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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ductive Object, 1997. Used Korean bed covers, used clothing

Interview: 평면에서 입체로의 접근, 보따리

Interviewed by 박영택 (금호미술관 선임큐레이터)

1996

박영택

  • 선생님과 이렇게 개인적으로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는 처음입니다. 무엇보다도 최근 김선생님께서는 외국에서 열리는 일런의 기회전시에 한국의 젊은 작가를 대표해서 번번하게 초대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면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계신데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을 가늠해 보이는 기획전시에 자주 초대되는 한편 외국의 큐레이터나 비평가들에게 주목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수자

  • 「originality의 문제」 즉, 크든 작든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가가 외국인들이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것과 함께, 삶과 현대미술의 문제에 총체적인 방향으로 접근하는 점 등이 어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작업들이 도출될 수 있는 여러 이슈들을 잠재하고 있고 따라서 새로운 이슈들이 나올지라도 제가 갖고 있는것의 일부가 거기에 포함될 여지가 있었다고 봅니다. 예컨데 저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전시에도 많이 초대되었지만 요즘 새롭게 제기되는 degenderism의 전시에도 초대를 받습니다. 내년 2월에는 세타가야 미술관에서 있을 degenderism을 주제로 한국제전에 출품할 예정입니다. 제 작품에는 gender의 요소가 강하지만 양성적인 성격도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래서 어느 정도 미술사적인 흐름과 구조적으로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고 또 작품 성격이 삶의 문제와 항상 맞닿도록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있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박영택

  • 앞서 언국하신 것처럼 선생님의 작업은 최근 현대미술의 주된 이슈가 되고 있는 것들에 상당 부분 걸쳐있다고 여겨집니다. 우선 주변부 문화와 아이덴티티의 문제에도 걸려있고 페미니즘과 설치 및 토탈아트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화단에서 보았을 때도 선생님의 작업은 상당한 흥미를 제공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작업이 그 모든것을 염두에 두고 풀어내는지 아니면 그의 무관한 혹은 그 중에서 어떤 특정한 문제의식 하에 자신의 작업을 전개시키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수자

  • 저는 제가 갖고 있는 감성과 논리라는 측면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업을 시작 했습니다. 화가들은 하나의 평면, 벽을 향한 끝없는 몸부림을 합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려는 노력이지요. 저 역시 그 벽외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해결할 것인가. 그것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구조에 어떻게 나름의 방법론으로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고심했습니다. 그래서 80년대 초반에는 종이, 나무, 아크릴등 여러 매체를 이용해 보기도 했고 설치 또는 신채의 구조를 드러내는 실크스크린을 하는 등 기하학적 도형과 연관한 작업도 했지요. 하지만 그 결과물에서 자신과의 동질성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분명히 내가 그쪽으로 전이된 상황이기는 한데 그것이 나의 전부일수 없다는 것 때문에 항상 갈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 어머니하고 이불을 꿰매던 중 솜이 들어있는 비단 원 위에 바늘을 꽂는 그 순간에 나의 감성과 내가 추구하던 논리와 회화의 평면 문제를 동시에 해석될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강렬하게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일견 수직, 수평이라는 기본 구조를 어떻게 평면 속에서 재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해결 되는 듯 했지요. 이 때 바늘과 실의 궤적은 곧 작가의 정신이며 육체이고 그것이 평면을 넘어서서 평명의 배면에 도달하고 또다시 이면으로 되돌아 오고 하는 그런 끊임없는 평면의 환원과 반복 속에서 평면에 대한 제 자신에 대한 물음 또는 그것과 동시에 맞닿아 있는 천과 삶과의 감수성적인 측면같은 부분들이 표하게 일치되었다고 할까요. 그러면 「바느질의 개념」이 최근 일상적 행위인 「걷는다」, 「본다」, 혹은 「말한다」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Sewing 행위로 전환, 확대되고 있습니다.

박영택

  • 모더니즘 미술관, 혹은 좁혀서 모더니즘의 편명성 논리를 나름대로 해결해 나가면서 동시에 자신의 감수성으로 소화해 내려는 과정에서 천 작업이 나왔다는 말씀이군요. 천을 택하고 이를 사용하면서 모더니즘 작업의 정당성을 확보해 내려는 일관된 시각이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온 것입니까?

