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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정
2020
“세상에 관계 지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1957년 대한민국 대구 출생. 1990년대부터 평면, 조각, 설치, 퍼포먼스, 영상작업 등을 통해 삶과 시대 그리고 예술의 조건에 첨예한 질문을 던지는 한국의 대표 개념미술가다. 1997년부터 뉴욕 P.S.1과 모마(MoMA) 등 전 세계 미술관의 개인전 및 비엔날레를 섭렵했고, 2013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도 활약했다. 지난 20년 동안 뉴욕, 파리, 서울 등을 돌아다닌 이 노마드 작가는 세상의 모든 지리적, 상징적, 구체적, 추상적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초창기 회화의 표면성을 탐구하던 중 발견한 '바느질'이라는 행위는 시대를 거듭하며 고유한 메타포로 끊임없이 진화 중이며, 기억과 경험, 인간과 자연, 세상과 일상, 예술과 미학 등을 모두 끌어안는 '보따리'의 존재 역시 작가 언어의 핵심이 된다. 색색의 보따리를 가득 쌓은 트럭에 몸을 실은 채 세계를 누비는 보따리 작가, 군중 속에 서서 자신의 몸을 세상과 타인을 꿰는 '바늘'로 은유하는 작업으로 '바늘여인' 등의 별칭을 얻었지만, 결코 이에 머물지 않는 관조적 시선과 명상적 실천으로 현대미술의 영역을 다시 쓰고 있다. 예술을 수렴하는 자기성찰적 태도, 시공간을 초월하는 수행적인 철학, 공고하고도 심오한 미학의 구조를 통해 김수자는 자신의 치열한 몸과 웅숭깊은 삶 그리고 진심의 예술을 관통하는 예술가의 지표를 만든다.
지난 2018년 겨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김수자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포옹으로 인사했다. 그때 김수자가 나를 천으로 귀한 무언가를 싼 보따리처럼 완전히 감싸 안았는데, 그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 두 팔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로 나의 영혼과 몸 그리고 실존 자체를 끌어안는 느낌. 작가가 길 위에서 수십 년간 치열하게 고민해 얻었을 삶의 에너지가 발끝까지 도사리던 한기를 순식간에 거둬 갔다. 타인과 몸을 맞댔을 때 부지불식간에 서로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은 흔치 않지만, 생각해 보면 김수자와의 만남은 늘 그런 순간을 선사했다. 눈빛은 (바늘처럼) 꿰뚫는 동시에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특유의 낮은 목소리는 (이불보처럼) 다정하면서도 단호했다. 일견 비정한 이론으로 무장한 미술 세계에서, 그렇게 김수자는 내게 통찰과 연민의 관계로 각인되어 있었다.
지난 2017년 카셀 도큐멘타의 전시장을 둘러보다 김수자의 '보따리'를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난민, 이주, 전쟁, 테러, 세상의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학구적, 정치적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명하던 전시장, 첨예한 예술의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중간중간 놓여 있던 색색의 보따리 덕분이었다. '보따리'는 현재 난민 문제나 유랑자의 삶을 은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현대사의 심각한 환부를 드러내며 저항과 혁명을 부르짖는 작품 모두를 끌어안는 전시의 쉼표이자 날 선 예술의 진심 어린 마침표나 다름없었다. 인간과 역사를 성찰하는 한 예술가의 웅숭깊은 세계로 모든 게 수렴되는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김수자는 '보따리 미술가'로 불렸다. 1990년대부터 전통 이불보를 묶은 보따리가 각국의 전시장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첨단 대도시 혹은 내전의 아픔을 겪는 도시에서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뒷모습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2009) 시리즈는 'Bottari'라는 단어를 각인시켰으며, 보따리를 쌓아 올린 트럭에 몸을 실어 방방곡곡 다니는 영상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 Cities on the Move: 2727Kilometers Bottari Truck>(1997) 등이 미술계 안팎에서 회자되었다. 파리 시청 건물에 작가의 뒷모습이 투사되는 풍경은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보따리가 그녀에게 각별한 이유는 '백남준의 명성을 잇는 한국작가'라는 평가를 선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보따리는 그녀에게 조각이자 회화이며, 삶의 궤적과 통시적 시간성을 간직한 오브제이자 핵심적인 조형언어다. 그리고 이는 바느질, 바늘, 이불보 같은 개념이자 행위의 중요성과 만난다.
