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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and the World, 1991.

'꿰매기' 작업과 「연역적 오브제」에 나타난 조형적 특성

유재길 (미술평론가, 홍익대 교수)

1994

서정적 복합 회화의 탄생

  • "모든 회화란 공간의 예술이라 말하며, 현대회화의 역사는 늘 공간을 위한, 또는 공간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여겨졌다." — 바네트 뉴만 (Barnett Newman, 1905-70)

  • 김수자의 조형 작업은 추상표현의 회화적 기법과 부조적 성격의 콜라주, 그리고 오브제를 이용한 조각적 표현 등 다양한 표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색동 천과 꿰매기 작업으로 재료의 특성을 살리면서 공예적 성격과 함께 순수 조형성 모색에 집착하는 그의 작업은 삶의 진솔한 표정들을 담은 서정적 느낌의 '복합 회화 Combine painting’이다.

  • 10여 년 넘게 색동 천을 가지고 '꿰매기'와 '드로잉' 기법을 혼합시킨 콜라주 작업을 계속해 온 그는 무엇보다 미술 속에 생활 을 반영시키는데 초점을 맞추어 왔다. 초기 작업에서 그는 천의 꿰매기와 드로잉을 통한 평면에서의 '순수 추상적 조형성'을 추구하였으며, '90년대 초부터는 점차 평면에서 입체로 열려진 형태를 추구하는 '삶의 도구와 일체감을 이루는 오브제' 작업으로, 그리고 이후 미국 P.S.1 미술관에서의 작업은 오브제의 회화적 표현 작업과 함께 '주어진 공간과의 조화를 이루는 입체 작업으로 변모하면서 근작에는 자 연과의 일체감을 이루는 열려진 형태의 설치작업으로 전개되고 있다.

  • '꿰매기'와 '드로잉' 기법으로 시작된 김수자의 색동 작업은 복합적 회화'를 탄생시키면서 삶의 예술로 폭넓게 전개되고 있 다. 그의 출발점은 "어느날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면서, 바느질이라는 일상적 행위에 전율하게 되면서 나의 사고와 감수성 그리고 행 위성 등, 이 모든 것의 일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 김수자의 조형 언어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삶의 집착에서 나온다. 그에게 있어서 조형 작업은 삶, 그 자체이다. 빨강, 노 랑, 파랑 등의 색동 천과 반복된 꽃무늬 천 조각들을 보고 삶의 본질과 고유의 체취를 시각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또한 그의 조형언어는 단순한 바느질의 꿰매기' 그 자체가 아닌 자신의 내면 세계를 담고 있다. 작가는 '꿰매기'라는 행위와 사고思考의 일체감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것들은 "묻어 두었던 그 숱한 기억들과 아픔, 애정까지 내포한다... 나에게 이것은 절박한 자기 구원의 의미"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서정적 추상표현의 콜라주와 오브제 작업은 삶의 원형적인 것에 대한 애착과 향수'를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꿰매기'와 '드로잉' 작업 이후 전개된 평면에서 입체로 '삶의 도구와 일체감을 이루는 오브제 작업', 그리고 '주어진 공간과의 조화', '자연과의 일체감'을 이루는 작업들이 현재까지의 진행사항이다. 그의 작품 밑바탕에 깔려있는 전반적인 성격은 잊을 수 없는 숱한 기억들이 담겨진 서술성과 서정적 복합의 아름다운 색채와 추상 형태, 그리고 인위적 구성 틀을 벗어난 실험성에서 우리의 역사성과 지역 적 특성을 발견하게 되며, 모더니즘 이후의 새로운 시각적 변화를 읽게 된다.

  • '꿰매기'의 초기 작업들 (1983-1988)

  • "나의 오브제나 설치 작업은 바느질'이라는 행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 작가 노트 중에서

  • 1983년부터 시작된 김수자의 초기 '꿰매기' 작업은 사각형의 틀에서 벗어난 색면추상화 경향이 강하다. 사각에서 탈피하면서 도 평면성을 유지하려는 구성된 천 조각의 색면들은 모더니즘 경향의 후기 회화적 추상과 공통된 성격을 갖는다. 그가 꿰매어 붙인 사각이 나 삼각형의 천 조각들은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미를 보여주면서, 표현주의와 같은 인간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회화 세계가 만들어진다.