김수자

  • 80년대 초반까지 많은 작가들이 모더니즘에 회의를 가졌듯 저 역시 밖으로부터 자기것을 찾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저하게 나 자신의 감수성과 욕구에 따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외부 사조나 다른 사람의 방법론 같은 데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 자신으로부터 끌어낼수 있을가.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항상 고심했습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그런 과정 속에서 제 작업은 나선형 구조를 가지고 변하면서 동질적 구조를 찾아간다고 할까요. 나를 열어놓고 자유롭게, 내 욕망이 가는대로, 그러면서 그것들이 현대미술의 문제를 함께 제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영택

  • 상당히 제한된 모더니즘의 환원적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성. 자신의 논리로 모더니즘을 해석하고 이를 구현할 방법론을 찾는다는 것잉 당시 획일적인 화단구조상 상당히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동기나 실마리 혹은 어떤 절박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김수자

  • 저는 78년쯤에 일본여행을 하면서 아시아 문화권과 한국 문화권이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막연히 아시아 문화권은 거의 유사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여행을 통해서 일본과 한국의 문화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인가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색, 건축구조, 기물의 구조 등을 유심히 보게되었고 꽉 짜여지지 않고 뭔가 틈새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조형적인 우리의 것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작가로서 분명히 서려면 우리의 고유한 문화가 갖고 있는 아이덴티티와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 퍼스널리티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더니스트들이 평면의 문제에 집착했던 것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학교나 화단의 분위기는 너무나 획일적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 강한 회의를 느꼈고, 그렇게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80년대 초만해도 하나의 시각과 논리로 밤에 작업을 해석하지 못했던 것 같고, 그래서 저는 늘 반론을 통해 시각을 확대하고 억압된 감성을 열어보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작업도 논리와는 무관한, 신체와 맞닿는 자유로운 드로잉을 시도했고요. 이후 후배들에 의해 80년대 후반 이러한 의식의 연장이 그룹 활동을 통해 보여지기도 했지만, 그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난 상황일 뿐 선배들 개개인 역시 그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고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개인의 역사들도 존중되었으면 합니다.

박영택

  • 홍익대 대학원을 나온 후 잠시 파리에 계셨고 이후 미국 뉴욕에 있는 P.S.1스튜디오에서 1년간 계신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공간의 이동과 그곳에서의 수학과 체험이 자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김수자

  • 파리에서의 생활은 제가 갖고 있던 아이덴티티를 재확인하는 정도에 그쳤고 새로운 인식의 전환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특별히 공간에 대한 인식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잠자고 있던 나의 오감이 살아났다고 할까요. 사회 분위기가 솔직했고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억압되었던 감정들이 다시 쉽게 살아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박영택

  • 처음에는 평면에 천조각을 붙이고 그 위에 드로잉의 흔적은 남기다가 이후 천과 천을 덧붙임과 오브제들이 부착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민속 거울이나 특정한 물품에 천과 실을 씌우고 감는 작업, 일련의 연출과 치장같은 작업을 하셨습니다. 또한 천조각들이 벽면과 바닥에 펼쳐지고 그러다가 최근 보따리 자세가 직접적으로 공간에 놓여지고 천이 바닥에 깔리는 작업으로 전개되어 오고 있는데요, 그런식의 과정의 필연성이 무엇이었을가요. 동시에 「연역적 오브제」라는 제목을 쓰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김수자

  • 제가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나름대로는 세가지 다른 형태,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첫째는 바느질 작업을 통해 드러났던 평면작업이고, 둘째는 감는 작업으로 나타난 오브제 내지 입체작업, 셋째는 설치작업이지요. 평면 작업이 아상블라주 형태를 띄고 귀납적 형태로 축적되어 가는 과정을 가지는 반면 오브제 작업은 연역적 측면을 가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오랜 시간에 걸쳐 사용되었던 기존의 오브제에서 기본적인 형을 변형시키지 않았고, 감는다는 행위를 통해서 변형을 가했더라도 그 구조를 재확인 할 뿐 기본 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하나의 결과라기 보다는 역으로 오브제의 구조를 재확인하는 과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제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하는 오브제 작업을 그냥 연역적 오브제라고 했습니다.

박영택

  • 그렇다면 「보따리 작업」들은 어떻게 보면 될까요?

김수자

  • 보따리도 하나의 오브제이면서 그것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귀납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양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보따리는 평면이 3차원화한 입체 내지는 오브제이면서, 그것이 놓이는 장소성이라는 문제와 연관될 때 설치로써 자리한다고 봅니다.

