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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부 (독립 큐레이터, 북경 칭화대 예술사 석사)
2022
1994년 경주 옥산서원에서 행해진 김수자의 퍼포먼스는 하나의 사회 조각 작품의 출발점을 알린다. 전통적으로 조각은 어떠한 형태를 새겨서 예술가가 원하는 형태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조각의 또 다른 정의는 어떤 대상을 모아서 결합하는 것(Assembling)도 내포한다. 그러한 조각의 정의 안에서,
예로부터 계곡 물가는 여인들의 사적인 소통이 일어나는 장소였다. 옥산서원 근처 계곡에서 이뤄지는 예술가의 퍼포먼스는 세대의 심미적 전통과 전승의 결과인 이불보 위를 걸어가면서 하나하나 돌 바닥에 놓여있는 조각보를 수집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의 보따리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보여준다. 이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활동인 것 같아 보이지만 지속적인 세대의 전승에 의해 이뤄진 작업을 현대적으로 전환시킨 행위 예술로 볼 수 있다.
할머니부터 어머니,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가정을 이뤄나갈 성인 여인의 출발점은 언제나 오색찬란한 이불보의 전승과 선물에서 시작된다. 전통적으로 이불보는 신랑의 집에서 신부의 집으로 송복(送服)이 이뤄질 때 신부의 두벌 옷과 패물, 혼서지(婚書紙)와 함께 오간다. 이 과정 속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한 혼수들이 오고 가는데, 대게 비단·이불감·솜·돈 등을 선물한다.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해 각 가정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불보가 쌓이게 된다. 이불보에는 미래에 한 가정을 이뤄나갈 새 출발에 대한 여러가지 축복이 담긴 상징물들이 다양한 색상과 조화를 이루며 새겨진다. 한국의 전통적 복(福)의 정의와 축복의 소망들이 이 조각보에 다양한 방식으로 새겨진 것이다.
한국의 가정에 있어서 이불보는 단순한 기능적 역할을 하는 섬유로 만든 생산품이 아닌, 한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이루기 위해 양측 가정에서 사려깊게 준비하고 선택한 마음과 생각, 심미적 안목이 담겨져 있는 오브젝트인 것이다.
요셉 보이스는 “생각은 곧 조각이다. 단지 하나의 대상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물질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조각품보다는, ‘생각한다’는 행위가 이 세상에서 당연히 훨씬 더 격정적으로 작용한다.”[1]라고 조각을 정의하였다. 사회적 출발점을 만들어나가는 생각들이 모인 이불보에는 그 오브젝트를 받는 대상, 즉, 가족의 구성원 마다 각자의 사연과 생각들이 축적되어 있다.
김수자는 이러한 생각들과 추억, 심미적 종합인 이불보를 자신의 사회적 조각을 위한 오브젝트로 선택하고, 세대의 흔적과 시간의 기억들을 하나의 보따리로 묶어 나가는 행위를 진행한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길이 담겨지고, 가정을 이뤄나가는 하나의 출발점이 되는 이 오브젝트를 한 곳에 모아 때로는 바늘과 실로 꿰어서 형태를 만들거나, 하나로 묶어내어 보따리를 만들어 나간다. 이 과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 조각을 창조하는 퍼포먼스인 것이다.
