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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2012
예전에 어디선가 니체는 공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예술의 관점에서 지식(공부)을 보고, 삶의 관점에서 예술을 본다." 예술의 관점에서 공부를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예술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안하지 않고선 잘 할 수 없다. 예술사에서 기억되는 사람들, 기억되는 문턱들은 전부 이전의 양식이나 스타일을 제끼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안한 사람이나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공부 내지 학문은 많은 경우 기존에 남들이 해놓은 것을 배우는 것으로 진행되고, 그러다보니 배운 걸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재'생산해 놓는 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을 니체는 철학적 노동자, 지식 노동자라고 불렀다. 노동이란 주어진 것을 반복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신이 나서 하는 놀이와 달리 싫어도 힘들어도 참고 해야 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그러나 학문이나 지식의 역사 역시 기억할 만한 것들은 전부 기존의 것들과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안한 사건이나 사람들이다. 즉 예술의 관점에서 공부를 본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안하려는 의지 속에서 사유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들뢰즈라면 이를 '탈주'라는 개념으로 명명했을 것이다.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는 탈주의 선을 그리는 것이라고. 예술의 역사는 탈주선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지식이나 과학, 공부 역시 탈주선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고. 이를 '클리나멘(clinamen, 편위)'이란 말로 바꾸어 말해도 좋을 것이다. 관성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나는 성분으로서 클리나멘.
그런데 니체는 예술의 관점에서 공부의 문제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덧붙인 것이다. 그 예술 또한 삶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예술을 삶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은 미를 추구하는 활동 아닌가? 반면 삶이 미를 추구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근대의 지식이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교양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서구에서 근대 이전에 지식이 모두 그랬는지는 잘 모르지만, 가령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라고 했을 때, 그것은 삶을 사는 지혜를 가르치려는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역사 역시 근대 이전에는 과거의 일들을 들어서 현재 당면한 일을 풀어나가는 지혜나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철학은 인식의 확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근거를 찾는 편집증적 지식이 되고 말았고, 역사는 그 자체로 고유한 발전의 논리를 갖는, 어디서나 관철되는 보편적인 법칙이 되고 말았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이처럼 삶에서 분리된 어떤 고상한 목적이 되어 지식을 삶의 저편으로 인도했다.
'미' 또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고상한 목적이 된다면,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삶의 저편으로 인도할 것이다. 현실적 삶을 초라하고 비루한 것으로 만드는 지고한 피안의 세계, 그리하여 피안의 삶에 대한 동경의 형태로 현실의 삶을 부정하게 하는 니힐리즘으로.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앞서 인용한 명제를 통해 니체가 말하려는 것은 예술을 그저 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아선 안된다는 말일 게다. 미 자체, 예술 자체가 예술의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일 게다. 사실 '미' 자체 또한 삶 속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의 감각이 응집되어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삶의 방식이 다르면 미의 내용이나 기준이 달라지는 것 아닌가? 예술이란 의식(ritual)이든 생산이든 삶의 과정이 요구하는 것을 만드는 활동이 표현적인 독자성을 획득할 때 발생했던 것 아닌가? 결국 예술이란 미적인 특이성을 갖고 참여(participation)하는 방식으로 삶의 일부분이 되는(participation) 그런 활동이 아닐까?
따라서 삶의 관점에서 예술을 본다는 것은 좀더 나은 삶을 산출하는 활동으로서 예술을 본다는 말일 게다. 예술이 좀더 나은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해야 한다는 말일 게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삶이, 좀더 나은 삶이, 좀더 즐겁고 신나는 삶이 예술을 인도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혹은 그런 삶으로 인도하는 예술이 될 것을 삶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게다. 삶을 긍정하고, 즐겁고 신나는 삶을 촉발하는 예술, 이전과 다른 것을 보게 하고 이전과 다른 감각으로 살게 하는 예술 등등.
