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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미술 읽기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 - 노마디즘 (김수자, 함경아)

김홍희

2024

  • 노마디즘과 글로컬리즘

    이장의 화두인 '노마디즘'의 초대 작가는 김수자(1957)와 함경아(1966)이다. 이들은 작품의 경향이나 작가적 성향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지만, 여행을 통해 현대 노마디즘의 윤리를 실천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김수자는 인류학적 관심으로 유목민적 여행을 수행하며, 함경아는 여행을 통해 예술적 발상을 촉발, 숙성시킨다. 이러한 이들의 노마디즘은 생존 본능을 충족시키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지역을 이동하며 생활하던 전통적인 유목민이나, 그 후손들로서 아직까지 유목 생활을 유지하는 지금의 유목민의 정서와 무관하다. 또한 미지의 공간을 상상하고 관념적으로 이동 생활을 상정하는 정보화시대의 '호모모벤스(homo mobens)', 즉 이동하는 인간으로서 해방적인 삶을 찾아 타지를 여행하거나 정신적 방랑을 꿈꾸는 낭만적 보헤미안, 로망의 노마디즘과도 거리가 있다.
    이 두 작가의 노마디즘은 이십세기 후반의 주요 화두인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즘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는 국가 권력의 시장 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경제적 자유방임주의로서 자본이 막강한 파워를 누리고 국가의 경쟁력이 강화되는 순기능과 함께, 불황, 실업, 빈부격차, 선진국과 후진국의 갈등 등, 상호호혜적 관계와 공동체적 재분배가 외면되는 역기능을 초래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시스템을 통해서 인류의 평화, 경제적 복지, 사회정의, 환경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글로벌리즘 사상과 맞물려 전지구적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효과이자 동인으로 발생한 글로벌리즘은 초국가적 유토피안 비전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탈식민주의 시각에서 제기되는 비서구와 제3세계의 지리정치학적 까닭에 그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요구된 것이다.


    서양적 가치와 기준으로 저개발 국가를 변화시키는 제1세계의 글로벌리즘에 맞서 대두된 것이 비서구가 서구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문화적 맥락을 세계로 확장하려는 대안 개념이자 주변부의 지역성을 중시하는 글로컬리즘(glocalism)이다. 이는 공식적 식민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존속되는 신식민주의, 즉 정치, 경제, 문화의 불평등한 국제 관계를 유지시키는 신제국주의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경각심과 위기의식에 맞닿아 있는 관점이다. 탈중심주의적으로 재편된 글로컬리즘은 지적, 윤리적 여행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하고 타자를 포용하는 김수자와 함경아의 예술적 노마디즘을 연결하는 하나의 개연성이 된다.


    김수자와 함경아의 노마디즘은 위의 논의가 시사하듯이 세계와 지역, 중심과 주변을 결합시키는 예술적 동력이 된다. 이와 맞물려 이들의 노마디즘은 여성 화자를 가시화하는 의식적 기제가 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김수자의 ‘보따리 작’업과 함경아의 '자수 프로젝트'가 시사하는 조형의 젠더 특정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다수의 현대미술 작가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천 작업이나 수공예를 새로운 조형 언어로 활용하고 있지만, 이 두 작가의 경우는 매체적 관심이나 탐구보다는 '매체가 메시지'가 되는 주제적 필연성이 우선시된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여성의 일상적 가사행위와 한국의 전통적 여성 역할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됐고, 함경아의 '자수 프로젝트'는 북한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 고안된 여성적 접근의 산물이라고 볼 때, 이들의 천, 바느질, 자수 작업을 여성 문화, 공동체 의식과 관련되는 주제의식과 분리시켜 생각하기 어렵다.


    요컨대 이들의 예술적 노마디즘을 시각화하는 보따리와 자수를 글로컬리즘의 맥락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노마디즘의 물리적, 상징적 표상이며, 함경아의 북한 자수는 변방의 기예가 문화적, 지리적으로 재조명되는 이동의 메타포로 의미의 확장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천과 자수는 이 두 작가의 노마디즘이라는 주제의식을 가시화하는 기표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천 작업은 매체 이상의 의미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결국 노마디즘과 여성 수공예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들 예술의 미학적, 정치적 좌표가 자리매김되고 페미니즘적인 함의가 깃들게 되는 것이다.

