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Kimsooja │ A One-Word Name Is An Anarchist's Name

2003

김수자 │ 한 단어 이름은 무정부주의자의 이름이다

2002

Kimsooja │Cloth and Life

1994

Kimsooja │ Cloth and Life

1994

김수자 │ 천과 삶

1989

김수자 │ 천, 색면, 변주

1988

김수자 │ 작가노트

A One-Word Name Is An Anarchist's Name

Kimsooja

2003

Action 1: "A One-Word Name Is An Anarchist's Name."

Identity of the one word name

  • When I decided to open a website using my name — which I hesitated to do for years because of its commercial aspect — I was hoping for an ideal society and relationship among people in the art world in which we could share real opinions with honesty, sincerity, dignity and love of art and life. I hope that my website project will not just introduce my activities but can bring more articulated discussions and criticism on art and the world.

  • I am careful to open this site, as mass media i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media and another form of power which often leads this (art)world unfairly and untruthfully. But this is also what I wanted to work out and to bring out the true face of it — by opening another critical mass media to balance the public opinions. Think how much internet information and how many discussions are going on in this world — it is excessive. But I find most of them nothing but consuming information which have no content or true concern about art and the world.

  • I feel a responsibility now to put my endeavor to the (art)world in a modest way, even with one single person in this whole world to share and to support the real concerns — which I've been thinking for sometime, experiencing how the opinion of the society can be twisted by leading the public with wrong information or by not giving information, or by manipulating the reality mainly using mass media — partly because they are ignorant, partly because they are insecure, and are serving themselves for money and power. I wish to see the real art and meet real spirit, and to create something real with real people, and share it with every single person one to one, mostly discovering the ideas that have not been revealed or appreciated enough in this world.

  • One night, I suddenly discovered an important aspect in naming the website domain which keeps mostly one-word name — and it drove me to make up my decision to open a website for the public which I've been hesitating to do for years — like others, <www.kimsooja.com>. I was struck by the fact that it shows no reference of the name which has two or three words put together, with the first name and the family name, sometimes with a middle name.

  • A one word name refuses gender identity, marital status, socio-political or cultural and geographical identity by not separating the family name and the first name. Action One: "A One-Word Name Is An Anarchist's Name" is my first statement for opening my website project.

  • You are invited to my station to share any concern or critical ideas and I will communicate with you one to one, posing questions, inviting significant artists, writers and thinkers, as well as curators in the near future.

  • Thanks very much for your concern and support for this project.

  • Please feel free to contact me if you have any questions or ideas to share.

  • I look forward to communicating with you soon.

  • Sincerely,

  • Kimsooja

— New York, July 14, 2003

한 단어 이름은 무정부주의자의 이름이다

김수자

2003

액션 1: "한 단어 이름은 무정부주의자의 이름이다"

한 단어 이름의 정체성

  • 상업성에 대한 고민으로 주저하던 수년을 뒤로하고 내가 홈페이지를 열기로 결정했을때, 나는 예술과 삶에 대한 진실성과 순수함, 존엄과 사랑이 함께하는 진정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작품 안에서 이상적인 사회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홈페이지는 단순히 내 작업과 활동을 소개하는 도구가 아니라 미술과 세계에 대한 더 활발한 대화와 평론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매스미디어는 가장 강력한 미디어이자 자주 이 (미술)세계를 불공평하거나 진실되지 못하게 만들어 가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이 홈페이지를 여는 것이 조심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대중 앞에 또 하나의 중요한 매스미디어 형식으로 내놓음으로써 문제의 진정한 단면을 보고 부딪쳐보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정보와 토론이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이는 수를 셀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예술과 삶에 대한 진정한 염려가 배제되어 있고 우리의 시간만 낭비하게 한다.

  • 나는 이 (미술)세계로 허식없는 노력을 쏟는 것에 대한 의무감을 느낀다. 그리고 단 한 명이 될지라도 진실된 염려를 나누며 함께하고자 한다. 한동안 생각해 왔던 것이지만 무지와 불안감때문에 혹은 돈과 힘을 얻기 위해 잘못된 정보, 고의적 정보의 부재, 통신매체를 이용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결국 대중이 사회에 대한 뒤틀린 의견을 갖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나는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혼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참된 사람들과 참된 무언가를 만들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하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들을 발견해 보고 그것을 모든 이들과 나누고 함께하고 싶다.