사실 리얼리즘이 아니더라도, 탁월한 예술작품 속에는 예술가가 체험하거나 관찰한, 혹은 사유하거나 상상한 삶이 스며들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괴테만이 아니라 카프카의 '어이없는' 소설 속에도, 보르헤스의 압축적 소설 속에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그런 삶을 사는 세계에 대한 깊은 사유가 들어 있다. 고흐나 피카소만이 아니라, 클레, 마그리트의 그림은 내 눈 앞에 펼쳐진 세계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드는 촉발로 충만해 있고, 베토벤, 말러만이 아니라 비틀즈, 너바나, 라디오 헤드, 혹은 소음으로 흘러넘치는 소닉 유스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음악에도 삶의 한 순간순간을 다른 방식으로 만나게 하는 새로운 감각으로 흘러넘친다. 그것으로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풍요로워진다. 새로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낡은 것이 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다시 새로운 것을 부른다. 새로운 것이 또 하나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또 하나 체험할 때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풍요로워진다. 이런 점에서 창작으로서의 예술은 예술가들의 것일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서는 삶의 방식으로서 예술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주어진 재료로 작품을 만들지만, 우리는 바로 우리의 삶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삶의 예쁘게 치장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과 진지하게 대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감각, 자신의 신체,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달라진 감각, 신체, 생각으로 다른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예술이 삶에 참여하는 방식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 우리의 감각이나 신체를 바꾸도록 촉발하는 것을 통해서일 것이다. 말하고 생각하는 다른 감각을 문학이 준다면, 보고 느끼는 다른 감각을 미술이 준다. 음악이 주는 다른 종류의 소리, 다른 종류의 리듬을 통해 우리는 삶을 사는 다른 리듬을 얻는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기 위해 예술가들의 힘을 빌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터이다. 예술이 삶에 참여하고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일 것이다. 니체가 삶의 관점에서 예술을 보자고 했던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마음이 어딘가에 고착되는 것이 질병임을 보여주었다. 흔히 외상(外傷)이라고 번역되는 트라우마(Trauma)는 말 그대로 상처를 뜻한다.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아픈 기억이다.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럽기에 억압되어 의식에서는 사라졌지만, 지워질 수 없는 것이기에 마음 한구석,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고 불렀던 곳에 기억되어 남아 있는 상처, 의식에선 잊혀졌지만, 없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고 표현되게 마련인 상처, 의식되고 있지 않기에 항상 변형되거나 왜곡되어 드러나고 의식되고 있지 않기에 없앨 수 없게 되어버린 상처, 그게 트라우마다.
이런 상처가 있고, 우리의 욕망 내지 마음이 그 상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프로이트는 '고착(fixation)'이라고 부른다. 고착된 욕망은 우리의 삶 속으로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억압된 것의 귀환'. 히스테릭컬한 반응으로, 혹은 강박증적인 신경증으로, 혹은 불안 신경증으로 등등. 이를 프로이트는 '증상(symptom)'이라고 부른다. 이런 증상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경우, 그것은 '질병'이라고 정의된다. 이런 점에서 어딘가에 마음이 고착된다는 것은 병에 걸린 것을 뜻한다. '집착'이란 흔히 질병이라고 하진 않지만, 어딘가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고착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고착과 달리 상처라는 '반동적(reactive)' 형식이 아니라, '애착'이라는 '능동적(active)' 형식을 취한다. 능동성의 형태로 자신을 가린 반동적 욕망. 그것은 고착과 아주 인접한 욕망의 투여(Besetzung)방식이다. 그것은 고착의 완화된 형태, 혹은 그처럼 강하게 억압되진 않아서 의식의 표면으로 쉽게 떠오르는 붙박힘 (Be-setzung)이다. 고착이나 집착은 우리의 욕망을 상처에 매이게 하고 우리의 삶에 말뚝을 박는다. 이로써 삶은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끝없는 여행이 아니라, 그 말뚝 주변을 맴도는 질병의 증상이 된다.
