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Sewing into Walking, 1994, site-specific installation at Seomi Gallery, Seoul. Courtesy of Kimsooja Studio.

Sewing into Walking, Cloth, Video, Sound Installation by Kim Soo-Ja

인터뷰: 황인

1994

  • 황인
    오늘 이 대담에서는 김수자씨 개인의 작품세계에 대한 조망은 물론이려니와 이를 통해 우리 동세대가 갖고 있는 미술에 대한 공통된 관심과 해석, 더 나아가서 미술과 삶이 본질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그 지점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려 합니다. 우선 이번 서미갤러리에서의 설치작업의 제목이 「Sewing into Walking」 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 제목과 작품의 디스플레이에 대한 개인적인 내력부터 설명해 주시지요.

  • 김수자
    사실 이번 서미갤러리에서의 설치 작업은 83년 이후 지속해오던 바느질 행위(Sewing)와 92년도 이후 발표해 온 보따리 작업에 대한 재검증이라고 할 수 있고, 「바느질 한다(Sewing)」라는 개념을 「걷는다(Walking)」 라는 개념으로 전환, 내지는 확대해석하면서 관객의 신체라고 하는 또 하나의 걸어가는 보따리를 등장시켜 바닥에 깔린 와이셔츠를 밟아 들어가며 의식 속에서의 Sewing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입 니다.

  • 황인
    이번 전시의 제목이 Sewing into Walking이고 실제로 작가가 멀리 마이산(馬耳山)이 보이는 길을 계속 걸어가는 모습이 모니터에 보이던데요.

  • 김수자
    전에는 실과 바늘로 천을 꿰매었다면, 이번에는 내 몸(body)이 하나의 자연을 꿰매는 침이 되어 자연이라고 하는 드넓은 천을 낸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자연을 걷는다고 했을 때, 한발이 착지해서 다른 발로 옮겨지는 연속 과정에서의 대지와 우리의 신체와의 호흡관계를 땀의 이동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바느질을 하면서 의식속에서 소요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걸어가면서 저의 의식 속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 황인
    그러면 여기서 처음의 평면 천작업이 최근의 Walking으로까지 진행된 경과를 단계별로 설명해 주세요.

  • 김수자
    처음에는 천을 평면의 구조로서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그때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었던 오래되고 낡은 천을 사용했음은 삶에의 애정을 동반한 것이었지만요. 말하자면 천의 조직적 구조와 바느질행위의 궤적이 갖는 수직 수평 구조, 그리고 십자형이나 T자형등이 갖는 전체 구조와 바느질 행위의 자기동일성에 몰두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천위의 채색이나 드로잉 이 차차 소거되면서 천의 물질성이 더 강화되고 사각형태로 부터 원형에 가까운 천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그리고 일상의 오브제를 천으로 감는 작업으로 전개되면서 점차 저의 작업이 삶의 공간을 향하여 원운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최근 다시 자연으로 이어지고 있구요. 그런데 그러한 과정을 저는 어떤 논리적인 귀걸이라기 보다 욕망 혹은 감성의 논리로 보게 됩니다.

  • 황인
    그렇게 보면 김수자씨의 작업은 단순한 평면에서 물질성이 강화된 평면으로, 또 그 물질성이 돌출하여 입체로 그리고 보다 큰 설치공간으로 이어졌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신체가 공간에서 큰 변화를 보여준 것같습니다. 이를테면 작가가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이 가능할른지요?

  • 김수자
    네. 더이상 무엇을 만들어 전시장에 놓 는다는 것에 관심이 없어진 이후 '화랑'이라는 인위적인 공간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고, 저는 화랑공간을 가장 잘 해석해 내던가 그렇지 않으면 가장 적절한 그릇, 즉 공간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따리가 놓일곳, 이불보가 펼쳐질 장소, 또 신체가 걸어갈 길을 찾은 곳이 경주 부근의 양동리 한옥마을과 옥산서원 계곡, 그리고 진안 마이산 등이었습니다. 자연과의 만남이 제게는 새로운 의미와 소중함으로 다가왔고 이 자연을 화랑공간으로 싸올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끝에 TV모니터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지 보따리 개념으로 TV모니터를 차용한 것이지요.

  • 황인
    와이셔츠가 깔린 바닥에 모니터가 가로 수처럼 길을 내주고 있고, 그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다 보면 코너에 보따리를 인 다섯개의 TV 모니터가 탑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있더군요. 또 한 첫번째 보따리와 소리 설치장면이 감시용 카메라로 잡혀져 두번째 공간의 정경과 나란히 모니터에 나타나고 있는데요, 그 두 공간의 관계에 대해 좀 설명해 주시지요.