김수자의 작품은, 권위에 의해 소통할 수 없어 추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 앞 세대의 단색화 운동과 과도한 자기주장과 권위 탈피, 권력에 대한 반목과 대항이라는 주제로 집단적으로 이뤄진 동세대의 민중미술과는 다른 예술 방향성을 선택한다. 그 방향성은 서양 예술계에서 시작한 탈식민적 담론과 다문화적 논쟁과 연결된다. 1989년 퐁피두 센터에서 이뤄진 대지의 마술사들”(Les Magiciens de la terre) 전시로 촉발된 이러한 흐름은, 서양 주류 동시대 예술계에서 더욱 많은 외부인들, 즉, 동양과 아프리카계 예술가들에 대한 전시참여의 기회가 점차 증대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변화에 맞춰서 1992-1993년 MoMA PS1에서 벽 조각 전시를 시작으로 김수자의 예술활동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고 조각된다. 김수자의 동양적이면서도 세련된 현대예술은 시대적 과제를 찾던 수 많은 큐레이터들과의 교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김수자는 새로운 예술적 출발점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때로는 ‘바느질’의 개념을 ‘걷기’개념과 연결시켜서 일상 생활의 개념으로 전환시키고, 출생과 죽음의 현장에서 처음 피부를 감싸게 되는 직물과 영혼을 연결시켜 외부의 세계로부터 보호하고 포옹시킨다.”[2]
김수자의 예술 창작 이념은 기나긴 냉전의 종식과 세계화의 촉발, 이동의 자유가 증진되는 시점에 또 다른 개념과 연결된다. 전지구적으로 이뤄지는 디아스포라적 이동과 이주의 증대에 맞춰서 김수자의 작품은 유목민적 작품으로 분류되며 또 다른 해석의 문이 열리게 된다. 이민가방으로 딱딱하게 정의되던 서양의 각진 케이스가 아닌 어떠한 공간에서도 빈틈없이 공간을 메워 나갈 수 있는 부드러운 소재의 김수자의 오브젝트는, 서양인들로 하여금 이동의 순간에도 심미적 요소를 고려하여 다양한 색상과 문양이 새겨진 동양의 멋에 감탄을 자아들게 만들었다.
일상의 보따리는 동시대 예술의 전당인 베니스 비엔날레의 현장에서도 전시가 되고, 이후 신과 조우하며 거룩의 성결함을 요구하는 교회에서도 전시되게 된다. 일상의 영역에서 새로운 공간과 만남을 이뤄나가며, 영원의 영역으로 작품의 활동 공간이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과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부분 총감독을 한 Harald Szeeman는 김수자의 창작행위의 과정과 그의 작품 키워드를 정의하면서 아래와 같이 작품을 정의한다.
“가까운 현재에 있고 동시에 먼 곳에 있는 직조의 혼합을 통해, 그녀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행동, 즉 우리의 존재의 덧없음, 순간을 즐기는 의식, 변화, 이주, 재정착, 모험, 고통, 익숙한 것을 남겨야 하는 것에 대해 성찰하도록 도전합니다. 그녀는 기억력과 서사가 풍부한 그녀의 옷감을 아름다움과 영향을 미치는 연상의 영역으로 능숙하게 현재의 상황에 맞춥니다.”[3]
김수자의 작품은 시대의 상황에 맞춰서 더욱 개방적이면서도 세계적인 환경의 요구에 맞춰서 활동하며 적응할 수 있는 유목민적 작품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유목민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는 삶이다. 김수자는 대구에서 직조공장을 최초로 운영하던 조부의 심미적, 재료적 유산과 매번 주둔지를 옮겨가던 군인 아버지의 잦은 이주성이 자신의 작품세계에도 반영이 된 것이다.
2000년 이후 김수자의 작품은 새로운 오브젝트를 통해 예술영역의 정의를 확장시킨다. <To Breathe - A Mirror Woman>에서 김수자는 빛의 호흡에 주목한다. 마드리드 팔라시오 데 크리스탈(Palacio de Cristal, 2006)에서 진행된 작품은 기존의 보따리가 아닌 빛에 주목한다.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빛의 영역은 가시광선의 영역이다. 이 가시광선은 다양한 빛의 조합으로 이뤄지는데, 물의 입자나 반투명의 유리에 빛이 반사가 되면 본래 가지고 있던 색상이 투영되어 빛의 파동을 가시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김수자는 이러한 빛의 호흡과 파동을 필름을 통해 건축의 공간에 반영하고 왜곡시켜서, 거울 위에 공간과 빛의 조화가 상을 맺어, 위와 아래의 구분 없이 무한한 공간적 포용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의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과 천상에서 비춰진 빛이 거울 위 여인 아래로 비춰지고, 인간과 건축, 자연의 표상으로 이미지의 예술 영역이 확장됨을 목도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가시적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에 대한 연민과 폭력에 대한 취약성을 감싸안으며 예술을 통한 치유의 방향을 모색하던 김수자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기존에 인간으로 향하던 예술의 시선을 자연계와 무한의 영역으로 작품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다.