  • 김수자의 '보따리'

    김수자의 보따리 작업은 바느질과 같은 여성의 일상적 가사행위, 크게는 의식주를 관장하는 생활 양식이 현대미술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개념화하고 의미화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1]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할머니의 한복과 그에 깃든 향수,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던 추억이 그의 회화적 천 작업과 조각적 보따리 작업을 탄생시킨 모태가 되었고, 작가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사이 그 작품들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성장하고 진화하였다. 1992년 뉴욕 P.S.1 컨템포러리아트센터 프로그램 레지던시에서 처음 선보인 작가의 보따리는 다수의 국내외 전시를 거쳐 양식적, 매체적, 개념적으로 다변화하였다. 때로는 작가의 몸, 여인의 몸으로 의인화하는가 하면 종래는 호흡과 빛 같은 비물질의 보따리로 그 양태가 바뀌면서 미학적, 정치적으로 심화되었다. 개인의 사연을 담은 '나의 보따리'가 역사의 질곡과 시련을 대면하는 '우리의 보따리'로 전환되고, 사적 영역을 넘는 공적 서사,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는 포용의 기표로 확장된 것이다.


    김수자의 보따리가 처음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지금은 전설이 된 역사적 전시회 「떠도는 도시들 (Cities on the Move)」(1997-1999)[2]을 통해서였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와 후 한루(Hou Hanru)가 기획한 이 전시회는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즘의 영향 아래 아시아가 지리정치학적 요지로 부상하면서, 신도시 건설 붐과 새로운 도시문화가 부흥하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시의적인 다장르 예술 이벤트였다. 작가는 이 전시 출품작으로, 자기 작업의 이정표가 된 <떠도는 도시들- 2727 킬로미터 보따리 트럭>(1997)을 발표했다.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한국의 정든 마을 길을 따라 장장 이천칠백이십칠 킬로를 달린 방랑의 여정을 기록한 이 퍼포먼스 비디오에서, 작가는 스쳐 지나는 한국 풍경을 뒤로하며 보따리 위에 걸터앉은 채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내내 뒷모습만 보이고 있다. 현대적 도시 현상과 진보 개념을 역행하듯, 보따리와 쓸쓸한 여인의 뒷모습이 유랑민의 소외와 노스탤지어를 환기시키는 이 작품은, 전시 주제를 독창적으로 해석한 대표작으로 평가되어 그를 단번에 세계적 작가로 등극시켰다.


    작품 속에서 길을 떠난 주인공처럼 김수자는 1999년 한국을 떠나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그때를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스스로가 자신을 세계에 홀로 내던진, 스스로를 문화적 망명자로 규정하는 그런 드라마틱한 상황이 스트레스로 여겨진다기보다는 나 자신을 한계 상황으로 내몬다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의 미래의 도전으로 생각했었다"고 회고한다.[3] 문화적 망명자로서 이방인의 삶을 영위하는 한계 상황 속에서 그는 '바늘 여인' 연작(1999-2009)을 비롯해, <구걸하는 여인>(2000-2001) <집 없는 여인- 델리>(2000) <집 없는 여인-카이로>(2001) <빨래하는 여인>(2000) <거울 여인>(2002) <바람 여인>(2003) 등, 스스로에 대해 사유하고 여성이 가진 치유의 힘을 암시하는 다수의 퍼포먼스 비디오를 탄생시키게 된다.


    '바늘 여인'의 첫번째 연작(1999-2001)은 도쿄, 상하이, 멕시코시티, 런던, 델리, 뉴욕, 카이로, 라고스 등 인구가 밀집한 여덟 개의 대도시에서 촬영한 다채널 퍼포먼스 비디오이다. 작가는 여기서도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대도시 군중들의 물결 한가운데 부동의 자세로 서 있다. 내적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부동의 뒷모습, 김수자 특유의 이러한 미장센은 도쿄 거리에서 일어났던 실존적 체험에 근간한다. 작가는 시부야 거리를 걸으며 "누적된 인파의 물결에 압도당한 순간 그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으며 그 압도적인 순간의 도착이 바로 바늘 여인의 시작"이 되었다고 말하며, 부동의 퍼포먼스 과정을 통해 자신이 “지워지는" 느낌이었다고 술회한다.[4] 바로 그 순간 작가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자신이 군중을 감싸는 보자기가 되는 동시에 그들을 직조하는 바늘이 되어 군중과 하나되는 '접신적' 일체감을 느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익명의 군중을 향한 감정이입, 연민, 포용, 환대의 감흥이었을 것이다.


