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Archive of Couples, 2009, 1 of 30 Iris Prints, 114.1 x 80.5 cm each.

'지수화풍(地水火風)’에서 생명을 보다

류병학 (미술평론가)

2010

  • 류병학
    2010년 새해 벽두, 오랜만에 국내 개인전을 열게 된 것을 축하 합니다. 이번 개인전은 로댕갤러리 개인전 이후 10년 만에 개최되는 국내 개인 전이죠. 당시 전시 제목이 <김수자: 세상을 엮는 바늘>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 다. 일명 <보따리> 작업들과 <보따리 트럭> <바늘 여인> <빨래하는 여인> 등, 우 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생의 작업들을 총망라한 대대적인 전시였죠. 이번엔 <지수화풍(風)>으로 돌아오셨군요. <지수화풍>은 스페인의 화산섬인 카나리아제도와 과테말라의 파카야 화산 풍경을 담았다고 들었습니다.

  • 김수자
    이번 전시에서 <지수화풍>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저는 전시 제목을 한글로 쓰지 않고 라고 영문으로 표기 했었습니다. '풍(風) 즉, 바람(Wind)과 공기(Air)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죠. 자연의 4원소를 동격의 출발점으로 보고자, 자연을 대하는 동양적인 태도로서 순환의 에너지를 포용하는 '풍'(Wind)을 배제하고, 원소 그 자체인 '공기' (Air)로 출발하기로 했어요. 이 프로젝트는 몇 년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인데, 마침 서울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신작 제의가 들어왔고, 또 란자로테비엔날레의 프로그램 일환으로 란자로테현대미술관으로부터 개인전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화산으로 이루어진 카나리아제도의 란자로테 섬을 이 프로젝트의 출 발점으로 삼고, 자연스럽게 에르메스재단과 란자로테비엔날레가 공동제작을 하게 됐죠. 이어서 일련의 사화산 작업을 마치고 과테말라의 활화산을 방문해 살아 있는 화산의 모습을 함께 담게 됐습니다.

  • 류병학
    사실 이 영상 작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따리>나 <바늘 여인> 작업과는 표면적으로 보기에 언뜻 다르다고 느낄 만합니다. 그래서 신작을 설명하기 전 에 이전 작업에서 어떠한 발자취를 거쳐 왔는지 차근차근 밟아 보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 신작을 너무 일반적으로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죠.

  • 김수자
    <보따리> <바늘 여인> 같이 '인간'을 다룬 작업만을 본 사람들은 이번 신작을 보고 '자연'만을 주제로 다룬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2000년도부터 '보따리'라는 제목 아래 일련의 자연을 감싸는 비디오 작업들을 진행했으나 국내에서 선보일 기회가 없었죠. '인간과 자연'이라는 주제는 제 작업에서 처음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바늘과 천의 관계, 말하자면 천이 자연으로 전개가 되고 바늘은 몸으로 전개되었다고 봅니다. 또한 천과 바늘의 관계가 천을 통한 자연에의 성찰, 바늘을 통한 인간의 성찰, 즉, 내 몸을 통한 인류애의 성찰로 전개되었기에 결국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천안(天眼)에 자연의 요소가 이미 있었고, 몸과 손과 마음의 연장으로서의 바늘에 인간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 보따리, 인간과 삶을 싼다

  • 류병학
    동감합니다. 사실 10년 만의 국내 개인전이라고는 하지만, 그 10년이라는 국내에서의 공백 기간은 한편으로 해외에서 바쁜 일정 속에 새로운 작업을 꾸 준히 선보여 온 시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과정을 조명해 봐야 선생의 작업을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말꼬를 트기 위해서 <보따 리> 작업의 시작 동기에 대해서 짚어 보죠. 1990년대 중반쯤 이런 얘기를 하셨 죠 "보따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내 주위에도 항상 있었다.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1992년 P.S. 1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고개를 돌린 순간 거기에 보따리가 보였다. 천 작업을 하려고 보따리를 싸 놓은 것을 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 그 보따리는 전혀 새로운 보따리였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조각이었고 회화였다. 그래서 단순히 묶는 행위를 통해서 2차원을 3차원화할 수 있는 가능성, 즉 회화적 방법을 연출할 수 있었고 또한 볼륨있는 조각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내용을 보자 면, 이미 보따리가 하나의 조각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인데, 그런 측면 에서 선생의 보따리 작업은 일종의 '레디메이드'라고 볼 수 있겠군요.

