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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On n On - 김수자의 ‘보따리’, 그 현재 진행형 아카이브의 성취와 반향에 관한 아홉 가닥의 사유

규 리 (Kyoo Lee)

2024

빛을 직조하고 공간을 창조하는 개념 예술가 김수자는 신기원적 작품 세계를 펼쳐온 ‘바느질꾼(threader)’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2016~2017년에 열린 《마음의 기하학(Archive of Mind)》전은 그의 주요 전시 중 하나로,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지구의 관계망과 생태학적 직조를 담아내는 그의 중 추적 예술 세계를 완벽히 보여주었다.

  • ON

    1. 김수자를 읽는 일은 실의 궤적을 따라가는 일이다.

    김수자는 《마음의 기하학》전 전시관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목재 탁자를 설치하고, 관람객이 찰흙으로 크기나 모양에 구애받지 않는 구를 직접 만들어 올려놓게 했다. ‘만들어지고 있는 전시회’라 할 수 있는 이 기발한 과정은, 전시 공간 속 참여 무대로서 《마음의 기하학》전을 자연히 완결시키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미완으로 남게 했다.


    물질 표현 방식의 개념적 정밀함으로 더욱 강조된 그 확장 가능형 구조에, 세계를 무대로 지구 곳곳에 작품을 남기는 김수자의 대표적 고유성이 담겨 있다. 한편 〈실의 궤적(Thread Routes)〉(2010~)이라는 김수자의 16밀리미터 필름 영상 연작은 세계 곳곳의 다양한 직물 문화를 절묘하게 이어 붙인 작품으로, 바느질과 직물 짜기라는, 주로 여성들에 의해 행해지는 보편적이고 공동체적인 행위를 담아낸 경이로운 모자이크다. (이 작품이 준 영감으로 인해,
    나는 글을 읽는 나의 행위를 일종의 방사성 바느질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마음의 기하학》전에서 선보인 그 4챕터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감싸고 풀고, 바느질하고 바느질을 푸는 행위가 최면을 걸듯 이어지며, 관찰하는 작가 김수자의 문법적 도구인 기록 고고학을 통해 기하학과 지질학이 끊임없이 내포하고 재연결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김수자의 장소특정적 작품들은 시공간의 어떤 지점에 있건 모두 동시에 만들어지고 있는 하나의 (메타)집합체다. 그 집합체에 포함된 작품의 수는 말 그대로 셀 수 없겠으나, 작가의 지난 항공권과 지구 곳곳의 출입국 기록을 통해서는 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여전히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김수자의 작품 세계에 관한 나의 ‘구’르는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마음의 기하학》전의 중심물인 ‘구(球, a ball)’, 그리고 작가의 지‘구’(地球, the Earth)가 주는 다의어적 공명에 따라, 이 글은 아홉 개의 부분으로 구성했다. ‘구’는 미완인 동시에 무한을 잉태한 숫자 ‘9’의 소리가 아닌가.

  • 2. 김수자의 ‘공’ 작업은 우리의 행성, 그 공 모양의 세계를 횡단하고 코드를 변환한다.

    브루클린박물관에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전시된 주디 시카고의 〈디너 파티(The Dinner Party)〉를 먼저 비교점으로서 살펴보자. 테이블에는 39인의 여인을 위해 마련된 가상의 초대석이 있는데, 그 초대석의 바닥에 새겨진 ‘다른 여성’ 999명의 존재는 흐릿하고도 단순하다. 삼각형이라는 테이블의 형태로 인해 그 모든 의미는 더 명료하고 통렬해진다. 그에 반해 지금도 그 한 버전이 뉴사우스웨일스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김수자의 설치 미술 〈마음의 기하학〉은 삼각형이 아닌 타원형이 그 핵심이며, 역사보다는 레트로 퓨처리즘을 향한다. 비선형이고 비-원근법적이다. 모든 가장자리는 부드러워지고 밀어 넣어지고 잡아당겨지고 둥글려지고 토닥거려지며, 테이블도 찰흙으로 빚은 공도 모두 크고 작은 규모로 이미 둥글거나 점점 더 둥글어진다.