    '바늘 여인'의 두번째 작품은 2005년 베네치아비엔날레를 위해 제작된 퍼포먼스 비디오로, 여기서 작가는 인구가 밀집한 불특정 대도시보다는 정치적, 종교적 분쟁과 내전, 폭력과 빈곤이 만연한 여섯 개 도시, 네팔의 파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예멘의 사나, 쿠바의 하바나,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차드의 은자메나를 탐방했다. 착취되고 소외되고 거세된 공간, 비탄에 빠진 도시 속 재앙의 긴장감이 리얼타임 대신에 슬로 모션으로 고조되는 이 비디오에서 작가는 무언과 부동의 자세로 존재감을 박탈당한 채, "천을 꿰매는 자신의 매개 역할을 하고 나면, 실 자국만 남기고 자기 자신은 그 장소에서 사라지는"[5] 바늘처럼, 느린 속도의 영상 속으로, 추상적 시간 속으로 소멸되었다. 글로벌리즘과 신자유주의의의 명암, 즉 제1세계와 제3세계, 중심과 주변, 세계와 지역, 서구와 아시아, 강국과 약소국, 빈부의 갈등이 충돌하는 혼란의 현장,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엇갈리는 혼란을 주제화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찌르고 봉합하는 바늘이 되어 지구와 인류의 불행을 지우는 치유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동시에 전쟁과 이주와 망명의 희생자들과 '관계 짓기'를 시도한 것이다.[6]


    김수자의 노마디즘을 전하는 페미니스트 바늘 여인의 메시지는 다큐멘터리 비디오 <뭄바이-빨래터>(2007-2008)로 발전되었다. 고된 빨래 노동, 지저분한 거주공간, 지친 사람들을 가득 태운 기차 등, 뭄바이 슬럼가의 실제 일상을 포착한 이 비디오에서 작가는 옷과 직물을 모티프로 인간의 존재론적 현존을 진단했다. 직물을 매개로 한 다큐멘터리는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진행된 '실의 궤적' 연작에서 인류학적, 고고학적, 문명사적 차원으로 본격화되었다. 처음으로 16밀리 필름을 사용한 대형 파노라마이자 여섯 장으로 구성되는 대하 서사 다큐멘터리인 이 영상에서 작가는 유럽, 동남아시아, 북남미, 아프리카 등의 여러 문화권을 이동하며 실의 노선, 직물의 경로를 추적한다. 여기서는 작가의 모습이 사라지는 대신 카메라 뒤에서 응시하는 작가의 눈이 직조 문화의 원형적 장면과 어휘를 포착한다. 자연환경, 지리형태, 농경지, 건축물과 텍스타일의 구조적 유사성을 통해 다양한 직조 문화에 내재한 인간 존재의 원형, 원초적 생명원리를 발견하고 이분화될 수 없는 문명과 삶의 관계를 재확인한다. 페루에서의 <실의 궤적-제1장> (2010)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는 직물의 결을 물속에 침전된 모래가 만든 선들, 원거리 숏으로부터 줌인(zoom in)되는 산등성이 경작지, 직조공들의 주름살, 건축물 구조에 유비시킨다. 이어지는 연작에서도 작가는 바구니, 자수, 물레질, 레이스뜨기와 같은 다양한 직조 문화에서 인간 존재의 공통적 원형, 원초적 생명원리를 발견하며 카메라 앵글을 통한 관객과의 대화를 이어간다.


