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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무는 김수자

Jung Joon Mo │ Between Existence and Non-Existence

Jung Joon Mo

2008

경계선 상의 보따리 (Bottari on the Borderline)

  • 김수자의 보따리는 매우 선명하다. 그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는 눈이 부실 지경이다. 하지만 그의 보따리가 갖는 오브제로서의 선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분명한 메시지나 미학을 던져주지는 않는다. 관객에게 오랜 시간 인내하는 시간을 요구 할 뿐이다. 일상에서처럼 슬쩍 지나치지 않는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과 일상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김수자의 작품은 그곳에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즉 말 걸기를 통해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으로 메시지를 주려고 하기보다는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또 다른 자신을 만나도록 도와준다. 그의 작품은 그런 점에서 명료하다. 아니 단순하다. 하지만 그 관계 속에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의 작품을 일상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외면하고 지나치는 일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보따리를 외면하기에는 왠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보따리는 현존하는 오브제이자 현실 그 자체인 때문이다. 사실 많은 예술은 가정이자 허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예술의 허구성은 삶의 일상성이라는 블랙 홀로 빠져들기 쉬운 인간의 속성으로부터 온갖 장치와 착시현상의 장치들을 걷어내고 순수한 예술적 대상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그 전제가 허구라는 점에서 김수자의 보따리와는 다르다. 사실 김수자의 작품이 여타의 작품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보따리가 현실에 존재하는 예술품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체를 넘어 보따리가 포함하고 있는 은닉된 사물과 그 관계로 인해 또는 예술적 허구가 기미만 보여주는 불투명한 느낌의 감상 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도구였다면 그의 보따리는 예술적 현실 그 자체로서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현전하는 보따리는 예술적 존재태로서 단순하게 참과 거짓으로 분리 할 수 있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보따리는 현존성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의 실재적 현실도 중요하지만 그 보따리의 다양한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보따리가 갖는 다양한 의미와 그 변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보따리는 단순하게 어느 무엇을 싼 덩어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전통적인 포장방법인 보따리는 마치 물과 같은 속성을 지녔다. 무엇을 싸느냐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지고 모양 또한 변한다. 또 용도를 다하면 천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물은 다른 용기에 담기지만 천은 담는 용기 그 자체라는 점에서 다르다. 물은 어느 곳에 담기던 물이라는 고유의 속성을 지니지만 보자기는 내용믈에 따라 그 모양이나 성격이 달리진다. 그 점에서 물은 자신을 끝내 잃어버리지 않지만 천의 하나에 불과한 보자기가 보따리라는 오브제로 변모하면 각각 다른 얼굴과 모습을 지닌다.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가진 보따리를 통해 김수자는 다양한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삶의 영욕을 성공과 실패를, 희망과 좌절을 투영시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가끔 그의 작품에 거울을 사용해서 공간을 확장시키거나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도록 장치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이런 시도는 그의 보따리가 개개인의 또는 관객하나하나의 삶을 담아내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고안이라고 추측한다. 아무리 더러운 시궁창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도 자연을,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비추어 준다. 그래서 비록 더러운 물이지만 물속에 구름이 흘러간다. 때로는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까지도 비추어 준다. 정말 아름답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김수자는 물웅덩이의 의미보다는 수면이 비친 풍경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말하려 할뿐이며 관객들에게도 웅덩이 물의 맑고 탁함보다는 물에 비친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물에 비친 풍경은 언제나 유목민처럼 움직이고 떠도는 것이지 붙박이는 아니라는 점이다.

