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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 Joon Mo │ Between Existence and Non-Existence
2008
김수자가 보따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미 십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을 덧대거나 이어서 캔버스라는 사각형의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는 대학원 시절 천이라는 매체와 바늘과 실 이라는 전통적인 규방문화적 재료와 방법론을 차용해서 작업을 시도했다. 그의 이런 작업은 당시 한국적 환원주의라는 교조적인 미술풍토에 대한 외면인 동시에 모더니즘 조차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의사모더니스트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회화의 지지체로서의 평면의 의미가 강조되던 시절 평면 그 자체도 결국은 오브제라는 결론에 이르면서 그는 평면을 버리고 보다 순수한 평면적 존재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삶과 유리된 교양 있는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모더니즘적 사고로 결별을 선언하고 민족주의를 외치는 사이비 좌파들의 ‘삶의 예술’이 아닌 삶의 진정성에 방점을 찍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는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나의 사고와 감수성과 행위가 모두 일치하는 은밀하고도 놀라운 일체감을 체험했으며, 묻어두었던 그 숱한 기억들과 아픔, 삶의 애정까지도 그 안에 내포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이 갖는 기본 구조로서의 날실과 씨실, 우리 천의 원초적인 색감, 평면을 넘나들며 꿰매는 행위의 천과의 자기 동일성,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향수--- 이 모든 것들에 나 자신은 완전히 매료되었다."<1988년 현대화랑 도록-작가노트 중에서>
이렇게 그의 초기 작업은 천에서 시작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천은 일상적인 옷에 다름 아니었다. 옷이란 인간이 부끄러움을 알고 나서부터 걸치기 시작한 것으로 인간에게 옷이란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대체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또 옷이란 인간에게 있어서는 삶의 조건이자 삶의 향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옷은 제 2의 피부라는 말처럼 그 사람을 대변하기도 한다. 즉 옷이란 외피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사람 됨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세상을 떠난 고인의 옷을 태우는 우리네 관습도 따지고 보면 옷이란 것이 갖는 인물의 대체재로서의 의미 때문일 것이다. 이런 보자기가 오브재를 이루면 보따리가 된다. 사실 보자기는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우리말 외에 ‘보’(褓) ‘복’(袱) 또는 ‘복’(福)으로 불린다. 여기서 복 복자를 쓰는 경유는 보자기를 복을 싸두는 용기의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 각 지방별로도 이름이 조금씩 달라서, 보대 밥부재 보재기 보래기 포대기 보자 보따리 등 다양하게 불린다. 보자기가 처음에는 무언가를 가리고 덥는 옷의 개념이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보자기인 선암사의 탁자보를 탁의(卓衣)라 부르고 갓난아이를 싸는 천을 강보(襁褓)라 부르는 것도 바로 옷의 의미가 지녔기 때문이다.
이어령은 ‘서양인은 가방을 만들어냈고 동양인은 보자기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같은 운반용, 포장용 수단이지만 가방은 한 가지 기능만 하는 대신에 보자기는 다양한 목적과 수단을 지닌다. 또 가방은 용도가 없을 때도 자체 모양과 무게를 지니지만 보자기는 접어두면 된다. 게다가 자신을 위한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정한 자기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떤 모양이라도 다 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양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두루 다 쌀 수 있다. 그래서 보자기는 그 자체가 ‘공(空)’인 까닭에 천변만화(千變萬化)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보자기로 김수자는 세계를 싸서 보따리를 짓기 시작했다.
그의 바느질(The Heaven & the Earth, 1984)은 연역적 오브제로 이어진다. 그에게 바느질은 바늘을 가지고 천에 구명을 내어 서로를 잇는 행위였다. 하지만 바느질이란 바늘로 상처를 내는 한편 그 상처를 치유한다는 이율배반적 행동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바느질이란 하나의 행동이 물질이나 사물의 성격 그리고 인간의 행동이 또 같지만 경우에 따라 그 결과와 의미가 서로 다르게 인식되고 나타나는 것처럼 이중적 의미와 가치, 상반된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지게 등 민속적인 농기구들이나 사다리, 빨래걸이 등을 일일이 천으로 싸고 감는 행위<Untitled, 1991>를 통해 당시 물성에 대한 생각을 안료가 아닌 천을 통해 구현하기도 한다. 물질을 에워쌈으로서 새로운 물질로 치환시키는 이런 작업은 당시 매우 신선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렇게 진화를 시작한 김수자의 천과 보자기는 사각의 틀을 벗어나 벽면에 부착되기도 하고 <어머니의 땅을 향해, 1990-91> 바닥에 놓이거나 모서리에 걸쳐지거나 또는 다른 오브제를 감싸면서 새로운 공간 즉 장소와 만나게 된다. 이 장소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만남이 일어나는 장소, 그리하여 본래의 의미가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로 전이되는 곳, 새로운 변형의 장소를 만남으로서 보따리 또는 보자기도 관객도 새로운 환경에서 서로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장소’가 된다.(꽃을 향하여, 1992, P.S. 1) 향후 이 장소라는 개념은 그의 보따리만큼이나 작품을 결정짓는 뼈대가 된다. 그리고 그의 보자기는 이 장소에 던져진 것처럼 널려있거나 전시장 벽면의 틈새에 끼워지는 형태의 전면적인 설치작업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더 이상 천을 자르고 꿰매는 일 대신에 천에 조그마한 힘을 가해서 있는 그대로의 천에 최소한의 형태를 부여하는 보따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보따리가 된 보자기는 김수자와 여행을 떠난다. 