정착이란 정착할 곳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착과는 다르다. 그것은 떠날 수 있지만 머무는 것이기에, 떠날 능력을 상실한 고착과 다르다. 그것은 고착처럼 사로잡힌 반동성도, 집착처럼 달려드는 '능동성도 없지만, 버틸 수 있는 한 떠나는 삶의 피곤함을 피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욕망의 수동적 (passive) 투여방식이다. 먹을 것을 얻는 데서든, 무언가 영유하는 데서든, '성공'한 어떤 곳에 멈추어 서고 그 성공을 반복해서 영유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 정착민은 '소유'를 발명한다. 무언가 이득을 주는 곳은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속한다는 선언, 남들은 그것을 침범해선 안되며, 그것을 나누어가지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선언이 그것이다. 그것은 이제 새로운 반동성을 만들어낸다. 침범당하고 싶지 않다는 수동성이 타인들의 접근을 저지하고 밀쳐내는 새로운 반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반동성은 소유를 확보하고 확장하려는 '제국주의적' 욕망으로 변형되면서 부정적인 '능동성'을 새로이 만들어낸다. 근접해오는 타자들의 절멸을 욕망하는 부정적 능동성을. 화 폐와 자본이 이러한 변환의 문턱을 제공한다. 이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제 정착은 집착이 되고 고착이 된다. 편안함을 구하던 삶은 모든 편안함과 평화를 깨는 질병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정착이 언제나 고착이나 집착 같은 질병인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약간의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언제든지 소유물의 증식을 위해, 화폐의 증식을 향해 삶 전체 를 거는 미친 욕망, 병든 욕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유목은 고착이나 집착은 물론 이런 정착 자체와 반대되는 벡터에 의해 정의된다. 그것은 욕망의 투여가 어딘가에 머물거나 고정되는 것에 반한다. 물론 멈추지 않을 수 없고 종종 머물지 않을 수 없지만, 멈춤은 이동의 성분 안에 있고, 이동의 중간에 지나지 않으며, 머묾은 또 다른 떠남으로 이어진다. 정착민은 어떤 성공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여 지속적으로 영유하려 하지만 유목민은 충분히 성공했다는 것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성공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해 떠난다. 여기서 유목민이란 이주민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주민이란 어딘가에 정착하지만 그곳이 더 이상 얻을 게 없어지면, 혹은 거기서 이득을 얻는데 실패하면 쉽게 그곳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이득을 얻기 위해, 불모가 된 땅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다. 반면 유목민은 초원이든 사막이든 불모가 된 땅에, 더는 얻을 게 없어 보이는 땅에, 그 실패한 삶의 영토에 달라붙어 거기서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동이나 이주, 움직임이 유목민을 정의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유목민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움직이지 않는 유목'이라는 역설적 정의를 제시한다. 이를 우리는 약간 다른 식으로 대비하여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주민은 실패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라면, 유목민이란 성공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라고. 이주민이 하나의 성공에 안주하여 그 성공이 불모가 될 때까지 이용/착취 (exploitation)하는 사람들이라면, 유목민은 실패를 떠안고 거기서 새로운 성공의 방법을 창안하며 그 성공이 충분하면 새로운 영토로 떠나는 사람들이라고. 유목민이란 자신의 실패와 성공 모두와 대결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실패를 피하고 외연하기보다는 그것과 대결하는 사람들이고, 자신의 성공에 안주 하기보다는 그것과 대결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목민은 자신과 대결하는 사람이고 언제나 익숙해진 자신을 떠나는 사람이다. 낯선 삶, 낯선 세계, 낯선 타자들을 향해 언제나 자신을 열어두고 그 낯선 존재들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자다. 그 낯선 존재들을 통해 자신 안에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내는 자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익숙해진 것을 떠나고 변형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유목적이다. 떠남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목적이다. 그러나 그런 예술, 그런 예술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오브제를 그려 성공한 덕분에 평생 그것만 그린 사람도 있다. 이 경우 성공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이는 사실 특별한 경우라고 하기 어렵다. 마르셀 뒤샹은 대부분의 작품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반복 안에서, 그 반복을 따라, 그 반복을 다르게 만드는 어떤 차이들이 되돌아올 때, 그 차이로 인해 반복이 차이의 다른 이름이 될 때, 우리는 그 반복마저 차이의 다른 이름으로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복 속의 차이가 정말 자신을 떠나게 만드는 차이인지, 정말 자신의 영토를 떠나게 만드는 차이인지를 정작 물어야 할 것은 예술가 자신일 것이다.