  • 김수자
    네. 레디메이드(Ready-made)이자, 레디유즈드(Ready-used), 페인팅이 자조각, 그리고 삶의 궤적의 양면성을 드러내면서 통시적 시간성을 가진 오브제로 보죠. 저에게는 하나의 화두이지만, 한국인의 일상 속에 함몰되어 있는 오브제이기 때문에 제 작업이 한국에서 이해되기가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죠. 물론,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세계를 최소한의 행위로 제시하면서 새롭게 인식 하고 문맥화하는 것이 제 작업이기도 하고요. 사실 초기에 P.S. 1에서 발견한 보따리는 보다 더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보따리라고 봅니다. '천'이라는 2차원 의 평면(Tableau)이 단순히 '묶는'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서 3차원의 오브제이자 조각이 되는 변형(Transformation)의 순간에 주목했던 것이죠. 이후에 뉴욕 뉴뮤지엄이나 이세아트파운데이션에서도 <보따리> 설치를 선보였지만, 한 국으로 돌아와 개인전 준비를 할 즈음에는 제 시각에 변화가 생겼어요. 한국 사회를 재인식하게 됐고, 여성이자 여성작가로서, 그리고 합리적인 세계를 경 험한 사람으로서 우리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이미 달라져 있었어요. 즉 그 보따리는 단지 미학적이고 형식적인(Formalistic) 보따리가 아니라, 우리 삶의 리얼리티(Reality)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그때부터는 색색의 천 조각이 아닌 출처를 모르는 헌 옷들을 넣어서 보따리를 만들었고, 보다 더 '인간과 삶을 싼다' 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 류병학
    1990년대 말 선생의 작업을 보면서 그 형식적 측면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분명 레디메이드지만, 뒤샹의 레디메이드와는 다른 점이 있죠. 뒤샹은 '소변기' (일상품)을 '샘' (작품)으로 박제시킨 반면, '보따리' 작품은 일상 품과 작품 사이를 왕복합니다. 선생은 '일상품' 보따리를 작품 보따리로 전이시키고, 일정 전시 기간이 지나면 작품이 해체되어 다시 일상품으로 돌아가 고 그 '일상품 보따리는 다시 다른 형태의 '작품'으로 나타납니다. 1990년대 내내 선생의 전시 내용은 보따리를 싸서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펼치고, 그러면 서 '이동성이 강조되죠. 뒤샹의 레디메이드 후계자들을 예로 들자면, 칼 앙드 레의 벽돌 작업, 댄 플래빈의 형광등 작업 (Monument>, 제프쿤스의 진공청소기 작업 (New Shelton Wet/Dry Double Decker> 등을 보자면, 그것들은 고착되어 있어요. 그러나 선생 작업은 가변적이죠. 흥미롭게 도 보자기로 벽돌이나 형광등 진공청소기를 다 쌀 수 있는데, 그러면 그 형태는 다 다르게 변하죠. <보따리>가 어떤 요술적인 작품으로 읽혀집니다. 그 점이 선생 작업의 또 다른 형식적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수자
    천이 가진 자연의 속성인 가변성 때문에 제 작업이 확대되고 또 극복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 삶과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양면성을 결정하는 경계

  • 류병학
    1994년 이후 작업에서 특히 '이불보를 많이 사용하셨죠.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이불보는 태어남부터 죽음까지 아우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상징적인 내용이 바로 '장소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 김수자
    사실 제가 <보따리> 작업을 할 때 보통 많은 사람들이 보자기로 보따리를 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는 이불보, 그 중에서도 한국의 전통적인 신혼부부 이불보 중 버려진 것들로 보따리를 싼 것입니다. 즉, 기능과 특정 의미가 공존하는 오브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불보란 우리가 태어나서 사랑하고 꿈꾸고 고뇌하다가 죽어가는 장소'라는 점에서 말이죠. 즉 우리 삶의 프레임(Frame)입 니다. 그 프레임에 대해 또 하나 형식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사랑 장수 수복 다산 등 평생 동안의 우리 삶의 기원들이 이불에 자수로 새겨져 있는데, 어쩌면 그 화려한 이불보의 기원과 축제적인 요소들이 우리 삶의 리얼리티와는 모순된다 고도 볼 수 있죠. 그래서 이불보가 펼쳐졌을 때 그것이 하나의 타블로 (Tableau)이자, 부부 성(Sex), 그리고 정착 가정 휴식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2차원적인 평면으로서의 장소성을 갖는다면, 보따리로 묶이는 순간에는 그 정반대의 컨텍스트를 가지게 되죠. 즉, 이동 이별 이주 분리 등 말입니다. 즉 보따리를 싼 이불보(Tableau)는 삶과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양면성을 결정하는 하나의 경계(Boundary)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 류병학
    2002년 휘트니비엔날레에서 센트럴파크에 있는 카페에 설치한 작업 말입니다. 당시 이불보를 테이블보로 사용했잖아요. 현지인들은 그게 이불보라는 것을 알았나요?

