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김복기 │ '바늘 여인’, 세계를 직조하다

2020

윤혜정 │ 김수자 ─ 삶과 존재를 끝없이 질문하는 개념미술가

보따리 트럭–이주(Bottari Truck–Migrateurs) 2007_생 루이 성당 설치 전경 Courtesy of Courtesy of Musée d’Art Contemporain du Val-de-Marne, Kewenig Gallery Berlin, Photo by Jan Liegeois

A Needle Woman Weaves the World

'바늘 여인’, 세계를 직조하다

김복기

2020

  • 글로벌 아티스트 김수자(金守子). 그가 매머드 전시를 열고 있다. 프랑스의 중세도시 푸아티에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날레 형식의 제1회〈트라베르세/김수자 (Traversées/Kimsooja)〉(2019. 10. 12~ 2020. 1. 19). 전시제목인 ‘트라베르세’는 ‘통과(crossing)’ 또는 ‘가로지르기 (traverse)’라는 뜻이다. 전쟁 이주 망명 등 오늘의 ‘글로벌 위기’를 반영하는 주제다. 여기에, 유목(nomad)의 표상인 ‘보따리 작가’ 김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는 사운드를 아우르는 장소특정적 설치와 퍼포먼스 오브제 비디오 필름 라이트설치 등 총 15점의 대형 작품을 발표했다. 또 주제에 부합하는 글로벌 작가를 초대하는 큐레이터 역할까지 맡았다. 실로 김수자 예술의 빛나는 무대가 아닐 수 없다. 김수자와 초대작가 14명은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13개의 역사적인 기념 건축에 작품을 선보였다. 이 전시에 주목해 작가와 인터뷰를 가졌다. 내용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트라베르세/김수자〉의 전시 개념과 공간 매핑, ‘글로벌 위기’에 대응하는 개별 작품을 소개했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참여작가 간의 조형적 연계성을 리뷰했다. 또 하나는, 김수자의 ‘관객-주체’ 퍼포먼스, 무지갯빛 스펙트럼, 실재와 가상이 혼재하는 거울 설치 등 근자의 작품에 주목해 그 조형론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바느질과 보따리 같은 모국주의 개인사에서 출발해 인간의 존재론 같은 보편적 예술 성취로 이어지는 작품 여정을 조망한다.

  • 김복기
    작년 연말에 뉴욕 스튜디오를 철수했다. 한국으로 캠프를 이동하는 중이다. 작가로서 큰 전기를 맞고 있다. 작가 이전에 자연인으로 본다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나 할까, 고향으로의 회귀의식이 발동한 것인가. 그 소회를 듣고 싶다.

  • 김수자
    수구초심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건 아니고, 그저 한 자연인으로서 나를 필요로 하는 가족의 일원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 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돌아왔다’기보다는 ‘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국에 있다 해도 과연 얼마나 한국에서 산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선 거의 섬에 살듯이 지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기간 뉴욕에서 화상이나 컬렉터, 미술관의 아무런 지원 없이 주로 유럽의 지원에 의존해 작업해 왔다. 2000년대 이후 점점 상업성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뉴욕이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떠날 계획을 이미 갖고 있었다.(사실 인텔렉추얼한 측면에서 뉴욕을 아끼는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뉴욕은 역시 내가 그 속에서 죽고 싶은 마지막 도시이다.) 1년 전만 해도 파리를 유럽의 베이스로 삼아 그곳으로 스튜디오를 옮기려 했다. 이번에 근 20년간 거주한(그래 봐야 실제로는 10년도 채 못 살았지만) 뉴욕의 이스트빌리지 아파트 짐을 모두 컨테이너에 실어 프랑스의 푸아티에로 운송하는 새로운 작업 〈보따리 1999-2019〉은 애초 파리에 정착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 이전에 보다 경제적인 도시 베를린으로 옮겨 보려고 6개월간 오가며 지내 봤지만, 정붙이기 어려웠다. 여러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역시 나는 파리가 수월하다. 프랑스 정부나 자치단체, 그리고 미술관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오고 있다.

  • 주제는 ‘트라베르세’, 통과 혹은 가로지르기

  • 김복기
    이번 인터뷰에서 다룰 중점 사안은 현재 프랑스 중부 도시 푸아티에 전역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 〈트라베르세/김수자(Traversées/Kimsooja)〉다. 우선 ‘트라베르세(traversées)’는 ‘통과(crossing)’ 또는 ‘가로지르기(traverse)’라는 뜻이다. 이게 바로 전시 주제인데, 무엇보다 이 전시의 시스템이 아주 특별하다. 여느 국제전과 달리 한 명의 예술가를 선정해, 그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까지 도시 전역에 전시하는 방식이다. 그 첫 번째 축제의 〈트라베르세〉를 이끄는 주인공으로 김수자가 선정됐다. 그러니까 김수자는 작품 발표뿐만 아니라 큐레이터 역할까지 맡았다. 주연배우와 감독을 겸하는 일이니, 작가로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있을까 싶다. 푸아티에 예술축제의 설립 배경, 미션과 비전은 무엇인가?

  • 김수자
    푸아티에는 파리에서 보르도 방향인 남서쪽으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인구 9만 5,000명 정도의 작은 중세도시다. 한국인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한때 프랑스의 수도이기도 했고, 푸아티에 전투로 유명했던 아랍권과의 전쟁 등을 겪으며 끊임없이 외부의 도전을 받았다. 그러니까 실제로 과거에 수많은 주변국가와 그 문화의 트라베르세가 일어났던 곳이다. 또 이 푸아티에 전투로 인해 ‘유럽’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탄생지이기도 하며, 종교와 교육도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애초에 40여 명이 참여하는 비엔날레로 기획한 이 프로젝트의 전체 제목이 〈트라베르세〉이고, 초대작가를 한 명으로 압축하여 트라베르세의 의미를 오래 탐구해 온 작가에게 전시 콘텐츠를 전권위임(Carte Blanche)함으로써, 그 첫 에디션의 제목을 〈트라베르세/김수자〉로 시작한 것은 이 비엔날레의 독특한 성격을 대변한다. 특히 도시의 진보적인 정치 성향과 현 시장의 이민과 난민 수용의 포용정책이 프로젝트의 추진 동력이 됐다. 무엇보다 도시 전체를 하나의 무대로 삼아 한 작가의 작업으로 매핑(mapping)할 뿐 아니라, 작가와 이번 전시에 연계될 수 있는 다른 작가의 작업을 초대할 수 있는 권한과 지원을 해 준 것은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엔날레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트라베르세/김수자〉는 푸아티에 시장인 알랭 클래이(Alain Claeys)가 푸아티에 출신이며 전 루브르미술관 관장이자 2015년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행사를 총지휘한 앙리 루아레트(Henri Loyrette)의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만들어졌다. 전 퐁피두센터-메스 디렉터이자 현재 팔레드도쿄 관장인 엠마 라비뉴(Emma Lavigne)와 독립큐레이터 엠마누엘 드 몽가종(Emmanuelle de Montgazon)을 공동 예술감독에 임명함으로써 그 첫발을 내딛게 됐다. 시장은 이 행사를 통해 푸아티에를 국제사회와 국제미술의 지형 속에 자리매김한다는 취지와 함께 최근 유럽의 가장 첨예한 이슈인 전쟁, 난민, 이주 문제를 전적으로 포용하는 입장을 표명하고자 했다. 또한 푸아티에에는 매우 흥미로운 콩포르모데른(Confort Moderne)아트센터가 있지만 아직 현대미술관이 없다. 중세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도시의 중심에 자리잡은 상징적인 건물이며 최근까지 법원으로 사용된 아키텐 공국의 궁전(Palais des ducs d’Aquitaine)을 새로운 현대미술 공간으로 전환해 시민에게 선사한다는 의미도 크다.

