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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한국 미술에 있어 1980년대 중·후반은 종래의 모더니즘 미학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좀더 넓고 개방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사회적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기와 올림픽을 계기로 한 국제화가 촉발됨으로써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하던 폐쇄적 사유방식과 획일적 가치관이 점진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기존의 인습과 새로운 사고를 위한 열정이 혼융된 하나의 과도적 시기이기도 하였다.
형식주의 모더니즘을 거부하는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 은 한편으로는 민족적 현실과 결부되어 ‘민중미술’로 대표되는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형식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코자 한 입장에서는 새로운 형상성의 추구와 복합 매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이 놓이는 공간이나 환경과의 상관성 속에서 작품을 재문맥화하는 설치미술이나 장소성이 강조된 새 로운 양식으로 확산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서구 포스트모던에 대한 깊은 이해는 부족하였지만, 1980년대 중·후반은 모더니즘의 미학이 가지는 제반 문제점들이 폭넓게 검증되기 시작하면서, 탈(脫)모던의 양상들이 매우 복잡하게 대두되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와 달리 대규모의 집단활동보다는 다양한 소그룹 활동이 활성화되었고, 더 나아가 독특한 개인 활동들을 중심으 로 개별성과 다원성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획일적 거대 담론보다는 작은 이야기들과 소수자들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서구 문화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전통과 그 언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전통을 소재로 한 작업들과 개인의 체험을 기반으로 한 작업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과거에 비해 역량 있는 많은 여성 작가들 이 등장하게 되는데, 종래의 남성 중심의 미술계 구도와는 다른 큰 변화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자는 이 시기에 등장한 매우 출중한 여성 작가 중 하나이다. 그녀는 현재 각종 국제비엔날레 등을 통해 확고한 국제적 인지도를 획득한 작가인데, 그녀의 초기 작업은 현재의 작 업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많은 잠재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작업은 이불보나 보자기와 같은 천을 사용하며, 바느질을 기본적인 기법으로 사용한다. 천을 조각보처럼 꿰매어 이어 붙이기도 하고 천으로 오브제를 감싸기도 한다. 개울가에서 천을 빨아 널어놓기도 하고, 천을 카페의 탁자보로 사용하여 작품을 일상 공간 속에서 실재적 기능과 조형적 요소로 작동시키기도 한다. 또 천을 보따리로 만들어 전시장에 늘어놓기도 하고, 보따리들을 트럭에 싣고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했던 지역들을 옮겨 다니기도 한다. 이외에도 그녀는 문화권이 다른 새로운 지역들을 여행하며, 여행지를 소재로 한 다양한 유목적 사유를 구현하는 비디오 작업을 수행하기도한다.
그녀의〈땅과 하늘〉(1984)은 초기작으로 당시의 조형 적 관심사를 잘 구현해 내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그 녀의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전통 규방문화의 산물인 조각보의 현대적 변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금박의 전통문양을 곁들인 원색의 비단 천과 같은 이불보 등의 천 조각들을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꿰매어 가는 공정은 동양 여성의 감수성을 조형화해 내는 적절한 코드로 작용한다. 또한 천이 가지는 가변성은 그것이 보자기로 사용될 때 증폭되며, 보자기는 비밀스러움과 내포성, 이동성 그리고 여인의 애환 등과 같은 복합적 의미를 함의토록 한다. 또한 바느질은 다양한 이미지들을 연결시키는 재문맥화 행위이며, 또한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애환이며, 애환을 구성하는 내러티브 만들기이기도 하다. 천들이 여인의 삶의 숱한 편린이라면 바느질은 그 편린들을 모았다 흩어버리는 사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녀의 바느질은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여정이며, 한 곳에 정착하기를 거부하는 그녀의 유목적 사유의 조형화이다.
─ 『문화예술』 12월호, 2003, pp. 1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