  • 김수자
    제가 작업에 대한 설명을 달지 않았더라면 몰랐겠죠. 사실 그 작업은 에딘버러의 프룻마켓 갤러리에서 1995년에 처음 선보인 다음, 1996년 마니페스타1, 1998년 일본, 그리고 휘트니비엔날레에서 네 번째로 선보인 겁니다. 물론 각각의 컨텍스트는 달랐지만요. 당시 '보따리를 펼친다'는 것의 의미는 일련의 보 따리 작업 이후에 그것이 다시 캔버스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불보를 다시 캔버스로 되돌려, 보이지 않는 요소들을 비물질적인 방법(마 음)으로 감싼다는 개념입니다. 보따리를 펼쳐서 하나의 타블로로 만듦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들을 타블로 안에 끌어들이는 거죠. 이를테면 카페에서의 사람들의 만남, 대화, 음식을 나누고 음악을 듣는 이 모든 소통 행위들을 '보이지 않게 감싼다' (Iinvisible Wrapping)는 개념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업에서 나타난 비물질적인 요소들이 일련의 비디오 작업과 2006년 스페인 크리스탈 팔라스에서 선보인 <호흡: 거울 여인>과도 연계된다고 할 수 있어요. 크리스탈 팔라스 작업에서 건물 바닥 전체에 거울을 깔아 펼쳐진 바늘로서의 거울의 허 상과 실상의 바느질을 시도했고, 특수 필름을 건물 유리창 표면 전체에 부착하여 빛이 투과할 때 생기는 무지개 스펙트럼을 외부 공간에서 내부 공간으로 끌어들였어요. 또 삶과 죽음의 매 순간을 의미하는 저의 호흡 퍼포먼스 사운드를 설치하여 모든 요소를 일체화했습니다. 건축의 '허(Void)'의 공간을 건물의 피 부까지 밀어내어 그 건축물 자체의 구조와 거울의 양면성, 호흡의 양면성, 그리고 안과 밖의 양면성을 빛과 소리의 보따리로 제시함으로써 보따리의 비물질성을 극대화한 작업입니다.

  • 류병학
    그렇군요. 저는 선생이 카페 테이블에 이불보를 깐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 어느 도록에 실린 것을 봤거든요. 그때 보고 참 쇼킹했어요.

  • 김수자
    도발적이라고 생각하셨나요?(웃음)

  • 류병학
    왜냐하면 특히 작업에서 신혼부부 이불보를 썼다고 하셨는데, 이불보라는게 특성상 신혼부부의 '잠자리'가 바로 연상되는데, 사람의 자연적 욕구로 보 자면 식욕과 성욕이 있잖아요. 그 두 가지가 여기서 딱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과연 외국에서도 이게 이불보라는 것을 알았을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 했어요.

  • 김수자
    처음에 에딘버러에서 전시했을 때 갤러리의 스텝이 와서 보고는 "You are Brave"라고 하더군요.(웃음) 이 작업은 어떻게 보면 도발적인 행위이지만, 한 편으로는 매우 수동적인 형태로 제시된 것으로 볼 수 있죠. 한국의 이불보 자체 가 자수도 섬세하면서 굉장히 화려하고, 오래되어 아름답게 낡은 것들도 많아 서 눈길을 끌기도 했어요. 물론 제가 주목하는 진정한 작업의 의미는 그 이불보의 문화적 미학적 가치에만 있는 것은 아니죠.