  • 김복기
    ‘트라베르세’, 이른바 ‘경계 넘기’ ‘가로지르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그동안 김수자가 견지해 온 작품 주제다. 1992∼93년 뉴욕 PS1창작스튜디오 작업실에서 태동된 〈보따리〉 시리즈 이후 김수자의 작품은 유목(nomad)의 표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푸아티에 예술 축제에서는 이 트라베르세의 개념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품에 실현되었는가. 〈보따리〉가 푸아티에라는 사이트에서 어떻게 새롭게 구현되었는가. 전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김수자
    우선, 두 명의 공동디렉터는 유서 깊은 중세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로 삼아 작업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나를 믿고 지원하며 〈트라베르세/김수자〉의 길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나로서는 큰 영광이었다. 또한 푸아티에라는 도시의 ‘열쇠’를 한 작가에게 넘겨줄 수 있는 시장과 디렉터들의 용기와 실험정신이 없었다면, 이런 대규모 비엔날레 형식의 개인/공공 프로젝트가 이처럼 새롭게 탄생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드림 큐레이터(Dream Curator)팀’이었다.(Curator는 ‘신경쓰다’ ‘돌봐 주다’를 뜻하는 라틴어 ‘curare’에서 나왔다.) 우선 트라베르세라는 타이틀을 받았을 때, 국제적인 지형도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아이디어는 그동안 내가 오래 계획해 온 유럽으로의 베이스 이동, 특히 뉴욕에서 파리로의 이주를 실행할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삶 자체를 옮기는 작업인 〈보따리 1999-2019〉는 지난 20년간 살아온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아파트에 쌓인 나의 일상생활의 모든 짐을 오방색 컨테이너에 싣고 푸아티에로 옮겨 피난처로서의 상징성을 지닌 성당(Cathedrale de Saint-Pierre) 앞에 내려놓는 여정이었다. 반면 푸아티에 도시 내의 지형도는 팔레(Palais des ducs d’Aquitaine)를 중심축으로 십자를 그으며 구도시와 맞닿는다는 생각으로 팔레로부터 매핑을 했다. 그래서 팔레의 중심에 〈마음의 기하학(Archive of Mind)>을 설치해 시민이 함께 모이는 중심축으로 상정했고, 구도심을 관통하는 오래 닫힌 팔레의 문을 열어 중세부터 중심 길이었던 카테드랄 길(rue de Cathedrale)을 통과해 성십자미술관(Musée Saint-Croix)과 콩포르모데른 아트센터에 이르는 긴 산책로의 좌우측 군데군데에 산재한 성당과 교육시설, 회랑 등 도시의 역사적 건물들을 문맥에 따라 경험하도록 계획했다. 각 사이트가 전체와 서로 연계를 가지면서도 각기 하나의 시각적 의미론적 중심으로서 내러티브를 갖도록 했다.

  • 김복기
    《e-flux》에 실린 컨테이너 〈보따리 1999-2019〉가 인상적이다. 한국의 보따리가 컨테이너로 치환된 작품이다. 한마디로 보따리의 변주인데, 이 작품의 함의가 대단히 중요하다. 이주 이동 유목의 의미를 담고 있는 보따리라는 이름을 유지하면서도 실제 보따리 형상은 컨테이너로 바뀌었다. 보따리의 ‘문화 번역’이라고 해야 할까. 컨테이너 표면은 5가지 원소(목 화 토 금 수)를 표상하는 한국의 전통 오방색으로 색띠를 그려 넣었다. 보따리의 원천을 유지하면서도 실제 작가 자신의 이주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래서 리얼리티가 강한 작품으로 보였다. 사실 2016년부터 〈연역적 오브제〉라는 입체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역시 색동천의 변주가 아닌가. 강철을 용접한 난형(卵形)의 형태에 기본 방향(동 남 중앙 서 북)과 전통 오방색으로 아주 현대적으로 입체화한 작품으로 보인다.

  • 김수자
    〈보따리 1999-2019〉는 지난 8월 말 뉴욕의 짐을 컨테이너에 실어 푸아티에로 보내면서 말 그대로대서양을 횡단해 설치한 작품이다.

  • 김복기
    큐레이터 자격으로 일본의 타다시 가와마타(Tadashi Kawamata), 인도의 수보드 굽타(Subodh Gupta)를 초대했다. 이 작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콩고의 새미 발로지(Sammy Baloji)도 참가했다. 그 외 초대작가와 김수자 작품과의 개연성이랄까, 이번 전시 프로젝트와의 관련성에서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할 것 같다.

  • 김수자
    이번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웠고 영감을 준 요소는 내가 이번 테마와 연계되는, 혹은 나의 작업과 연계되는 다른 동료작가를 초대해, 내 작업과의 연계성을 공유하며 〈트라베르세〉의 의미를 심화하고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예를 들자면, 나는 타다시 가와마타의 작업을 남성적 직조 행위로 본다. 그의 작업은 내가 2010년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 〈실의 궤적(Thread Routes)〉 16mm 필름 프로젝트를 맨 처음 발상할 당시인 2002년, 벨기에의 브루주(Brugge)에서 보빈 레이스(Bobbin Lace)를 짜고 있는 한 여성을 보면서 바로 병치하게 된 남성적 직조 행위로서의 건축 행위를 연상시킨다. 텍스타일에서 여성적 직조 행위와 건축에서 남성적 직조 행위는 그동안 내가 〈실의 궤적〉 필름 속에 병치해 왔다. 이러한 건축적 요소를 이번에 팔레의 입구 기둥에 설치한 가와마타의 〈둥지〉를 통해 물리적으로 잘 병치할 수 있었다.

  • 메인 작가와 큐레이터를 겸하다

  • 김복기
    가와마타는 기존의 건축에 기생하는 나무로 된 집 혹은 둥지 같은 형상의 설치작품을 통해 구축과 해체의 모호한 풍경을 연출한다. 시작도 끝도 아닌, 일종의 이항대립의 중간지대와 같은 차원은 마치 김수자의 〈보따리〉가 이제 막 떠나려는 상황과 이제 막 도착한 상황, 그 두 상황의 사이 혹은 공존과도 통한다.

  • 김수자
    공감한다. 관객들이 가와마타의 〈둥지〉를 지나 팔레 내부로 들어가면 중심에 설치된 〈마음의 기하학〉(2019)을 체험할 수 있다. 여기서 보따리와 구(球)로의 이행을 보다 더 구체적이고 물리적으로, 또 심리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지적한 대로 형식적으로 하나의 가능태로서의 보따리가 형성과 해체의 가능성을 공유하고 있는 동시에 이 전시가 강조하는 중요한 요소인 ‘환대와 보호(Hospitality and Protection)’라는 측면, 즉 미셀 푸코가 말하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특수한 장소성을 가지면서도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하는 환대와 환영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첫 입구에 가와마타의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의 중심축이 되는 18m 길이의 타원형 테이블 위에서의 퍼포먼스 〈마음의 기하학〉은 팔레 내의 다른 두 설치, 과거 재판관들의 개인 사무실 공간이었던 투르 모베르종(Tour Maubergeon)의 〈숨쉬기(To Breathe)〉 거울과 숨소리 설치에서 다시 아치형 천장과 그 구조의 반사로 인해 조성된 타원형의 가상적 공간을 만든다.

  • 김복기
    김수자 예술에서 퍼포먼스의 중요성을 빼놓을 없다. 흔히 ‘작가-주체’의 퍼포먼스로는 〈바늘 여인〉이나 〈빨래하는 여인〉처럼 작가 스스로를 공간의 축이자 시간의 축으로 설정하는 작품이 있다. 그런데 근자의 〈마음의 기하학〉에서는 ‘관객-주체’의 퍼포먼스로 이동했다. 〈마음의 기하학〉은 많은 사람이 작은 찰흙 구(球)를 빚어 텅 빈 거대한 타원형 테이블을 채우는 작업이다. 단순히 관객 참여형이라고만 평가하기에는 작품의 의미가 대단히 깊고 넓다. 작품의 주제가우주라든가 우리 인간의 존재론과 같은 문제로 이동했다. 각기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각기 다른 형태의 찰흙 구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소우주이고, 그 소우주가 모여 은하수와 같은 대우주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 우주의 소리를 연상시키는 사운드 〈구의 궤적〉이 조합된다. ‘오디오 퍼포먼스’라고 해야 할까. 결국 촉각 시각 청각이 총동원되는 작품이다.

  • 김수자
    팔레에는 특별히 이번에 푸아티에시에서 커미션하여 모로코에서 새로 제작한 아프리카 챕터인 〈실의 궤적 Vl〉과 함께 전체 프로젝트의 하나의 센터로서 각기 다른 형식(설치 퍼포먼스 사운드 필름 라이트)으로 전체 프로젝트의 스펙트럼을 대변하게끔 설치하였다. 또한 가와마타의 〈터널〉은 오랜 세월 막혀 있던 구도시로 통로를 열어 주는 매개 작업이었다. 이렇게 다다른 카테드랄 길은 2012년 런던올림픽 때 참가국으로만 제작된 〈숨쉬기: 깃발〉 이후 국가를 상징하는 모든 존재하는 국기를(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차별 없이 알파벨 순서로, 여기서 남한과 북한의 국기가 오브랩된다) 사용해 재편집한 비디오 작업에서 추출한 이미지들로 초국가적 깃발을 제작해, 카테드랄 길을 따라 컨테이너 보따리가 있는 생피에르 성당까지 설치되어 뮤지엄 쪽으로 안내하게 된다. 여기서 또 시리아 난민의 도착 장소 중 하나이고 근년에 가장 회자되었던 그리스의 레스보아 섬에서 발견한 난민의 구명조끼로 제작한, 그리스 작가이자 건축가 아킬레아스 수라스(Achilleas Souras)의 돔 형식의 설치 〈SOS(Save our Souls)〉를 만나게 된다. 바다 내음과 소금기가 그대로 묻어 있는 이 작업은 성탄절 전날 밤 설치 일부가 불에 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 시점의 유럽과 프랑스의 여러 정치 종교 사회적 문제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사건은 불안정한 시대를 대변하는 이 작업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는 사건이 됐다.

