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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원전 방류제, 김수자의 바늘이 되다.

최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 사업관리팀장)

2010

  • 20세기 모던 아트의 등장은 물질(matter) 개념의 확산, 잠재의식과 정신분석학의 영향,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 등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비교하여, 21세기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의 특성은 과연 무엇일까? 수잔 솔린즈(Susan Sollins)에 의해 주도된 <Art 21 : Art in the Twenty-First Century>(2001-2009) 프로젝트에서, 현대 미술 비평가와 큐레이터들은 ‘장소(Place)’, ‘정신성(Spirituality)’, ‘정체성(Identity)’, ‘소비(Consumption)’의 개념이 21세기 현대 미술에 있어서 시각언어의 확산을 이루어 낸다고 이야기하였다. 김수자의 작품세계 역시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상세히 소개되었다. 유동하는 삶의 표현,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유, 타자와 구별되는 작가의 정체성,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는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의식 등이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현대미술의 가능성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 지난 해 12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관 밖에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그 가능성을 탐색해 보기 위한 첫 번째 파일럿 프로젝트로서 김수자의 멀티 채널 비디오 작품인 <지·수·화·풍(Earth·Water·Fire·Air)> 시리즈를 선정하여 <영광원자력발전소 아트프로젝트>를 준비해왔다. 당시에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진들 사이에선 새로운 형식의 아트 프로젝트에 관한 진지한 토론들이 심심치 않게 전개되곤 하였다. 미술관 영역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전시와 프로젝트를 밖으로 끌어내어 미술관의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일본의 ‘나오시마(直島)프로젝트’, 프랑스의 ‘르와르(Loire)강 프로젝트’ 등이 살펴졌고 각 프로젝트의 장, 단점이 토론되었다. 그러는 중에 세계 경제계의 중요한 동반자로 등장한 한국의 산업 역량을 예술 프로젝트와 결합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도출되었다. 결과적으로 미술관은 어떤 면에서 보면 가장 어려울 수도 있는 선택을 하였다. 당시 ‘UAE로의 원자로 수출’이라는 성과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원자력에너지와 산업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원자력 에너지란 무엇인가? 원자력은 핵폭탄을 연상시키는 두려움의 대상인가? 아니면 지구의 환경문제와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시켜 줄 미래적 대안인가? 원자력 영역과 예술 영역의 만남은 가능할 것인가? 그 결과는 해당 산업계와 미술계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 것인가? 그리고 어떤 예술적 소통이 가능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끊임없이 던져졌다.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한 상상의 프로젝트를 원자력 발전소라는 특정 장소에서 펼쳐 보이자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부터이다.

  • 우리나라의 울진, 월성, 고리, 영광의 4개소 원자력 발전소 중 영광이 이번 프로젝트의 대상지로 선정된 이유는, 호남 지역 특유의 아름다운 지형 속에 원자력 발전소가 설치되어 있고 특히 발전소 조성 시 발생한 토사를 재사용하여 만들어진 한마음 공원이 시민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작품이 설치되는 곳은 원자력발전소 내의 방류제이다. 방류제란 일종의 방파제인데, 원자력 발전소 방류제는 원자력발전으로 데워진 바닷물을 식히는 기능도 함께 갖고 있다. 전장 길이 1,136m에 달하는 방류제는 영광 앞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바다를 향해 질주하는 듯한 경관을 자랑하며 방폐장 유치 논란으로 뜨거웠던 부안의 위도도 바라볼 수 있다. 김수자 작가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원자력 발전이라는 기술의 영역과 자연과 인간을 해석하는 예술의 영역이 이곳에서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김수자의 <지·수·화·풍> 시리즈는 시리즈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철학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금년 7월, 그린랜드 지역의 빙하를 헬리콥터에서 촬영하여 편집한 시리즈로 완결됨으로써 총 8개의 시리즈로 구성된 이 작품의 핵심개념은 자연을 구성하는 지·수·화·풍의 각 물질적 요소는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생성, 변화, 소멸 된다 는 것이다. <Fuego de Tierra / Fire of Earth>, <Agua de Tierra / Water of Earth>, <Tierra de Agua / Earth of Water>, <Aire de Fuego / Air of Fire>, <Aire de Tierra / Air of Earth>, <Aire de Agua / Air of Water>, <Fuego de Aire / Fire of Air>, <Agua de Aire / Water of Air>라는 제목 역시 지·수·화·풍의 순환관계를 드러낸다. 이 제목은, 흙의 속성은 물과 공기에 의해 형성된다거나 불에서 비롯되는 공기의 성격과 물에서 비롯되는 공기의 성격은 또 다른 자연의 속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등의 수많은 유추를 암시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구체적인 언급은 한 바 없지만, 이 작업을 통해 동양철학에서의 ‘오행’과 ‘상생’의 개념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지·수·화·풍의 요소들은 단지 자연 현상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 김수자가 발표했던 <바늘여인(A Needle Woman)>, <구걸하는 여인(A Begger Woman)>, <거울여인(A Mirror Woman)> 등의 시리즈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등의 대립적인 요소들이 만나, 상처를 안기고, 상처를 치유하는 그런 관계까지를 연상시킨다. <여인 >시리즈에서, 관자들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작가의 존재는 미동도 없이 작품의 중심에 서 있음으로 해서, 이 모든 관계성의 연결과 순환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바 로 다음 아닌 작가 자신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 김수자의 작업세계는 종종 ‘바늘’과 연관된 독특한 체험과 표현으로 설명되어 왔고 작가 스스로도 여러 인터뷰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 끝머리에 노란 등대가 설치되어 있는 1,136m의 좁고 길게 뻗은 방류제는 또 한 번 ‘바늘여인’ 김수자의 실존을 상징한다. 방류제는 바늘이 되어 자연과 에너지, 물질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다시 묻는다. 오래 전 실크이불보를 어머니와 함께 바느질하던 순간에,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에너지와 우주의 에너지가 한꺼번에 바늘 끝으로 향하는 것 같았던 그 충격적 체험이 방류제에서 보다 더 큰 스케일로 재현되는 것이다.

  • 김수자는 분열과 융합을 통하여 ‘혼성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자연물질 중 하나로서 원자력을 해석하여 <지.수.화.풍 > 시리즈의 영역을 확산시키고자 한다. 자연 물질의 하나이면서 현대에 들어와 생성과 파괴의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 원자력 에너지라는 소재는 앞서 언급한 현대미술의 담론들을 한꺼번에 녹여내는 용광로와 같기 때문이다. 방류제에 김수자는 6개의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흙, 물, 불, 공기의 자연 요소들을 배치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 주제에 대한 작가의 첨예한 문제의식들은 예술 프로젝트로 거듭나게 된다. 인간과 원자력, 상충과 상생, 예술성과 공공성에 대한 질문 과 대답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을 방류제로 인도한다.

“바늘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이지요. 이중적인 성격이 늘 있습니다-

침 끝으로 공격하고 상처를 내는가 하면, 바늘귀를 통해 치유하기도 하지요.
나아가 양성구유(兩性具有)의 특징을 한 몸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바늘이 가진 이러한 모순된 속성에 매료됐기 때문에 바늘과 연계된 질문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늘은 분리된 천을 잇고 꿰매는 자신의 역할을 하고 나면, 실의 흔적만을 남기고 자신은 그 사이트에서 사라집니다.”

  • ─ 이규현, 『안녕하세요? 예술가씨!』(도서출판 넥서스, 2010) 중 김수자와의 인터뷰에서 인용

─ 『영광 원자력발전소 아트프로젝트 2010, 지-수-화-풍, 김수자』, 국립현대미술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