보자기, 세계를 싸서 보따리가 되다. (Pojagi, Creating bottari by wrapping the world)

  • 김수자가 보따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미 십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을 덧대거나 이어서 캔버스라는 사각형의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는 대학원 시절 천이라는 매체와 바늘과 실 이라는 전통적인 규방문화적 재료와 방법론을 차용해서 작업을 시도했다. 그의 이런 작업은 당시 한국적 환원주의라는 교조적인 미술풍토에 대한 외면인 동시에 모더니즘 조차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의사모더니스트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회화의 지지체로서의 평면의 의미가 강조되던 시절 평면 그 자체도 결국은 오브제라는 결론에 이르면서 그는 평면을 버리고 보다 순수한 평면적 존재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삶과 유리된 교양 있는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모더니즘적 사고로 결별을 선언하고 민족주의를 외치는 사이비 좌파들의 ‘삶의 예술’이 아닌 삶의 진정성에 방점을 찍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는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나의 사고와 감수성과 행위가 모두 일치하는 은밀하고도 놀라운 일체감을 체험했으며, 묻어두었던 그 숱한 기억들과 아픔, 삶의 애정까지도 그 안에 내포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이 갖는 기본 구조로서의 날실과 씨실, 우리 천의 원초적인 색감, 평면을 넘나들며 꿰매는 행위의 천과의 자기 동일성,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향수--- 이 모든 것들에 나 자신은 완전히 매료되었다."<1988년 현대화랑 도록-작가노트 중에서>

  • 이렇게 그의 초기 작업은 천에서 시작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천은 일상적인 옷에 다름 아니었다. 옷이란 인간이 부끄러움을 알고 나서부터 걸치기 시작한 것으로 인간에게 옷이란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대체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또 옷이란 인간에게 있어서는 삶의 조건이자 삶의 향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옷은 제 2의 피부라는 말처럼 그 사람을 대변하기도 한다. 즉 옷이란 외피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사람 됨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세상을 떠난 고인의 옷을 태우는 우리네 관습도 따지고 보면 옷이란 것이 갖는 인물의 대체재로서의 의미 때문일 것이다. 이런 보자기가 오브재를 이루면 보따리가 된다. 사실 보자기는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우리말 외에 ‘보’(褓) ‘복’(袱) 또는 ‘복’(福)으로 불린다. 여기서 복 복자를 쓰는 경유는 보자기를 복을 싸두는 용기의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 각 지방별로도 이름이 조금씩 달라서, 보대 밥부재 보재기 보래기 포대기 보자 보따리 등 다양하게 불린다. 보자기가 처음에는 무언가를 가리고 덥는 옷의 개념이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보자기인 선암사의 탁자보를 탁의(卓衣)라 부르고 갓난아이를 싸는 천을 강보(襁褓)라 부르는 것도 바로 옷의 의미가 지녔기 때문이다.
    이어령은 ‘서양인은 가방을 만들어냈고 동양인은 보자기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같은 운반용, 포장용 수단이지만 가방은 한 가지 기능만 하는 대신에 보자기는 다양한 목적과 수단을 지닌다. 또 가방은 용도가 없을 때도 자체 모양과 무게를 지니지만 보자기는 접어두면 된다. 게다가 자신을 위한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정한 자기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떤 모양이라도 다 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양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두루 다 쌀 수 있다. 그래서 보자기는 그 자체가 ‘공(空)’인 까닭에 천변만화(千變萬化)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보자기로 김수자는 세계를 싸서 보따리를 짓기 시작했다.
    그의 바느질(The Heaven & the Earth, 1984)은 연역적 오브제로 이어진다. 그에게 바느질은 바늘을 가지고 천에 구명을 내어 서로를 잇는 행위였다. 하지만 바느질이란 바늘로 상처를 내는 한편 그 상처를 치유한다는 이율배반적 행동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바느질이란 하나의 행동이 물질이나 사물의 성격 그리고 인간의 행동이 또 같지만 경우에 따라 그 결과와 의미가 서로 다르게 인식되고 나타나는 것처럼 이중적 의미와 가치, 상반된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지게 등 민속적인 농기구들이나 사다리, 빨래걸이 등을 일일이 천으로 싸고 감는 행위<Untitled, 1991>를 통해 당시 물성에 대한 생각을 안료가 아닌 천을 통해 구현하기도 한다. 물질을 에워쌈으로서 새로운 물질로 치환시키는 이런 작업은 당시 매우 신선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렇게 진화를 시작한 김수자의 천과 보자기는 사각의 틀을 벗어나 벽면에 부착되기도 하고 <어머니의 땅을 향해, 1990-91> 바닥에 놓이거나 모서리에 걸쳐지거나 또는 다른 오브제를 감싸면서 새로운 공간 즉 장소와 만나게 된다. 이 장소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만남이 일어나는 장소, 그리하여 본래의 의미가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로 전이되는 곳, 새로운 변형의 장소를 만남으로서 보따리 또는 보자기도 관객도 새로운 환경에서 서로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장소’가 된다.(꽃을 향하여, 1992, P.S. 1) 향후 이 장소라는 개념은 그의 보따리만큼이나 작품을 결정짓는 뼈대가 된다. 그리고 그의 보자기는 이 장소에 던져진 것처럼 널려있거나 전시장 벽면의 틈새에 끼워지는 형태의 전면적인 설치작업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더 이상 천을 자르고 꿰매는 일 대신에 천에 조그마한 힘을 가해서 있는 그대로의 천에 최소한의 형태를 부여하는 보따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치유하는 보따리 (Healing Bottari)