  • 김복기
    구명조끼를 작품에 끌어들이는 다른 작가도 있지만, 아킬레아스 수라스의 경우 건축가여서인지 단순히 구명조끼를 난민의 상징으로 외형적으로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대단히 구축적인 조형이 돋보인다. 가와마타의 작품 〈둥지〉와 〈터널〉과도 구조적으로 잘 어울린다.

  • 김수자
    19세의 젊은 그리스 건축가 아킬레아스 수라스의 작업 역시 이민과 난민의 문제, 또 환대의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그의 작업과 〈보따리〉의 의미와 형식적 유형을 여기서 또 한번 연계하면서 내용적 유사성을 제시했다. 내가 초대한 작가들에게서는 여타의 유사한 재료를 쓰거나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의문은 들지 않았다. 그 의미의 진정성과 형식과 내용의 일관성 때문이다. 일단 뮤지엄 광장에 들어서면 리크리트 티라바냐(Rirkrit Travanija)의 수직수평 구조로 대나무를 사용한 건축적 미로와 중심에 위치한 찻집 설치와 다도(茶道)를 아우른 작업 〈무제(the infinite dimension of smallness)〉(2018) 역시 그가 오래 유지해 온 헤테로토피아적 공간 제시와 환대를 대변하는 나눔의 퍼포먼스의 연장선에 있는 작업이다.

  • 김복기
    이번 프로젝트에 입체 설치작품 이외에 퍼포먼스의 비중도 높은 것 같다. 리밍웨이(Lee Mingwei)의 〈수선 프로젝트〉는 한눈에 봐도 김수자의 작품과 연결된다. 바느질, 이른바 직조라는 개념인데, 남성작가의 바느질이 흥미롭다.

  • 김수자'
    미술관 내부에 설치한 리밍웨이의 〈수선 프로젝트〉 역시 비폭력주의와 환대 내지는 관용적 태도와 맥을 같이 하는 남성의 바느질 작업이다. 그의 작업은 전자의 남성적 직조라기보다는 여성성에 기초한 남성의 직조로 보이는 러빙 케어(Loving Care)의 의미를 늘 추구하고 있다. 그의 예술적 접근 역시 비폭력주의와 나눔, 포용, 그리고 상처 치유와 통합과 하모니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내 작업과 맥락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러한 일련의 접근은 미술관 2층에 설치된 〈실의 궤적 l, ll, lll〉에서 바느질, 마름질, 염색, 레이스 뜨기, 직조, 쿠킹, 노마딕 생활상과 각 챕터의 지역성에 기초한 역사적 건축물과 자연과 현지의 수공예적 감수성과 미학의 병치를 통해 종합적으로 통합되어 선보인다. 콩고 출신의 작가 세미 발로지 역시 구리 탄피를 녹여 십자가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과 그 십자가를 목에 매단 교회의 소년합창단을 통해 과거 콩고의 식민지배의 역사와 문화를 성스러운 안무와도 같은 필름과 설치작업 〈Tales of the Copper Cross Garden〉(2017)에 담아냈다. 폭력을 치유로 전환시키고 있는 이 작가의 작업 역시 나의 감수성과 방향성과 결을 함께한다고 생각된다.

  • 김복기
    식기를 소재로 삼아 다양한 입체 설치작품을 펼치는 인도작가 수보드 굽타는 이번에 요리 퍼포먼스로 각광을 받았다.

  • 김수자
    굽타는 푸아티에 건축센터(Maison d’Architecture)에서 오래된 부엌의 소스팬과 냄비 등을 이용하여 하나의 투과성 있는 독특한 집을 만들고 그 안을 부엌 겸 식당으로 꾸며 인도음식 퍼포먼스 〈요리 세계〉(2017)를 펼쳤다. 작가가 관객과 대화하며 본인의 레시피를 가미한 인도의 거리음식을 나누는 퍼포먼스는 문화적 건축적 미학적이었고, 이식된 공동체를 오감과 함께 느낄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이었다. 나 역시 2018년 중국의 인촨비엔날레(Yinchuan Biennale)에서 시도한 장소특정적인 죽(porridge) 프로젝트를 푸아티에 현지 조건에 맞추어 실행하고 싶었지만, 10여 개의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겨를이 없어 포기했다. 굽타와 한 공간의 블랙박스에 나는 뭄바이의 슬럼가와 공공빨래터 도비갓(dhobighat), 또 인산인해를 이루며 기차로 출퇴근하는 모습을 담은 〈뭄바이: 빨래터〉(2007)를 병치했다. 인도의 문화와 사회적 현주소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주어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온 프로젝트였다. 사실 이 작업은 나의 이불보 설치작업의 연장으로 보면 된다. 한편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세례성당(Baptistère Saint-Jean)에서는 한국의 국악인 정마리가 정가를 불렀다. 지고한 순수미와 독특한 창법으로 〈영속하는 기쁨의 노래〉를 60분간 쉼 없이 노래하며 관객 모두에게 명상과 초월적 경험을 선사했다. 끊일 둣 이어지는 그녀의 숨막힐 듯 가녀린 목소리의 풀림은 마치 직조행위를 비물질화하여 바라보는 것 같은 연상작용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녀의 소리를 이 프로젝트의 미학적 정점에 놓고 싶었다.

  • 오방색 스펙트럼, 우주의 빛

  • 김복기
    이번에도 무지갯빛 효과를 자아내는 빛 작업을 선보였다. 김수자가 빛을 작품에 끌어들인 것은 2006년 스페인의 마드리드 크리스털 궁전의 설치작품 〈숨쉬기–거울여인〉(2016)에 이어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였다. 유리창에 회절격자 필름을 부착해 빛이 스며들면 무지갯빛 효과를 낼 수 있다. 전시공간은 마치 우주와 같은 스펙터클한 환경으로 바뀐다. 김수자가 비물질을 작품 재료로 끌어들인 것은 획기적인 변화다. 베니스에서는 빛이 스며드는 공간과는 대조적으로 빛과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적막한 공간을 조성하기도 했다. 외부 공간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빛 작업이 지속되고 있다. 빛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빛은 김수자 예술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 김수자
    이 답변을 위해서는 색의 스펙트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오방색과 십자, 보따리에 대한 내 생각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다. 근 40년 가까이 내가 끊임없이 실험해 온 지속적인 문제 중 하나는 화가로서의 시각을 견지하며 질문해 온 캔버스의 표면(surface), 나아가 경계(border), 캔버스를 지탱하고 있는 십자구조이다. 이 십자구조는 1980년 홍익대 대학원 졸업논문으로 발표했던 〈조형기호의 유전성–십자형 기호를 중심으로〉에서도 다루었다. 나는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1875∼961)의 만다라에서 보인 마음의 원형(Archive of Mind)에서 그 구조적 심리적 근원을 찾았다. 십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조적으로도 많은 작가가 거치지 않을 수 없는 터널과도 같은 것이다. 색의 기본적인 스펙트럼으로서의 오방색은 그 방향성과 계절, 맛과 물질의 성질을 포함하는 우주의 스펙트럼이라고 해야 옳다. 이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는 색의 정의가 있을까.

  • 김복기
    예나 지금이나 화가에게 색채에 대한 물음은 결국 그 시작과 끝이 빛의 세계로 귀결된다. 무지갯빛의 스펙트럼은 결과는 비물질이지만, 실상 회절격자의 물질이 매개가 된 것이다. 김수자가 보여 준 물질과 비물질이라는 이중구조에의 관심에서 본다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수자
    그렇다. 기본적으로 바로 이 오방색(빛에 내재하는)과 십자구조인 회절격자 필름의 만남이 내가 사용하는 무지개 스펙트럼의 핵심이다. 이 필름은 1cm에 거의 수천 개의 수직수평 스크래치로 긁혀져 특수 제작된 것이다. 거의 나노스케일이어서 눈에 감지되지 않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투명한 천이다. 나의 작업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필름이 유리창에 부착되어 외부의 빛을 통과할 때 유리창 면과 하나가 된 필름 표면은 프리즘처럼 빛을 굴절시킨다. 결국 유리창은 하나의 빛의 타블로인 셈이다. 날씨 변화에 따라 빛을 호흡하고 변주하면서 벽과 바닥, 또는 천장과 사람의 신체에 빛의 페인팅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때 바닥에 설치된 거울은 또 한번의 반사굴절로 내부 공간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인다. 이 필름이 부착된 표면을 처음 사용할 때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구조의 궁전 건축물 자체를 아무런 오브제도 설치하지 않고 하나의 ‘보따리로 싼다’는 개념이었다. 여기에서 바닥의 거울도 보따리 천에 해당된다. 허의 공간을 건축 표면까지 밀어낸 것, 즉 공(vide)의 공간과 나의 숨소리(삶과 죽음의 경계로서의)가 바로 보따리의 구조물이 됐던 것이다. 관람객들은 기존 보따리의 상징적인 인물인 헌옷 대신 살아 있는 퍼포머로 그 안에 싸여지는 것이다. 또 바닥의 거울설치를 통해 그 건축물마저도 이중성을 갖게 되며 하나의 완전성인 구(球)를 지향하는 것이다.