    보따리’를 닮아 미완의 개방성을 지닌, 또한 행성 같기도 한 김수자의 테이블은 특별한 종류의 기하학적 탐구, 상상, 감수성을 내포하고 드러낸다. 그 원형 구조의 산발적 유동성은 반(半)가시적인 중심에 묶인 채 위상 기하학적 다공성과 동적 포용성을 건축학적으로 표현한다. 그저 평화로운 ‘설치’ 미술로 느껴질 수도 있을 이 작품의 다공성 구조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그 테이블 아래도 보고 들어야 하는데, 소리 작품인 〈구의 궤적(Unfolding Sphere)〉(2016)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16채널의 소리 트랙이 지하의 작은 통신 커뮤니티를 이루며 32개의 스피커에서 재생된다. 마른 찰흙 공이 굴러서 모난 가장자리에 부딪히는 소리는 천둥을 닮은 소리를 낼 수도 있고, 이에 작가 스스로가 물을 머금고 가글하는 사운드 퍼포먼스가 더해지니, 교감하는 전체로서의 협력적 동시성은 더욱 다감각적으로 복잡해진다.


    이처럼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는 우주의 (연못 아닌) 연못에서, 우리는 기하학을 살며시 다루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들을 수도 있다. 기하학 그 자체가 차원을 초월한다. 작가는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모나지 않게 하고 활성화시키고 다중심화함으로써, 또한 창의적으로 해체하고 일종의 사실주의와 집산주의로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양극화 및 세계 역사의 현재 진행형 모순이 지니는 통렬한 아카이브로서의 의미를 포용한다. 또한 그 의미를 다언어화하고 전위시킨다. 이 2010년대작 공동 테이블은 내부를 향하여 교차해 나아가는 다양한 광경과 면과 판을 ‘내던지는’ 동시에, 그것들을 향해 선회한다.


    유랑하는 작가 김수자가 종종 작업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의식의 거리(streets of consciousness)’에서는 삶을 사는 개인으로서의 인류가 지닌 동적 동시대성과 참여적 민주주의가 실행되고 표현된다. 김수자의 ‘퍼포먼스’가 그렇게 실시간으로 발생하고 또 발생한다. 공동 거주적 공존이 구체적으로 사유된다. 치유력을 지닌 김수자의 시적 · 윤리적 영혼과 인류학자적 통찰력이 함축적으로 표현되는, 방법론적으로 토착화된 유목주의와 국가주의와 사해민족주의는 그의 사회 윤리적 헌신이 표현되는 절제된 방식이다. 좀 더 최근의 작품인 〈통과(Traversées)〉(2020)에서, 그는 프랑스의 푸아티에시(市)를 공공 예술 실험실이자 유토피아적 작업실로 바꾸고, 그곳에서 자신의 작품뿐 아니라 자신이 초대한 작가 스무 명의 작품들을 가지고 태피스트리를 짜냈다. 김수자의 무대가 이 세상이라면, 그 무대는 당신 안에도 있다.

  • 3. 김수자의 복잡한 '공' 작업은 하나하나 한 땀 한 땀 전체론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김수자가 세속적인 것들의 특이성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복잡하게 협력적이고 지속적인 전체(whole)를 보는 작가 자신의 우주적 비전으로부터 단절된 성질이 아니라, 그것과 공존하는 성질로서 주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스로의 숨쉬기 퍼포먼스에서 추출한 음파 한 토막을 캔버스에 가로질러 수놓은 김수자의 첫 디지털 자수, 〈숨One Breath〉(2006/2016)에서는 내뱉는 숨의 소리가 말 그대로 생존의 신호가 될 수도 있음이 축약적으로 표현되었다. 각각의 호흡, 그 들숨과 날숨의 순환은 정지해 있는 한 ‘조합(set)’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진동하는 전체의 일부다.


    〈마음의 기하학〉도 대표적 예시가 될 수 있는 능동적인 비유다. 한 덩이의 찰흙으로부터 각각의 구가 만들어지고, 하나의 구는 1±1 을 거쳐 계속해서 1로 남는다. 부드러운 소우주로서 둥글게 빚어진 그 각각의 오브젝트(오브제)는 물질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수행적으로도 수적으로도, 하나로 남아 있는 동시에 하나의 일부가 되어 간다. 흙(humus[1])으로 빚어진 각각의 ‘인간(human)’과 그리 다르지 않게 말이다.


