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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있음의 과제

스티븐 헨리 마도프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교수)

2017

  • 세계는 끝없는 갈등으로 인해 분열되어 있지만 눈물 한 방울 한 방울, 작디작은 갈등과 충돌 하나하나조차 모두 나름대로의 통합을 지향한다. 어떤 갈등이더라도 그것은 전체 구조에 대한 노스탤지어이자 전체를 향해 가는 길의 궤적이다. 물론 각양각색의 전체화 구조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차이를 억압하는 구조도 있고 민주적인 질서를 지지하는 구조도 있다.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전체화라는 개념은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용어인 ‘무엇 내에서 존재함(being-in)’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정의로는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무엇 안에 무엇과 함께하는 무엇(something with something in something)”을 들 수 있다.[1] ‘무엇 내에서 존재함’의 사회적 실례를 들자면, 우리는 각자 하나의 무엇이고 따라서 우리는 무엇과 함께 하는 사회라고 하는 무엇 안의 존재이다. 사회(society)는 공존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의 라틴어 ‘socius’에서 유래했다. 그렇다면 사회는 곧 ‘함께-존재함’이다. 시민(civitas)은 도시(city)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시민(citizen)’, 혹은 조직화된 공간 내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 귀결된다. ‘폴리스(도시국가, polis)’라는 단어는 ‘경계 지어진 공간’을 뜻하는 원시 인구어(原始印歐語, the proto-IndoEuropean) ‘pele’에서 유래한 말인바, 폴리스는 곧 경계 지어진 시민들의
    공간이고 이 공간에서 ‘존재한다(to be-in)’는 것은 사회적 코드들, 즉 사회적 존재 간에 유통되는 코드들의 체계에 따라 함께 산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과 동물이 살아온 시간에 대한 모든 기록들이 말해주듯, 코드들은 언제나 도식적인 동시에 무정부적인 분열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다시 협의되고 수정되는 과정에 노출된다.

  • ‘사회(socius)’, ‘시민(civitas)’, ‘폴리스(polis)’. 김수자의 작업 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는 상징적 의도는 두 가지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저널리스트적 태도로 일상적인 사건들을 역사적 시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 전제는 언제 어디서나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행동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며 관용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온전함을 추구하며 파괴성이라는 인간의 사악함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치유와 보살핌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수자의 작품을 보면 이러한 상호 균형적인 인간의 행동들이 천의 안팎을 관통하는 바늘로 표현되고, 이것들이 인간 본성의 바탕을 이루는 신학적이고 철학적 믿음 체계들을 통해 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물권(生物圈)과 삶의 코드들, 사회성, 그리고 이신론 (理神論)적 원리들과 윤리적 장치들은 모두 ‘무엇 내에서 존재함’의 방식에 따라 차이의 공존을 지향하는 통합적 합의하에 철저히 분열되거나 서로 탄탄히 결합하는 구조를 띠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사회 내부적으로 선한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또 모두가 함께 살아갈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해 왔다. 이는 윤리학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이 글의 제한된 지면상 필자는 이러한 윤리학적 사유의 범위를 합의된 인식과 동의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로 제한한다. 이를 통해 사회의 전체성을 성취하기 위한 폭력의 중재를 꾀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무엇 내에서 존재함’을 사회적 형태인 ‘함께-존재함 (being-together)’이라는 제한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전체화를 보편주의나 절대주의의 관점이 아닌 타자성과 즉흥성, 혼란과 질서가 끊임없이 번갈아 오르내리는 지렛대의 지렛목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함께-있음’을 사회(socius)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즉 전체성의 성취를 위해 사회 내부의 폭력을 극복할 책임, 그리고 사회라는 경계 지어진 공간의 파편화와 사회적 형태들의 해체, 다시 말해 사회 내부의 분열을 극복할 책임 말이다.