    '실의 궤적'은 '바늘 여인'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몸으로 인간, 자연, 우주를 직조해낸 복합적 진술이었다. 작가는 이미 <직물 공장>(2004)에서 바늘과 보따리로 의인화된 자신의 몸을 매체화하는 숨소리 사운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폴란드 우치비엔날레 출품작으로 직물 공장이었던 우치의 빈 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직물 공장>은 자신의 숨소리와 허밍 사운드를 불어넣어 공장을 재가동시킨다는, 즉 빈 공장과 몸을 일체화시킨다는 개념으로 발상되었다. 들숨과 날숨으로 반복되는 호흡을 씨줄과 날줄로 교차되는 직물 또는 바느질의 수직 수평 순환 구조에 유비시키는 호흡 퍼포먼스는 2006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La Fenice) 극장에서 발표한 <호흡- 보이지 않는 거울, 보이지 않는 바늘>로 본격화되었다. 작가의 호흡과 관객의 호흡이 혼연일체가 되어 극장을 감싸고 극장은 이들의 숨소리 앙상블을 담는 매개가 되어 그야말로 오페라 공연을 대신하는 숨소리, 삶 소리의 향연이 펼쳐진 것이다. 같은 해 마드리드 크리스털팰리스 개인전 「호흡- 거울 여인」에서는 건축물에 입힌 특수 필름이 굴절시키는 무지개 태양빛과 바닥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 반사되는 빛이 조우하며 크리스털팰리스와 온몸을 감싸고 빛과 호흡이 공명하는공감각적 보따리를 창출했다.


    숨소리와 빛으로 공간을 감싸는, 탈물질화된 보따리를 '후기 보따리’로 명명한다면, 2013년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호흡보따리」가 이를 본격화했다. 작가는 한국관의 유리 전면을 특수필름으로 덮어 무한대로 굴절되는 무지갯빛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바닥에 거울을 부착하여 반사된 빛을 재투영시키는 만화경 같은 미러링 효과를 연출했다. 빛의 스펙트럼에 조응하듯, 다른 편에는 빛이 없는 밀실이 마련되었다. 암흑의 공포 속에서 관객은 숨소리, 기침, 맥박 등 자기 몸의 소리만을 듣게 된다. 빛과 암흑이 공존하는 우주적 보따리, 죽음과 생명이 하나 된 삶의 보따리를 직조한 것이다.


    이후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MMCA 현대차 시리즈 2016:김수자-마음의 기하학」에서도 관객을 공명시키는 빛과 소리의 보따리를 선사했다. 미술관 중정을 예의 특수필름으로 굴절시켜 영롱한 빛의 공간으로 전환시킨 빛 작업과 함께, 이번에는 <구의 궤적>이라는 새로운 사운드 퍼포먼스를 소개했다. 이 작업에서 커다란 타원형 탁자에 초대된 관객들은 그곳에 놓인 진흙 덩어리를 손으로 빚어 탁자에 굴린다. 그렇게 해서 마치 진흙으로 인간을 창조하듯, 추상적 구의 형태를 만드는 제식적 관객참여 퍼포먼스 <마음의 기하학(Archive of Mind)>이 완성된다. 관객이 빚은 찰흙 공을 탁자에 굴리는 소리와, 작가가 입으로 가글하는 소리가 2채널 사운드로 뒤섞여서 온 공간에 울려 퍼질 때, 관객은 진흙으로 빚어진 구체와 자신의 손이 하나가 되는 혼연일체의 감흥으로 실제 가글하는 녹음 소리와 공이 굴러가는 녹음 소리가 2채널로 들리는 공감각적 경험을 만끽하게 된다. 노마디즘의 징표인 보따리가 지리적 공간에서 심리적 공간으로 이동하며 '바늘 여인'의 메시지가 심화, 확장된 것이다.

  • 함경아의 '자수 프로젝트'

    [...]

  • 노마디즘과 환대

    김수자와 함경아의 작품세계를 연결하는 공통의 키워드는 '관계 맺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 맺기는 우선 천과 바느질로 개념화한다. 김수자는 천을 잇고 보자기로 싸는 자신의 '보따리' 작업을 나와 타인, 나와 세계, 자연, 우주를 일체화시키는 포용의 기제로, 함경아는 '자수 프로젝트'를 남북의 분단을 해소할 수 있는 사적, 비언어적 대화로 간주한다.