  • 어느 날 밤 나는 한 단어로 된 홈페이지 주소의 이름을 생각해 보며 갑작스러운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발견은 수년간 망설여오던 대중을 위한 홈페이지를 만들도록 이끌었다. <www.kimsooja.com> 나는 이 웹주소가 성, 이름, 또는 미들네임 등 두 세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이름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 한 단어의 이름은 성과 이름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성별, 결혼의 유무, 사회 정치적, 문화적, 또는 지리적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액션 1: “한 단어 이름은 무정부주의자의 이름이다” 는 나의 홈페이지를 여는 것에 대한 첫 번째 성명이다.

  • 나는 어떤 의견이나 비평적 아이디어도 함께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이 공간에 초대한다. 나는 이곳에 찾아오는 여러분 개개인과 의견을 나눌 것이며 가까운 시일 내에 작가, 사상가, 그리고 큐레이터들을 이 공간으로 초대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에 대한 염려와 지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의문과 의견을 나누고 싶은 분들은 언제라도 연락을 바란다.

  • 곧 함께 의견을 나누길 기대하며.
    김수자

  • New York, July 14, 2003

Lie on the Nature / Sewing into Walking, used bed covers, Oksanseowon Valley, Korea, 1994. Photo by Ju Myung Duk.

Cloth and Life

Kimsooja

2002

  • We are wrapped in cotton cloth at birth, we wear it until we die, and we are again wrapped in it for burial. Especially in Korea, we use cloth as a symbolic material on important occasions such as coming of age ceremonies, weddings, funerals, and rites for ancestors. Therefore, cloth is thought to be more than a material, being identified with the body — that is, as a container for the spirit.

  • When a person dies, his family burns the clothes and sheets he used. This may have the symbolic meaning of sending his body and spirit to the sky, the world of the unknown. When I look back over my more than twenty years of handling bedcovers, I feel that I have always been performing, guided by the piles of cloth I have lived among.

  • What in the world have I stitched and patched. What have I tied up in bundles. When will the journey of my needle end, my silkworm unwrap its flesh. Will it in the end slough off its skin. Will the bundles with no destination find their way to go.

— Artist statement accompanying "Kim Sooja: A Mirror Woman", Peter Blum gallery, New York City.
Exhibition from February 23 to May 18, 2002.

Cloth and Life

Kimsooja

1994

  • We are wrapped in cotton cloth at birth, we wear it until we die, and we are again
    wrapped in it for burial. Especially in Korea, we use cloth as a symbolic material on
    important occasions such as coming of age ceremonies, weddings, funerals, and rites for ancestors. Therefore, cloth is thought to be more than a material, being identified
    with the body -- that is, as a container for the spirit.

  • When a person dies, his family burns the clothes and sheets he used. This may have
    the symbolic meaning of sending his body and spirit to the sky, the world of the
    unknown. When I look back over my more than twenty years of handling bedcovers, I
    feel that I have always been performing, guided by the piles of cloth I have lived among.

  • What in the world have I stitched and patched.

  • What have I tied up in bundles.

  • When will the journey of my needle end, my silkworm unwrap its flesh.

  • Will it in the end slough off its skin.

  • Will the bundles with no destination find their way to go

─ Artist’s Note from Gallery Seomi Solo Show ‘Sewing into Walking’, Seoul, Korea, 1994

천과 삶

김수자

1994

  •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접하는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태아를 감싸는 무명일 것이다. 우리는 이 천이라는 부드러운 물질을 죽는 순간 까지 두르고 살아가며, 마지막 시신까지도 천으로 감싸져 땅에 묻히는 진통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삶의 중요한 대목들, 이를 관·혼·상·제에 있어 그 예식의 상징적인 매개물이 바로 천 임을 목격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때로 천이라는 오브제는 물질을 넘어 살을 맞대고 함께 호흡하던 신체와 동일시 되며 또 그 신체의 영혼까지도 묻어있는듯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입던 옷가지와 덮던 이불 등을 태우는 행위가 바로 그의 몸과 혼을 하늘, 즉 저승으로 보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닐까? 십여년간 천을 만져 오면서 나는 작업을 한다기 보다 한 조각의 천이 이끄는대로 혼자만의 퍼포먼스를 하며 헌옷더미에 묻혀 살아온 느낌이다.

