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sooja at The Project

Nancy Princenthal

2004

  • In the beginning, readymades were chosen for their dumb simplicity: a bicycle wheel, a bottle rack, a shovel. Kimsooja, on the other hand, has chosen an object that is spectacular in its own right. The circular jukebox speaker that appeared four times in the installation Mandala: Zone of Zero features concentric bands of colored plastic, circulating bubbles, mirrored tiles and colored lights, all surrounding a brocade-covered audio element. A rotating knob at the center supports the resemblance to a roulette wheel; vaguely pagoda-shaped brackets give it a generic Asian accent. In the exhibition, the speakers were each centered on a wall in a room painted a deep soothing indigo and unlit, except for the audio units' multihued glow. Carpeting enhanced the serenity.

  • But it was a jangly calm, which matched the east/west discordance of the glitzy object itself, a sensory buzz amplified by the sound composition Kimsooja assembled. Mixing Gregorian chant, Muslim singing and Tibetan bells, the music was, like the bubbling speakers, almost embarrassingly engrossing. The mutually subversive and anyway kitsch-challenged spirituality of the three soundtracks produced genitive dissonance where an unlikely and altogether gorgeous aural harmony reigned.

  • The connection Kimsooja saw between the jukebox speakers and Tibetan mandalas is evident in this installation's title. Implicit in the subtitle is the question of whether its musical mixed messages transcend sectarianism to attain a higher level of spirituality than any one faith can offer (a zone of zero where striving particularity can be sublimated), or if the work points to the crass commercialism of which every religion can, at times, be found guilty (a zero zone of spiritual aridity).

  • A Korean artist now in her 40's, Kimsooja is a past master of imperturbable resistance to conclusive statement. Her previous work includes installations of filmy Korean textiles hung on lines like drying laundry and, perhaps best known, an international series of performances called A Needle Woman. Standing sentinel in London, Cairo, New Delhi, Lagos, Mexico City, Shanghai, and elsewhere, Kimsooja was the unmoving obstacle around which pedestrian traffic swirled. In the video documentation that followed, she is always shown from the back. It's possible to read committed asceticism in her posture, but also frank refusal to engage.

  • The same disinclination to take sides is evident in Mandala. Somewhere between the aggressive irreverence of Jason Rhoades's imaginary trip to Mecca, documented in his rapturously messy recent installation Meccatuna, and the prim eroticism of Duchamp's Precision Optics, with their hypnotic rotating geometries, is the null zone of quietly pulsing intransigence where Kimsooja has taken up residence.

Art in America, USA, April, 2004, pp.126-127.

P.S. 1 현대미술관 《김수자》

그레고리 볼크

2001

  • 한국 미술가 김수자의 이번 첫 뉴욕 개인전에서는 최근의 비디오 작품들을 선보였지만 사실 그의 작업은 비디오, 퍼포먼스, 조각(작가 자신의 몸을 포함하여), 그리고 야외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명상 행위가 혼합되어 있다. 그 중심에는 <바늘 여인(A Needle Woman)>(1999-2001)이 있다. 이 작품을 위해 김수자는 카이로, 델리, 라고스, 런던, 멕시코시티, 뉴욕, 상하이, 도쿄 등 8개의 주요 도시를 여행했지만, 작품 속에서 그는 보행자들과 갖가지 차량으로 북적이는 시내 한복판에서 카메라를 등진 채 결국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P.S. 1 현대미술관(P.S. 1 Contemporary Art Center)에서는 작가로부터 뒤쪽으로 몇 미터 떨어진 위치에 고정된 카메라로 이러한 행위들을 촬영한 무성 비디오가 대형 홀의 벽면에 투사되었다. 단조로운 회색 원피스를 입은 작가는 인간적 이동과 소동의 한가운데에 서 있고, 사람들은 그를 향해 주변으로 밀려든다. 이따금 작가는 인파에 휩쓸릴 것만 같고, 어쩌면 누군가 무심코 그에게 부딪히거나 어떤 식으로든 위협을 가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는 이는 그의 안전을 걱정하게 된다. 때로 그녀는, 모든 이가 제 갈 길로 흩어지는 와중에도 그저 한 자리에 머무르며,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강인한 신비로움을 품은 채 존재한다.

  • 언제나 시각적으로 매혹적인 이 비디오들은 개인과 대중 사회 사이의 불편한 관계, 다른 문화에 에워싸인 외국인이 느끼는 위치 상실(dislocation)의 감각, 혼란스럽고불안정한 세계에서 자신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 김수자의 표정은 한 번도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행동을 하기까지 그에게 용기와 강렬한 내면의 활력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은 확연하다. 그의 작품 전반에는 보는 이에게 강한 울림을 주는 인내심 있는 수용과 정신적 평온함이 배어 있다. 그리고 이 퍼포먼스의 일부는 거리의 삶이기도 하다. 이름 없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성큼성큼 걷고 자전거 페달을 밟고 차를 몰아 작가 쪽으로 다가왔다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다. 분주한 뉴욕 사람들은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그를 보지 못하고, 다민족의 런던 사람들은 휴대폰에 대고 재잘대기 바쁘며, 상하이 사람들은 작가를 몰래 힐끗거린다.