    김수자가 인류에게 품은 ‘이불’ 같은 연민, 우주를 향해 품은 생태적 친밀감은 보편을 아우른다. 하지만 어떤 추상적 관점이나 정치화된 관점에서도, 그는 보편주의자가 아니다. 민첩하게 신중한 그의 야심과 시도는 작가적 상상력과 활성화의 첨예한 ‘바늘 끝’에서 한 땀 한 땀 의미 깊게 구체화되고, 개체초월화되고, 실행된다. 그 점은 《마음의 기하학》전에 포함된 김수자의 자전적 초기 작품, 〈몸의 연구(A Study on Body)〉(1981)에서 도식적으로 잘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각각의 ‘공(a ball)’은 공간이나 비움으로서의 ‘공(空)’의 일부가 된다. 무(無)로부터 연역적으로 만들어지고 획득된 공 하나하나는 또다른 ‘공(工)’과 짝을 이루기도 하며 이중(二重)의 ‘공’을, 다시 말해 조심스럽게 자유롭고 자유롭게 무거운 도교의 무위(無爲)를 행한다. 〈몸의 기하학(Geometry of Body)〉(2006~2015)을 살펴보면, 작가 자신이 직접 사용하던 요가 매트가 그저 뒤샹식 ‘레디메이드’가 아니라 아방가르드 캔버스로 업사이클링되어, 이미 사용된 물건이 지니는 생태학적으로 다층적 · 수용적인 시간성(temporality)을 탐색한다. 쓰던 요가 매트, ‘버려진’ 것이 시간으로부터 선사받은 밀도에 는 무위의 단계 하나하나가 저절로 기록, 보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하는 일의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 다른 차원에 기록되어 있던 그것이 여기에서 비로소 부활된다.


    그러한 기억의 작동 또는 기억 작업을 통해, 내면적 항구에의 정박은 존재에의 예우가 된다. 나는 ‘신인’ 시절의 김수자가 쓴 ‘작가노트’를 처음으로 우연히 보았던 때를 퍽 또렷하게 기억한다. 1988년 서울의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김수자 첫 개인전의 도록, 지금은 누렇게 바래 가는 그 책자의 맨 끝에 작가의 말이 작게 실려 있었다. 그 마지막 페이지에서 소개 글인 첫 단락과 결론인 셋째 단락 사이 두 번째 단락에 마음을 사로잡혔던 것도 기억한다. 마치 양쪽 면을 바느질하여 잇듯 그 가운데 단락에서 작가는 2차원적 캔버스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직물’이라는 영감이 불현듯 찾아왔던 1983년 어느 ‘보통의’ 날을 짚었다. 당시 그는 정통적 회화에서는 멈춰버린 답보 상태로 남을 수도 있는 평면 공간의 수평성, 수직성을 극복하고 초월할 방법을 마침내 찾아냈다고 느꼈다. 그 순간은 실로 얼마나 짜릿했을까. 나는 그때 일종의 생체기하학적 진동의 흐름 속에 있다고 느꼈다. 그 흐름의 한 가닥은, 능동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내포’된 시간의 흐름이었다. 김수자의 합리성과 감수성이 만나는 작가적 직관의 ‘바늘 끝’ 같은 정점은 그렇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던 순간에 찾아왔다. 그가 말했듯, 모녀가 함께 바느질을 하던 일상적 무위의 순간에 말이다.


    그 순간을 이제 다시 짚어보며 놀라운 점은 〈마음의 기하학〉에서 관객 한 명 한 명이 가만히 명상적 주의를 기울이며 저마다의 공을 만드는 무작위적 순간들이 이 한 순간의 에피소드와 공명한다는 점, 사실상 포개어진다는 점이다.


    김수자를 읽는 일은 그의 날카로운 비전이 지니는 둥긂 위를 사뿐히 디디는 일이다.

  • N

    4. 김수자의 모든 ‘보따리’는 스스로를 중추적으로 지탱한다. 2016년의 〈연역적 오브제〉도 마찬가지다.

    공은 언제나 만들어지는 (또한 만들어지지 않는) 중이고, 보따리의 재료이자 보따리의 결과물이다. 《마음의 기하학》전에서 소개된 두 점의 〈연역적 오브제〉(2016)는 그중 규모가 큰 공이고, 같은 제목으로 지금도 계속되는 연작의 일부다. 한 점은 실내에 다른 한 점은 실외에 설치되었는데, 실내의 〈연역적 오브제〉는 작가 스스로의 팔을 본떠 만든 조소 작품이다. 그 두 팔은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고, 움직임의 소통을 나누는 엄지와 검지와 검지 사이, 그 공유되고 형성되는 공간을 통해 동적인 공을 보여준다. 실외에 자리한 〈연역적 오브제〉는 길쭉한 모양으로, 잔뜩 부풀린 미식축구 공처럼 보일 수도 있는 별난 공이라 하겠다. 브라만다(우주의 알)를 닮은 이 난형 작품은 선명한 오방색의 직물이 둘린 채, 거울로 된 중추 위에 서 있다. 마치 콜럼버스 계란의 이중 패러디처럼, 평평하게 찌그러뜨린 면 없이도 평화롭게.