  • 이 경우에 통합은 폭력의 현존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코드들의 유연성을 상정함으로써 신중한 판단과 투표를 통한 합의하에 재코드화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윤리적 전체성(wholeness)은 평등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자아들 간의 합의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윤리적 자아란 다른 자아들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아를 일컬으며, 이때의 윤리란 행동에 대한 물음이고 해결을 위한 타자들의 대답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자아가 형성되는 하나의 비평 형식으로서 타자들과 ‘함께-있음’, 즉 윤리적 친밀성이라 부를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어떻게 그려나갈지, 그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문답의 장(場)을 통해 비로소 형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윤리는 어떠한 사태, 행위자의 능력, 의논 과정에서의 상호성을 고려 대상으로 하는 창의적 실천의 한 형태이다.

  • 윤리에 대해 필자가 이러한 사유에 이르게 된 데에는 김수자의 예술이 기여한 바가 크다. 김수자가 자신의 작업을 행하는 과정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행위의 윤리학’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 그녀의 작업은 염원적 ‘함께-있음’에 대한 상징적 재현이라 할 것이다. 개인적 자아들의 불투명성은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관용이라는 어떤 안정된 사회성에 이르는 길목에서 인간 본성의 복잡한 폭력적 단계들을 거치는 자아들에 대한 이상화된 투명한 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함께-있음’에 대해 작가가 내린 정의의 특징은 공통된 일상성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김수자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행위를 감지하게 된다. 영상 또는 사진 작품에서 김수자는 항상 우리를 등진 채 다른 사람들, 다른 사물들을 마주하고 있다. 마치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고 합의의 가능성을 감안해서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면 어떻게 내가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치 독자적 정체성들의 호혜적 춤을 고집하려는 것처럼. “당신 안의 나는 누구이며 내 안의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묻기라도 하는 양.[2]

-실제로 작가의 작품들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자아들의 춤과 그 춤을 지켜보고 동참하는 집단적 존재감이다. ‘나-더불어-너(I-withyou)’라는이 움직임에는 작업과 사색의 여러 환경에서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유사점들과 접점들에 대한 암시가 존재한다.[3] 이는 <바늘 여인>, <실의 궤적>과 같은 영상 작품들을 통해 잘 예시되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보이는 공간들은 긴밀하게 농축되어 있으며 민족지학(民族誌學)적인 정밀한 현미경 렌즈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듯하다. 게다가 폐쇄된 공간의 밀도가 강조하는 손들과 인물들의 묵직한 의미에 주목하는 응시에 의해 공간은 좁혀지고 있다. 김수자의 영상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것처럼 그녀는 카메라의 시점을 공중에 위치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작품에서 예외 없이 감지되는 것은 작품에 표현된 운동감이 어떠한 틀에 의해 제한된 듯, 잘린 듯, 그리고 안쪽으로 당겨진 듯하다는 점이다. 인간 신체의 움직임에 대한 사색적인 고찰의 흔적이 보이고, 이는 지체
없이 존재감과 사회성, 물리적 노동의 구현으로 표현되는 동시에 반복에 대한 지극히 가벼운 무게의 추상적 표현으로 연결된다.