"맨 처음 바느질 작업은 회화(캔버스)의 표면 구조에 대한 물음과 세계의 수직, 수평 구조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되었어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나의 관심사는 회화의 형식적 측면에 놓여 있었죠. 바늘은 붓을 대신하고 손과 몸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도구였어요. 이후 캔버스 대신 이불보와 헌 옷을 꿰매 평면성을 확장했습니다." 인간과 자연, 세상과 세계를 바느질의 개념으로 엮어 내게 된 연유에 대한 질문에 그녀가 말한다. 어머니와 이불보를 꿰매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이 가진 에너지가 바늘을 통해 우주와 연결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천-바늘의 관계를 우주 내 몸의 관계와 연결 짓는 개념은 곧 <바늘여인> 시리즈로, 땅을 걸어 대지라는 이불에 스민 역사와 기억을 관통하는 <소잉 인투 워킹 Sewing into Walking>(1994/1997) 등으로,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실체를 보이지 않게 감싸는 비디오 작업으로 진화했다.
지난 2010년 서울 아틀리에 에르메스의 개인전 《지, 수, 화, 풍 Earth, Water, Fire, Air》에서도 김수자를 만났다. "전통 이불보는 우리가 사랑하고 꿈꾸고 고뇌하고 죽어 가는 장소, 삶의 근원이자 프레임이 되는 장소예요. 사랑, 행복, 부(富), 장수, 다산, 기쁨 같은 상징과 사회적 맥락도 있죠. 나는 경험, 기억, 미학이 담긴 천을 풀고 싸는 행위를 해 왔어요. 그 천이 자연으로 전개되고, 도구인 바늘이 인간의 몸으로 전개된 겁니다.” 다시 10여 년 후 그녀는 바느질의 맥락을 다시 이렇게 정리해 주었다. "결국 바느질은 관계 짓기예요. 몸과 손, 천에 이르는 관계, 걸음과 땅의 관계, 날숨과 들숨의 관계, 내 눈과 그를 보는 거울 속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해요. 세상에 관계 지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특히 인터넷 시대에는 모든 일상이 '바느질하기'이기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바느질의 망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죠."
종종 김수자는 꽤 명확한 단어로 정의되곤 한다. 일찌감치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이유로 “노마드 예술가로, 바느질, 이불보 등이 여성의 정체성과 밀접하다는 명분으로 “페미니스트 예술가"로 불린다. 그러나 그녀가 만약 노마드 예술가라면, 그건 한자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예술가"라는 수식어도 상식적인 의미 이상에서 쓰여야 한다. 김수자는 1990년대 초 바느질, 빨래, 청소, 요리, 다리미질, 다듬질, 장보기 등 현대미술이 도외시한 일상적 가사 노동 행위를 미술 언어로 개념화하고, 현대미술사에 미적·문화적·사회적·심리적인 면에서 예술 행위로 재정립했다. "바느질의 시초가 여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평면회화 구조의 본질적 물음에서 기인했고, 그것이 삶의 문제까지 연계 및 확대되었다는 얘기"라고 김수자는 강조했다.
김수자의 작업이 삶과 예술의 경계에 놓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일상 속 평범한 행위들도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적극 도입되었다. 보기, 걷기, 숨쉬기, 미러링 등 한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행위들. 지난 1995년 에든버러 플루마켓 갤러리 카페 테이블에 이불보를 깐 프로젝트는 사람들의 만남, 대화, 관계, 행위 등을 '보이지 않게 감싼다'는 개념이었다. 이런 비물질적 요소들은 스페인 크리스탈 팔라스에서 선보인 <호흡: 거울여인To Breathe: A Mirror Woman> (2006) 같은 작업과도 자연스레 연계된다. 바닥 전체에 거울을 깔아 관람객의 몸이 거울 속의 반대편 세상을 관통하게 했고, 유리창에 특수필름을 붙여 빛의 투과로 생기는 무지개 스펙트럼을 적극 끌어들였으며, 삶과 죽음의 매순간을 의미하는 호흡 퍼포먼스 사운드를 설치했다. "회화의 핵심 요소인 '색'에 대한 근원적 관심이 오방색의 탐구로, 십자가와 음양의 축으로 발전했고, 특수필름에 각인된 수많은 수직수평의 형태인 빛의 프리즘으로 고찰했으며, 이것이 태양의 빛을 싸고 펼친다는 보따리 개념의 확장으로 자연스럽게 이행된 것이다.