  • "인간과 자연'이라는 주제는 제 작업에서 처음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바늘과 천의 관계, 말하자면 천이 자연으로 전개가 되고 바늘은 몸으 로 전개되었다고 봅니다. 또한 천과 바늘의 관계가 천을 통한 자연에 의 성찰, 바늘을 통한 인간에의 성찰, 즉 내 몸을 통한 인류의 성찰 로 전개되었기에 결국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류병학
    이렇게 2000년 로댕갤러리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보따리> 작업들을 다양한 형태로 작업을 진행해 왔죠. 광주비엔날레에서는 보따리 안의 내용 물들, 헌옷들을 산에 풀어 놓았구요. 인천 용유도에서 설치 작업을 한 후 사진 으로 남긴 것도 있고요.

  • 김수자
    보따리 작업과 이불보를 펼치는 작업은 대개가 재활용된 것이에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작업들이 컬렉션이 안됐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제 작업에 있어 결정성'이라고 할까요, 'Finish'의 개념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 습니다.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보따리를 싸는 행위는 항상 형태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늘 하나의 과정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 공간의 축이자 시간의 축, 바늘 여인

  • 류병학
    아까 나온 레디메이드에 대한 이야기로 다음 질문을 연결하고 싶습니다. 아 까 예로 든 작가들도 그렇듯, 레디메이드 작품이 알고 보면 다 공산품이에요. 공산품이 아닌 레디메이드가 나온 게 2000년도에요. 기욤 바일이라는 작가가 슈퍼마켓을 전시장에 옮겨 놓아 농산품을 처음 사용했고, 이후에 주목 받은 데 미안 허스트의 경우 상어처럼 수산품을 레디메이드로 쓴 거죠. 허스트가 그 다 음엔 해부학 모형을 크게 확대시켜 만들더니, 최근에는 다이아몬드로 해골을 만드는 것을 보고 '인간'을 레디메이드로 삼고 싶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사 실 '인간' 도 레디메이드잖아요. 선생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더군요. "아 티스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것 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게 아티스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가 어떤 물건을 사용했을 때는 그 물건을 사용한 사람의 삶을 사용하기 위해서 다"라고 말이죠. 제가 느낀 점은 이제 선생 자신이 레디메이드로 자리매김되면서 <바늘 여인>과 같은 영상작품이 나오게 된 게 아닌가 하고 연관지어 봤어요. 들뢰즈의 '~되기' 라는 말이 있듯, 선생의 작업이 바늘 여인되기' 빨래하는 여인되기' 그런 식으로 보이더군요. <바늘 여인> 작업은 1999년 일본 도쿄에서 시작한 작업으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요?

  • 김수자
    1999년 CCA 기타큐슈에서 제작 의뢰를 받았을 때, 무언가 퍼포머티브한 작업을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는 제가 뉴욕에 가서 살던 첫 해로, 나 자신이 삶의 벼랑 끝에 위치한 상태였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첨예한 상태 를 유지하던 때였습니다. 그렇기에 제 몸에 대해 더욱 예민하게 인식하고 주목 하면서 '외로움'(Isolation) '자아'(Self) '타자'(Others)와 같은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죠. 원래는 '워킹(walking) 퍼포먼스'를 생각해서 무언가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가 나오길 기다리며 수 시간 동안 도쿄 시내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부야에 도착한 순간 수십 만 명의 인파가 밀려 오고 밀려 나가는 그 길 위에서 저는 더 이상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순간을 경험했어요. 선불교에서 '악!' 소리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야말로 정말 가슴 속에서 '악!' 소 리를 지르며 꼼짝없이 서서 발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그 자리에 부동의 자 세로 서게 되면서 비로소 걷는 행위의 의미, 말하자면 걷는 행위의 시간성을 통해 나 자신의 몸이라는 보따리에 싸여 누적된 모든 인파와 내 몸의 관계성을 이 해하게 된 것이었죠. 그 장소가 바로 첫 <바늘 여인> 작업으로 설정된 것입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퍼포먼스를 시작했고, 카메라맨에게 제 뒷모습을 기록해 달라고 한 후 그 자리에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겠다고 했어요. 그 때 가 저에게는 가장 특별한 퍼포먼스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 마음의 평정과 중심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수많은 인파의 에너 지를 한 몸으로 받고 감싸며 대항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몰입의 상태에 다 다르면서 내가 싸고 엮으며 관계 지으려 했던 의도와는 정 반대의 현상이 벌어 지더군요. 그들로부터 아득히 멀어지면서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거기서 완전한 해방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엔 끝없는 평화의 미소가 절로 스며 나오고, 내 가슴은 인류애의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죠. 그 수많은 인 파의 물결 너머, 인파의 수평선 너머로 후광 처럼 떠오르는 흰 빛을 봤어요. 그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면서 '세상의 모든 인류를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각 대륙의 8개 대도시를 방문하면서 <바늘 여인> 프로젝트를 이어갔습니다.

