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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k Sang Hwan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
2012
50대 여성작가인 김수자는 1997년 보따리 수 백 개를 자신의 트럭에 싣고 우리나라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퍼포먼스 예술로 주목을 받은 이후, 이탈리아, 세느강, 리베라시옹 광장 등 세계 곳곳의 광장에서 보따리와 바늘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선보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가 메인 주제로 삼고 있는 '보따리와 바늘'은 전 세계 현대인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소재로서 난민문제나, 기아문제 그리고 문화적 갈등에 대한 표현을 담고 있다. 세계 어느 지역이던 상관없이 갈등적 요소에서 오는 문화적 차이와 종교의 독단 등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자신의 몸을 매개로 하여 재구성하고 현재화시키는 작업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몸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현재 자신과 집단을 연결시키는 관찰의 한 형식으로 작동한다. 과거를 재구성하는 과정은 주체가 비록 개인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집단에 적용되는 세계 해석의 특정한 틀 속에서 진행된다. 그의 작업이 소통의 내용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기억은 사회화 과정에서 도출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수자의 작업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기억'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고자 한다. 사회적 기억 또는 집단적 기억은 전통의 맥락에서 그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정치적 내지 사회적 대변혁기를 거쳐 집단이 해체되면 망각되거나 소멸된다. 작가는 기존의 사회적 조건이 변화할 때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의 지점을 '문화적 기억(kulturelles Gedächtnis)'으로 대체하고, 인류보편의 문화원형을 상기시키는 과정을 '시간성'에 대한 사유화 과정으로 극복한다. 군중 속에 서 있으면서도 군중 사이를 가로지르는 퍼포먼스 <바늘여인>, 유랑을 통해 세계에 던져진 자신의 원형을 찾아 헤매는 <보따리 여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김수자에 의한 '문화적 기억' 이란 정치권력에 의해 조작된 기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한 사회집단은 자신들이 실제 체험한 근거리 과거를 기억할 때 일상적 소통을 통해 그것을 현재화하고 '구체적' 정체성을 획득하지만, 그것이 '생생한 기억'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사회적 효력에서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 사회 내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쟁취한 집단은 그들의 제한된 기억을 머나먼 '기원'에 소급함으로써 그것의 배타성을 은폐하고 그것을 담지한 자기 집단의 보편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원'은 현실 체험과 유리되어 있기에 신화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기록물, 텍스트, 건축물, 도상, 묘비, 사원, 기념비 또는 제의와 축제 등의 매체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문화적 이거’이란 문화의 의미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 조직적으로 전승하며 집단정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기억을 의미한다. 문화적 기억은 집단의 정체성과 밀접히 이처럼 '문화적 기억' 이란 문화의 의미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 조직적으로 전승하며 관련된다는 점에서 추상적이고 보편적 지식을 위주로 하는 역사와 구별되고, 또 산발적으로 저변에 있는 기억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조직되고 규율되는 전통과 다르다. 여기서 문화는 문화적 기억이 뿌리를 내리는 물질적 기반 즉 매체를 통한 소통이며, 매체의 발전과 변화는 문화의 양태와 문화기억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억매체로서의 문자의 주도적 역할은, 19세기 사진의 발명과 그리고 20세기 영상매체의 혁명적 발전으로 그 자리를 사진, 영상, 컴퓨터에게 양도하였다.