지난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였던 김수자는 이 공간 역시 전체를 특수필름을 이용해 보따리처럼 감쌌다. 이렇다할 오브제 없이 그 자체가 작품인 공간 바닥에 관람객들은 그저 앉아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빛과 어둠, 소리가 전부였고, 그러므로 이 곳은 단연 베니스의 심장이었다. 이 작품은 서로 강력한 자아를 분 출하는 비엔날레에서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예술이 무엇 인지를 보여 주었다. '빛과 소리의 보따리'는 다름 아닌 본연의 감정에 집중하도록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란 일상의 예술적 속성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던 그녀의 이야기가 귓전에 맴돌았다.
지난 2017년 베를린 케베니히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숨의 기하학 Geometry of Breath》의 그 고아한 공간, 완전한 진공 상태에서 나는 본질적인 친밀감을 맛보았다. 그간의 작품이 카메라(관객)로 하여금 작가 뒷모습과 어깨 너머 군중을 응시하게 만드는 '바늘여인' 같은 방식이었다면, 이 전시는 반대로 사적 시간의 흔적을 통해 자 신과 타인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주크박스에서는 작가의 숨소리가 흘러나왔고 숨쉬기: 만다라 To Breathe: Mandala>), 20년 입은 검은색 옷이 빨랫줄에 걸리거나(<빨래하는 여인 A Laundry Woman>) 검은 보따리로 놓여 있었으며(〈보따리 Bottari>), 1990년대부터 모아온 머리카락 (시간의 토폴로지 Topology of Time>)과 신체 흔적이 남은 낡은 요가 매트(<몸의 기하학Geometry of Body>)가 회화처럼 걸려 있 었고, 날숨과 들숨을 디지털 드로잉에서 추출한 디지털 바느질 (<숨 One Breath>)이 펼쳐졌다. 작가의 삶이 각인된 작품들은 구체성과 추상성을 공히 획득하며 자연스럽게 나의 시간과도 포개어졌다.
내게 김수자의 작업은 "경계와 이면에 사는 이들에 대한 생각”을 통해 “나와 타자의 관계를 고민하는 예술가의 선물이나 다름없다. 2019년 10월 중순 비가 오던 날, 파리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푸아티에를 찾아갔다. 중세 아키텐 공국의 중심지이자 유럽의 개념을 정립한 아랍권과의 푸아티에 전쟁으로 유명한 도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곳은 현대화의 방식을 예술에서 찾았는데, 그 첫 프로젝트가 《트라베르세/김수자Traversées/Kimsooja》다. 미술 축제의 주인공이 된 김수자는 직접 초청한 동료 예술가들의 작업을 자기 작품과 함께 곳곳에 배치했고, 유서 깊은 도시는 감각적인 경험의 장으로 변모했다. '트라베르세'란 가로지르기, 경계 넘기, 여정이란 뜻이다. 이 도시가 국경과 관습,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나들며 예술 언어와 생의 경계를 사유해 온 노마드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했다면, 작가는 도시 전체를 끌어안음으로써 이에 화답한 셈이다. 나는 푸아티에의 골목을 걸으며 완벽한 타인인 내 몸이 바늘이 되어 이 땅의 과거와 현재, 역사와 미래를 기워 내는 환대의 순간을 만끽했다.