  • 구축적인 부조와 같은 '꿰매기' 색면들은 구체적이거나 서술적이지 않다. 보는 사람들은 사각이나 삼각형의 순수 조형적 구성과 다채로운 색, 그 자체에 만족해야 한다. 1983년부터 제작된 「하늘과 땅」이나 「대지」, 「초상」, 「삶의 어쩔 수 없음」 등과 같은 서술적 제 목의 '꿰매기' 작업은 '88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 진다. 여기서 초기 작품인 「가을」이나 「하늘과 땅」의 연작들을 비교하여 보면 당시의 작품 전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김수자에게 있어서 색채는 이미 만들어진 인공적 사물의 색이다. 붉은 색이나 황색, 검정과 흰색 등이 천 속에 스며들어 손끝 에서 나오는 우연성을 배제한다. 화면에 등장한 형상들 역시 인공적 연속 무늬들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평면과 사각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 이같은 작업은 '복합 회화'의 다양한 변화이다. 김수자의 조형적 독창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며, '복합 회화'가 탄생되는 것 이다. 이는 캔버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열려진 형태와 열려진 공간의 탄생을 예고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화폭은 형식 적 틀과 제한된 영역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자유로운 사고를 획득하게 된다.

  • 초기 ‘꿰매기' 연작의 조형적 특성은 'X'자 'W'자 'T'자 혹은 '+'자형과 '삼각형' 등 불규칙한 기본형의 틀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같은 예기치 못한 기본형에서 삶의 다양한 표정을 읽게 된다. 그의 예기치 못한 기본형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형태들은 "우리가 피부로 접해온 한국의 건축 공간의 격자 형태나 문자 등, 우리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동질적인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작가는 말한다. 기본형의 다양한 변화는 새로운 공간의 형성이며, 무엇보다 "존재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만남의 결과였던 만큼, 나에게는 절박한 자기 구원의 의미"라고 그는 생각한다.

  • 한편 김수자의 예기치 못한 자유로운 기본형들은 완전히 독립된 추상화로 순수 조형적 구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행 위성이 나타난다. 그의 행위성은 우리의 정체성identity과 일치시키려 한다. 이것은 '회화 그 자체'에서 순수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 하였던 모더니즘 작업이며, 인간(여성)의 행위(일)를 강조하는 독창적 조형 언어이다.

  • '꿰매기' 연작은 '80년 중반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에도 계속된다. 「푸름」이나 「검음」작품은 당시 작업을 대표하는 것으로 청 색과 흑색 등 무거운 색채와 커다란 직사각형의 면들이 긴장감을 더해 주고 있다. 또한 커다란 사각형의 대비와 어두운 무채색에서 나오는 중압감으로 어두운 느낌이다. 그러나 모자이크된 크고 작은 색면들은 열려진 공간 속에서 하나의 목표를 지향한다.

  • 이러한 그의 작품은 삶의 표정을 밝게 그려냈던 초기 작업과 달리 어둡게 느껴진다. 색면의 분할은 더이상 명확하지 않다. 면 과면 사이의 구분이 지워지면서 공간적 구성보다는 추상성에서 주는 감정적 표현에 매달린 조형성 모색이다. 천 조각들을 연결한 부분들 도 과거처럼 매끄럽게 이어져 있지 않아 상처의 흔적처럼 삶의 고통스러움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색면들의 분할 자체가 모호해지고 순 색의 밝은 면들은 검정과 탁한 청색이 우울한 감상에 젖게한다.

  • 「연역적 오브제 Deductive Object, 1989-1994」 연작들

  • "연역적이란 보편적 인식에서 개별적 인식의 도출이다. 이에 반해 귀납적은 개별 인식에서부터 보편적 인식을 도출하는 것이다." — 철학 용어 사전

  • 김수자의 초기 꿰매기' 연작에서 우리는 현대회화가 안고 있는 사각의 평면성 문제를 더욱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즉, 이제 그림은 한정된 사각틀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였던 조형 작업은 예측하기 힘든 공간의 변형과 사각에 서 벗어난 다양한 틀이 만들어지는 것에서 조형적 특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형식적인 점에 있어서 그가 시도하였던 '변형' 들이 완전히 전통적 회화의 평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록 사각이라는 액자의 틀을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평면성을 유지한 그의 작품에서 관객은 여전히 일루전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하는 것이다.