그러나 성공에 안주하는 것은 그만두고, 남의 성공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상주의의 성공이 확실해지자 인상주의자가 되어 그 익숙함의 이득을 착취하며 살아간 사람들, 육면체 박스로 만든 건축물이 '국제주의 양식'이 되자, 평생 육면체 박스 모양의 건물만을 지어 이득을 획득하며 살아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모두 정착민이다. 이주자도 못 되어본 사람들이다. 비틀즈는, 작지 않은 스캔들(“비틀즈는 이제 예수보다 유명하게 되었다”는 발언에 대한 교회의 곡해와 공격)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긴 했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없게 만드는 끝없는 공연을 접고 스튜디오에 들어앉아 새로운 음악적 실험을 시작한다. <서전트 페퍼 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로 상징되는 후기의 걸작 앨범들은 이전의 성공을 떠남으로써 가능했던 것일 게다. 비틀즈가 크게 성공하여 슈퍼스타가 되었을 때부터, 존 레넌은 비틀즈를 떠날 생각을 하기 시작한 바 있지만, 그 거대한 성공을 떠나 비난마저 따르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그는 또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기 존 레넌은 비틀즈가 아니었고, 비틀즈의 레넌이 아니었다.
이처럼 유목은 익숙해진 것, 성공한 것, 능숙하게 된 것을 떠나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마디즘은 앞서 말했듯이 끊임없이 삶을 갱신하고 새로 만들어내는 방법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드는 방법의 다른 이름이다. 좀더 나은 삶의 방법을 스피노자의 용어법을 빌어 '윤리학(ethica)'라고 말할 수 있다면, 노마디즘은 삶을 예술로 만드는 윤리학의 이름이라고 다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갱신의 기술, 탈주 의 감응으로 삶을 촉발하는 예술이 삶에 개입하는 통로고, 그럼으로써 예술이 삶에 말려 드는(in-volve) 길이다.
생산이나 유통, 소비와 문화가 지구 전체를 빛에 버금가는 속도로 이동하는 이른바 '전지구화 (globalization)'의 시대만큼 유목 내지 '노마디즘'이 오해되기 쉬운 경우는 없을 것이다. 가장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은 자본이다. 금융화된 자본의 흐름이 국경을 넘나들며 증식의 고리들을 만들어낸다. 생산 또한 그렇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컴퓨터는 일본 도시바의 상표를 달고 있지만, CPU는 미국에서, RAM은 한국에서, CD롬은 말레이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다른 것들 또한 나름의 '국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중국에서 조립한 것이다. 이렇게 현대적인 상품만이 아니라 옷 같은 전통적인 상품 또한 국경을 넘어서 생산되고 판매된다. 생산의 국제화, 소비의 국제화 등등. 따라서 자본이나 자본가는 물론 기업에서 일을 하는 사람, 물건을 파는 사람, 그리고 소비자 또한 전지구적인 이동의 궤적을 그리며 산다. 대학이나 대학원 같은 교육 또한 더할 수 없이 국제화되어, 유학은 그만두고라도 어학연수 같은 것을 다녀온 것은 취업을 위한 필수적인 스펙의 일부가 되었다. 해외여행 또한 일상화되었고, 대중화되었다.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의 활동은 물론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활동 또한 전지구화되었다. 전지구적 스케일의 이동이 어디서나 일반화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컴퓨터,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술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매일매일의 삶에 이동의 벡터를 그려넣는다.