  • 특히 인상적인 것은, 김수자가 취하는 이와 같은 최소한의 행위가 각기 다른 도시의 감각과 사유를 자극하는 인물의 초상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도쿄에서 김수자는 철저히 무시되어 마치 유령처럼 보이고, 우리는 일본에서 한국계 소수자들이 문화적으로 비가시적인 존재로서 오랫동안 차별을 겪어온 현실을 자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다. 라고스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사람들이 호기심이 역력한 얼굴로 작가 주변에 모여든다.

  • 또한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와 연관된 다른 행위들을 담은 비디오도 선보였는데, 이 비디오들은 때로는 벽에 투사되고 때로는 모니터로 상영되었다. 카이로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성인 남성들과 소년들에게 둘러싸여 모로 누워 있는 김수자는 여성 "타자"의 전형이 되며, 작가의 눈에 띄지 않지만 당혹스러운 행동은 구경꾼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작가가 델리의 야무나 강 둑에 서 있을 때, 강은 좌에서 우로 잔잔하게 흐르고, 그 표면은 천천히 떠 가는 부유물로 장식되어 있다. 눈앞에서 지나가는 것은 쓰레기이지만, 우리는 지나가는 기억을, 소망과 상실을, 한 생의 눈부신 파편들을 생각하게 된다. 겉으론 소박해 보이는 김수자의 행위는, 그 안에 깃든 복합적이고도 깊은 울림으로 우리의 내면을 조용히 사로잡는다.

—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 미국, 2001년 12월호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홍정인

낯선 거리에 선 여인의 시선

김애령 (미술평론가)

2001

  • 이스탄불 · 광주 · 상파울루 · 베니스 비엔날레 등 무게 있는 국제전을 위시해서 일본. 미국·유럽 미술관의 여러 전시와 국내 로댕갤러리의 개인전을 통해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한국 작가로 떠오른 김수자의 뉴욕 데뷔전이 P.S.1 에서 열렸다. 김수자는 92년부터 1년간 P.S.1 국제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참가하였으며, 거기서 그의 예술에 전기 를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개인전은 각별한 의미가 있으며 그가 지난 8~9년간 얼마나 치열하고 명석하게 작가의 길을 열어왔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 지상 4층, 지하 1층의 거대한 P.S.1 건물은 방마다 그룹전이나 개인전이 열리고, 복도. 계단 · 휴게실은 물론 화장실까지 각종 프로젝트들이 침입하여 온 건물로 벌집 쑤신 듯 창작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의 욕망으로 들끓는 특이한 장소다. <김수자전>은 P.S.1 의 창립자인 알라나 하이스가 직접 디자인했다는 3층 갤러리에서 열렸다. 주 전시실 주변 5개의 방이 좌우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어 P.S. 1의 다른 전시실과는 달리 경건함까지 느껴지는 장소로서, 김수자 작업의 실존적 엄숙함과 반복성의 대칭성을 더할 나위 없이 부각시켜 주는 공간이다.

  • 이번 전시는 지난 2년간 도쿄·상하이 · 델리 ·뉴욕· 멕시코시티 · 카이로 · 라고스 · 런던 등 8개 도시에서 실행한 <바늘여인(A Needle Woman)> 비디오 퍼포먼스를 하나의 보따리로 싸듯 매듭지어 보여주는 것을 중심으로 <바늘여인>의 바리에이션인 <빨래하는 여인(A Laundry Woman)> <집 없는 여인(A Homeless Woman)>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 이 모든 퍼포먼스의 시발점이 된 <바느질하면서 걷기(Sewing into Walking)>을 전시했다.

  • 97년 이스탄불 비엔날레 참가했을 때에 붐비는 거리를 고정 시점에서 찍은 이 비디오는 이전에 작가 혼자서 행한 같은 제목의 퍼포먼스의 타자적 버전으로 이 둘의 변증법적 전 개가 <바늘여인>으로 귀결되었다. 바느질과 보따리 싸기를 시작한 김수자의 예술은 여성을 초월하고 자아를 극복하면서 세계와의 만남을 찾아 나섰다. 보따리는 기왕에 이동을 상징하는 물건이지만, 작가는 바느질에서도 무한한 여행과 발견 · 만남을 상상하였던 것이다. 그의 여행은 글로벌 문화의 상징이자 현상처럼 거론되지만, 사실은 고대로부터 진리 를 구하는 자들이 행한 '가출'에 가깝다. 익명의 여자로서 그냥 거리에 던져진 소외된 자의 모습으로 평범한 삶들을 마주치며 그 속에서 인생의 화두를 얻는 그의 자세와 방법은 불교적 명상과 실천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예술의 관점에서 더욱 의미있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체험을 전달하는 형식이다. 말이 아닌 시선과 몸의 언어, 비디오라는 보따리 싼 얼마든지 이동 가능한 시간 · 공간 · 관객을 흡수하는 구성, 보이지 않는 부분이나 형태를 가질 수 없는 것까지 예감하고 그릴 수 있게 하는 여백.

