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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안소연

2003

  • 베니스, 상파울로, 리용 등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에 초대되면서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수자는 전통적인 천과 바느질이라는 일상적인 행위를 삶과 사회를 포용하는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이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다가 천이라는 소재를 새롭게 자각 하게 되었고, 천이라는 소재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바느질의 행위에서 당시 자신은 물론 미술계가 천착하였던 '평면' 의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주로 천 위에 드로잉 또는 채색을 가미한 그의 1980년대 후반까지의 작품들은 비록 캔버스를 벗어나긴 하였으나 평회화의 또 다른 연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1990년에 들어서면서 창호지 문틀이나 지게, 얼레 등 전통적인 일상의 오브제들을 천으로 감싸 그 기본 구조를 재확인하는 <연역적 오브제> 시리즈 작업을 하면서 그는 천을 평면적으로 다루던 기존의 작업에서 탈피하여 천이 가진 입체성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 김수자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보따리와의 만남은 뉴욕 P.S. 1에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이루어졌다. 천 작업을 하려고 싸놓았던 보따리를 어느 순간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보따리는 평면적인 천을'묶는다'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서 3차원화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회화적 방법을 연출할 수 있는 동시에 볼륨있는 조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따리는 평면이 3차원화한 입체내지는 오브제이면서 그것이 놓이는 장소성이라 는 문제와 연관될 때 설치로서 자리하기도 한다. 처음에 평면에 대한 대체물로 천을 채택하였던 김수자는 천의 여러 가지 다양성을 모색하면서 그것의 끊임없은 확산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고, 특히 공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보따리를 발견하면서 계속적으로 공간, 장소에 대한 관심을 확대해 나아갔다.

  • 1997년 11일간 트럭에 보따리를 가득 싣고 전국을 일주하는 퍼포먼스를 담아 제작한 비디오 작품 〈떠도는 도시들-2727km 보따리 트럭〉은 평면, 오브제, 설치 작업의 과정을 두루 거치면서 그의 작업 영역이 전시장 밖으로 더욱 확장되어 나아갔음을 보여 준다.이 작품은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하였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의 흐름을 따라가는 여정이자 작업을 위해 세 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은유하면서 보따리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동'과 '유 랑' 의 정서를 표출한 작품이다. 이 보따리 트럭이 1998년 상 파울로 비엔날레와 1999년의 베니 스 비엔날레에 출품되면서 김수자는 세계미술계에 유랑과 자유로운 의식의 유목주의적 사유와 함 께 정체성에 대한 문제 등을 제기한 일명 '보따리' 작가로 알려지게 된다.
    김수자 작업의 기본이었던 바느질이라는 행위도 실제로 꿰매는 행위 없이 실과 바늘이 없이도 관계를 맺어 가는 개념적인 바느질 작업으로 전개되어 나아갔다. 작가는 특히 바늘이 갖는 '치유의 도구'로서의 기능에 주목하면서 스스로를 바늘에 비유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바느질 행위는 '호흡 또는 소통같은 것'이며 분리된 것들을 한땀 한땀 이어 나가 관계를 맺게 하는 행위이다. 바늘은 매개체로서 갈라진 틈 사이를 지나면서 그 틈을 연결시키지만 정작 남는 것은 자신과 연결되었던 실만이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작가는 이렇게 매개체로서의 역할이 끝난 후 무(無)화되는 바늘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 바늘로서의 작가의 모습은 일본 동경의 시부야 거리와 중국 상하이, 인도 델리, 그리고 미국 뉴욕에서 벌인 퍼포먼스를 담은 비디오 작품 <바늘 여인>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길 한가운데에서 마주 오는 행인들을 바라 보며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작가의 모습과 각 도시 행인들의 다양한 반응을 담은 이 비디오 작업은 자신의 몸을 매개로 하여 나와 타인, 나와 세계의 관계를 엮고자 하는 작가 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이 작업에 대해 "하나의 매개체, 혹은 바로미터 또는 나침반으로서 의 작가의 몸은 인파 속에서 스쳐 가는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관계 지을 뿐 결국 투명 인간처럼 거의 무의 상태로 소외되고 사라지고 만다"고 설명한다. 우리의 일상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천이라는 소재와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이었던 바느질이라는 일상적 행위를 인간의 보편적인 문맥으로 발전시켜 나간 김수자는 결국 자신의 예술을 사유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그 속에 치유, 정화, 그리고 포용을 내포하는 관계 맺기를 지향하고 있다.

─ 『Mind Space』(2003), 삼성미술관(현 리움미술관), pp. 11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