사실 한국의 보따리는 안으로는 포용과 감싸 안음인 동시에 외적으로는 배척과 경계를 동시에 상징한다. 따라서 보따리의 안은 내 식구지만 밖은 남이다. 하지만 그 안과 밖의 의미가 고정된 것은 아니다. 보따리를 푼다는 것은 정착과 안식을 뜻하는 정주를 의미하고 싼다는 것은 결별과 방랑을 의미하며 유목민의 삶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정착하고자 하면서도 그 역마살을 어쩌지 못해 반복적으로 길을 떠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런 보따리의 양면성은 김수자 작업의 키워드이자 핵심이다. 김수자는 보따리를 통해 일상과 예술을 때로는 동시에 때로는 분리하서 서로가 서로를 조명하기도 하고 조망하기도 한다. 이런 그의 보따리는 1997년부터 여행을 떠난다. 물론 그의 이런 유랑은 이미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1993년 <연역적 오브제-옷과 천>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옷감의 일체화를 실험했던 그는 퍼포먼스와 비디오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보따리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런 그의 행동은 보따리의 이중적 의미를 확인하거나 실천하기 위한 실험이자 실천이었다. 이듬해 그는 관훈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전시장 밖에 옷을 가득 싼 보따리를 적당하게 쌓아 외부로 나오더니 이후 경주 옥산서원 계곡에서 이불보를 헤쳐 계곡을 덮었다가 다시 보따리에 사는 퍼포먼스 <자연에 눕다.> (1994년 경주옥산서원계곡) 를 행하면서 전통과 자연이라는 절대적인 환경 속에서 보따리로 의미 지어지는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보따리는 경주의 양동마을의 고가에서 다시 민숙마을이라는 시간과 장소 속에 설치되어 작품화 한다. 이후 이런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설치와 행위는 다시 인천의 용유도 백사장에서 다시 환생한다. 이런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 보니 먼 길을 떠나기 전 천지신명께 길 떠나는 것을 고하며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의식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그의 이런 유랑벽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군인으로 나라에 봉사했던 아버지를 따라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대개 군인들은 일 년이나 2년 단위로 임지가 바뀌는 지라 그 가족들까지도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언제나 떠 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단촐 한 살림살이와 이부자리 두어 채를 이불보따리에 싸서 떠나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쓸쓸한 유랑민의 가장 호사스러운 가재도구는 아마도 이불보가 아니었을까. 이불보의 그 처연한 아름다움은 짧은 시간이지만 사귀었던 친구들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친구들에 대한 기대를 아울러 의미하기도 했다. 미지의 장소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이라는 보자기의 안과 밖 같은 이중적 구조는 김수자의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분자이다. 이러한 그의 보자기는
1990년대 중반부터 김수자는 본격적으로 그의 퍼포먼스를 단지 기록하는 것이 아닌 퍼포먼스와 비디오가 결합된 작품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비디오 작품은 아마도 수십 개 아니 수 백 개의 보따리를 트럭에 싣고 11일 동안 전국을 달리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라는 제목의 비디오 작품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작품은 비디오 작품인 동시에 그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기록물로 그의 작품의 골간을 이루는 유랑(Nomad)이라는 개념의 집합이자 결산이기도 하다. 이 비디오 작품에서 작가는 보따리를 실은 화물차 짐칸에 마치 보따리처럼 함께 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보따리에 삶을 맡긴 익명의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들과 여정을 같이한다. 그에게 있어 그의 몸은 움직이는 또 하나의 보따리이다. 사랑과 욕망, 겸손과 자만, 절제와 욕망, 채움과 비움, 편협과 포용, 이기심과 배려같은 상충된 모든 현상들이 천의 피부를 통해 안과 밖으로 갈라서는 접점에 그는 그들을 대신해서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움직이는 트럭의 화물칸에서 마치 석고상처럼 움직임이 없는 작가의 뒷모습을 뒤로하면서 주변은 물처럼 흘러간다. 움직이는 것은 트럭일진데 마치 주변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과연 진실일까 아니면 착시현상일까. 이러한 비디오 작업은 <바늘여인>(1999~2001)이란 제목으로 이어진다. 수만의 인파가 지나가는 도쿄와 상하이, 뉴 델리, 뉴욕, 멕시코, 카이로, 라고스의 도심에서 인파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있는 작가의 모습과 일본 기타쿠슈의 돌산위에 비스듬히 누워 안식을 취하는 작품에 이어 카이로와 멕시코와 라고스의 도로 위에서 보시를 요구하는 (2000~2001)과 뉴델리와 카이로에서 길에 작가자신이 길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2001)과 델리의 바라나시로 유명한 야무르 강가 저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잡은 <A Laundry Woman - Yamuna River, India> (2000)로 이어진다. 그리고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된 (2005)로 이어진다. 네팔의 파탄과 쿠바의 하바나, 리우 데 자네이로, 챠드의 은자메나, 예면의 사나와 예루살렘에서 예의 뒷모습을 보인 채 그들을 함께 걷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모습의 비디오를 통해 숭고한 역사와 시간의 견고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도시가 갖는 노예무역이라는 치욕스러운 인간의 욕망과 휴머니티의 역사, 살육과 투쟁 그리고 역설적으로 평화라는 장소성과 역사성을 일깨워 주면서 아름다운 화면에 감추어진 인간의 욕망과 절제사이의 간극은 더욱 넓어지고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놀라움은 더욱 확대된다.
─ Originally Published in Shin DongA Magazine, Vol. 585, June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