  • 작가의 설치 작품에는 이러한 집단적 친밀감이 흠뻑 스며 있다. 앞서 언급한 행위 윤리학의 접근으로 인해 공간은 사물들을 서로 연결하는 깨우침의 바느질이 만들어 내는 희열의 장으로 변모한다. 빛과 색채들의 상징성은 이 ‘함께-있음’에 가득 투사되고 있다. <연역적 오브제 Deductive Object>(2016)에서 작가는 강철을 용접한 난형(卵形)의 형태에 기본 방향(동, 남, 중앙, 서, 북)과 5가지 원소(목, 화, 토, 금, 수)를 표상하는 한국의 전통 오방색으로 색띠를 그려 넣었다. 촉감, 시각, 호흡, 무게, 견고성, 시간의 지속, 해의 방향, 신체가 지탱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 신체가 가는 장소, 가정 그리고 도구, 이 모든 것들이 세계 내의 집, 생명 또는 삶의 세계로서 존재와 연결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인들이 ‘zoē’라고 부른 것과 그리스어 ‘bios’, 즉 개인으로서 ‘함께-있음’의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4] 이러한 삶의 이중적 흐름, 걷잡을 수 없으면서도 통제된 에너지들의 흐름들이 서로를 거쳐 지나치며 작품의 코드화된 색채들과 완성된 기하학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제목은 전체성의 형이상학적 명제로부터 연역된 물리적 방법론으로서 작품의 논리적 지위를 한층 강조한다. 김수자는 <연역적 오브제>를 사방이 막힌 뜰에 놓인 거울 대좌 위에 위치시키며 이러한 상징주의적 효과를 더욱 강화한다. 따라서 작품은 중앙, 즉 사회(socius)의 중심(omphalos)에 자리하게 된다. 이를 통해 존재함과 ‘함께-있음’의 강도가 한층 더 증폭되는 가운데 작품 위의 하늘은 방향을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빛을 비춘다.

  • 약 2.5m 높이로 마치 거대한 오벨리스크처럼 치솟아 있는 이 조각 작품 주변은 작가가 자주 사용해 온 특수 회절격자 필름으로 뒤덮인 미술관의 유리 벽들이 에워싸고 있다. 이로 인해 빛은 무지갯빛 띠로 굴절된다. 창을 통한 모든 전경은 하나의 틀이 되고, 이 틀로 인해 세부 요소들은 색채의 각도에 의해 살아 움직이는 어렴풋한 추상적 형태들로 녹아든다. 이러한 점에서 조각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유리 벽은 하나의 회화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이 추상화의 과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각적 비물질화를 유도하고, 통합된 존재라는 주제를 더욱 부각하면서 우리를 물질에서 형이상학적 관계로 되돌려 보낸다. 이 작품의 제목인 ‘호흡’조차 경계들을 흐리려는 의도에 일조하면서 보는 것과 호흡하는 것이 서로 함께함, 병치되는 일종의 공감각적 작용 또는 감각적 혼혈 생식을 암시한다. 유동성과 융합을 향한 이러한 궤도는 김수자의 작업에서 일종의 다년생 식물의 생명 주기처럼 계속 반복되는 요소이다. 집중하고 움직이며 무언가
    만들기를 반복하는 신체들은 물질성을 유예한다. 이러한 신체들은 거울 표면 위에서 부유하며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형체를 가졌으나 대개의 경우에는 종종 녹음된 작가의 호흡, 콧노래, 또는 가글 소리로 부풀어 공기 중에 떠돌게 된다. 이러한 소리는 작가가 신체의 발산, 즉 안팎의 용해를 암시하기 위해 되풀이하는 방법론적 요소인데, <직물공장 The Weaving Factory>(2004)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번 <구의 궤적>에서도 이러한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반복되는 행위들과 모티브들의 봉헌은 마치 하나의 결합된 존재를 위한 제의(祭儀)인 듯하다. 이 또한 ‘나-더불어-너’라는 사회성을 성사하는, 쉴 새 없이 변화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활동함을 표현하는 것은 질서로서의 반복, 규범의 확립,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함께-있음’의 숙련된 방식들의 확립에 대한 상징으로서, 반복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 행위의 윤리학임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 김수자의 설치 작품이자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마음의 기하학>의 집단 공동체적 퍼포먼스는 관람자가 19m에 달하는 타원형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찰흙 덩어리들을 손으로 굴려 구 형태를 만드는 것으로 완성된다. 구로 가득한 탁자는 돔으로 덮인 도시의 모형, 또는 신생 행성들이 군집한 별자리 지도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찰흙은 천지창조 신화에서 인간을 만드는 데 쓰인 재료이다. 신화에서는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인간 형태의 찰흙에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영감을 ‘불어넣어(inspire)’ 생명을 부여한다.[5] 인식 자체가 타자에 대한 의식적인 인정(認定)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찰흙 구들은 만들고 형태를 부여하고 다듬는 손에 의한 상징적 영감(靈感)의 구현이며, 자아와 자아들, 그리고 존재 인식의 표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인정된 상호 관계로 해석되며, 이 상호 관계는 집단 공동체적 행위의, 단일 재료로 여러 동작들을 반복하는 손의 유희적 즐거움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동시에 찰흙을 변
    형시키는 행위 도중에는 유사한 소리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찰흙을 변형시키는 와중에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자신들을 변화시키기도 하는데, 이러한 상호적(mutual) 행위에 의해 변모되는 것이다. 이때 상호 관계(mutuality)와 변형성(mutability)은 같은 것이 된다. 즉, 이것은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가 ‘나-더불어-너’에 대해 ‘함께-있음’에 있어서의 변형에 대해 “내가 타자에 의해 인식된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는 타자의 나에 대한 인식이 나를 변화시키는 정도와 비례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6]