그녀 자신의 몸과 정신, 인생을 온전히 관통하는 김수자의 작업 세계는 그래서 몇 페이지의 글로 정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도저하다. 천에 구멍을 내는 바느질처럼 삶에 필연적인 균열을 내고 순간을 성찰하며 직조한 작업은 숨 쉬듯 제 영역을 확장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삶은 미술 개념과 형식뿐 아니라 삶과 인간에 대한 탐구로 점철되어 있다. 시대를 앞서간 김수자는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이라는 제목의 시대를 일구었고, 역설적으로 시대의 구획이 필요 없는 예술가가 되었다. 김수자는 날을 거듭할수록 투명해진다. 천을 꿰맨 후에는 사라져 버리는 바늘처럼, 세상 모두를 비추지만 정작 자신은 비추지 못하는 거울처럼 소실점이 되는 것이 그녀의 진화법이다. 김수자는 그렇게 내게 삶과 미술이 결코 분리된 대상이 아님을 매순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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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정
작가님이 나를 안아준 순간 단순한 인사나 위로를 넘어서는,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가로서 예술과 예술가를 어떻게 정의하는지가 그 행동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했어요.
김수자
동시대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연민을 갖고 있고, 이는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에 작업으로 스며 나오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연민의 궁극적인 출발점은 나 자신인 동시에 보는 이 자신일지도 몰라요. 사실 작업에서는 하나의 물질, 이미지, 사실, 상황, 상태만 보일 뿐 작품을 만드는 나의 심리 상태나 나 자신과의 관계는 보이지 않죠. 하지만 관객이 이를 헤아리는 순간 전이를 경험하게 되고, 그들의 주관적 관점을 통해 내 작업이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때 경험이라는 건 관계 즉 '바느질'이 형성될 때만 이뤄지고, 이 관계 속에서는 감성적, 이성적 작용이 동시에 드러나죠. 불안정하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조건이나 삶의 일회적이고도 불가역적 운명을 공감할 때, 연민과 애정 같은 따뜻한 마음의 전이는 이를 공유하는 개인 사이의 끈처럼 작용해요. 하지만 내 작업에는 생각하고 분석하게 하는 미술 내면의 형식적 구조가 공존하기에, 감성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태도 그리고 형식적 전개가 함께한다고 봅니다.
윤혜정
2017년 케베니히 갤러리에서 만난 개인전 《숨의 기하학》이 인상적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나무 계단에 놓여 있던 하얀 보따리가 내내 기억에 남았어요.
김수자
전시 일주일 전에 고(故) 케베니히 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어요. 나를 비롯한 모두가 충격을 받았죠. 준비 단계에서 몸, 흔적, 숨,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성을 묻는 작업을 갤러리에 설치 하기로 정하고 전시 제목도 그와 여러 번 상의했는데, 결국 케베니히 씨의 존재를 추모하는 전시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얀 보따리는 그를 추모하는 상징적인 작업이었어요. 평소 사용한 이불보, 즐겨 입은 셔츠, 스웨터, 재킷, 신발, 손수건, 향수, 안경 등 케베니히 씨의 시선과 시간이 묻어나는 오브제들을 보따리로 싸맸습니다.
윤혜정
1990년대부터 뉴욕, 파리, 베를린 등에서 작업했고, 그래서 '노마드 작가'로 불립니다. 타지에 발을 붙이고 땅에 꿰매듯) 산다는 건 곳곳에서 바느질의 개념을 작업으로 선보이는 입장에서 더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여요. 이런 삶을 결정한 데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까?
김수자
마흔을 갓 넘긴 해에 뉴욕으로 문화적 망명을 결정했어요. 당시 각종 비엔날레를 통해 국제 무대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반면 한국작가의 해외 활동은 거의 없었을 때였죠. 그러나 국내에서는 내 작업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았고, 작품 판매도 전무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나 자신을 세상에 내던지고 한계로 내모는 일종의 드라마틱한 상황이 막연한 스트레스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어요. <바늘여인>,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2000~2001), <집 없는 여인A Homeless Woman>(2000~2001), <빨래하는 여인 A Laundry Woman>(2000) 등 결정적인 퍼포먼스 작업들이 그 시기에 탄생했어요.
윤혜정
특히 파리에 대해서는 "근원적 이끌림"이라는 표현을 쓰셨죠. 현대인들은 보통 고향에 집착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타지에 이끌린다는 점이 낯설지만 흥미롭게 들렸습니다.