  • 김복기
    반사의 매개체인 거울은 실제와 가상이 혼재하는 확장된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투과성을 띠는 빛과 함께 거울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 김수자
    거울을 처음 사용한 것은 하랄트 제만이 감독을 맡았던 1999년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본전시 아페르투토(d’Aperttuto)에서였다. 그때의 거울은 코소보 난민에게 헌정한 〈아페르투토, 혹은 보따리트럭(d’Aperttuto, or Bottari Truck in Exile)〉(1999)을 위한 하나의 가상의 길을 여는 작업이자 동시에 아르세날레의 전체 공간을 거울로 싸서 보여 주는 보따리 작업이었다. 거울의 운용은 그때그때 사이트가 요구하는 질문에 응답하며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왔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1979년에 지금은 없어진 그로리치화랑에서 동료 이윤동 작가와 〈호흡전〉이라는 2인전을 열었다. 그때 창호지를 제거한 한국 가옥의 투명한 격자구조의 문짝을 들고 서서 홍익대 뒷쪽 와우산을 배경으로 일련의 퍼포먼스 사진(흥미롭게도 그때 입었던 스커트가 무지개 색의 사선으로 된 줄무늬 스커트였다)을 흑백 네거티브로 프린트한 투명필름을 빨랫줄에 걸어 한 공간에 설치했다. 또 검은 카펫이 깔려 있던 갤러리 바닥에는 지름 10~15cm 정도의 두 개의 길고 가는 나무둥지를 거의 40~50cm 간격으로 잘라 조금씩 어긋나게 드로잉을 하고, 그 어긋난 나이테 사이에 30cm 정방형의 투명 플렉시글라스를 끼워 넣었던 설치작업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바늘땀이었던 것 같다. 수직수평의 개념도 함축되어 있었고. 내가 회화의 평면성을 질문하던 그때부터 투명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필름의 투명성이나 투과성, 나 자신과 세상을 비추는 거울의 상징적 투명성과 대상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푸아티에의 거울 작업처럼 있는 그대로의 특정 공간의 바닥에 거울을 설치해 공간의 구조를 거울이라는 경계를 통해 재해석하기도 하고, 관객을 의도되지 않은 자율적인 퍼포머로 바라보기도 한다. 또한 10폭 거울 병풍을 새로운 회화 형식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거울은 아직도 나의 조형적 질문의 대상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개념이 발견될 것만 같은 거울을 기회 있을 때마다 지속적으로 실험할 계획이다.

  • 김복기
    ‘경계 넘기’ ‘가로지르기’는 1990년대 광주비엔날레의 ‘경계를 넘어서’ 같은 주제나,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보니토 올리버가 내세웠던 ‘유목성’ 같은 주제를 떠올린다.김수자의 〈보따리〉가 이 시기에 태동된 것은 참으로 절묘하다. 이 시기의 경계나 노마드는 글로벌리제이션으로 쏠려 있다. 동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해체 이후 복합문화주의의 도래, 비서구권 미술의 약진 등 여러 환경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김수자
    보따리가 1992년에 탄생했다고 할 때, 노마디즘이나 글로벌리즘의 이슈가 미술과 사회에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단지 내 작업에서의 유목적 특성은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에 기인하며, 그 당시 글로벌리즘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이즘(ism)’ 등의 프레임워크에는 현재까지도 별 관심이 없다. 보따리는 한순간 직관적으로 발견된 것이지만, 하나의 전체(totality)로서 그 안에 논리적 형식적 내용과 삶의 본질적인 철학과 정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지속성을 가지고 진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보는 이의 관점이 낭만적일 때 작업도 더 낭만적으로 보일 것이고, 그것이 더 이상 낭만적일 수 없는 시점에서의 감상은 보다 리얼해 보일 것이다.

  • 김복기
    돌이켜보면, 1992년 〈보따리〉가 나오면서 김수자의 작가적 행보가 급속하게 분주해졌다. ‘물꼬가 터졌다’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해야 하리라.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 〈호랑이 꼬리〉, 1995년 광주비엔날레, 1996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한일교류전 〈1990년대 한국미술 이야기〉 등에서 ‘보따리의 변주’가 이어졌다. 보따리야말로 천변만화의 가변성을 지닌 입체 구조다. 묶기/풀기, 닫음/열림, 구축/해체, 수직성/수평성, 3차원/2차원, 긴장/이완, 수축/팽창, 채움/비움, 정지/이동 등의 조형 체계와 사유의 임의성을 지니고 있다. 이불보를 바닥에 가지런히 깔거나, 테이블보로 설치하거나, 빨랫줄에 널듯이 걸거나…. 〈보따리〉는 이 다양한 얼굴이 무엇보다 매력이다. 1997년에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 2727km〉를 제작하고, 그 이후 1999년부터 〈바늘 여인〉〈빨래하는 여인〉 시리즈가 이어졌다. 〈바늘 여인〉은 서영희가 지적했듯이 “자신이 바늘(수직축)이 되어 세계의 도시와 인파의 층(수평축)을 거듭 관통하며 시공간을 넘어 기억과 체험을 하나로 연결한 작업이다.” 각 대륙의 8개 도시를 방문하면서 〈바늘 여인〉 시리즈를 이어 갔다. 긴 머리를 동여맨 김수자의 뒷모습이 등장한다. 이 뒷모습은 천상 바늘로 보인다. 1999년 김수자는 뉴욕으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작품도 작가도 이동,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 김수자
    때때로 글로벌리즘의 이슈로 읽히기도 했던 〈바늘 여인(1999∼2001)의 첫 번째 시리즈는 마침 9.11테러가 일어난 바로 그날도 뉴욕 MoMA PS1 개인전에서 전시 중이었다. 그 이후 이라크전쟁 발발과 함께 전 세계가 불신과 증오와 혼란에 빠지고 이슬람권과 기독교권과의 대립이 심화된 상황은 나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시작한 첫 작업이 지금은 사라진 뉴욕의 전설적인 갤러리 더프로젝트(The Project)에서 처음 선보였던 〈Mandala: Zone of Zero〉(2004)였다. 이 작품에는 이라크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고, 동시에 세계의 평화와 화합을 암시하는 작업으로 부시(Bush)정책의 폭력성에 대한 발언을 담았다. 키치한 미국의 겜블링 오브제 상점에서 착상한 주크박스 스피커 3개에 티벳과 그레고리언, 그리고 애초엔 이슬람의 성가들이 각각 푸른 벽의 공간에 섞여 다소 혼란스러운 불협화음이 나도록 병치시킨 설치였다. 하지만 실상 이 불협한 세계의 종교와 이념을 모아 들어보면, 매우 공평하고 조화롭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거의 베이스와 바리톤, 그리고 테너의 성악적 체계가 공존하며 나름의 음색으로 대화하듯이 조화로운 코러스를 이룬다. 이번 〈트라베르세/김수자〉에서도 싱글 주크박스에 3개의 성가가 혼합되어 들리도록 제작한 싱글채널 에디션을 콩포르모데른(Confort Moderne) 아트센터에 선보였다. 현재 로마의 21세기미술관 MAXXI에서도 다른 에디션이 선보이고 있고, 시애틀아시아미술관(Seattle Asian Art Museum)에서도 곧 초기 에디션이 동시 다발적으로 선보이게 된다. 이제야 이 작업이 제도권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 글로벌 위기, 어떻게 대응하는가