작가가 인식코자 한 문화기억은 그 가운데, 죽은 자를 위한 추모행위의 재해석(문화원형으로의 복귀)이라고 볼 수 있다. 아스만(Aleida Assmann)은 “살아 있는 자와 망자를 서로 연결해주는 기억의 가장 본질적이고 널리 알려진 형식은 망자숭배”[1]이고, 서구 역사에서 망자의 추모 제도는 18세기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이후 근대의 문턱에서 소멸되었다고 말한다. 생존한 자들의 기억 속에 망자가 법적,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고는 종말을 고했기 때문에, 문화원형과 전통, 관습의 관계는 보다 면밀히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스만은 기억을 2가지 형태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현재의 직접적 요청에 기능하도록 구성된 '기능적 기억' (Funktionsgedächtnis)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매체를 통해 저장되어 필요시 사용되는 '저장기억' (Speichergedächtnis)이다. 역사는 두 번째에 해당된다. 저장기억이 기능기억을 검증하고 수정하는 토대역할을 한다면, 기능기억은 저장 기억의 조타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수자의 작업은 '기억 작업을 수행하는 일종의 '메타기억'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역사가 민족중심, 엘리트 중심으로 보편적 내지 추상적 담론의 형태로 구성되어 현실 사회에서 권력의 힘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라면, 작가에게 기억작업은 억압되고 망각된 진실을 해체한다는 측면으로 해석된다. 이렇듯 문화적 정체성에 호소하는 측면에서 작가는 과거의 체험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고, 재구성한 방식, 다시 말해 일정한 인위적 구성작업을 통해 소수자의 흔적을 일상생활 속에 보다 생생하게 이해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사회적 혹은 정치적 사건의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지향하고 갈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작가는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자기 합리화하는 권위주의와 배타주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거부하고, 개인이 속한 집단과의 합리적 거리두기라는 사회적 합의를 시도한다. 이것은 기억된 문화, 역사에서 분석되는 모순과 갈등의 원인이 자신의 안과 밖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는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문제와 대면(Umgang)하는 가운데 해결되는 방식인 것이다. 그 안에서 작가가 추구한 것이 바로 '문화원형'으로의 복귀이다. 즉 태초의 혹은 인류 보편의 신화원형을 상기시키는 작업이나 자연 자체로의 우리 몸을 통해 조화로울 수 있는 내용들을 소리(Weaving factory) 혹은 대자연의 광경(지수화풍) 등으로 대체하는 작업은 문화원형이 접근해 사회적, 역사적 차이에서 오는 현실적 간극을 좁히기 위한 작가의 노력인 셈이다.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원형'이라는 키워드를 역사성찰의 과정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문화 자체가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인 만큼, 문화원형은 더더욱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나 최소한 미술적 차원에서는 문화전파와 문화전승 그리고 문화변동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대가 형성된다. 비록 개념상의 모호함은 있지만 과거를 재구성하는 문화적 기억에서 전통은 여전히 과거와 소통하는 길목에 있다. 제한된 기억을 먼 과거로 소급할 때 현실과의 괴리에서 그것은 신화적 상징을 요청하고, 창작소재로서 문화원형이 전통문화를 지향할 때 신화적 상상력과 흔히 연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문화적 기억에서 사용되는 시간의 개념은 다소 특이한 지점에 자리한다. 특정집단의 당대에 소통되는 시간은 자기 시간인 것에 비해, 전승되는 기억으로서의 문화기억의 시간성은 분리되었다가 다시 결합하는 '절합된 상황'(die zerdehnte Situation) 속에서 작동한다. 문화적 기억은 과거와 현재가 동렬로 배치되어 전승되는 문화적 의미이다. 신화는 기원에 대한 기억인데, 그것은 “상징과 제의와 같은 기념비적 소통의 장 즉, 축제를 통해 연출되고 경험되는 기억이다. 그것은 따라서 일상과 대비되는 것, 아니 일상에서 배제되어 있는 현존재의 근원을 지시해 주고, 일상이 지향해야 할 질서를 일러줌으로써 일상의 의미를 비로소 생성 시켜주는, 아스만의 표현에 따르면 일상의 결핍을 '치유해주는 기억이다."[2]
우리는 시간적 병렬 속에서 일종의 심리적 위안을 찾는다. 기억담론은 과거에 대한 비판과 향유라는 대립하는 두 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한편은 과거의 신화를 해체하고, 다른 한편은 과거를 재신화화하고 있다. 문화와 문화원형 그리고 전통과 연관된 '뿌리찾기' 즉 재신화화는 결국 문화에 내포된 근대화의 문제점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홉스봄(Eric Hobsbawm)의 「만들어진 전통의 서론 '전통들을 발명해내기'의 한 단락을 인용한다.