  • 류병학
    그 8개 도시가 도쿄 상하이 델리 뉴욕 카이로 라고스 런던이었죠. 그 후에도 다른 도시들, 네팔의 파탄, 쿠바의 하바나,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차드의 은자메나, 예멘의 사나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이어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 김수자
    <바늘 여인>의 두 번째 시리즈입니다. 사실 첫 번째 <바늘 여인> 시리즈에서 는 내 몸이 어떤 '공간의 축'으로 위치했다면, 2005년 두 번째 작업은 앞서 8 개의 대도시를 돌아다니고 세계를 경험한 이후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첨예한 갈등과 문제에 봉착해 있는 도시들을 찾아 내 몸을 '시간의 축'으로 제시하며 인류의 보편적 휴머니티를 찾고자 했습니다. 특히 네팔의 파탄은 방문 당시 내전 중이어서 수많은 총성을 들으며 작업을 진행했어요. 이 작업들 은 첫 번째와 달리 리얼타임이 아닌 슬로우 모션으로 제작했어요. 그래서 첫 번째 버전에서 내 몸의 퍼포먼스적인 측면이 부각된다면 두 번째 버전은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성이 더 드러나지요. 시간과 시간의 교차, 몸과 몸의 부딪힘, 정신의 교감의 통로가 더 드러나고 내 몸이 공간보다는 시간의 축으로서 더 작용을 하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내 몸은 부동성(Stillness)이라 는 제로(Zero)의 시간의 영역(Zone)에 있고, 그 제로를 슬로우 모션으로 확장 했을 때 그것은 과연 어떤 시간인지를 탐구하게 된 것이니까요. 연장된 제로의 포인트인 내 몸(Zone of Zero)에서, 화면 속에서 걷는 이들의 시간(Slow Mode), 그리고 이것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간(Real Time), 이렇게 3 자의 서로 다른 시간성이 공존하며 관계 맺어가는 것을 볼 수 있죠.

  • 류병학
    <바늘 여인>의 뒷모습은 흥미롭게도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낀 바다를 건너는 방랑자>(1818)의 뒷모습 풍경화를 연상시키는데요. 그렇게 수많은 인파가 눈 앞에서 밀려오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에서는 과연 무슨 생각이 들 까 너무 궁금해요. 저라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 것 같은데 말이죠. 말씀 중에 앞에 빛이 보였다고 했는데 그것은 완전히 평정심을 얻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 김수자
    <바늘 여인>이나 <빨래하는 여인>을 프리드리히의 작품과 연관시켜서 해석 하는 이론가들이 서구에 꽤 있었죠.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어느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과 제 작업을 나란히 놓겠다고 제 작품을 컬렉션한 적도 있어요. 흥미로운 관점이지만 정신 세계나 작업 의도는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인도 델리의 무나강 옆의 화장터를 방문한 후 강가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던 중 문득 어떤 에너지가 느껴져서 잠깐 차에서 내려 강둑으로 내려간 적이 있어요. 그 강물이 흐르는 장면을 본 순간 '여기다 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퍼포먼스를 한 것이 바로 영상 <빨래하는 여인>이 되었죠. '장소성' 에 있어 계속되는 이야기지만, 저는 그 장소에서 어떤 특별한 에너지를 느껴야 만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에너지를 느끼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지만 말이죠. 그러다가 어떤 에너지가 느껴졌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서슴없 이 작업을 하게 됩니다. <빨래하는 여인> 퍼포먼스를 할 때는 내 몸을 비껴가며 흘러 떠내려가는 야무나 화장터의 부유물들, 삶과 죽음, 생명의 무상함과 그 에 대한 연민, 그리고 내적으로는 나 자신과 주검의 정화 예식을 하던 중 굉장 한 혼란에 빠지기도 했어요. 강을 바라보면서 과연 흐르는 것은 강인가 나인가 하는 혼란 말이죠.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깨닫게 됐습니다. 강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흐르고 있는 것은 사실 가장 부동의 자세로 확고히 서 있는 나 자신 임을 말입니다. 내 몸이야말로 정말 흘러가고 사라질 것이라는 자각 말이죠.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떻게 내가 그렇게까지 혼란을 느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제가 생각한 답은 내가 너무나도 집중했기 때문에 그 집중이 마치 바늘 끝과 같았다는 거죠. 그 집중의 중심에는 경계가 없어요. 바늘은 위치만 있을 뿐 어떤 대상화될 수 있는 물질적 흔적이 없는 거예요. 바 늘 중심으로부터 세계는 끝없이 확장되어 있고 동시에 축소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경계도 기준도 없습니다. 안과 밖이 공존하는 시점에서 제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 류병학
    제가 보통 '집중'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몰입' 이거든요. 그만큼 거기에 빠지는 건가요?