  • 우리가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한 사회적 담론의 길을 터주는 것은 다름 아닌 ‘자아와 타자’에 대한 인식, ‘나와 너’의 호혜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변형적 행위이다. 여기서 이 담론은 항상 정황에 의해 활성화된다. 다만 윤리의 틀은 이성이라는 견고한 토대 위에서 상호 의존의 장에서 비롯되는 상호 보완적 관점의 가능성을 반영하지만 말이다. <마음의 기하학>에서 신체들은 손의 동작과 작업을 통해 서로에게 말을 걸며 존재의 사회성에 진입한다. 만드는 행위를 통해 탁자의 타원 주위로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게 된다. 동시에 <구의 궤적>에서 공이 굴러가는 소리와 가글 행위의 신체적 소음에 귀 기울이는 상호 활동을 통해 사람들은 통일된 행위들로 인해 닫힌 구조의 원을 그리며 ‘나-더불어-너’에 대해 인식하는 하나의 규범을 보여주게 된다.

  • 그러나 김수자의 작업은 주체로서의 인간 자아에 그 프로젝트를 국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이 다른 사물 속에 있는 사물임을 인식하며, 하나의 보다 광범위한 윤리에 있어 물활론(物活論)적인 행위자의 능력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 제안에는 모든 것들이 서로 얽혀 있다. 상관 관계와 ‘무엇 내에서 존재함’으로 이주를 유도하며, 소속성을 생성하는 기계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포착하는 그물같이 말이다. 이는 ‘실의 궤적’이라는 제목을 가진 여섯 개의 16mm 영상 작품들에서 분명하게 보인다. 이 중에서 가장 최근의 작품인 <실의 궤적V>(2016)을 예로 살펴보면, 이전 작품들처럼 시적인 요소가 가미된 다큐멘터리 형식을 통해 전 세계의 전경들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직조 작업을 보여준다. <실의 궤적 V>에서 우리는 바구니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수직기 (手織機)로 작업하는 여인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필자는 베틀이 현대컴퓨터의 원형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직조된 방적사의 망은 인터넷상의 수억 가닥 데이터의 어버이인 셈이다. 또한 배치, 배열의 적극적 형식으로서, 복잡하게 얽힌 전기와 빛의 흐름의 형식으로서 인터넷은 훨씬 더 보편적인 ‘zoē’와 ‘bios’의 소우주, 다시 말해 훨씬 더 엄청난 성좌가 형성된 광대함의 작은 표식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의 다큐멘터리적 특징이다. 확대된 이미지에 행위자들의 영상들이
    심호흡하듯 삽입되어 있어 우리의 주의력은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고 방직사나 바구니처럼 편직된 형태로 갑자기 등장하는 풀, 물의 흐름, 구름, 꽃무늬, 심지어는 누군가의 숱 많은 머리와 같은 자연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된다. 이 영상이나 앞서 말한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것은 다름 아닌 ‘유사함’이라는 소재이다. 즉 하나가 다른 하나의 형식상 메아리로 기능하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물이 그 원초적 원인을 반드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모든 사물에서 체계상 그들의 공통된 혈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존재론적
    추론을 통해 근원적 정보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적극적 물질성을 선사시대의 전(前) 방법론적이고 근원적인 방식으로 표출한다는 점은 어떤 대상을 절망이나 무아지경으로 몰아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zoē’, 모든 생명이 원초적이고 개화(開花)적인 형식으로 함께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실의 궤적’은 모든 물질을 관통하는 근원적 ‘정보의 실’이 된다. 그리고 실 꿰기는 경이(驚異)와 등가(等價)이고 ‘무엇이 무엇과 함께 무엇 내에 있음’과 같으므로 존재의 직조성(woven-ness)과도 등가이다. 마치 모든 시간과 시간 이전의 실의 세계가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된 상징적 존재로서 경이로운 사물로 오그라들 듯 집약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실 꿰기’는 찻잔 안의 우주처럼 존재의 다(多) 신체적, 그리고 무(無) 신체적 신체에 부적처럼 걸려 있는 지상명령(至上命令)을 향한 게놈(genome)적 충동의 몸짓이다.

