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윤우학 │ 김수자·이윤동의 「호흡展」
윤우학 (미술비평가)
1979
우리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서는 기성 작가들의 그것과는 달리 어떤 솔직함과 담백함을 엿볼 수 있는 작업들이 많다. 물론 그러한 작업들은 작업의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 일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그들은 쓸데없이 완결된 채 작업적인 분위기만 조성하는 겉늙은 작업들에 비교하여 훨씬 가치있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바로, 김수자와 이윤동의 작업이 그와 같은 솔직성과 담백성을 지닌 것이라 말할 수 있고 그들의 작업은 무엇보다 이러한 점에서부터 관심을 끄는 것이라 믿어진다.
사실, 그들의 작업은 결코 어떤 복잡한 구조 관계 내지 필요 이상의 의미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김수자의 경우, 살아있는 나무와 가공된 나무를 照應(조응)시킴으로서 나타나는 둘사이의 관념적 관계를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집중화 혹은 투명화시킨다든지, 잘려진 나무의 토막들을 투명한 플라스틱 판으로 등분시켜 그들의 관념적 거리감 내지 단절감을 새롭게 연결시켜 본다든가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며 (이점은 잘려진 나무토막들을 약간씩 어긋나게 자르고 나열시키는데서 우선 발견되어진다) 그의 작업은 이와같은 直喩法(직유법)에 꽤 큰 재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라, 보는자로 하여금 금방 작가의 발상적인 위트(Wit)에 휘말려 들게끔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이윤동의 경우는, 塗料(도료)가 천에 묻은 상태와 그 무게에 따라 긴장되고 변화하여 가는 천의 주름들이 하나의 특징적인 표정으로서 나타나며 그들의 표정은 흡사 연륜을 쌓아감에 따라 변하여가는 인간의 주름살처럼 그속에 어떤 內化(내화)된 표정을 남겨 놓는 점이 바로 그러한 솔직한 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들의 작업은 결코 숨김이 없는 그러한 발상과 그만큼의 결과를 보인 것들이라 말할 수 있으며 이들은 그러한만큼 그 나름의 거리낌 없는 표현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만 이윤동의 그것은 작품 전체의 표정을 지나치게 물리적인 因果性(인과성)에 의존시키고 있는 느낌이다. 그 자신이 어떻게 그러한 인상을 지워 갈 수 있을것인가가 하나의 문제로 남겨져 있는듯 하다.
─ 『SPACE』, 1979, 10. No.148, pp.9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