    이들의 관계 맺기는 현대판 노마디즘으로 추동된다. 이들의 노마디즘은 실제로 물리적 장소를 이동하며 여행한다는 점에서 하이테크와 유비쿼터스로 견인되는 자유분방한 디지털 노마드, 또는 '신유목민'과 차별화되지만, 최소한 인터넷 정보를 발판으로 소수민족, 다문화 현상을 접하며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사회참여적이며 인터랙티브한 민주화의 지평을 열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십일세기형 신유목민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술하였듯이 중요한 점은 이들의 노마디즘이 서구중심의 글로벌리즘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식과 맞닿아 있는 글로컬리즘이라는 명제를 충족시킨다는 점이다. 세계적이면서도 지역적인 글로컬한 정서와 인류학적 관심, 실험정신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까닭에 이들의 여행을 예술적이고 윤리적인 탐사여행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전지구적 공생과 인간적 포용, 타자와의 조응, 동시대 재앙에 대한 연민과 치유, 교차문화적 연합을 위한 결단을 실행시키는 김수자와 함경아의 노마디즘은 자연스럽게 '환대'에 결부된다. 환대의 가치는 누구에게나 열린 지적 풍요와 자유정신에서 찾아지는데, 이것이 예술로써 실천될 때 놀라운 반전의 효과가 나타난다. 도덕적 제어나 조건 없는 환대로 자기중심적, 지역 중심적 문화예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으며, 국가주의 이념과 정치적 폭력,또는 타자에 대한 의심과 적개심, 자연적 환경에 대한 불신, 경제적 이득을 최종 목표로 삼는 신자유주의적 풍토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환대는 지역주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인종차별, 기후와 환경 등 첨예한 이슈와 관련되는 새로운 정치 미술의 미학적 기폭제가 된다. •특히 페미니즘은 환대를 수용함으로써 인종과 젠더에 따른 억압에 대항하고, 여성, 고령자, 장애인과 같은 하위주체를 포용함으로써 비서구적이고 비부계적이며 비모더니즘적인 예술을 성취한다. 치유자, 매개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암시하는 김수자, 분단을 주제로 하는 대화와 부드러운 예술적 접근으로 북한과 소통하려는 함경아의 작품에는 강력하면서도 설득력있는 환대의 메시지가 존재하며, 그로써 확장된 페미니즘 미술의 사례를 제시한다. 타자와 주변부를 감싸는 포용적 환대로 자기중심적이고 지역 이기주의적인 한계, 단선적 페미니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이 두 작가의 예술을 확장된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독해하는 명분이다.

[Note]
[1] 김수자, 「여성, 그 다름과 힘」 전시 도록, p. 83. "여성의 일상은 평면 작업, 입체 작업, 주생활(housing)에 있어서의 시각적인 체계는 현대미술의 단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설치 작업, 그리고 행위예술로 점철되어 있다. 즉, 의생활(clothing), 식생활(cooking), 먼지 털기, 집안 꾸미기, 밥 짓기, 장보기, 요리하기, 상 차리기, 그리고 설거지하기 등등 (・・・) 현대미술의 구조적 논리가 이 속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이 모든 세 부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감상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논리적이고도 매혹적 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워 주는 비일상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 혹은 여성의 일의 개념화 (conceptualization)이다.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작업이다."
[2] 이 전시에는 미술가, 건축가, 영화 제작자, 디자이너 백오십여 명이 참여하였고, 이 년간 비엔나, 뉴욕, 보르도, 덴마크, 런던, 방콕, 헬싱키 등 일곱 개 국가의 대도시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3] 김수자, 윤혜정과의 인터뷰, 「김수자: 삶과 존재를 끝없이 질문하는 개념미술가」, 윤혜정,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을유문화사, 2020, p. 61.
[4] 김수자, 김홍희와의 인터뷰, 2021.
[5] 김수자, 최윤정과의 인터뷰, 「김수자의 바늘 여인, 성소적 의식」, 대구미술관 개관특별전 (2011.12.-2012. 4.) 도록 『김수자』, p. 40.
[6] 김수자, 윤혜정과의 인터뷰, 「김수자: 삶과 존재를 끝없이 질문하는 개념미술가」, 윤혜 정,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p. 53. "몸과 손, 천에 이르는 관계, 걸음과 땅의 관계 지음, 날숨과 들숨의 관계 지음, 또 내 눈과 그를 보는 거울 속의 눈의 관계 지음이다. 이 세상에 관계 지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 인터넷 시대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상이 바로 '바느질 하기'이며 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바느질 망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 — 『페미니즘 미술 읽기』 2024, 열화당, pp. 20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