김수자
뉴욕이 내가 죽고 싶은 마지막 도시라고 늘 느끼는바 아마 조만간 내 인생의 또 다른 중요한 이동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에요. 어쩌다 프랑스는 내게 가장 지속적인 지원을 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작가 이전에 인간으로서 내가 떠도는 여러 도시 중 특히 파리에 실존적 밀착감을 느낍니다. 적지 않은 심적·물리적 타격을 받은 곳이기도 하지만, 1984년 에콜드보자르에서 프랑스 국비 장학금으로 6개월간 연수한 후 40년이 다 된 지금도 이 거역할 수 없는 느낌이 나를 끊임없이 이곳으로 유도합니다. 프랑스가 많은 사유자를 낳은 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도시와의 밀착감은 어느 도시보다도 나를 나로서 존재하고 사유하게끔 만들어요.
윤혜정
다른 도시, 다른 공간에서 일정 기간 머물면서 작업하는 레지던시 활동도 활발히 합니다. 부러 이방인을 자처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시간을 통해 어떤 영향을 받습니까?
김수자
레지던시는 나 자신을 일상적 공간에서 유배하는 시공간이자 사물이나 문화와 행동 양식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도록 중립 상태에 놓아 두는 겁니다. 그 시공간을 통해 새로운 발상이나 시도를 가능케 하는 망원경이라고도 할 수 있죠. <바늘여인>, <보따리 트럭-이민자들>, <바늘여인-우주는 기억이었고, 지구는 기념품이다A Needle Woman-Galaxy was a Memory, Earth is a Souvenir> (2014) 그리고 최근 세라믹 작업도 모두 레지던시를 통해 제작되었는데, 모두 내 작업의 중요한 매듭으로 새장을 연 모멘텀들이었어요. 중요한 건 이 기간 동안만큼은 내게 전적인 자유와 지원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이방인의 눈으로 거리를 두고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새로운 인식이나 창작이 가능하겠어요.
윤혜정
스스로의 몸을 스튜디오이자 프로젝트 저장소로, 질문이자 답으로, 도구이자 개념으로 삼는 작가이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어떤 계기로 이렇게 몸의 실존성에 주목하게 되었나요?
김수자
어린 시절부터 내 몸에 도전해 왔지만, 무엇보다 스물세 살 즈음에 꾼 꿈이 내 삶과 작업에 상당한 여진을 가져왔어요. 몸의 유한성과 삶의 순환성을 깨달은 시각적, 신체적, 음향적인 경험이었지요. 꿈속에서의 깨달음이 너무 강렬해 '모든 것이 하나다'라고 인식할 수 있었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놋쇠로 내 머리를 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몸과 정신의 실존성과 일체성을 경험했어요. 꿈에서의 경험이 어머니와 바느질을 하며 느낀 경이로움 못지않게 뚜렷이 각인되었죠.
윤혜정
언젠가 안나 마리아 마욜리노(Anna Maria Maiolino)의 회고전에서 할머니, 엄마(작가), 딸이 하나의 실을 문 채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을 본 적 있어요. 온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주한 작가이니 이동의 끈이기도, 삶의 연속성에 대한 화두이기도 할 겁니다. 몸을 매개로 이어지는 가족, 과거와 현재의 연결점이라는 점에서 작가님의 시간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녀들과는 무엇을 공유했습니까?