  • 김수자
    빠지기보다는 어떤 '상태'라고 보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가장 중립적인 상태라고 할까요. 사실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집중하지 않은 상태죠. 집중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평정을 향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 “각 원소들은 서로 순환하고 연계되는 관계입니다. 그것을 4가지 원 소로 각기 바라보는 과정에서 각 원소들의 '홀로 설 수 없음, 기대어 있음'을 드러내 보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 각각의 요소가 '하나' 이고 결국 우리 '몸'과 일치한다는 것, 또 자연의 힘과 그 연약함을 늘 느 끼면서 작업했습니다.”

  • 4원소의 순환과 연계성

  • 류병학
    앞서 언급한 네팔의 파탄, 쿠바의 하바나 등 대부분 역사의 장소성을 내포한 곳들이 등장합니다. <등대 여인>의 경우, 찰스턴의 모리스섬 등대를 다양한 색 상의 빛으로 감쌌죠. 알고 보니 찰스턴은 미국 남북전쟁의 발발지인 사우스 캐 롤라이나의 수도입니다. 그 외의 작업도 그 장소성이 보따리나 이불보의 장소 성처럼 묘하게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지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번 신작의 장소성 역시 어떤 의미심장한 내용이 느껴집니다. 왜 스페인의 화산섬인 카나리제도의 란자로테 섬과 과테말라의 화산을 선택한 건지요?

  • 김수자
    물론 제가 란자로테 비엔날레에 초대되어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기도 했지 만, 몇 년간 자연의 4원소에 관한 작업을 꿈꾸고 있었기에 그 특별한 땅을 주저 없이 탐색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하니 화산의 생명줄인 '불'이 완전히 소멸한 장소를 선택한 것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화산이 바로 자연의 '니르바나(Nirvana)였다는 자각 때문이죠.

  • 류병학
    이번 <자수화풍>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선생 작품의 형식과 조금 다르다 는 점에서, 감상하는 데 있어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이전 비디오 작업의 경우는 '인파와 작가' 라는 관계성이 형성되기 때문에 보는 이가 어떤 드라마를 형성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관객 스스로가 드라마를 형성해야 하는 상황이니 조금 난감할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이번 작품을 보면서 거기에 선생의 뒷모습 만 없을 뿐이지 여전히 지난 작업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의 뒷모습이나, 바로 관객으로 바뀐 것이라고 말이죠.

  • 김수자
    사실 제가 등장하지 않고 <바늘 여인>과 똑같은 형식으로 지나가는 인파를 촬 영한 <Sewing into Walking─Istanbul〉(1998)이라는 비디오 작업이 있었어요. 카메라가 제 몸을 대신하고, 카메라 렌즈가 제 눈을 대신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고정된 프레임으로 인파가 오가는 장면을 20, 30분간 담고 하나는 거 리의 소리를, 또 하나는 티벳 승려들의 독경을 담아 두 개의 채널로 제작한 작업 입니다. 이번 작업에서 사람이 부재하는 것은 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 작업에서의 시점이 카메라의 눈이 바라보는 시점이라면 <바늘 여인>에서의 시점은 나 자신이 내 등을 바라보는 시점입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의 나의 시점은 나와 관객의 몸 너머에 존재하는, 단순한 풍경 이상을 바라보는 시점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즉 '제3의 눈'의 응시라고 할 까요. 궁극적으로 관객과 작가의 몸이 한 곳에 위치하게 되는, 즉 <바늘 여인>에 서 관객이 내 몸에 주목하지 않는 순간 나의 몸을 입고 바로 내가 선 자리에 서서 내가 보는 거리와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류병학
    아까 작품을 바라보다가 재미있는 체험을 했는데, 보통 영상 작업을 볼 때 프로젝터의 렌즈 부분을 가리면 관객의 그림자가 화면에 생기잖아요. 작품 쪽으로 가까이 가다보니 제 그림자가 바다의 물결 한가운데에 생기더군요.