이처럼 이동하는 삶을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통념적인 것이다. 한때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이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의 광고 카피가 되어 등장하고, 트렌드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서 노마디즘이란 책을 썼다는 이유로 나 같은 사람을 불려냈던 것은 이런 통념에 따른 것일 게다. 그러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3일이 멀다하고 국제선 비행기를 타는 기업가의 마음이 오직 하나 돈을 버는 것에 쏠려 있다면, 혹은 매주 국제선을 타고 출장을 다니는 사람의 마음이 가족의 안위와 돈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아무리 이동의 빈도가 많고 이동한 거리가 길다고 해도 그를 유목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스마트 폰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버스에 앉아서도 끊임없이 손가락을 놀려 서핑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의 사고나 행동이 표준적인 삶의 척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코 유목을 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목을 이동과 구별하고, 유목민은 이주민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유목민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역설적 정의를 제안했던 들뢰즈/가타리의 명제는 이런 시대를 예견하기라도 한 듯하다. 이런 시대에 「호모 노마드」 같이 이동하며 사는 것을 또 하나의 '인간의 본성'으로 보편화하여 책을 쓰고, 심지어 직업을 옮겨다니는 '잡 노마드' 같은 것을 새로운 시대적 조류로 일반화 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동하는 삶의 양상을 유목이라고 오해하는 지식인의 출현은 앞서 말한 통념에 아주 가까이 있는 만큼 상식의 범위만큼 설득력을 갖는다. 예술이 비록 통념화된 것을 깨고 상식화된 것과 대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식적이고 통념적인 오인 속에서 예술가들이 유목을 주제로 작품을 만드는 것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유목민의 텐트나 보따리 같이 이동, 혹은 떠남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늘어놓는 것이 노마디즘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상식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목이 정착과 구별되는 것은 이동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멈출 경우에도 이동의 벡터 속에서멈춘다는 것. 비록 재영토화를 하며 나아가지만 언제나 탈영토화의 벡터가 일차적인 힘을 갖는다는 것에 의해서다. 주어진 배치, 주어진 상식이나 감각을 와해시키며 탈영토화하는 것. 그리고 흐름을 통제하고 질서화하는 홈을 따라 이동하는 게 아니라, 그런 홈을 범람하고 흘러넘치면서 소용돌이처럼 모든 방향으로 열린 벡터를 가동하는 것. 또한 윤곽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어떤 시각적 형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윤곽선이 사라지고 형상의 구별이 불가능해지는 근접성 속에서 촉감적인 표면을 읽고 각각의 장소들이 갖는 특이성 (singularite)을, 이른바 특개성(hecceite, thisness)을 포착하고 읽어내는 것. 이를 들뢰즈/ 가타리는 '매끄러운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한다. 유목이란 어디서든 매끄러운 공간을 창안하고 그것을 점유하며 그 공간 속으로 대중을, 민중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떠남이나 이동을 상징하는 보따리보다는 차라리 서양의 탁자를 낯설고 이질적인 직물로 덮어버림으로써 탁자를 둘러싼 배치 전체를 탈영토화하는 것이 사실은 노마디즘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오래된 사원 안에 현대적인 스크린을 세우고, 아마도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충분한 거리를 갖는 어떤 것이 침입해 들어오게 함으로써 그 공간 전체를 탈영토화하는 것, 혹은 전아한 바로크식 궁전 옆에 커다란 화면을 세우곤 아주 거리가 먼 것 같은 세계를 가시화함으로써 궁전 자체를 다른 배치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유목민을 상징하는 물건들로 이동의 궤적을 표시하는, 상식이 지지하는 유목적 형상보다 훨씬 더 유목적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흔히들 백남준의 작품들에서 발견하는 노마디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해야 할 것이다. 유목민의 마차나 말에 실린 비디오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 대한 통념에 의문을 던지며 양자의 요소를 뒤섞어 새로운 종류의 존재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유목민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사용한 작품이나 퍼포먼스보다는 차라리 음악이나 악기, 연주 등에 대한 통념을 깨부수며 음악 아닌 것을 음악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고, 춤이 아닌 것을 춤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평면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유목이란 이름에 더 가깝다.
그러고 보면, 유목이란 관념에 반하여 유목적인 예술을 창조하는 것, 유목민의 형상마저 탈영토화하며 유목민의 형상을 창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이 이동이 유목을 대신하고 이동의 외양이 유목의 본질을 지워버리는 대대적인 이동의 시대에 예술이 유목에, 노마디즘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미 지배적인 것이 되어버린 이동적인 삶의 방식을 넘어서, 유목적인 삶의 방식을 발명하고, 유목민의 전쟁기계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새로운 종류의 공간 속에서 가동시키는 것, 그리하여 예술과 삶의 새로운 관계를 유목적인 매끄러운 공간 속에서 재창조하는 것, 그 공간 속으로 도래할 민중을 불러들일 매혹의 특이점을 만들어내고 가동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 긍정적 삶의 의지가 예술가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요청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 Essay from Exhibition Catalogue 'Kimsooja' published by Daegu Art Museum, Korea. 2012, pp.5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