  • 김복기
    T. J. 디모스 같은 이론가는 1980, 90년대의 진행되었던 글로벌리제이션 속의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은 대단히 로맨틱한 ‘노마디즘’이었다고 간주하는 한편, 2000년대에 와서는 글로벌리제이션에 의해 일어났던 다양한 갈등을 되묻는 물음으로 패러다임이 변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9.11이후의 상황을 ‘글로벌 위기(Crisis Globalization)’이라 부르고, 그것이 내포하는 여러 모순과 아티스트들의 실천 관계를 묻는다. 그것은 오늘의 세계 상황에 대한 미술의 대응이라 요약할 수 있다. 국경을 뛰어넘는 자본주의 경제의 끊임없는 유동,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태어난 글로벌 사회는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 질서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그 꿈은 결과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이 와중에 진행되었던 경제 불균형의 확대, 난민의 증가, 새로운 정치적 대립은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글로벌 아트를 지향해 왔던 아티스트와 큐레이터들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작금은 글로벌한 규모로 이동하는 삶의 양태 그 자체, 이를테면 망명, 디아스포라, 난민에 개입해 상상력을 갖춘 비판적 도큐멘터리로서의 아트가 전면에 나왔다. 2017년의 카셀도쿠멘타(여기에 김수자의 〈보따리〉가 출품되었다), 2018년 광주와 부산의 비엔날레에서도 크게 보면, ‘글로벌 위기’가 주제였다. 여기서, 좀 거칠게 묻는다. ‘트라베르세’ 혹은 김수자의 작품은 오늘의 세계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 김수자
    T. J. 디모스의 해석에 공감한다.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프로젝트를 위해 〈바늘 여인〉의 두 번째 시리즈를 제작할 때, 나는 첫 번째 시리즈(1999~2001)와 달리 세계의 중심적 대도시가 아니라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충돌이 발생하는 각 대륙의 문제의 도시와 후기식민주의 문제를 안고 있던 도시를 찾아 나섰다. 그럴 필요를 강력하게 느꼈다. 첫 번째 퍼포먼스를 통해 세계가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했다면, 9.11 이후에 폭력과 대립이 만연한 전 세계의 이중삼중의 충돌현상, 그 혼란의 파고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나는 현 시대에 살며 한 개인사에서 출발해 확장된 인간의 조건들에 천착해 왔다. 세계에 던지는 나의 존재론적 질문들, 혹은 정치사회적 인류학적 질문들은 언제나 비폭력과 평화, 정의와 진실, 사랑과 화해, 즉 휴머니즘과 유토피아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김복기
    앞으로 작품 활동 계획은?

  • 김수자
    뉴욕 스튜디오의 짐도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새로운 스튜디오도 마련해야 하는데 뜻대로 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늘 불확정적인 삶을 살아서인지 스튜디오가 없어도 걱정되지 않는다. 현재도 뉴욕에서 일하는 어시스턴트가 있고 오랫동안 일해 온 협업자들이 있다. 파리는 파리대로 일을 도와주는 어시스턴트가 있어 모든 프랑스 프로젝트를 현지의 협업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협업자를 찾고 있다. 한국을 기반으로 멀리 여행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를 펼치고 싶다. 사실 그동안 글로벌하게 협업자들과 일해서 어디를 가더라도 더 이상 거주지가 문제시되지는 않는다. 앞으로 한국 관객들과 더 자주 만나고 참여하며, 작업 외에 한국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간 잘 뒤쫓아 가지 못했던 한국미술도 좀 속속들이 보고 싶다. 늘 낯설고 쉽지 않지만 한국에 조금씩 적응해 봐야 할 것 같다.

— Art in Culture, January 2020, pp. 44-67.

김수자 ─ 삶과 존재를 끝없이 질문하는 개념미술가

윤혜정

2020

  • “세상에 관계 지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 1957년 대한민국 대구 출생. 1990년대부터 평면, 조각, 설치, 퍼포먼스, 영상작업 등을 통해 삶과 시대 그리고 예술의 조건에 첨예한 질문을 던지는 한국의 대표 개념미술가다. 1997년부터 뉴욕 P.S.1과 모마(MoMA) 등 전 세계 미술관의 개인전 및 비엔날레를 섭렵했고, 2013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도 활약했다. 지난 20년 동안 뉴욕, 파리, 서울 등을 돌아다닌 이 노마드 작가는 세상의 모든 지리적, 상징적, 구체적, 추상적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초창기 회화의 표면성을 탐구하던 중 발견한 '바느질'이라는 행위는 시대를 거듭하며 고유한 메타포로 끊임없이 진화 중이며, 기억과 경험, 인간과 자연, 세상과 일상, 예술과 미학 등을 모두 끌어안는 '보따리'의 존재 역시 작가 언어의 핵심이 된다. 색색의 보따리를 가득 쌓은 트럭에 몸을 실은 채 세계를 누비는 보따리 작가, 군중 속에 서서 자신의 몸을 세상과 타인을 꿰는 '바늘'로 은유하는 작업으로 '바늘여인' 등의 별칭을 얻었지만, 결코 이에 머물지 않는 관조적 시선과 명상적 실천으로 현대미술의 영역을 다시 쓰고 있다. 예술을 수렴하는 자기성찰적 태도, 시공간을 초월하는 수행적인 철학, 공고하고도 심오한 미학의 구조를 통해 김수자는 자신의 치열한 몸과 웅숭깊은 삶 그리고 진심의 예술을 관통하는 예술가의 지표를 만든다.

  • 지난 2018년 겨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김수자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포옹으로 인사했다. 그때 김수자가 나를 천으로 귀한 무언가를 싼 보따리처럼 완전히 감싸 안았는데, 그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 두 팔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로 나의 영혼과 몸 그리고 실존 자체를 끌어안는 느낌. 작가가 길 위에서 수십 년간 치열하게 고민해 얻었을 삶의 에너지가 발끝까지 도사리던 한기를 순식간에 거둬 갔다. 타인과 몸을 맞댔을 때 부지불식간에 서로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은 흔치 않지만, 생각해 보면 김수자와의 만남은 늘 그런 순간을 선사했다. 눈빛은 (바늘처럼) 꿰뚫는 동시에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특유의 낮은 목소리는 (이불보처럼) 다정하면서도 단호했다. 일견 비정한 이론으로 무장한 미술 세계에서, 그렇게 김수자는 내게 통찰과 연민의 관계로 각인되어 있었다.

  • 지난 2017년 카셀 도큐멘타의 전시장을 둘러보다 김수자의 '보따리'를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난민, 이주, 전쟁, 테러, 세상의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학구적, 정치적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명하던 전시장, 첨예한 예술의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중간중간 놓여 있던 색색의 보따리 덕분이었다. '보따리'는 현재 난민 문제나 유랑자의 삶을 은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현대사의 심각한 환부를 드러내며 저항과 혁명을 부르짖는 작품 모두를 끌어안는 전시의 쉼표이자 날 선 예술의 진심 어린 마침표나 다름없었다. 인간과 역사를 성찰하는 한 예술가의 웅숭깊은 세계로 모든 게 수렴되는 순간이었다.

  • 오랫동안 김수자는 '보따리 미술가'로 불렸다. 1990년대부터 전통 이불보를 묶은 보따리가 각국의 전시장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첨단 대도시 혹은 내전의 아픔을 겪는 도시에서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뒷모습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2009) 시리즈는 'Bottari'라는 단어를 각인시켰으며, 보따리를 쌓아 올린 트럭에 몸을 실어 방방곡곡 다니는 영상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 Cities on the Move: 2727Kilometers Bottari Truck>(1997) 등이 미술계 안팎에서 회자되었다. 파리 시청 건물에 작가의 뒷모습이 투사되는 풍경은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보따리가 그녀에게 각별한 이유는 '백남준의 명성을 잇는 한국작가'라는 평가를 선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보따리는 그녀에게 조각이자 회화이며, 삶의 궤적과 통시적 시간성을 간직한 오브제이자 핵심적인 조형언어다. 그리고 이는 바느질, 바늘, 이불보 같은 개념이자 행위의 중요성과 만난다.

  • "맨 처음 바느질 작업은 회화(캔버스)의 표면 구조에 대한 물음과 세계의 수직, 수평 구조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되었어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나의 관심사는 회화의 형식적 측면에 놓여 있었죠. 바늘은 붓을 대신하고 손과 몸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도구였어요. 이후 캔버스 대신 이불보와 헌 옷을 꿰매 평면성을 확장했습니다." 인간과 자연, 세상과 세계를 바느질의 개념으로 엮어 내게 된 연유에 대한 질문에 그녀가 말한다. 어머니와 이불보를 꿰매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이 가진 에너지가 바늘을 통해 우주와 연결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천-바늘의 관계를 우주 내 몸의 관계와 연결 짓는 개념은 곧 <바늘여인> 시리즈로, 땅을 걸어 대지라는 이불에 스민 역사와 기억을 관통하는 <소잉 인투 워킹 Sewing into Walking>(1994/1997) 등으로,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실체를 보이지 않게 감싸는 비디오 작업으로 진화했다.

  • 지난 2010년 서울 아틀리에 에르메스의 개인전 《지, 수, 화, 풍 Earth, Water, Fire, Air》에서도 김수자를 만났다. "전통 이불보는 우리가 사랑하고 꿈꾸고 고뇌하고 죽어 가는 장소, 삶의 근원이자 프레임이 되는 장소예요. 사랑, 행복, 부(富), 장수, 다산, 기쁨 같은 상징과 사회적 맥락도 있죠. 나는 경험, 기억, 미학이 담긴 천을 풀고 싸는 행위를 해 왔어요. 그 천이 자연으로 전개되고, 도구인 바늘이 인간의 몸으로 전개된 겁니다.” 다시 10여 년 후 그녀는 바느질의 맥락을 다시 이렇게 정리해 주었다. "결국 바느질은 관계 짓기예요. 몸과 손, 천에 이르는 관계, 걸음과 땅의 관계, 날숨과 들숨의 관계, 내 눈과 그를 보는 거울 속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해요. 세상에 관계 지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특히 인터넷 시대에는 모든 일상이 '바느질하기'이기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바느질의 망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죠."

