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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솔 (비평가, 큐레이터)
2013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은 이례적이다. 프랑스 디종 콩소 시움의 공동디렉터인 김승덕 커미셔너와 작가 김수자의 협업으로 개최된 <호흡: 보따리>전은 한국관 내부 표면을 거울과 반투명 필름으로 뒤덮었다. 자르디니 정원에서 보았을 때 건물 전체가 마치 투명한 유리궁전처럼 혹은 사라져가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한번에 10명 내외의 관람객 입장할 수 있는 규칙 때문에 프리뷰 기간 내내 함상 길게 줄을 서기다린 뒤, 신발을 벗으라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고 발로 전시관에 들어서고 나서야 환한 빛의 공간을 맞닥뜨릴 수 있다. 이러한 전시관 한구석에 절대적인 어둠을 경험할 수 있는 '호흡: 정전’이란 제목의 무향실을 설치했다. 여기는 또 한번에 한 명의 관광객만 입장하여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홀로 경험하도록 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현상학적인 경험을 끌어내는 이번 전시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두 가지 이유에서 이래 혹은 변칙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표면적으로 이 전시는 종종 한국 문화의 특수한 메타포에 글로벌한 감각을 첨가했던 작가의 지난 작업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리고 나중에 더 다루겠으나, 김수자의 이번 전시는 베니스비엔날레의 다른 국가관 전시들과 견주어 보아도 시각적으로 이례적이다. 하지만 자르디니 공원에 세워진 마지막 국가관으로 미술계의 올림픽인 베니스비엔날레 참여 10회째를 맞이하는 한국관의 문화사적 맥락을 참 고할 때 올해 한국관은 탁월하게 기획된 변칙이며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숨겨진 보물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김수자 작업의 맥락은 작가의 여성적 신체 디아스포라 정체성 글로벌한 순례 등의 용어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1957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수자는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 한 뒤 1980년대 중반부터 해외 미술계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곧이 어 1990년대부터 세계적인 미술가 대열에 합류하여 국제적인 비엔날레와 전시를 따라 전 세계 대도시들을 이동해왔다. 작가의 작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보따리와 이불을 차용하고 활용한 것으로 이러한 소재들은 바늘을 이용해 천을 꿰매거나 오브제를 천으로 감싸고 다시 튀거나 푸는 행위에 대한 비유로 언급되었다. 좀 더 정 확히 말해 보따리와 이불은 작가 자신의 내면에 새겨진 한국적인 문화의 전통을 표상한다. 잘 알려진 일화에 따르면 작가는 1983년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던 중 그동안 대학의 미술교육으로 익숙해진 캔버스와 붓을 포기하고 천과 바늘을 작업의 주요 매체로 쓰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따라서 뉴욕의 P.S.1. 리옹의 현대미술관 등의 화이트큐브 안에 설치되거나 광주의 산등성이 혹은 브루클린의 공동묘지 등의 장소 특정성을 띤 야외에 놓이는 것에 별 관계 없이 김수자의 이불과 보따리 작업에 쓰인 비단의 화려한 색상은 문 화적(한국적)이며 젠더적(여성적인 코드가 덧씌워진 아우라를 표 출하며 작가의 신비화된 페르소나 또한 자아낸다. 최근 10여 년 동안 작가는 도쿄, 카이로 라고스, 뉴욕, 상하이 등 여러 도시의 붐비 는 거리 한가운데서 관람객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움직이지 않고서 있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이를 영상작업으로 남기기도 했다. ‘바늘 여인’(1999~2001: 2005)으로 명명된 이 영상작업 시리즈의 주제는 작가의 모습이 아닌 그녀를 지나치는 행인들의 다양한 초상과 반용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바늘로서 수많은 도시들의 외면과 이면을 엮는 매체로 상징화한다.