  • 김수자
    말하자면 야외에서의 행위와 설치작업이 바닥에 놓인 TV모니터에 싸여 (wrapping) 있고, 첫번째 공간이 C.C 카메라를 통해 두번째 공간이라는 보따리에 싸여진 것이 됩니다. 그리 고 두 번째 방의 설치물과 첫번째 방의 영상이 나오는 TV모니터가 모두 두번째 방의 또 다른 C.C 카메라에 잡혀서 영상화됩니다. 그럼으로 해서 걸어들어가는 관객은 자신의 뒷모습과 마주서게 되는, 다중의 wrapping을 통해 공간 전체를 조망해보려 하였다고나 할까요.

  • 황인
    말머리를 조금 돌려서 보따리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것을 펼치기도 하고 묶기도 하던데,

  • 김수자
    보따리는 쌀 수도 있는 만큼 풀 수도 있 는 것이지요. 저는 우리 몸 자체를 가장 미묘한 보따리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보따리를 싸고 풀듯이 내 몸(Body) 역시 끊임없이 머물고 떠 납니다. 말하자면 천이란 우리몸의 안팎을 경계짓는 피부와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혹, 이러한 긴장과 이완의 관계, 작업의 중층구조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시킬지도 모를 일이지 만 사실 제 자신은 전혀 혼란스럽지가 않습니 다. 모두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황인
    그런데 보자기의 풀고 묶음이 만남과 단절을 의미하듯이 Sewing도 같은 작업으로 엮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김수자
    Sewing은 호흡 내지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같은 것입니다. 내가 정확하게 한 바늘의 뜸을 짜서 천이라는 경계의 배 면으로 꼭 찔러 들어갔을 때 바늘 끝이 다시 내 게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우리가 대화할 때 그런 작용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합니다. 우리가 「말한다」는 행위, 또는 「바라본다」 라고 하는 행위가 바로 끊임없는 Sewing 아닐까요?

  • 황인
    우리가 이제껏 보아오던 미술이란 그것 이 평면이든 입체이든 혹은 설치든 그것은 구체적인 물체의 담보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작가의 신체를 이미 떠난 어떤 구체적인 존재들의 집합이 되겠지요. 아무리 거기에 작가의 혼이 배어있다고 해도 작가자신과는 동일시 할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렇다면 김수자씨는 화랑이라는 전시공간을 떠남으로해서 오히려 자신의 작업을 자신의 인격속으로 끌어들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뒤집어서 작품의 공간을 무한히 확장한 결과로 작가가 작품속으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껏 관행되어오던 작가와 작품의 대결구조를 해체하려고 하는 새로운 노력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은 미술이 음악이나 무용처럼 신체에 훨씬 가까이 다가서는 양식을 취하게 되는 셈인데, 그 결과는 질량을 점점 가볍게 벗어버 리는 문화형식 이를테면 유목문화의 양식에 접근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떠돌이의 예술이라고나 할까요.

  • 김수자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저는 삶. 즉 작업에 전존재로서 총체적으로 다가가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또한 예술가란 자신의 모순이나 욕망, 그리고 한계를 예술적 언어로써 극복하는 장르 이름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조형 내지 예술적 언어들은 작가와 세계와의 고독 하고 은밀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요.

  • 황인
    마지막으로 이번 설치의 또다른 특징적 인 요소로 소리의 도입을 들 수 있겠는데요. 첫 번째 공간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와 두번째 공간 외 「털썩」하는 소리의 반복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 김수자
    한복 방의 TV모니터와 연결된 보따리를 들고 들어와 한옥마당에 털썩 떨어뜨리는 소리는 삶의 무게를 내 가슴에 던지는 운명적 행위를 소리 메시지로 전달하는 것이라면 옆방의 사운드, 즉 풍속적인 재즈의 노래와 박수소리는 보따리 하나하나 향한 진솔한 호소인 동시에 삶의 무게를 벗으려는 허무한 몸짓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 황인
    흑인여가수 Nina Simone의 공연실 황중의 일부를 반복해서 들려주신 것으로 아는 데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 김수자
    그녀는 「Ne me quitte pas」 (날 떠나지 마오)라든가 「Please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오해하지 말아주오)등 통속적인 삶의 테마들을 온전히 자기화하여 해석하고 있는 거짓없는 창법을 구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녀의 삶에 대한 애정과 진실성이 보따리의 사연과 만나 서로 응답할 수 있기를 기대했고, 혹인 여가수의 공연실황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현장감있는 인종을 초월한 소리굿을 연출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또한 이 공연실황과 보따리 놓는 소리는 각방에서 따로 들어도 좋고 연결해서 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 김수자
    김수자씨의 말을 듣고 보니 작업의 조그만 행위 하나에도 매우 중층적인 의미가 뒤섞여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어색한 만남 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로 녹아들면서 근사한 새로운 컨셉(concept)이 생기는 것이 조형예술의 미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오늘의 대화가 바느질 한땀에 불과한 미미하고 초라한 것일른지 몰라도 바늘이 반드시 지나쳐야 할 그 지점에 자리했으면 더없는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계속 분발을 부탁드립니다.

— Interview from SPACE, (January 1995), pp. 3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