"역사적으로 기념할만한 과거에 준거하는 한, '만들어진 전통의 특수성은 대체로 과거와의 연속성을 인위적으로 내세우려 든다는 데에 있다. 요컨대 전통은 새로운 상황에 대한 반응인데, 여기서 역설적이게도 예전 상황들에 준거하는 형식을 띠거나, 아니면 거의 강제적인 반복을 통해 제 나름의 과거를 구성한다. 따라서 지난 두 세기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전통의 발명'을 그렇게도 흥미로워하는 까닭 역시, 근대세계 안의 지속적인 변화 및 혁신과, 사회적 삶의 몇몇 부분만큼은 고정불변의 것으로 구조화하려는 시도 사이의 대립에 있는 것이다."[3]
관습이 살아 있는 과거라면, 전통은 과거와의 실질적인 단절 속에서 그 단절을 은폐하기 위해 '고안된' 정신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 19세기 민족주의가 발흥할 때 가상의 타자를 설정함으로써, 자민족에게 고유한 문화가 유럽에서 주장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그 작업을 본격화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20세기 후반 한국인은 서구에서 고안된 가상의 타자를 자발적으로 우리 안에서 찾아왔다. 이른바 Re-Orientalism 현상이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기억할 때, 많은 사람들이 역설적이지만 서구에서 만들어진 관점인 Orientalism의 시각에서 의식, 무의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전하였으나,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이 그러하듯 학문의 정체성은 늘 의문의 대상이었고, 일상인들의 자기 정체성 추구 역시 서구화와 일본화, 미국화 속에서 왜곡 발전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일단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주체적 관점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으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나가는 지금 그 흐름은 다시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주된 구호는 다시 수단과 과정의 합리성 보다는 찌그러진 결과만을 강조하는 경쟁 중심의 강자의 논리로 귀환하였다. 여기서 근대화 과정에 만들어진 문화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한반도의 근대화는 서구화와 교차하였고 동시에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런 정황은 한국이나 중국 등 동아시아만의 특징이 아니라 후발 자본주의 사회가 동일하게 겪는 역사적 체험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후발국인 독일의 예를 들어보자. "독일 부르주아가 제기한 문명과 문화의 대립은 뒤에 서구사회가 동아시아를 제국주의적으로 침탈해 올 때에 동아시아가 제기했던 중체 서용이나 동도서기 같은 담론의 전사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4] 주지하듯이 근대초기 독일은 서구(즉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정치경제적 후진성을 정신주의적으로 보상하려는 욕구를 '자신들만의 가치에 내재하는 지적, 예술적 우위성'으로 정당화하려는 부르주아들의 시대 정신의 영향력이 있었다.[5] 영어에서 culture와 civilization은 동의어적 성격이 강하나,독일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의미동일성이 수용될 수 없었다. "우리는 예술과 학문을 통해 매우 높은 수준으로 문화적으로 교화되었다(kultiviert)... 도덕성의 이념은 문화(Kultur)에 속하는데, 이를 단지 명예욕, 예절과 같은 무엇과 피상적으로 예의바른 어떤 것에서만 찾는다면 이는 문명화(Zivilisierung)에 귀결될 것이다."[6]라는 칸트의 진술은 겉치레적이고 물질적인 서유럽의 문명에 대해 내면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독일문화의 우위성을 대변하고 있다. 칸트 이후 18세기 독일 지식인들은 문화를 정신적 문화(Kultur)와 물질적 문명 (Zivilisation)라는 대립구도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이해된 문명과 문화 관계에서 독일인들은 민족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을 서부 유럽의 물질적 문명에 대항하는 중부 유럽 독일의 문화 투쟁으로 파악하였다.