  • 김수자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 직조된 유사성은 물질적으로 상이한 것들 간에 존재하는 포괄적인 미장아빔(mise en abyme)을 넌지시 암시한다. 한편, 끊임없이 언급되는 행위 윤리학의 모범적 전형이기도 한 다름들의 거울적 호혜성과 행위 윤리학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한 규범적인 틀을 찾아낼 의무를 작동하면, 이 틀 내에서 ‘무엇 내에 존재함’은 그 ‘함께-있음’의 요소로 치유 가능한 아고라(agora)를 설명할 수 있다. 그 개방적 특성으로 인해 인간적 개체든 비인간적 개체든 상관없이 모든 것들이 공존할 수 있다. 참여하는 것으로 상상되는 이 윤리적 작품은 지역 역사의 일화적 순간들, 지리, 정치, 그리고 신체들의 가장 국지적인 몸짓들에 기초하는 동시에 범정치적이고 초시간적이기도 한데, 이는 작가가 재료, 색, 몸짓, 형식에 규칙적으로 상징성을 부여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윤리적 상대주의, 즉 개별 문화들의 도덕적 체계들이 동시에 인정되기도 하고 위배되기도 한다. 또한 사물과 더불어 있는 사물의 최대 계수(係數) 내에서 상상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품의 호흡은 길어지며 빛은 굴절되고 확산된다. ‘무엇 내에서 존재함’에 대한 작가의 폭넓은 상상의 장에서 이 친밀함의 작업, ‘함께-있음’의 작업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Note]
[1] Peter Sloterdijk, Bubbles: Spheres I, trans. Wieland Hoban (New York: Semiotext(e), 2011), p. 542.
[2] 이 글에서 다뤄지고 있는 윤리에 대한 나의 사유는 특히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rbermas)의 영향을 받았다. Jürgen Habermas, Moral Consciousness and Communicative Action, trans. Christian Lenhardt and Shierry Weber Nicholsen (Cambridge, MA: MIT Press, 1990)과 Judith Butler,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5).
[3] 이 글에서 언급되는 ‘나-더불어-너(I-with-you)’라는 개념은 필자의 표현이다.
[4]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zo
ē’를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공통으로 적
용되는 살아있다는 혹은 살아간다는 단순한 사실”로 정의한다. Giorgio Agamben,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trans.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p. 1.
[5] 라틴어 ‘inspīrāre’는 문자 그대로 ‘숨으로 채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6] Judith Butler, 앞의 책, p. 26에서 재인용.

  • — Essay from Exhibition Catalogue 'Kimsooja: Archive of Mind' published by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2017. pp.86-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