  • 종종 김수자는 꽤 명확한 단어로 정의되곤 한다. 일찌감치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이유로 “노마드 예술가로, 바느질, 이불보 등이 여성의 정체성과 밀접하다는 명분으로 “페미니스트 예술가"로 불린다. 그러나 그녀가 만약 노마드 예술가라면, 그건 한자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예술가"라는 수식어도 상식적인 의미 이상에서 쓰여야 한다. 김수자는 1990년대 초 바느질, 빨래, 청소, 요리, 다리미질, 다듬질, 장보기 등 현대미술이 도외시한 일상적 가사 노동 행위를 미술 언어로 개념화하고, 현대미술사에 미적·문화적·사회적·심리적인 면에서 예술 행위로 재정립했다. "바느질의 시초가 여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평면회화 구조의 본질적 물음에서 기인했고, 그것이 삶의 문제까지 연계 및 확대되었다는 얘기"라고 김수자는 강조했다.

  • 김수자의 작업이 삶과 예술의 경계에 놓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일상 속 평범한 행위들도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적극 도입되었다. 보기, 걷기, 숨쉬기, 미러링 등 한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행위들. 지난 1995년 에든버러 플루마켓 갤러리 카페 테이블에 이불보를 깐 프로젝트는 사람들의 만남, 대화, 관계, 행위 등을 '보이지 않게 감싼다'는 개념이었다. 이런 비물질적 요소들은 스페인 크리스탈 팔라스에서 선보인 <호흡: 거울여인To Breathe: A Mirror Woman> (2006) 같은 작업과도 자연스레 연계된다. 바닥 전체에 거울을 깔아 관람객의 몸이 거울 속의 반대편 세상을 관통하게 했고, 유리창에 특수필름을 붙여 빛의 투과로 생기는 무지개 스펙트럼을 적극 끌어들였으며, 삶과 죽음의 매순간을 의미하는 호흡 퍼포먼스 사운드를 설치했다. "회화의 핵심 요소인 '색'에 대한 근원적 관심이 오방색의 탐구로, 십자가와 음양의 축으로 발전했고, 특수필름에 각인된 수많은 수직수평의 형태인 빛의 프리즘으로 고찰했으며, 이것이 태양의 빛을 싸고 펼친다는 보따리 개념의 확장으로 자연스럽게 이행된 것이다.

  • 지난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였던 김수자는 이 공간 역시 전체를 특수필름을 이용해 보따리처럼 감쌌다. 이렇다할 오브제 없이 그 자체가 작품인 공간 바닥에 관람객들은 그저 앉아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빛과 어둠, 소리가 전부였고, 그러므로 이 곳은 단연 베니스의 심장이었다. 이 작품은 서로 강력한 자아를 분 출하는 비엔날레에서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예술이 무엇 인지를 보여 주었다. '빛과 소리의 보따리'는 다름 아닌 본연의 감정에 집중하도록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란 일상의 예술적 속성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던 그녀의 이야기가 귓전에 맴돌았다.

  • 지난 2017년 베를린 케베니히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숨의 기하학 Geometry of Breath》의 그 고아한 공간, 완전한 진공 상태에서 나는 본질적인 친밀감을 맛보았다. 그간의 작품이 카메라(관객)로 하여금 작가 뒷모습과 어깨 너머 군중을 응시하게 만드는 '바늘여인' 같은 방식이었다면, 이 전시는 반대로 사적 시간의 흔적을 통해 자 신과 타인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주크박스에서는 작가의 숨소리가 흘러나왔고 숨쉬기: 만다라 To Breathe: Mandala>), 20년 입은 검은색 옷이 빨랫줄에 걸리거나(<빨래하는 여인 A Laundry Woman>) 검은 보따리로 놓여 있었으며(〈보따리 Bottari>), 1990년대부터 모아온 머리카락 (시간의 토폴로지 Topology of Time>)과 신체 흔적이 남은 낡은 요가 매트(<몸의 기하학Geometry of Body>)가 회화처럼 걸려 있 었고, 날숨과 들숨을 디지털 드로잉에서 추출한 디지털 바느질 (<숨 One Breath>)이 펼쳐졌다. 작가의 삶이 각인된 작품들은 구체성과 추상성을 공히 획득하며 자연스럽게 나의 시간과도 포개어졌다.

  • 내게 김수자의 작업은 "경계와 이면에 사는 이들에 대한 생각”을 통해 “나와 타자의 관계를 고민하는 예술가의 선물이나 다름없다. 2019년 10월 중순 비가 오던 날, 파리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푸아티에를 찾아갔다. 중세 아키텐 공국의 중심지이자 유럽의 개념을 정립한 아랍권과의 푸아티에 전쟁으로 유명한 도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곳은 현대화의 방식을 예술에서 찾았는데, 그 첫 프로젝트가 《트라베르세/김수자Traversées/Kimsooja》다. 미술 축제의 주인공이 된 김수자는 직접 초청한 동료 예술가들의 작업을 자기 작품과 함께 곳곳에 배치했고, 유서 깊은 도시는 감각적인 경험의 장으로 변모했다. '트라베르세'란 가로지르기, 경계 넘기, 여정이란 뜻이다. 이 도시가 국경과 관습,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나들며 예술 언어와 생의 경계를 사유해 온 노마드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했다면, 작가는 도시 전체를 끌어안음으로써 이에 화답한 셈이다. 나는 푸아티에의 골목을 걸으며 완벽한 타인인 내 몸이 바늘이 되어 이 땅의 과거와 현재, 역사와 미래를 기워 내는 환대의 순간을 만끽했다.

  • 그녀 자신의 몸과 정신, 인생을 온전히 관통하는 김수자의 작업 세계는 그래서 몇 페이지의 글로 정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도저하다. 천에 구멍을 내는 바느질처럼 삶에 필연적인 균열을 내고 순간을 성찰하며 직조한 작업은 숨 쉬듯 제 영역을 확장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삶은 미술 개념과 형식뿐 아니라 삶과 인간에 대한 탐구로 점철되어 있다. 시대를 앞서간 김수자는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이라는 제목의 시대를 일구었고, 역설적으로 시대의 구획이 필요 없는 예술가가 되었다. 김수자는 날을 거듭할수록 투명해진다. 천을 꿰맨 후에는 사라져 버리는 바늘처럼, 세상 모두를 비추지만 정작 자신은 비추지 못하는 거울처럼 소실점이 되는 것이 그녀의 진화법이다. 김수자는 그렇게 내게 삶과 미술이 결코 분리된 대상이 아님을 매순간 일깨운다.

  • 윤혜정
    작가님이 나를 안아준 순간 단순한 인사나 위로를 넘어서는,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가로서 예술과 예술가를 어떻게 정의하는지가 그 행동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했어요.

  • 김수자
    동시대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연민을 갖고 있고, 이는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에 작업으로 스며 나오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연민의 궁극적인 출발점은 나 자신인 동시에 보는 이 자신일지도 몰라요. 사실 작업에서는 하나의 물질, 이미지, 사실, 상황, 상태만 보일 뿐 작품을 만드는 나의 심리 상태나 나 자신과의 관계는 보이지 않죠. 하지만 관객이 이를 헤아리는 순간 전이를 경험하게 되고, 그들의 주관적 관점을 통해 내 작업이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때 경험이라는 건 관계 즉 '바느질'이 형성될 때만 이뤄지고, 이 관계 속에서는 감성적, 이성적 작용이 동시에 드러나죠. 불안정하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조건이나 삶의 일회적이고도 불가역적 운명을 공감할 때, 연민과 애정 같은 따뜻한 마음의 전이는 이를 공유하는 개인 사이의 끈처럼 작용해요. 하지만 내 작업에는 생각하고 분석하게 하는 미술 내면의 형식적 구조가 공존하기에, 감성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태도 그리고 형식적 전개가 함께한다고 봅니다.

  • 윤혜정
    2017년 케베니히 갤러리에서 만난 개인전 《숨의 기하학》이 인상적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나무 계단에 놓여 있던 하얀 보따리가 내내 기억에 남았어요.