위무와 치유의 보따리 (Bottari that heals and mourns)

보따리를 풀면서 (Unwrapping Bottari)

  •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많은 것들을 만나지만 그것들을 그냥 스쳐지나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외면하기도 하고 인식하지 못 한 채 지나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일상은 과거나 현재와 그렇게 깊은 관련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의 삶이란 일상적인 사물들이 던지는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것인 동시에 말 걸기이다. 그리고 그 말 걸기에 일상이나 사물과 나 또는 인간과의 관계맺음이다. 즉 관계란 일상성의 또 다른 말이다. 삶은 그 주변 또는 중심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궁극적인 의미의 삶이 목표가 너무도 크고 방대하다 하더라도 가장 일상적인 상태에서 머물면서 ‘있는 그대로’ 또는 ‘되는 대로’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세상과 사물과의 만남과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세속적인 재미나 호기심에 이끌려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명백한 미래는 잊어버리고 일상 속에서 머물기를 즐긴다. 즉 사람들은 일상성 속에 함몰되어 그 궁극의 의미나 실천방법을 잊어버리고 현실에 몰입한다.
    이렇게 김수자의 말 걸기는 계속된다. 일루젼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에서 비롯된 바느질과 싸고 감는 행위는 자연으로 들어가 자연과 인간의, 신체와 자연과의 일체를 이루고 다시 이는 3차원의 보따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보따리는 때에 따라 묶이기도 싸매기도 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빛이라는 메가 보자기를 통해 종래의 물성과 역사적 의미를 탈색시켜 새로운 치유의 산물로 환원시킨다. 이렇게 그의 작업은 일관되게 천으로 기호화된 신체이자 작품을 지지하는 바탕이자 표면이기도 하다. 이런 그의 작업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 있기도 하고 때로는 차안에 때로는 피안에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자기의 겉과 안이 다르지 않듯 부조리한 것들의 집합체인 모순덩어리인 인간의 현현이 김수자의 ‘보따리’이다. 그의 보따리는 존재태인 동시에 존재들로 가득 찬 존재의 그 자체이자 모순으로 점철된 인간의 욕망 덩어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따리는 존재하는 오브제로서의 덩어리이자 곧 풀어헤치면 한 장의 천으로 돌아가는 이중적 구조가 그의 작품을 이끌어 가는 모체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구조를 통해 예술과 삶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예술은 언제나 일상화되며 일상도 언제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순환적 구조이기 때문에 예술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약자를 힘 없는 사람을 우선 배려한다. 이런 박애주의적 태도와 함께 동양적 또는 한국적이라는 신비주의적인 로칼리즘에 천착하기보다는 서구 모더니즘이 간과했던 가치들을 찾아내어 이것들을 새롭게 회생시키면서 예술적인 삶보다는 삶과 함께 하는 일상의 예술을 실천하는 삶의 진정성이 묻어나는 예술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은 여전히 증폭되어 갈 것이다.

─ Originally Published in Shin DongA Magazine, Vol. 585, June 2008.

  • Jung Joon Mo is a writer and curator based in Seoul, and is currently the Exhibition Director for Koyang Culture Foundation. He was chief curator of th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in Korea, and was the Exhibition Director of the Gwangju Bienn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