박영택

  • 평면, 오브제, 설치작업들을 병행하십니까? 그 세가지 작업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최근에는 「보따리 작업」이 주가 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만…

김수자

  • 평면, 오브제 작업의 발표를 안했을 뿐 계속하고는 있습니다. 평면, 오브제, 상처를 우리의 신체구조와 비교해서 보고 있습니다. 평면은 피부, 오브제는 신경, 설치 그 중에서도 91년도 갤러리현대에서 발표했던 링 설치작업을 뼈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 작업은 이렇게 신체라는 것 과 계속 연관을 갖고 있고 보따리 작업 자체도 하나의 신체로 보고 있거든요. 우리 몸을 가장 복잡미묘한 보따리 구조로 은유한다면 신체는 하나의 움직이는 보따리가 되지요. 천의 시각적 측면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제가 천을 사용했을때는 천이라는 매체가 이만큼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습니다. 저는 단지 평면예 대한 대체물로 천을 체택했는데 그것이 끊임없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더군요. 또 공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 설치와는 필연적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여성성으로 말하자면 천이 감싸고, 닦고, 덮고, 보호하는 것, 또 우리가 태어나고 죽을 때 신체를 싸는 행위에 필요하다는 등 속성상 여성의 자궁과 같은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의 화려함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고요. 사실 촌스러움 쪽이 더 가깝다고 봅니다. 화려한 촌스러움일까요. 아무튼 촌스러움과 화려함은 연관성이 있는 것 같군요.

박영택

  • 천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계신데 어떤 특정한 천을 골라 사용하시는지요. 혹은 천을 취택할때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김수자

  • 제 개인적인 성향 또는 에너지라고 볼 수 있겠지요. 저는 어떤 원형적인 것에 다가가려는 욕망이 강한 것 같아요. 특히 티벳 몽고, 시베리아 등의 문화나 풍물을 보면 제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는데 천을 사용할 때도 저는 홀리듯이 빠져들면서 작업을 합니다. 제가 새 천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남들이 덮었던 이불이나 입었던 옷을 사용하기 때문에 거기에 혼령이 묻어 있는지 몰라도 천에서 강한 에너지를 느낍니다.

박영택

  • 「보따리 작업」을 착상하게 된 동기가 있으셨나요?

김수자

  • 보따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제 주위에도 항상 있었어요. 그 작업을 하기 전 부터 제 화실에도 있었고요.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뿐입니다. 그런데 92년 P.S.1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고개를 돌린 순간 거기에 보따리가 보이더군요. 천 작업을 하려고 보따리로 쌓아놓았던 것을 제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 때 그 보따리는 전혀 새로운 보따리였어요.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조각이고 회화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단순한 「묶는다」는 행위를 통해서 2차원을 3차원화 할 수 있는 가능성, 즉 회화적 방법을 연출할 수 있었고 또한 불륨있는 조각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것 같아요.

박영택

  • 그럼 이 보따리를 통해 가장 회확적이고 동시에 조각적인 작업을 지속해서 풀어내려는 의욕을 지니고 계시군요.

김수자

  • 그렇지요.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사실 저는 화가의 입장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에게 천 작업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지요.

박영택

  • 80년대 후반부터 선생님의 작업을 두고 이른바 페미니즘 미술의 현 성과로 보려는 시각들이 있어왔습니다. 물론 바느질과 천의 사용이란 지극히 여성적인 것일 수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최근에 많은 여성작가들의 작업에서 이 천의 사용과 바느질 자국을 흔하게 접합니다. 일종으 유행과 패션이 되었다고 여겨지고도 합니다. 선생님은 본인의 작업이 패미니즘 미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수자

  • 제가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것을 단지 내 작업이 갖고 있는 많은 요소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일견 동조를 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만일 저를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단정해서 본다면 그것은 오류입니다.

박영택

  •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작업을 여성적인 양식으로 보고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수자

  •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긍정을 합니다. 저는 물론 한 인간이지만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여성이지만 한국의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여성작가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시대의 한계도 분명히 있겠고요. 거기에 분명 「억압」이라는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또 여성성이라는 문제는 제가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박영택

  • 위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최근에 천을 사용하는 작가들이 상당수 눈에 띄고 있고 그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은 이런 현상에 대해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김수자

  • 천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형태가 보자기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는 우리나라 보자기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소개되지 않을 때였어요. 그 후 84년도에 중앙박물관에서 대규모 보자기 전시가 있었는데 내 작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군요. 가보지는 못했지만 전통적인 것이 체질적으로 제게 스며든 부분은 있겠지요. 제가 정사각형의 평면 작업들을 원형적인 아상블라주 작업으로 옮기게 된 것도 그 보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작가들이 천에 애착심을 갖고 다루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날카로운 시각으로 해석해 내고 다양화 시켰으면 합니다. 다만 진정한 프로는 결코 남의 일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는 식의 태도는 취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천 작업을 하는 분들이 그런 오해나 문제를 많이 안을 것 같은데, 천은 속서앙 바느질이라든가 묶고 엮고 쌓는 등의 방법론을 피하기가 어렵거든요. 그것을 어떻게 자기식으로 개념화시키고 당위성을 갖느냐가 중요한 문제겠지요.