  • 과연 무엇을 꿰매어 왔던가.

  • 또한 무엇을 그리도 칭칭 동여매고, 보따리 보따리 싸매어 왔던가.

  • 언제쯤 바느질 뜸을 따라 걸어가는 이 길이 끝날 것인가.

  • 나의 누에는 제 실을 다 풀어 허물을 벗을 것인가.

  • 그리고 갈 곳없는 보따리들은 제갈길을 찾을 것인가.

  • 1994년 11월 김수자

─ Artist’s Note from Gallery Seomi Solo Show ‘Sewing into Walking’, Seoul, Korea, 1994

천,색면,변주
Cloth, Color space, Variation

김수자

1989

  • 한 조각의 천, 그것도 누군가의 손때가 묻어있어 삶의 우여곡절을 느끼게 하는 그것을 바라보고 앉았노라면 지난날의 어느 시점, 혹은 어느 공간을 향하여 마음이 모아진다. 삶의 부대낌과 소음이 밀려간 빈자리에 서서히 밀려오곤 하는 것, 그것은 늘 지나간 시절 몸담았던 자연의 어느 모서리이거나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의 모습이었다.

  •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하여 끝없이 산속에 헤매이거나 낯선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던 유년의 경험, 남몰래 다락방에 올라가 어둠속에서 들추어 보던 아버지의 해묵은 서적이며 앨범, 할머니의 반닫이 속에 든 갖가지 집기며 보따리들의 기억…., 그것은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보랗빛 도라지 꽃을 발견했을 때 처럼 나에게 은밀한 감동을 안겨주곤 했고, 그런 일이 있던 밤이면 잠자리에 누워 깊은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 내 마음 한 켠에 각인된 지울 수 없는 또다른 영상들이 있다. 그것은 왜곡되어 있는 듯 싶고 어쩌면 이 세상과 무관한 듯도 싶은 그런 인물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화사하거나 웅장한 그 무엇보다 더욱 절실한 하나의 의미로써 영혼의 떨림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시절 할머니를 따라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갔던 어느 먼 산속 과수원, 그 안에 딸린 한간 토담집 초가에 유배자처럼 홀로 살던 어느 친척 아저씨의 죽음, 등 뒤에서 수런대던 공포에 가까왔던 그의 죽음에 관한 어른들의 뒷 이야기, 그때 느껴지던 토담방의 흙내음, 한 인간의 파괴, 혹은 바람부는 저녁, 옷자락을 펄럭이며 절뚝이던, 눈도 코도 귀도 뭉그러진 사람들의 기억…., 이러한 잊을 수 없는 숱한 기억들이(작업을 하는 동안 수없이)밀려왔다 밀려가곤 한다.

  • 삶의 체취를 맡으며 기억의 파편들을 꿰매고, 내 마음의 갈래들을 하나의 평면 속에 통합시키는 과정, 그 시간은, 그것이 갖는 조형적 성과만큼이나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다. 내가 굳이 손으로 일일이 바느질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사색과 고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고 단순한 조형적인 효과로써 꿰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간을 살고 있으며 그 삶을 통해 인간적인 허물과 존재의 모순, 나아가 자유에의 영원한 열망을 극복하고자 한다. 천을 꿰매는 행위 속에서, 나는 나의 사고와 감수성과 행위 이 모두가 일치하는 은밀한 일체감을 경험하고 있고, 묻어두었던 그 숱한 기억들과 아픔, 삶의 애정까지도 그 안에 내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천이 가지는 부드러움, 날실과 씨실의 조직, 우리 천의 그 원초적인 색감, 평면을 넘나드는 꿰매는 행위의 천과의 자기동일성,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향수…., 이 모든 것들에 나 자신은 매료되어 있다.