김수자
어린 시절 할머니와 살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은밀한 사색의 시간을 가지며 시각적, 촉각적으로 친밀한 물질, 이미지 또는 정서가 생긴 것 같아요. 내게 모시, 삼베, 홑이불 같은 천이 나 마당에 핀 무궁화, 담장을 뒤덮은 찔레꽃은 할머니의 현전이었고, 깊은 초록색과 붉은색이 대비된 낡고 부드러운 비단 누비이불의 질감과 촉감은 어머니의 그것이었어요. 할머니와 어머니가 이불 호청을 빨아 다듬을 때, 나는 방망이로 리드미컬하게 두들겨 촉촉하게 길이 든 하얀 면 이불 호청을 주시하곤 했죠. 좁고 긴 다듬잇돌 위에 아주 세련되고 적절하게 얹힌 하얀 이불 호청의 비례와 두께, 부드럽게 돌아가며 접힌 가장 자리, 물먹은 천의 촉감, 천의 접힘과 펼쳐짐의 향연, 그것의 기하학적 변환... 커다란 호청을 접어 가며 마음을 맞추던 퍼포 머티브한 행위들에도 매료되었어요. 우리 가족은 수없이 이사 를 다녔고, 그래서 내게 문화란 가설극장과 곡예사들, 여름밤 들판에서 보던 흑백영화, 멀고도 먼 논길의 순례, 얼음조각 배 의 조형성, 무겁게 깊고 푸르렀던 산정호수의 얼음판, 철원 신 수리의 초가집에서 벽지 위에 가득 돋아난 성에를 손톱으로 긁 던 아침의 시간, 슬라이드 쇼처럼 스쳐 지나던 산천초목과 들판 등으로 각인되어 있어요. 또 선의, 인내심, 믿음, 누구도 차별하는 법 없던 어머니의 성품에 늘 감동받곤 했죠. 그래서인지 내가 세상에서 겪은 상반된 경험들은 종종 상처가 되었고 불의, 차별, 거짓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윤혜정
건축가인 아들 정재호 씨와 함께 일하기도 합니다. 사석에서 아들이 잘 커 주어 고맙다고 했는데요. 당시 어린 아들에게 예술에 몰두하는 엄마로서의 존재와 작업을 어떻게 납득시켰나요.
김수자
납득시킬 이유는 없었고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사실이었겠지만, 잘 적응하고 인내해 주어 고마울 따름이에요. 단지 아들이 대학에 진학할 당시, 예술가는 절대 되지 않겠다 선언 하는 걸 보고 그가 얼마나 힘들게 나를 보아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죠.
윤혜정
예술가의 특별한 통찰력은 삶의 자기 성찰적 태도에서 온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작가님의 예술 여정은 어떤 통찰력을 동력으로 삼고 있을까요?
김수자
글쎄요. 돌이켜 보면 항상 모르는 채 도전한 작업, 알 수 없는 즉각적인 요구나 선(禪, zen)적인 한순간의 발현, 직감 또는 직 관적인 반응들이 작업 전개의 중요한 순간이 되어 왔다는 걸 부정할 수 없어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예술의지가 생겨나고 행동하는데, 논리와 개념은 작업 이후에나 발견하게 되죠. 클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가 “욕망이 주도한다"고 말한 적 있는데, 전적으로 동의해요. 단 그 욕망이 세속적인 욕망은 아닐 수도 있겠죠.
윤혜정
지난 인터뷰에서 “보따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했습니다. 보따리를 통한 이야기를 완결 짓고, 다른 걸 시도하겠다는 의지로 들렸어요. 어떤 작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김수자
더 이상 예술 할 필요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자족할 때까지만 일하자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어느 순간 '과연 더 해야 할까', '공식적인 예술 행위를 해야만 할까' 싶을 때가 있죠.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킬 때 그 작업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예요. 헌데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락된 작업에서 또 새로운 질문이 파생할 때도 있고, 언급할 필요성을 느낄 땐 같은 형태의 작업 이라도 계속합니다. 보따리가 좋은 예일 수 있는데, 한때의 보 따리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지금의 보따리를 싸맬 수 있다고 봐요. 예전의 보따리와 지금의 보따리가 다르기 때문이죠.
윤혜정
동의합니다. 이를테면 2010년 이후에는 작가님이 초창기에 만든 ‘○○ 여인' 제목의 작업이 없지 않습니까?