    이와 마찬가지로 김수자의 모든 보따리 작품 하나하나는 온전하게 홀로이면서 동시에 어떤 다른 존재와도 연대할 준비가 된 채 서 있다. 그의 보따리는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의 추상적 ‘인디언’이 축적될 수 있는 귀납적 오브젝트(object)가 아니다. 연역적이기도 하지만, 서브젝트(subject)처럼 존재하고 언제든 서브젝트가 될 수 있는 오브젝트, 즉, ‘소브젝트(sobject:
    subject + object)’이기도 하다. 김수자의 보따리 소브젝트는 움직이는 길 위에서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다층적 비유가 되어, 스스로를 (묶고 또 풀며) 중추적으로 지탱한다. 《마음의 기하학》전의 〈연역적 오브제〉들은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것과 담기지 못하면서 담는 것의, 스스로를 감추고 또 드러내는 소브젝티비티(sobjectivity)를 중추적으로 현현하는 한 쌍의 작품이다. 범주간의 상호 의존성을 망적으로 물질화하여 개인과 집단이, 집중과 포괄이 서로 포옹하거나 손을 잡게 하는, 그리하여 김수자의 예술 궤적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마음의 기하학》전은 이처럼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두 〈연역적 오브제〉 사이의 계면성으로 인해 한층 더 표상적 전시회가 된다

  • 5. 무위의 순간들이 〈연역적 오브제 - 보따리〉(2023)로 돌아오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특히 놀라운 작품은 〈연역적 오브제〉 연작에 최근 합류한 〈보따리〉(2023)로, 김수자의 보따리가 지니는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소브젝티비티’가 더욱 강화된 작품이다. 기하학의 세계를 향해 이어지는 김수자의 지질학적 · 기하광학적 탐색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정밀해진 작품이기도 하다. 김수자가 자신의 ‘만들며 만들지 않는’ 장소특정적 무위의 예술을 다음 단계로 데려간 이 새로운 〈연역적 오브제 - 보따리〉는 멕시코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의 개방형 갤러리, 메리디아노의 사각형 전시실 중심에 자리한다. 건축의 독특한 다공성으로 인해서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도 안이 되는 이곳에서, 이 파운드 오브젝트는 건물의 안에서도 일종의 블랙홀 도서관으로서 부활했지만, 건물의 바깥에도 남아 있다. 비-인간으로서의 타성도 변함 없이 유지된다. 몹시 오래된 것이 지니는 그 불가해함은 인류의 지나친 익숙함으로부터 보호되고, 그렇게 그 바위는 또 하나의 새로운 ‘보따리’가 된다. 다만 움직이는 성질은 없다. 이번에는 김수자라는 존재 전체의 ‘보따리’인 그의 몸만이 움직인다. 그렇게 움직임은 순간이 되고, 장소특정적일 뿐 아니라 시간성을 지니기도 한 사건이 된다.


    이 바위 보따리를 향한 김수자의 응시 퍼포먼스는 하나의 아카이브가 다른 아카이브를 만나는 일이다. 2016년 《마음의 기하학》전에서 갤러리 벽 저편 연역적 오브제가 응시한 것은 아카이브로서 본떠진 작가의 두 손이었는데, 2023년 메리디아노에서 일어나는 연역적 오브제의 응시는 멀리 있는 작가의 응시를 만난다. 태곳적부터 내내 존재했던 그것의 꼼짝없는 응시를 마주하며, 작가의 응시는 스스로의 존재를 더 직접적으로 의문한다. 여기에서 바위와 작가의 몸(이 두 연역적 오브제는 이름 없는 존재끼리의 생태학적 친밀함을 통해 선 없이도 연결되어 있다)이 지니는 도교적 익명성과 자유, 원시적 무명성은 그 어느 규칙보다 강력한 미(美)적 규범이다. 두 오브제 모두 매개물이 되고 바늘 구멍이 되며, 그 통로를 통해 인식의 새로운 지평선이 솟고 새로운 평원이 열린다.

  • 6. 우리의 행성이 '끓는 점'에 가까워지고 있는 2023년 지금, 우리에겐 더 많은 등대가 필요하다.