  • 낯선 거리 한복판에 멈춰 서서 주변을 동요 없이 바라보는 작가의 뒷모습을 담은 <바늘여인>은 놀라운 흡입력으로 관객이 작가의 정지 자세를 따르게 한다. "왜 저러고 서있 는가?" 혹은 "무엇을 바라보는가?"라는 질문은 곧 그녀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세상 풍경 에 흡수되어 버리고, 관객은 '나'를 버린 시선으로 존재하는 텅빈 순간으로 인도된다. <바늘여인>은 정보와 계획, 상상과 환상이 포화상태인 일상생활과 실재와 가상의 구분 조차 모호해지는 시대에 온몸으로 거기 있음'을 실천하는 퍼포먼스다.

  • 그러함으로써 작가가 서 있던 때와 장소를 관객의 시공과 맞댈 뿐 아니라 언어와 풍 습. 국경으로 분리된 '나'와 '타인' 을 이어 붙이는 상징적 바느질이다. 따라서 김수자의 멈춤은 거부나 저항, 혹은 자기성찰을 위한 일단 정지가 아니고 외부를 향한 열림의 자 세다. 열림은 <구걸하는 여인>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미지의 군중을 향해 벌린 손바닥 위에서 벌어 진 드라마들, 돈이 쥐어진다던가, 놓인 돈을 훔쳐간다던가 혹은 살아 있는 병아리가 놓인 일들을 작가는 각성의 계기로 여긴다. 흐르는 강물 앞에서 변하는 것은 강이 아니라 부동의 자세로 서 있던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했듯이 멈춤은 내면과 외부를 소통시키는 자세이기도 하다. 내면의 변화는 다양한 색깔과 냄새, 그러나 하나의 인생을 사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장소를 공평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세계의 선물일 것이다.

— 『아트인컬처』 서울, 한국, 2001년 9월호
*작품 시리즈명은 원문에서 일부 수정되었다.

김수자·이윤동의 「호흡展」

윤우학 (미술비평가)

1979

  • 우리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서는 기성 작가들의 그것과는 달리 어떤 솔직함과 담백함을 엿볼 수 있는 작업들이 많다. 물론 그러한 작업들은 작업의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 일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그들은 쓸데없이 완결된 채 작업적인 분위기만 조성하는 겉늙은 작업들에 비교하여 훨씬 가치있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바로, 김수자와 이윤동의 작업이 그와 같은 솔직성과 담백성을 지닌 것이라 말할 수 있고 그들의 작업은 무엇보다 이러한 점에서부터 관심을 끄는 것이라 믿어진다.

  • 사실, 그들의 작업은 결코 어떤 복잡한 구조 관계 내지 필요 이상의 의미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김수자의 경우, 살아있는 나무와 가공된 나무를 照應(조응)시킴으로서 나타나는 둘사이의 관념적 관계를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집중화 혹은 투명화시킨다든지, 잘려진 나무의 토막들을 투명한 플라스틱 판으로 등분시켜 그들의 관념적 거리감 내지 단절감을 새롭게 연결시켜 본다든가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며 (이점은 잘려진 나무토막들을 약간씩 어긋나게 자르고 나열시키는데서 우선 발견되어진다) 그의 작업은 이와같은 直喩法(직유법)에 꽤 큰 재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라, 보는자로 하여금 금방 작가의 발상적인 위트(Wit)에 휘말려 들게끔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이윤동의 경우는, 塗料(도료)가 천에 묻은 상태와 그 무게에 따라 긴장되고 변화하여 가는 천의 주름들이 하나의 특징적인 표정으로서 나타나며 그들의 표정은 흡사 연륜을 쌓아감에 따라 변하여가는 인간의 주름살처럼 그속에 어떤 內化(내화)된 표정을 남겨 놓는 점이 바로 그러한 솔직한 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 따라서 그들의 작업은 결코 숨김이 없는 그러한 발상과 그만큼의 결과를 보인 것들이라 말할 수 있으며 이들은 그러한만큼 그 나름의 거리낌 없는 표현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만 이윤동의 그것은 작품 전체의 표정을 지나치게 물리적인 因果性(인과성)에 의존시키고 있는 느낌이다. 그 자신이 어떻게 그러한 인상을 지워 갈 수 있을것인가가 하나의 문제로 남겨져 있는듯 하다.

— 『공간』, 서울, 한국, 1979년 10월, No.148,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