김수자
지난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두 번째 '바늘여인'을 (리얼 타임으로 선보인 첫 번째 시리즈와는 달리) 슬로 모드로 선보였을 때, 이 시대의 시공간성과 나의 몸의 관계를 논할 만큼 논했다 는 생각이 들었어요. '00 여인'이라는 제목도, 내 몸도 관객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풍경과 바람의 흔적으로 보인 비디오 드로잉 작업 <바람의 여인A Wind Woman>(2003), 크리스탈 팔라스에서 건물 전체를 특수 필름과 거울로 감싼 설치 작업 <거울 여인>, 코넬대학교의 나노과학자와 건축가 아들과 협업한 의인화된 조각 설치작 <바늘 여인-우주는 기억이었고, 지구는 기념품이다> 등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이 작업들을 통해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 즉 우주를 실로 꿰어 내듯 한 번에 꿰뚫는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윤혜정
천에서 시작한 바느질은 빛, 소리, 숨쉬기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활용한 바느질로 진화했습니다. 특히 숨(호흡)은 실존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죽음과 삶의 문턱을 의미할텐데, 사실 작가님의 모든 작품이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문턱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김수자
1979년 이윤동 작가와 지금은 사라진 사간동의 그로리치 화랑에서 《숨》이라는 제목의 2인전을 연 적 있어요. 그리고 2006년에 내 작업에 바느질 개념으로 평면을 재해석하면서 호흡을 개념화한 비디오, 사운드 퍼포먼스 작업 <호흡 - 보이지 않는 거울, 보이지 않는 바늘 To Breathe-Invisible Mirror, Invisible Needle>을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선보였죠. 작업에 사용한 나의 숨소리와 허밍 사운드 퍼포먼스인 <직조 공장The Weaving Factory>(2004)은 폴란드 우지(Lodz)에 있는 빈 직조공장에서 영감받아 우지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업인데, 내 몸을 호흡으로 가동되는 직조공장으로 상정한 '숨쉬기 사운드 퍼포먼스'였어요. 이때 숨이라는 반복적 리듬은 인식의 연장이었고, 날숨과 들숨, 삶과 죽음, 그 전환의 경계를 넘나드는 보이지 않는 바느질 드로잉 작업이었어요.
윤혜정
한편 <뭄바이: 빨래터 Mumbai: A Laundry Field>(2007~2008) 같은 작품에서는 시각적인 풍성함과 슬럼가의 고단한 현실이 병치됩니다. 미학적인 탐구에만 천착한 것도, 위로를 작정한 것도 아니지만 역시나 자연스레 공존하죠. 작가님의 작업이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감, 공정함과 박애 같은 기본을 전제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폭력적인 시대란 곧 인간의 조건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일 텐데, 슬픔과 희망을 관조적으로 사유하는 작가로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김수자
지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오바마 정권이 GSA(General Services Administration)의 예술과 건축 프로그램의 커미션 작업 활성화의 일환으로 멕시코 국경 지역에 영구 설치작품을 의뢰한 적 있습니다. 그때 국경을 넘다 추방당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보호시설에 가게 됐죠. 멕시코 여성들의 탈출은 그야말로 사투였고, 국경 지대에서 죽어간 이들을 무수한 붉은 점으로 표시한 통계 자료를 보는 순간 목이 콱 메일 정도로 처참했어요. '바늘여인' 퍼포먼스로 세계 여덟 개 도시를 돌아다닐 때도 부의 불평등을 비롯해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갈등으로 파괴, 분열되는 세계의 모습을 목격했어요. 예술가로서 무력감을 느낄 정도로 착잡한 심정입니다. 다만 함께 보고 나눔으로써 바로 여기, 지금을 지각하고자 하며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면서 더 나은 사회를 꿈꾸고 싶어요.
윤혜정
이런 바람을 가진 미술가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요? '살아남음'과 동의어일까요?
김수자
결국 무엇을 성공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겠죠. 예술가가 창조하고 표현할 방법이나 장이 없다면 무척 숨 막힐 겁니다. 지속성이 작가의 생명력과 관련 있다 보는데, 창조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여력과 조력이 없다면 평가 이전에 어쨌든 작품을 지속할 수도 없습니다. 거의 40년을 활동해 온 나조차 어떻게 또 한 해를 생존하며 새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합니다. 저는 미술시장에 최적화된 작가가 아니니까요.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현재에서 끝나지 않는 지속성을 보인다면 일단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죠.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의 의미가 각인되고 회자되는 작가, 작품의 존재가 영영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역시 성공입니다. 문제는 누가 역사 속에서 살아남는가인데, 역사는 지속해서 다시 쓰여지기에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가치 설정입니다.