그렇다면 <호흡: 보따리> 전시에서 과연 보따리는 실재하는가? 전시 에서 바늘의 메타포가 지속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한국관이 베니스비엔날레의 본 전시나 다른 국가관과 비교했을 때 어떤 이례적 면모를 보이는지 언급하고자 한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는 <백과사전식 궁전>으로 기획을 맡은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는 1955년에 이탈리아계 미국인 건축가 마리노 아우리티가 착상한 건축 모델에서 전시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아우리티의 건축 모델은 세계의 모든 지식을 담은 상상 속 박물관으로, 물론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꿈꿨던 유토피아적 환상과 예술 적인 집착은 마시밀리아노 지오니가 구축한 동시대 미술의 백과사전 에서 역동적인 것 이상으로 구현되었다. 어쩌면 3년 전 지오니기 최한 2010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보여준 것과 지나치게 비슷할 수도 있지만,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는 창조적이며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예술적 사고로 구축된 수많은 소우주로 가득했다. 초상이나 자화상의 이미지는 올해 본 전시의 주요한 축이었고, 이는 지오니가 전시의 유일한 공동큐레이터로 신디 셔먼을 선택한 데서도 살펴볼 수 있다. 지오니는 신디 셔먼을 자신의 전시 세계의 영감으로 삼는다며 그녀에게 아르세날레진의 전시실 하나를 아웃소싱하였다. 신디 셔먼이 기획을 맡은 전시실은 너무나도 당연히 초상화와 사진, 조각의 연출된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고, 정체성은 본질적 속성의 결여로 재현됨을 역설했다. 이미지는 언제나 이미지일 뿐이지만 이미지 재현은 자아를 표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일 수 있다. 이처럼 예술은 세계를 투명하게 반영하지 않으며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걸쳐져 있는 동시에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본 전시와 마찬가지로 올해 비엔날레에 참여한 여러 국가관은 다양한 방식으로 각각의 세상을 상상 구축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에드슨 치가스가 참여하여 황금사자상을 받은 앙골라 국가관은 길가에 놓여진 정물의 사진을 포스터로 인쇄하여 전시장에 쌓아두고 관람객들이 미리 배포된 폴더에 각자 앙골라에 대한 이미지 컬렉션을 만들 수 있게 했으며, 스테파노스 치보포물로스를 내세운 그리스 국가관은 금융위기에 관한 사유로 대안화폐에 관한 3채널 영상 작업을 선보였다. 하지만 김수자가 참여한 한국관 전시는 이와 상반되게 텅 빈 듯 보이는 세계를 제시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김수자의 전시장은 적어도 관람객이 감상할 수 있는 이미지를 작가가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텅 비어 있는 것이다. 한국관을 찾은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이중으로 구속된 빛과 어둠, 투명함과 불투명함으로 긴장된 육체적 경험을 유발한다. 관람객은 빛으로 이루어진 방에서 전시장 의 기존 벽면 이곳저곳에 설치된 거울에 비친 제 모습과 맞닥뜨린다. 전시장 내벽의 일부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굴절하는데 반투명, 반반 사 소재로 만들어져 외부의 빛 혹은 풍경 또한 비추기 때문이다. 어둠의 방에서는 시청각적 경험을 최소화시키고 선험적 느낌만을 강조한다.
1980년대부터 지속된 여성의 신체와 자아 이미지에 관한 작가의 관심을 고려해볼 때, ‘바늘여인'과 같은 작업들은 신디 셔먼의 '영화 스틸’ 작업과 유사성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벽에 걸린 작업 없이 빛으로만 공간을 채운 설치를 선보인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작가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데 이바지한 재현과 전유의 놀이에서 탈피했음을 알린다. 한편 이러한 흐름은 이미 2006년부터 전조를 보였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의 크리스털 궁을 둘러싼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업에서 보따리는 한국 여성들의 가사노동과 급격한 현대화로 빚어진 불가피한 이동이라는 한국적 뿌리를 상실하며 사물을 감싸는 하나의 제스처로 변환된다. 물론 싸고 묶는 제스처의 대상은 종종 건물 전체가 되기도 한다. 초기 작업에서 보따리가 작가의 신체를 비유했다면 이제 보따리는 텅 빈 기표가 된 것이다. 관람객들은 호흡하는 신체로서 김수자의 작업 안에 들어가 자아이미지를 바라 보게 된다. 라캉식으로 말해보면 관람객들은 나 아닌 것(not-me) 혹은 오류 인식된 자아(meconnaissance)를 마주하는 것이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김수자의 한국관이 선보이는 마술적인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수자의 작품 세계 깊숙이 자리 잡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은유, 정확히는 동시대 미술의 비유로 부활한 전 근대적인 한국의 전통과 더불어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작가의 인생 발자취에 기반을 둔 탈식민지적 망명에 빗댄 작품 해설은 한국관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소위 한국적인 것과 더불어 한국관이 시각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도 소멸한 것은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의 맥락에 서 강력한 효과를 자아낸다. 