  • 김수자
    전시 일주일 전에 고(故) 케베니히 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어요. 나를 비롯한 모두가 충격을 받았죠. 준비 단계에서 몸, 흔적, 숨,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성을 묻는 작업을 갤러리에 설치 하기로 정하고 전시 제목도 그와 여러 번 상의했는데, 결국 케베니히 씨의 존재를 추모하는 전시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얀 보따리는 그를 추모하는 상징적인 작업이었어요. 평소 사용한 이불보, 즐겨 입은 셔츠, 스웨터, 재킷, 신발, 손수건, 향수, 안경 등 케베니히 씨의 시선과 시간이 묻어나는 오브제들을 보따리로 싸맸습니다.

  • 윤혜정
    1990년대부터 뉴욕, 파리, 베를린 등에서 작업했고, 그래서 '노마드 작가'로 불립니다. 타지에 발을 붙이고 땅에 꿰매듯) 산다는 건 곳곳에서 바느질의 개념을 작업으로 선보이는 입장에서 더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여요. 이런 삶을 결정한 데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까?

  • 김수자
    마흔을 갓 넘긴 해에 뉴욕으로 문화적 망명을 결정했어요. 당시 각종 비엔날레를 통해 국제 무대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반면 한국작가의 해외 활동은 거의 없었을 때였죠. 그러나 국내에서는 내 작업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았고, 작품 판매도 전무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나 자신을 세상에 내던지고 한계로 내모는 일종의 드라마틱한 상황이 막연한 스트레스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어요. <바늘여인>,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2000~2001), <집 없는 여인A Homeless Woman>(2000~2001), <빨래하는 여인 A Laundry Woman>(2000) 등 결정적인 퍼포먼스 작업들이 그 시기에 탄생했어요.

  • 윤혜정
    특히 파리에 대해서는 "근원적 이끌림"이라는 표현을 쓰셨죠. 현대인들은 보통 고향에 집착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타지에 이끌린다는 점이 낯설지만 흥미롭게 들렸습니다.

  • 김수자
    뉴욕이 내가 죽고 싶은 마지막 도시라고 늘 느끼는바 아마 조만간 내 인생의 또 다른 중요한 이동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에요. 어쩌다 프랑스는 내게 가장 지속적인 지원을 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작가 이전에 인간으로서 내가 떠도는 여러 도시 중 특히 파리에 실존적 밀착감을 느낍니다. 적지 않은 심적·물리적 타격을 받은 곳이기도 하지만, 1984년 에콜드보자르에서 프랑스 국비 장학금으로 6개월간 연수한 후 40년이 다 된 지금도 이 거역할 수 없는 느낌이 나를 끊임없이 이곳으로 유도합니다. 프랑스가 많은 사유자를 낳은 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도시와의 밀착감은 어느 도시보다도 나를 나로서 존재하고 사유하게끔 만들어요.

  • 윤혜정
    다른 도시, 다른 공간에서 일정 기간 머물면서 작업하는 레지던시 활동도 활발히 합니다. 부러 이방인을 자처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시간을 통해 어떤 영향을 받습니까?

  • 김수자
    레지던시는 나 자신을 일상적 공간에서 유배하는 시공간이자 사물이나 문화와 행동 양식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도록 중립 상태에 놓아 두는 겁니다. 그 시공간을 통해 새로운 발상이나 시도를 가능케 하는 망원경이라고도 할 수 있죠. <바늘여인>, <보따리 트럭-이민자들>, <바늘여인-우주는 기억이었고, 지구는 기념품이다A Needle Woman-Galaxy was a Memory, Earth is a Souvenir> (2014) 그리고 최근 세라믹 작업도 모두 레지던시를 통해 제작되었는데, 모두 내 작업의 중요한 매듭으로 새장을 연 모멘텀들이었어요. 중요한 건 이 기간 동안만큼은 내게 전적인 자유와 지원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이방인의 눈으로 거리를 두고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새로운 인식이나 창작이 가능하겠어요.

  • 윤혜정
    스스로의 몸을 스튜디오이자 프로젝트 저장소로, 질문이자 답으로, 도구이자 개념으로 삼는 작가이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어떤 계기로 이렇게 몸의 실존성에 주목하게 되었나요?

  • 김수자
    어린 시절부터 내 몸에 도전해 왔지만, 무엇보다 스물세 살 즈음에 꾼 꿈이 내 삶과 작업에 상당한 여진을 가져왔어요. 몸의 유한성과 삶의 순환성을 깨달은 시각적, 신체적, 음향적인 경험이었지요. 꿈속에서의 깨달음이 너무 강렬해 '모든 것이 하나다'라고 인식할 수 있었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놋쇠로 내 머리를 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몸과 정신의 실존성과 일체성을 경험했어요. 꿈에서의 경험이 어머니와 바느질을 하며 느낀 경이로움 못지않게 뚜렷이 각인되었죠.

  • 윤혜정
    언젠가 안나 마리아 마욜리노(Anna Maria Maiolino)의 회고전에서 할머니, 엄마(작가), 딸이 하나의 실을 문 채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을 본 적 있어요. 온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주한 작가이니 이동의 끈이기도, 삶의 연속성에 대한 화두이기도 할 겁니다. 몸을 매개로 이어지는 가족, 과거와 현재의 연결점이라는 점에서 작가님의 시간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녀들과는 무엇을 공유했습니까?

  • 김수자
    어린 시절 할머니와 살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은밀한 사색의 시간을 가지며 시각적, 촉각적으로 친밀한 물질, 이미지 또는 정서가 생긴 것 같아요. 내게 모시, 삼베, 홑이불 같은 천이 나 마당에 핀 무궁화, 담장을 뒤덮은 찔레꽃은 할머니의 현전이었고, 깊은 초록색과 붉은색이 대비된 낡고 부드러운 비단 누비이불의 질감과 촉감은 어머니의 그것이었어요. 할머니와 어머니가 이불 호청을 빨아 다듬을 때, 나는 방망이로 리드미컬하게 두들겨 촉촉하게 길이 든 하얀 면 이불 호청을 주시하곤 했죠. 좁고 긴 다듬잇돌 위에 아주 세련되고 적절하게 얹힌 하얀 이불 호청의 비례와 두께, 부드럽게 돌아가며 접힌 가장 자리, 물먹은 천의 촉감, 천의 접힘과 펼쳐짐의 향연, 그것의 기하학적 변환... 커다란 호청을 접어 가며 마음을 맞추던 퍼포 머티브한 행위들에도 매료되었어요. 우리 가족은 수없이 이사 를 다녔고, 그래서 내게 문화란 가설극장과 곡예사들, 여름밤 들판에서 보던 흑백영화, 멀고도 먼 논길의 순례, 얼음조각 배 의 조형성, 무겁게 깊고 푸르렀던 산정호수의 얼음판, 철원 신 수리의 초가집에서 벽지 위에 가득 돋아난 성에를 손톱으로 긁 던 아침의 시간, 슬라이드 쇼처럼 스쳐 지나던 산천초목과 들판 등으로 각인되어 있어요. 또 선의, 인내심, 믿음, 누구도 차별하는 법 없던 어머니의 성품에 늘 감동받곤 했죠. 그래서인지 내가 세상에서 겪은 상반된 경험들은 종종 상처가 되었고 불의, 차별, 거짓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 윤혜정
    건축가인 아들 정재호 씨와 함께 일하기도 합니다. 사석에서 아들이 잘 커 주어 고맙다고 했는데요. 당시 어린 아들에게 예술에 몰두하는 엄마로서의 존재와 작업을 어떻게 납득시켰나요.

  • 김수자
    납득시킬 이유는 없었고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사실이었겠지만, 잘 적응하고 인내해 주어 고마울 따름이에요. 단지 아들이 대학에 진학할 당시, 예술가는 절대 되지 않겠다 선언 하는 걸 보고 그가 얼마나 힘들게 나를 보아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죠.

  • 윤혜정
    예술가의 특별한 통찰력은 삶의 자기 성찰적 태도에서 온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작가님의 예술 여정은 어떤 통찰력을 동력으로 삼고 있을까요?

  • 김수자
    글쎄요. 돌이켜 보면 항상 모르는 채 도전한 작업, 알 수 없는 즉각적인 요구나 선(禪, zen)적인 한순간의 발현, 직감 또는 직 관적인 반응들이 작업 전개의 중요한 순간이 되어 왔다는 걸 부정할 수 없어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예술의지가 생겨나고 행동하는데, 논리와 개념은 작업 이후에나 발견하게 되죠. 클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가 “욕망이 주도한다"고 말한 적 있는데, 전적으로 동의해요. 단 그 욕망이 세속적인 욕망은 아닐 수도 있겠죠.

  • 윤혜정
    지난 인터뷰에서 “보따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했습니다. 보따리를 통한 이야기를 완결 짓고, 다른 걸 시도하겠다는 의지로 들렸어요. 어떤 작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 김수자
    더 이상 예술 할 필요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자족할 때까지만 일하자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어느 순간 '과연 더 해야 할까', '공식적인 예술 행위를 해야만 할까' 싶을 때가 있죠.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킬 때 그 작업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예요. 헌데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락된 작업에서 또 새로운 질문이 파생할 때도 있고, 언급할 필요성을 느낄 땐 같은 형태의 작업 이라도 계속합니다. 보따리가 좋은 예일 수 있는데, 한때의 보 따리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지금의 보따리를 싸맬 수 있다고 봐요. 예전의 보따리와 지금의 보따리가 다르기 때문이죠.