윤혜정
이 모든 질문의 원형으로 돌아가 보죠. 그럼에도 왜 예술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김수자
인생처럼 예술에도 정답이 없어요. 그렇지만 나름의 입장에서 최선의 경지라 여기는 삶과 작품의 방식이 있지요. 흥미로운 질문에 관심을 두며, 예술이건 삶이건 열심히 성찰하고 답하고자 노력해 왔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고요. 이렇게 생각 의 끈을 흔드는 인터뷰에도 삶을 살듯, 예술을 하듯 답을 써 보려 합니다. 이렇게 길을 찾는 해방의 순간이 없다면 어떻게 살 아갈 수 있으며, 예술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내가 추구하는 건 명성이 아니라 진실되고 정직한 가치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속 이는 거짓된 예술계의 행태는 개인과 사회를 기만하는 행위이며, 나는 이를 예의주시할 겁니다. 예술하는 행위 자체로 영혼의, 사회의 등대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요.
윤혜정
작품 제목에서 낫싱(nothing), 제로(zero), 나우웨어(nowhere) 등의 단어가 보이는데, 그런 수행적인 뉘앙스도 위의 답변과 연결 지을 수 있겠군요. 없다는 게 아니라 모든 것, 동시에 덧없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요.
김수자
그렇죠. 낫싱(nothing), 제로(zero), 나우웨어 (nowhere)는 에브 리싱(everything), 토탈리티(totality), 에브리웨어(everywhere) 라 해석해도 좋을 거예요. 난 모든 것을 함유하는 언어에 한계를 느낍니다. 그 언어를 오히려 희석하고 무화(無化)했을 때 의미가 더 암시적으로 전달된다고 봐요. 소거해도 더 이상 소거 할 수 없는, 추가해도 더 이상 더 추가할 수 없는 형상성을 지닌 숫자, 양 혹은 공기 같은 시공간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윤혜정
그것이 작가님이 종종 이야기해 온 “삶과 예술의 통합(the totality of life and art)"일까요.
김수자
뿌리 깊은 보편의 입장에서 가능한 한 다각도로 삶과 예술을 깊이 명상하고 통합하려고 시도해 왔어요.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더 맞겠네요. 보따리, 바느질, 실의 궤적이나 연역적 오브제 등 모든 작업이 통합의 길목에 있어요. 갈 때까지 가다 보면 결국 하나가 되지 않을까요.
윤혜정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길 바랍니까?
김수자
시간을 초월하는 통시적 질문자(questioner)로 남고 싶습니다.
윤혜정
만약 3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김수자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담임선생님이 훗날 희망하는 두 가지 직업을 쓰라고 하셨어요. "말하는 자와 화가라고 적었죠. 저에게 말하는 자란 곧 지혜를 설파하는 철학자였어요. 2002년에 한 어느 인터뷰에서 "만일 당신이 다시 그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 답하겠냐"라는 질문에 “a lover or a monk(사랑하는 사람 혹은 수도승)”라 답했어요.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다시 3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아무래도 '철학'이라 답해야 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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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종종 푸아티에에서의 시간을 떠올리곤 한다. 나는 옛 아키 공국 궁전에 놓인 거대한 테이블에 앉아 찰흙을 빚었다. 각국의 관객들이 빚어 만든 구가 모여 우주가 되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 다. 사실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빚 는 행위는 구복을 상징하기도,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지만 무엇보 무한히 생득적인 느낌이기 때문이다. 구를 만들려면 찰흙덩이를 손바닥 위에 놓고 일정한 압력과 방향으로 계속 어루만져야 한다. 이렇게 나의 손과 타인의 손에서 파생하는 수많은 선, 지름과 반지 름이 일종의 드로잉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과연 그녀의 말처럼 그 곳에 앉아 구를 빚었을 때, 나는 누군가와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 다. 보따리를 싸고 펼치고 스스로 바늘이 되어 인파 사이를 걷는 등 의 몸과 예술을 잇는 보이지 않는) 기하학의 선들이 세상을 돌아 평 한사람들 그리고 나의 손끝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미술가를 인 터뷰하고 미술 기사를 쓸 때마다 대면하는 막연한 갈등, 과연 현대 미술이 인간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의 혼란한 질문에 대 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불세출의 철학자 푸코의 고향에서 그의 개념인 '현실화된 유토피아'를, 김수자를 통해 체험한 셈이다.
─ 윤혜정,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을유문화사, pp. 4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