이는 특히 바로 옆에 위치한 독일과 프랑스가 베니스비엔날레의 국가관 체제에 내재한 국가주의를 비판하고자 서로 전시장을 맞바꾼 것에 비추어보았을 때 더욱 그러하다. 한국관이 김수자의 작업을 통해 마술적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은 프랑스와 독일이 일으킨 일련의 스캔들보다 더 충격적이고 정교한 미적 효과를 자아낸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한국관 기획과 작업은 또 다른 맥락에서 적절하다. 여기서 우리 는 작가의 재치있는 시각적 속임수가 한국관 건물이 유리와 강철로 세워졌기에 가능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콘크리트나 대리 석 등으로 세워진 다른 국가관들에 비해 한국관은 시각적으로 가벼운 소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승덕 큐레이터는 커미셔너로 선정된 후 한국관의 건축과 위치, 역사에 관해 언급하는 전시를 기획 하고자 노력했는데, 한국관의 기원은 정확히 20년을 거슬러 올라가 1993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 백남준은 한스 하케와 더불어 독일 관을 대표해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이미 몇 해 전부터 구상해온 한국관 건립 논의를 베니스 시에 강력히 건의했다. 백남준의 요청은 "불가능하다"라는 차가운 대답으로 돌아왔는데, 한국관 건립에 관해서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던 이용우 광주비엔날레 이사장이 이번 한국관 전시 도록에 기고한 글에서 자세히 기술했다. 지금의 관점 에서는 꽤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지만 한국관 건립 과정에서 백남준이 던진 마지막 승부수는 새로 지어질 한국관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남한과 북한 모두를 위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로 한반도 분단체제의 미래에 관해 낙관적인 전망이 범람했고, 그 결과 한국은 이례적으로 뒤늦게 자르디니 공원의 마 지막 국가관을 획득했다. 베니스 시 당국은 한국이 상대적으로 중심 부에 가까운 지점에 건물을 세우도록 허가하는 대신 건물이 뒤편의 대운하를 가리지 못하도록 했고, 이러한 이유로 한국관 건물의 형태 와 소재는 지금과 같이 가볍고 투명하며 소규모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국관에서 지금까지 북한 작가가 소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런 점 역시 <호흡: 보따리>에 쓰인 거울이라는 소재가 비극적인 아름다움과 신랄함을 전달하는 이유가 된다. 김수자의 작업은 한국관 건립이 이뤄진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치적인 오류 인식을 오마주하며, 평화와 희망이라는 텅 빈 기표 안에서 떠 오르는 타자로서의 자아의 초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더 나아가 관람객의 초상은 벽에 설치된 거울에 반사될 뿐만 아니라 바닥과 천 장에 설치된 알루미늄 패널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파편된 이미지로 복사, 재생된다. 사진으로 기록된 한국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전시장은 정돈된 모습의 미장아빔(mise-en-abime)이 아닌 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10여 명의 자아들의 만화경 이미지를 성립한다. 관람객들은 텅 빈 보따리 안에 들어가는 순간 수많은 뾰족 바늘이 되어 보따리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한국관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시각적 은유를 끌어올리기 위해 작가의 자아에 관한 개인적인 은유는 최소화된 것 같다. 작가의 호흡으로 만든 사운드 작업 ‘더 위빙 팩토리 '(2004~2013)는 빛의 전시관에 설치되어 있지만 전시관의 시각적 요소에 사실상 압도되며, 작가가 허리케인 샌디 상륙 기간에 뉴욕에서 겪은 정전을 바탕으로 구축했다는 무반향실은 한국관의 역사적 맥락에서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동북아시아를 촬영한 위성사진 이미지를 통해 잘 알려졌다시피, 한반도의 북쪽 절반은 사실상 전 세계에서 가장 어두컴컴한 부분이 아니 었던가? 내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로 선정된 조민석이 남한만 아니라 북한 건축에 대한 포섭을 발표한 것은 이런 점에서 꽤 심상치 않은 우연일 것이다. 이런 발상은 한국관에 새겨진 'COREA'라는 푯말이 남한과 북한 어느 한 곳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으로 뒷받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남한의 문화가 한 반도 북쪽의 사회와 예술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지금의 형태를 띠는 것이고 북쪽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것이 더 큰 이유로 작용한다. 빛과 어둠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지난 20년간의 북한의 사회·문화·정치적 행보는 그다지 이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전 지구적 흐름의 한 징후로 작동하는 것 같다. 마치 <호흡: 보따리>의 이례성 또한 베니스비엔날레와 한국관의 징후로 그 날카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처럼.
─ Article from Space Magazine, August 2013, pp.114-120. 번역 박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