  • 색면들은 하나의 천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하여 네모꼴의 단위속에서 변주되고 이 단위들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확산되면서 하나의 형태화된 평면으로써의 당위성을 얻고자 한다 최근의 작업들은 원색적인 천의 소리들이 많은 부분 검정속으로 흡수되고, 반면에 평면의 質의 표현이 중요시 되어있다. 또한,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언어의 표기는 그것이 전체적인 조형에 무리를 가져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명명함으로써 하나의 의미와 구체적인 이미지를 탄생시키고자함이며,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내가 마음속으로 「아름답다....,」라고 되뇌어 보듯이 시각을 통하여 하나의 청각적인 반향을 얻고 싶음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낙서와 같이 무의식적이거나, 전체 작품속에서 부차적인 요소로 남기 보다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의미상으로 작품 자체를 정의하는 등가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작업에서의 검정의 출현은 검정이 갖는 관념적인 의미 그대로 절망, 허무, 죽음과 같은 침몰된 정신상태의 반영이라 할 수 잇다. 그리고 수평과 수직의 만남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의 작업에는 일련의 십자형 내지는 그 변형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러한 형태의식은 우리가 피부로 접해온 한국의 건축공간의 격자형태나 문자등, 우리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동직적인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으나, 무엇보다 존재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속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만남의 결과였던 만큼, 나에게는 절박한 자기구원의 의미로 남아있다.

─ 『SPACE』, 1989. January. No.257, pp.112-113.

작가노트

김수자

1988

  • 내가 오래된 한복 천들을 모아 바느질 작업을 하기 시작한 것은 몇 가지 감성적, 논리적 필연성으로부터였다. 80년대 초반까지의나의 관심은 온통 사물의 내부구조와 그 관계에 집중되어 있었고,당시 나에게 있어 회화(繪畵)란, 자연에 대한 나의 인식을 표면화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로써의 천(天) · 지(地) · 인(人), 그리고 그 존재방식으로서의 수평 · 수직구조의 조형적 탐구를 의미했다. 평면을 통해, 혹은 오브제(object)나 신체를 통해 이러한 인식의 조형화를 시도하였으나 그러한 사고가 점차 관념화되면서 사고의 경직성을 낳았고, 구조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표현적인 요소가 점차 소거되어 결국 작업에서의 행위의 부재,내지는 무의미를 가져왔다. 또한 나 개인의 삶과 작업 사이에서도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구조 위에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넣는 인간화(人間化)의 작업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 끝없이 도전하는 평면 앞에서, 자기존재의 모순 앞에서, 또한 독창성(originality)에 대한 강한 욕구 앞에서 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방법론을 찾아 고심하던 중, 1983년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는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나의 사고와, 감수성과 행위 이 모두가 일치하는 은밀하고도 놀라운 일체감을 체험했으며, 묻어두었던 그 숱한 기억들과 아픔, 삶의 애정까지도 그 안에 내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이 가지는 기본구조로써의 날실과 씨실, 우리 천의 그 원초적인 색감, 평면을 넘나드는 꿰매는 행위의 천과의 자기동일성,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향수····· 이 모든 것들에 나 자신은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작업에서 보여지는 색면들은 하나의 천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하여 네모꼴의 단위 속에서 변주되고, 결국 이 단위들의 통합된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네모꼴의 각기 다른 천들이 유기적 관계 속에서 확산되면서 하나의 형태화된 평면으로써의 당위성을 얻고자 했다면, 다소 굴곡이 있지만 최근의 작업들은 원색적인 천의 소리들이 많은 부분 검정톤(tone)으로 가라앉으면서, 평면의 질(質)의 표현이 중요시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작업에서의 검정의 출현은 검정이 갖는 관념적인 의미 그대로 절망, 허무, 죽음 같은 침몰된 정신상태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수평과 수직의 만남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의 작업에는 일련의 십자형(十字形), 내지는 그 변형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형태의식은 우리가 피부로 접해온 한국의 건축공간의 격자형태나 문자 등, 우리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동질적인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으나, 무엇보다 존재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만남의 결과였던 만큼, 나에게는 절박한 자기구원의 의미로 남아있다.

─ 『Kim, Soo-Ja』, 갤러리현대 개인전 도록 수록 글, p.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