에 대한 참조들과 지역적 코드들을 기반으로 작업한다. 김수자의 작업세계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수자 작업에서 이러 한 요소들이 지역을 넘어서 전지구적 차원에서 그 의미를 구축하며, 순회할 수 있는 경로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그의 작업은 각기 다른 문화적 종자들의 다수성 사이에서 모종의 협력을 시도하며, 또 그것의 특이성들간의 지속적 번안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 전반에서 감지 할 수 있는 미니멀리즘 미학과 '레디유즈드' 개념은 한국적 오브제들, 지역 적 문화, 그리고 동양 사상을 서구 미술사와 연결시키고, 새로운 번안을 거치며, 인류의 삶을 순회할 수 있는 특이적이고 독창적인 경로를 형성하고 있다. 김수자의 보따리, 이불보, 바느질 등은 한국전통, 동양사상과 서구 미술사적 코드를 가로지는 하나의 모델을 탄생시켰다. 김수자의 모든 사물들은 레디메이드 오브제들이다. 물론 '레디메이드 개념은 오늘날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슈는 아니다. 핵심은 김수자가 레디메이드 오브제들을 취한 것에 있다기 보다는, 그 레디메이드 개념을 어떻게 확장하고 전환시켰는가에 있다.
"나의 작업은 이미 존재하는 오브제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다. 이 선재성(先在性)은 특히 서양의 관점에서는 일상 속에 감춰져 있다. 미술사는 이러한 선재성을 말하지 않고, 오브제의 선재성을 개념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누군가가 이것을 그 본래의 기능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하며, 재현/ 퍼포먼스의 프레임 안에서 보여주었을 때 비로서 개념화되는 것이다. 미술 사에서 오브제의 고유한 컨텍스트를 창조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작업이다. 나의 작업은 그 이전의 삶이 없는 새로운 오브제를 만드는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5]
보따리, 이불보, 혹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그의 관심 은 이미 만들어진 것(행위/결과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사용 되어져 왔는가(시간/경험)에 있는 것이다. 즉, 작가가 누군가가 입었던 헌 옷가지나 덮고 살았던 이불보를 사용했을 때, 작가는 그 물건을 사용한 사람의 '삶'을 사용하는 것이다. 김수자는 익명의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이 배어 있는 이불보, 보자기, 보따리를 통시적 시간성을 가진 특이적 오브제로 전 환시키며, 우리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사람의 숨결을 느끼며, 인간애를 찾아 나선다. 그의 작업에서 '레디메이드readymade'에서 '레디유즈드readyused, 로의 이행은 이불보를 꿰매고, 보따리를 싸며,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들의 삶의 여정에 동참하는 '수행성'을 통해서 전개된다. 그의 이러한 수행적 태도는 작가 스스로 익명 가운데 하나가 되어 또 다른 익명의 삶을 감싸고 펼치며, 이미 존재하는preexisting 하지만 보이지 않는 삶의 궤적을 드러내 며 재맥락화하고 있다. 알록달록한 이불보는 인생만사가 새겨지는 삶의 프레임이 되고, 형형색색의 보따리는 이러한 익명의 삶을 포용하는 유연한 그릇이 되며, 이러한 모든 것을 연결하는 바늘-몸은 자신을 소멸시키며 익명의 주체들을 가시화하는 제스처가 된다. 그리고 화면에서 사라진 작가/주체는 '제 3의 눈'이 되어 보다 근원적인 삶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 다. 이미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었던 오브제들의 보이지 않는 시간들, 삶, 그 리고 그 흔적을 통해서 현재를 맥락화하는 과정은 김수자의 작업에서 언제나 최소한의 개입과 최소한의 행위로 탄생된다. 그의 작업의 최소한의 미학은 '아무 것도 만들지 않으며, 그 무언가도 되려고 하지 않는' 일종의 참선 과정과도 같다. 만들지 않으면서 만든 것보다 더 강렬한 것을 드러내는 것, 소멸을 통해서 영속성을 가시화하는 것, 최소한 것으로 최대한의 것을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김수자의 작업세계인 것이다.
[각주]
─ Essay of the Catalogue, '지·수·화·풍' from the artist's solo show at the Fondation D'Enterprise Hermès. Seoul, Korea. 2010. pp. 3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