본래 서양에서 문화에 해당되는 라틴어 cultura(경작, 교육)는 동사 colere(돌보다, 교화하다)에서 유래하였듯이 문화에는 인간의 개입 행위가 강조되는데, 특히 교육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근대 독일어 '문화'의 용례는 개인과 사회의 자아교육과정을 반영한다. 인간적 품위를 지닌 고급의 정신문화와 저급한 대중의 물질문화에서 보이는 이분법적 사유와 그리고 '교양' 개념과 연결된 문화개념은 특히 후발 근대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찾을 수 있다. 동양의 고대 문화 개념도 인간의 교육과 수양의 맥락에서 발전되었다. 문화는 본래 ‘이문교화(以文敎化)’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문치교화(文治敎化)와 덕치교화(德治敎化)와 함께 유가적 인문정신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즉 사회적 변화 시기 인간의 적극적 개입을 추동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였다. '위로부터의 개혁' 방식을 취한 후발국들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시급히 요청되는 대중의 동기유발을 주로 정신적 혹은 도덕적 측면에서 찾는 이유는 전근대 사회의 문화적 기억과 친화성이 깊기에 그만큼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개념은 여전히 오늘날도 유효한 근(현)대화 문제와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독일적 문화 개념에서 형성된 고급문화는 대중문화와 분명히 다르고, 이러한 영향은 20세기 중반 문화산업를 비판한 아도르노까지 미치고 있다. 물론 현대 한국사회는 그 당시 서구와 구별되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유럽사회의 계급에 따른 문화의 차별적 소비 형태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분명한 차별성을 찾기가 어렵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계급 혹은 계층적 정체성으로 차별되게 문화를 수용하거나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구별이 어려운 혼합적 양상을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재이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사회변화를 분석할 때, 혼합적 상태에서 저항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고 지배문화를 추수하는 경향을 감안한다면 위에서 말한 고급-저급의 대립적 문화전통은 동아시아에서도 유사한 흐름을 찾을 수 있고, 근대화 과정에서 지금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중체서용(中體西用), 화혼양재(和魂洋才), 동도서기(東道西器)적 근(현)대화(Modernization) 논리에서 보이는 정신 중심적 이분법과 과거 회귀적 사유형태는 여전히 지배적이고, 이 연속되는 흐름 속에서는 인문(人文)정신의 추구가 '문인(文人)정신'으로 회귀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러한 전통에서 문화적 기억도 자유롭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화의 뿌리 찾기도 이러한 흐름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사회경제적 근대화는 수용하면서 문화적 근대화 즉 타자와의 공존을 거부하였던 중국이나 조선 후기의 근대화론은 신구·동서간의 대립관계를 절충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였다. 중체서용적 절충주의에 내재한 문화보수주의는 다만 19세기 말의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지배적인 문화해석은 헌팅턴식의 문화본질주의 측면이 강하다. 전통의 이름으로 근(현)대를 거부하고, 동시에 근(현)대라는 이름으로 전통을 비판하는 다시 말해 전면적 긍정을 하면서 동시에 전면적 부정을 하는 이원대립적 현대성 담론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Note]
[1] 얀 아스만, 『기억의 공간』 (경북대학교 출판부, 2004), 39쪽.
[2] 김학이, 「얀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 『서양사연구』 (서울대 서양사연구 33, 2005), 241쪽.
[3] 에릭 홉스봄, 박지향 외역, 「만들어진 전통」(휴마니스트, 2004), 21쪽
[4] 김종엽, 「문화개념의 변동과 문화연구의 과제」, 「문화이론과 문화컨텐츠의 실제」 (인하대 문과대학 특화사업단, 인하대, 2005), 72쪽.
[5] 이러한 맥락에서 쉴러는 "미적 교육" 4번째 편지에서 프랑스 혁명과 유토피아 사조를 비판한다. F.Schiller, Ueber die ä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 (Stuttgart, Reclam, 1965).S.9.
[6] Kant, 'Idee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ürgerlicher Absicht', in; Werke Bd.9 (Darmstadt, 1983), S. 44
(A402~403).
[7] 이하는 박상환, 「문화콘텐츠와 인문학의 소통과 가능성」, 『인문과학 41호』 (성대 인문과학연구소, 2008), 228-229 쪽에서 요약 및 발전시킴.
[8] 문화가 인류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
[9] 디터 젱하스, 『문명내의 충돌』 (문학과지성사,2007), 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