박영택

  • 사실 그러한 문제는 우리 화단에 있어 매우 광범위하게 번져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특정한 화풍이나 세력을 의식해서 그려내거나 모방과 패션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언어, 자기 세계관을 정확하게 표출해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수자

  • 작가의 에너지, 혹은 욕망과 관련이 깊은 것 같아요. 끌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가 욕망이 주도한다라는 말을 한적이 있어 인상적이었는데, 결국 그 욕망이 어떤 욕망인가가 문제겠지요.

박영택

  • 선생님 경우 그 욕망은 무엇에 대한, 어떤 욕망입니까?

김수자

  • 저 나름대로의 논리를 갖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은 거의 끌리다시피 오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욕망이 아니었나 합니다. 본능적이고 생득적인 것이라고 할까요. 논리는 욕망 가운데 늘 잠재해 있는 것이라 봅니다.

박영택

  • 자신의 감수성과 본능, 욕망을 빈번하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여성적인 본능성에 가까운 것인가요? 아니면 어떤 것이 혼재된 것입니까?

김수자

  • 여성적인 본능이라기 보다는 어떤 원형, 아이덴티티의 문제겠지요. 그 아이덴티티는 여성으로서의 그것일수도 또는 한 인간 작가로서의 그것일 수도 있지요.

박영택

  • 사실 그 보따리는 개인적으로 많은 것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만큼 연상의 동기를 제공해 주는 편입니다. 무엇인가 담겨져 있고 그것이 비밀스럽게 묶여져셔 숨겨져 있지요. 동시에 그것은 곧 떠남과 이별, 정리와 죽음 같은것도 일시적으로나마 접촉시킵니다.

김수자

  • 「떠난다」, 「도착한다」는 유목민적인 요소가 있지요. 또 보따리를 쌀 때는 안듯이 싸는 데 그것은 내것으로 보호하고 경계짓고, 결론짓는다는 의미도 있어요. 하지만 또 묘하게도 정반대의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데, 예컨데 떠난다, 거부한다는 자기폐쇄적인 측면도 갖지요. 공간적으로는 열려있되 심리적으로는 폐쇄된 상황을 표출할 수 있어요. 또한 보따리는 인간이 죽을 때 까지 지닐 수 밖에 없는 최소한의 소지품(Belonging)이자 삶의 그림자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보따리는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고 한마디로 언어화할 수 없는, 보따리라는 「문제」 자체가 저에게는 문제거리인 것 같아요.

박영택

  • 다분히 유목적인 정신과 자세, 그러니까 일종의 노마드적 사유와 세계관도 일정 부분 연상시키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일상적 삶과 예술의 간극이 완전히 소멸되는 지점을 향해 지속해서 작업을 풀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작가란 존재는 항시 삶의 모서리에서 버티면서 예민한 시대정신과 자유로운 의식을 그 부랑과 유목의 정신을 몸소 보여주는 자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근에 부쩍 그런 생각을 해보는데 그런 것이 오늘날 요구되는 나름의 미술관, 작가상 같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김수자

  • 그렇습니다. 어떤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이행해온 과정 그 자체도 그런 떠남으로 이야기될 수 있겠는데 그것은 결국 칼날 같은 현실 위에서도 예술가로 살아 남으려면 하나의 의지이며 일상적 현실을 비우고, 비일상적 삶에 발을 딛는다는 것, 애착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것을 통해서 자신을 극복하려던 과정으로 말할 수 있어요. 또 실제로 저는 어렸을 때 도시에서 시골로, 산촌에서 산촌으로 옮겨다니는 유목민적인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영택

  •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김수자

  • 예술한다는 것은 결국 철학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무엇을 남긴다기 보다 무엇을 생각하는 작업이 될 것 같고요. 그것은 생각지 못했던 것을 환기시켜주는 일도 되겠지요. 저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무(無)에로 도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국, 살아있기 위해서 모든 작업을 점으로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노동」이 많이 요구되는 일인 「바느질」로 말이지요. 그 과정이 어떤 의미에서는 서술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만 작업을 할 생각입니다.

— SPACE(June 1996), No.344, pp. 11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