  • 김수자
    사실 제가 <바늘 여인>이나 <빨래하는 여인>을 상영하면, 관객들이 자주 그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을 오버랩해 보곤 합니다. 제 뒷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제 모습이 걷히면서 제 등을 바라보는 자리가 아닌, 내 몸에 관객의 몸을 대입해 나의 시점으로 한걸음 다가가게 되죠. 마치 축지법을 쓰듯이 말이죠. 저로서는 <바늘 여인>의 다층적 시점이 시사하는 바가 의미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관객이 기존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점이 <바늘 여인> 이전의 태도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지요.

  • 류병학
    <지수화풍>의 총 7점의 작품 제목이 전부 은유적이에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짓는 제목과는 다르죠. 이를테면 물결이 치는 바다를 촬영한 영상의 제목은 <바다의 파도>가 아닌 <물의 대지>입니다. 그래서 유심히 바라보다 보니, 만일 바다 장면에서 물을 땅으로 본다면 파도의 물결이 마치 땅 위의 산이라는 풍경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의도한 건가요.

  • 김수자
    그렇게 바라봤죠. 물은 불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땅이 불과 물 공기의 요소를 가지고 있듯이, 각 원소들은 서로 순환하고 연계되는 관계입니다. 그것을 4 가지 원소로 각기 보는 과정에서 각 원소들의 '홀로 설 수 없음, 기대어 있음'을 드러내 보고자 했습니다. 그것들의 연계성, 내적인 역동성에 제 나름대로 주목하려는 방식, 이를 테면 물에서 땅의 요소를 주목한다는 의미에서 타이틀 을 <물의 땅>로 명명했죠. 대지를 해질녘에 촬영한 것은 땅을 하나의 물의 속성 으로 바라보고 <땅의 물>), 또 불과 공기의 관계를 치환해서도 바라봤어요. <<불의 공기>>. 이 4가지 요소는 사실 순열 조합하면 16개의 관계성이 나오는데 각기 두 가지의 요소가 엇물려 있으므로 32개의 각기 다른 조합이 가능하다고 봐야겠죠. 말하자면 그 4원소에 대한 사색을 시도하는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결국 그 각각의 요소가 하나' 이고 결국 우리 '몸'과 일치한다는 것, 또 자연의 힘과 그 연약함을 늘 느끼면서 작업을 했죠. 불 속에 있는 인간성, 즉 물속, 땅 속, 그리고 공기 속에 있는 인간 성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결국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일체성을 근간으로 한 질문들을 담고 있어요. 특히 화산 용암이 돌이 되어 떨어지는 모습을 실제로 마주한 채로, 펄펄 끓는 용암이 땅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온 다음 흘러 화석 이 되고 먼지가 되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3000m 고지에서 그 뜨거운 땅을 밟고 열기를 느끼며 작업을 하면서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자체가 너무나도 뜨거운 숨 쉬는 생명체라는 것을 몸소 느꼈죠. 그 열기의 스러짐이 자연이 그리는 극적인 장면(Tableau Vivant)을 연출하는 동시에 작은 화산석 하나에서 먼지 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자연 요소들을 각기 하나 하나의 생명체로 재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류병학
    한 작품은 온통 칠흙처럼 캄캄한 곳을 달리는 자동차에서 손전등을 비추어 빛이 비추는 부분만 보였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곤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 이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곧 그 풍경이 화산을 중심으로 달리는 자동차에서 빚을 비추는 곳을 촬영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것은 바로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용암(욕망의 불덩어리)이 식어서 만들어진 것이었구요. 그 영상에서 '모든 인간은 재로 돌아간다' 는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Art in culture 독자를 위해서 이번 신작을 어떻게 봐주면 좋겠다고 한 말씀 부탁합니다.

  • 김수자
    글쎄요. 어떻게 봐달라고 주문하기보다 저는 '이것을 같이 보고, 질문하고, 나누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끝없는 회화적 여정으로의 질문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 질문인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도 재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 This article was originally published in Korean in Art in Culture magazine, February 2010. English translation was published in Art in Asia magazine, June,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