특정 필름의 재료가 가지는 수 많은 수직과 수평선의 구조는 빛에 있어서 프리즘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 빛은 이 필름을 통과하여, 무지개 빛을 만들어 나간다. 이 과정을 통해 캔버스와 빛, 색상과 안료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던 김수자는 빛과 소리의 본질을 내면적 공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한다. 완전히 밀폐되고 어두운 공간에서 소음이 차단된 침묵의 공간을 조성하여, 빛과 대비시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나간다.[4]
기존의 작품은 오브젝트와 행위적 관계, 어떠한 지향적 목표점을 향해 보다 열린 공간으로 나아갔다면, <Archive of Mind, 2016>에서는 밀폐되고 제한된 공간 속에서 일정 빛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면서 테이블 위에서는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작품에 참여하는 관객들 간의 호흡이 수많은 Clay Ball을 지나면서 충돌과 흡착에 의해 보이지 않는 파동을 만들어 나가면서 원탁에 앉은 타인에게 전달되게 된다. 이 것은 빛의 파동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설치 예술을 통해 시각적으로 보인 것이며, 또 다른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육체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물은 중력의 영향, 뇌의 방향성과 호르몬의 조정에 의해 혈압과 세포, 혈류를 통해 신체 내부세계의 발란스를 조정한다. 이러한 신체와 유사하게 인간의 마음 역시 지속적으로 마음의 방에 몸과 혼, 영의 영역의 교차적 조우를 통해 마음의 상태가 결정이 된다.
2000년 전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마음과 몸, 혼의 상태가 현재의 상황뿐만 아니라 영원의 세계와 연결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이러한 문구를 남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내면적 마음에 형태가 구조화된 설치작품은 인간의 영과 혼, 몸의 연결고리가 지속적으로 일상의 관계 속에서 파동을 일으키며, 내면적 갈등과 충돌, 때로는 상처입은 영혼처럼 피흘리며 이에 대처하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들을 시각적으로 구조화 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구조물을 통해 더 이상 일상의 영역이 아닌 내면의 세계와 자신과의 대면을 유도한다.
김수자는 언제나 시대의 필요에 앞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갔다. 현실세계는 점점 더 복잡화되고 교류와 매체의 방향성은 인간성을 상실하는 내용들이 세상을 점령해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 김수자의 작품은 더욱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창조해나간다.
아니쉬 카푸어는 여성의 젖꼭지와 같은 표면의 부드러움과 때로는 압도적인 크기로 공간을 점령하거나, 깊이를 예측할 수 없는 어둠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감과 두려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추상적이면서도 명상적 조각을 만들었다면, 김수자는 이러한 일방적이면서도 구조화된 공간의 요청이 아닌, 기존의 자연계와 함께 조우하면서 조화를 이뤄나가는 작품을 선보인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압도하거나 일방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분위기를 조장하지 않는다. 오브젝트 표면의 부드러운 느낌처럼 내면을 부드럽게 관조할 수 있는 환경들을 조성한다.
그 점은 2000년대 이후 건축과 공간, 자연과 오브젝트, 그리고 작가 자신의 미래지향적 작품의 방향성과 연결된다.
2022년 Frieze Seoul Artist talk에서 김수자는 앞으로 미래 예술의 방향에 대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작가 스스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감동하며 소통할 수 있는 예술, 더 이상 거칠고 파괴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진정으로 인간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인류 문명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작품으로 예술의 방향이 진행이 되면 좋겠다고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한다.
이러한 예술관은 지속적인 변형과 새로운 오브젝트에 대한 모색과 점차 복잡화되고 과격해지는 현대의 예술세계에 새로운 안식처와 명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리고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객들에게 다시 질문하게 된다. 이러한 예술세계는 보따리 트럭 위에 앉아 자연의 호흡과 밤새 머금은 이슬이 빛에 투영되어 하나의 몽환적 공간을 연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일상의 이주를 신비로움을 자아내게 만든 그녀의 신화적 초기 작품의 모습처럼, 예술가의 작품세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나갈 먼 걸음을 내딛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2.9.10.
[Note]
[1] Carmela thiele, Schnellkurs skulptur, DuMont Buchverlag GmbH, 1995
[2] Hans Ulrich Obrist, Wrapping Bodies and Souls, 1997
[3] Harald Szeeman, Bottari, 2000
[4] A Conversation between Kimsooja and Hou Hanru, Create A New Light,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