  • 실제 사물처럼 느껴지는 일루전이라는 시각적 상상력에서 벗어나 좀더 구체적인 사물의 표정과 인간관계를 원하였을 때, 작가 들은 평면 양식에서 벗어나 서슴없이 입체화하려 형식을 취한다. 이것은 탈 일루저니즘의 '꿰매기' 작업으로 독특한 자신의 조형언어를 탄생시키며, 보편적 인식의 일상적 사물(오브제)들에서 개별적 인식을 이끌어내는 특수한 삶의 오브제이다.

  • 김수자의 「연역적 오브제」들은 토속적 성격과 자연적 요소를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그가 선택한 생활 도구들은 삶과 일체감을 갖게하며, 오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89년 이후 제작된 「벽 속의 벽」이나 「대지를 향하여」를 끝으로 '90년대에는 「연역적 오브제」라는 새로운 구조의 조형 작업을 시작한다. 이러한 실험 작업을 작가는 우리의 동질성이나 고유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꿰매기' 작 업과 같이 "절박한 삶에서 나오는 자기 구원의 행위"이라고 말한다.

  • 「연역적 오브제」연작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는 것은 1991년부터이다. 「연역적 오브제-기억」이나 「연역적 오브제북과 얼레」 그리고 「황금빛 깃발을 비롯하여 많은 평범한 사물(오브제)이 특수한 의미의 작품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초기 이러한 작품들에서 나타난 주제나 소재의 의미는 구체적 물체의 등장으로 그 해석이 쉽게 드러난다. 즉, 창호지 문틀이나 지게, 연을 날리는 얼레, 소북, 색동 의 기다란 천들이 「연역적 오브제의 주제가 되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서술적으로 전개시켜 나간다.

  • "어린시절 산촌의 풍경과 기차, 그리고 다락에서 찾아낸 오래되고 신기한 골동 집기들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오래된 우리의 기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거기에 매우 아름다운 구조의 미를 깨달았어요." 라고 말한다. 이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향수와 추억 들이나, 작가는 이것을 매듭풀듯 하나하나 풀어 헤쳐 나가면서 구체적으로 조형화한다.

  • 추상적 순수 조형의 모색과 숨겨진 의미들이 가득찼던 꿰매기' 작업과 달리 추론이 가능한 일상적 사물들은 독자적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스며든다. 토속적 성격의 기물들에서 과거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어 평면적 모자이크 페인팅이 아닌 입체적 구조로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표정이며, 향수를 느끼게 하는 사물들로 사랑스럽고 시적詩的이기까지 하다.

  • 그후 김수자는 P.S.1 미술관 초청으로 미국에서 작업을 계속하게 되면서, 「연역적 오브제」 작업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킨 다. 이제 그는 삶의 고전적 표현에 만족하기보다 시대를 생각하는 작업으로 주어진 공간과의 조화를 추구하게 된다. 비록 1년간의 짧은 기 간 동안 미국에서의 실험적 작업이였으나 그에게는 오늘의 삶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게되는 '주어진 공간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싸움이었 다. 사다리가 등장하고 시간성과 지역성을 뛰어 넘는 일상 생활의 이야기나 색다른 미국적 오브제들, 반복되는 이국적 성격의 색들과 한국 적 형상들, 그리고 평면에서 벗어난 입체적 표현으로 열려진 공간과의 만남 등이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귀국 후 이같은 변화는 지속성을 갖게 되며, 근작에서는 주어진 공간에서의 조화에 '자연'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우연한 자연 과의 만남이 아닌 의도적인 자연과의 대화로 자연과 인간의 일체감을 강조한다. 경주 옥산서원 계곡에서 이루어진 「자연에 눕다」는 인간 이 만든 색동 천의 오브제들과 자연과의 일체감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삶의 표정들이다.

  •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김수자의 「연역적 오브제」 작업은 과거를 다시 바라보면서 현재의 삶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끊임없는 변화를 주고 있는 김수자의 순수 조형 작업은 우리의 과거와 오늘의 현실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미래의 열려진 세계를 향하고 있다.

  • 결론적으로 김수자의 '복합 회화'인 '꿰매기' 양식, 「연역적 오브제」 작업은 미완성의 양식으로 보일지 모르나 주어진 공간과, 또는 자연과의 만남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이 갖는 독자적 조형 언어로 인정된다.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삶의 표정들을 자신있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타성화된 미적 관념이나 개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의 표정을 그리고 있는 그의 작품에 더욱더 애착을 갖게 된다.

─ 『김수자』(1994), Art Vivant No.21, 시공사,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