    표면은 중요하다. 좀 더 깊고 넓게, 더 잘 볼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1에서 10까지만 셀 수 있는 스스로의 손에 의해 파괴되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점점 더 디지털로 총체화되고 기후 변화와 2차적 위기에 흔들리는 이 세상에서 김수자의 연결적 응시와 몸짓이 지닌 아날로그적 물질성(과 비물질성)은 놀랍도록 레트로퓨처리즘적이다. 앞서 한 땀 한 땀 접근하는 작업 방식의 예로서 논한 〈숨〉 (2006/2016)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공허로 인해, 우
    리의 공동 생존(coviving) 구역이, 제로(0)가 지니는 교각으로서의 가능성이, 만물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이동점이 색인화(indexicalize)된다. 여기에 희망의 작은 빛이, 세상의 복부에서부터 퍼져나오는 메아리가 있다.


    우주 시간의 해일 속에서 만화경 속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빛과 어둠, 소리와 고요의 밀고 당김이 〈호흡(To Breathe)〉(2016)에서 섬세하게 감각화되고 극대화되었다. 레이나소피아미술관의 크리스탈궁(2006)과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2013)에서 선보인 적 있는 작가의 주요 작업물들을 새로운 규모로, 장소특정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며, 같은 제목의 연작이 2023년에는 베니스의 그라시 궁전에서, 2022년에는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마음의 기하학》전에서 함께 소개된, 좀 더 미시적이고 개념적인 〈숨〉과 더불어 감상할 때, 〈호흡〉의 신기원적 중요성은 더욱 온전하게 다가온다. 더 나아가, 이 작품들을 지금 코펜하겐의 시스테르네르네(한때 지하 수조였던 거대하고 특이한 지하 예술 전시관)에서 열리는 《빛의 직조(Weaving the Light)》(2023)와 연결하면, 우리는 보따리, 연역적 오브제, 그리고 숨을 아우르는 김수자의 작업들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팽창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서로 수렴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구 곳곳에서 ‘숨쉬고 있는’ 이 작품들을 연결함으로써 우리는 그와 같은 지하, 지면, 공중의 화해와 명상이 오늘날 어째서, 어떻게 중요한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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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교감(In Communion)

    존재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전자적으로나 그 외의 방식들로 연결된다는 것은 여러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경계, 벽, 와이어를 넘어서 현재에 지속적으로 동참할 방법을 찾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홀로 꿈꾸지 않으니 말이다. 오노 요코(Ono Yoko)의 시집자몽(Grapefruit)》(1964)에서 영감을 받은 〈우리는 홀로 꿈꾸지 않는다(We Do Not Dream Alone)〉(2020)는 같은 제목으로 열린 제1회 아시아 소사이어티 트리엔날레에 함께 전시된 영상 〈호흡 – 깃발(To Breathe – The Flags)〉(2012), 그리고 베네치아의 포르투니미술관에서(2017), 세일럼의 피바디에섹스박물관에서(2018), 뉴사우스웨일스미술관에서(2022~2023) 각기 변주된 〈마음의 기하학〉 작품들과 서로 공명을 한다. 몹시도 직접적인, 직접적으로 일상적이며 또 지구적인 공명을 말이다. 김수자는 연결되어 있다, 어디에 있건 간에.

  • 8. 별자리(In Constellation)

    이렇듯 《마음의 기하학》전에 소개된 여덟 작품은 모두 이 지구 위 김수자의 고원(高原)에 자리한 수많은 다른 작품들과 함께 별자리를 이룬다.

  • 9. 김수자 연속체(In the KSJ Continuum)

    지금까지 논한 모든 내용은 결론으로 마무리될 수 없다. 김수자가 여전히 활동하기 때문에, 심지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왕성하게 작품을 탄생시키고 있기 때문에는 아니다. 존재의 구멍과 항구들에 관해 끊임없이 탐색하는 그의 예술 세계에서, 존재함은 곧 ‘계속됨’이기 때문이다. 계속성은 시간 속 비선형의 선, 즉, 실 한 가닥 한 가닥에 있다. 그것은 실증이나 존재의 한 지점이라기보다는 그 지점들 사이를 고유하게 미끄러져 움직이는 무언가다. 내재적 초월의 면(面)이다. 바늘은, 또는 몸은 그곳으로 사라지고, 그러함으로써 결과를 발생시킨다. 《마음의 기하학》전은 한때 그곳으로 들어갔다. 시의적으로 일어난 그 사건은 이제 스스로의 반향을 반영하는 김수자 연속체의 더욱 넓어진 아카이브 속 한 부분이 되었다.

[Note]
[1] 흙이라는 뜻의 라틴어.

— Essay from ‘MMCA Hyundai Motor Series 2014-2023’' published by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2024. pp.235-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