  • 윤혜정
    동의합니다. 이를테면 2010년 이후에는 작가님이 초창기에 만든 ‘○○ 여인' 제목의 작업이 없지 않습니까?

  • 김수자
    지난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두 번째 '바늘여인'을 (리얼 타임으로 선보인 첫 번째 시리즈와는 달리) 슬로 모드로 선보였을 때, 이 시대의 시공간성과 나의 몸의 관계를 논할 만큼 논했다 는 생각이 들었어요. '00 여인'이라는 제목도, 내 몸도 관객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풍경과 바람의 흔적으로 보인 비디오 드로잉 작업 <바람의 여인A Wind Woman>(2003), 크리스탈 팔라스에서 건물 전체를 특수 필름과 거울로 감싼 설치 작업 <거울 여인>, 코넬대학교의 나노과학자와 건축가 아들과 협업한 의인화된 조각 설치작 <바늘 여인-우주는 기억이었고, 지구는 기념품이다> 등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이 작업들을 통해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 즉 우주를 실로 꿰어 내듯 한 번에 꿰뚫는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 윤혜정
    천에서 시작한 바느질은 빛, 소리, 숨쉬기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활용한 바느질로 진화했습니다. 특히 숨(호흡)은 실존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죽음과 삶의 문턱을 의미할텐데, 사실 작가님의 모든 작품이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문턱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 김수자
    1979년 이윤동 작가와 지금은 사라진 사간동의 그로리치 화랑에서 《숨》이라는 제목의 2인전을 연 적 있어요. 그리고 2006년에 내 작업에 바느질 개념으로 평면을 재해석하면서 호흡을 개념화한 비디오, 사운드 퍼포먼스 작업 <호흡 - 보이지 않는 거울, 보이지 않는 바늘 To Breathe-Invisible Mirror, Invisible Needle>을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선보였죠. 작업에 사용한 나의 숨소리와 허밍 사운드 퍼포먼스인 <직조 공장The Weaving Factory>(2004)은 폴란드 우지(Lodz)에 있는 빈 직조공장에서 영감받아 우지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업인데, 내 몸을 호흡으로 가동되는 직조공장으로 상정한 '숨쉬기 사운드 퍼포먼스'였어요. 이때 숨이라는 반복적 리듬은 인식의 연장이었고, 날숨과 들숨, 삶과 죽음, 그 전환의 경계를 넘나드는 보이지 않는 바느질 드로잉 작업이었어요.

  • 윤혜정
    한편 <뭄바이: 빨래터 Mumbai: A Laundry Field>(2007~2008) 같은 작품에서는 시각적인 풍성함과 슬럼가의 고단한 현실이 병치됩니다. 미학적인 탐구에만 천착한 것도, 위로를 작정한 것도 아니지만 역시나 자연스레 공존하죠. 작가님의 작업이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감, 공정함과 박애 같은 기본을 전제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폭력적인 시대란 곧 인간의 조건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일 텐데, 슬픔과 희망을 관조적으로 사유하는 작가로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 김수자
    지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오바마 정권이 GSA(General Services Administration)의 예술과 건축 프로그램의 커미션 작업 활성화의 일환으로 멕시코 국경 지역에 영구 설치작품을 의뢰한 적 있습니다. 그때 국경을 넘다 추방당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보호시설에 가게 됐죠. 멕시코 여성들의 탈출은 그야말로 사투였고, 국경 지대에서 죽어간 이들을 무수한 붉은 점으로 표시한 통계 자료를 보는 순간 목이 콱 메일 정도로 처참했어요. '바늘여인' 퍼포먼스로 세계 여덟 개 도시를 돌아다닐 때도 부의 불평등을 비롯해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갈등으로 파괴, 분열되는 세계의 모습을 목격했어요. 예술가로서 무력감을 느낄 정도로 착잡한 심정입니다. 다만 함께 보고 나눔으로써 바로 여기, 지금을 지각하고자 하며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면서 더 나은 사회를 꿈꾸고 싶어요.

  • 윤혜정
    이런 바람을 가진 미술가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요? '살아남음'과 동의어일까요?

  • 김수자
    결국 무엇을 성공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겠죠. 예술가가 창조하고 표현할 방법이나 장이 없다면 무척 숨 막힐 겁니다. 지속성이 작가의 생명력과 관련 있다 보는데, 창조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여력과 조력이 없다면 평가 이전에 어쨌든 작품을 지속할 수도 없습니다. 거의 40년을 활동해 온 나조차 어떻게 또 한 해를 생존하며 새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합니다. 저는 미술시장에 최적화된 작가가 아니니까요.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현재에서 끝나지 않는 지속성을 보인다면 일단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죠.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의 의미가 각인되고 회자되는 작가, 작품의 존재가 영영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역시 성공입니다. 문제는 누가 역사 속에서 살아남는가인데, 역사는 지속해서 다시 쓰여지기에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가치 설정입니다.

  • 윤혜정
    이 모든 질문의 원형으로 돌아가 보죠. 그럼에도 왜 예술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 김수자
    인생처럼 예술에도 정답이 없어요. 그렇지만 나름의 입장에서 최선의 경지라 여기는 삶과 작품의 방식이 있지요. 흥미로운 질문에 관심을 두며, 예술이건 삶이건 열심히 성찰하고 답하고자 노력해 왔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고요. 이렇게 생각 의 끈을 흔드는 인터뷰에도 삶을 살듯, 예술을 하듯 답을 써 보려 합니다. 이렇게 길을 찾는 해방의 순간이 없다면 어떻게 살 아갈 수 있으며, 예술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내가 추구하는 건 명성이 아니라 진실되고 정직한 가치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속 이는 거짓된 예술계의 행태는 개인과 사회를 기만하는 행위이며, 나는 이를 예의주시할 겁니다. 예술하는 행위 자체로 영혼의, 사회의 등대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요.

  • 윤혜정
    작품 제목에서 낫싱(nothing), 제로(zero), 나우웨어(nowhere) 등의 단어가 보이는데, 그런 수행적인 뉘앙스도 위의 답변과 연결 지을 수 있겠군요. 없다는 게 아니라 모든 것, 동시에 덧없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요.

  • 김수자
    그렇죠. 낫싱(nothing), 제로(zero), 나우웨어 (nowhere)는 에브 리싱(everything), 토탈리티(totality), 에브리웨어(everywhere) 라 해석해도 좋을 거예요. 난 모든 것을 함유하는 언어에 한계를 느낍니다. 그 언어를 오히려 희석하고 무화(無化)했을 때 의미가 더 암시적으로 전달된다고 봐요. 소거해도 더 이상 소거 할 수 없는, 추가해도 더 이상 더 추가할 수 없는 형상성을 지닌 숫자, 양 혹은 공기 같은 시공간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 윤혜정
    그것이 작가님이 종종 이야기해 온 “삶과 예술의 통합(the totality of life and art)"일까요.

  • 김수자
    뿌리 깊은 보편의 입장에서 가능한 한 다각도로 삶과 예술을 깊이 명상하고 통합하려고 시도해 왔어요.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더 맞겠네요. 보따리, 바느질, 실의 궤적이나 연역적 오브제 등 모든 작업이 통합의 길목에 있어요. 갈 때까지 가다 보면 결국 하나가 되지 않을까요.

  • 윤혜정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길 바랍니까?

  • 김수자
    시간을 초월하는 통시적 질문자(questioner)로 남고 싶습니다.

  • 윤혜정
    만약 3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 김수자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담임선생님이 훗날 희망하는 두 가지 직업을 쓰라고 하셨어요. "말하는 자와 화가라고 적었죠. 저에게 말하는 자란 곧 지혜를 설파하는 철학자였어요. 2002년에 한 어느 인터뷰에서 "만일 당신이 다시 그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 답하겠냐"라는 질문에 “a lover or a monk(사랑하는 사람 혹은 수도승)”라 답했어요.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다시 3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아무래도 '철학'이라 답해야 할 것 같군요.

요즘도 종종 푸아티에에서의 시간을 떠올리곤 한다. 나는 옛 아키 공국 궁전에 놓인 거대한 테이블에 앉아 찰흙을 빚었다. 각국의 관객들이 빚어 만든 구가 모여 우주가 되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 다. 사실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빚 는 행위는 구복을 상징하기도,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지만 무엇보 무한히 생득적인 느낌이기 때문이다. 구를 만들려면 찰흙덩이를 손바닥 위에 놓고 일정한 압력과 방향으로 계속 어루만져야 한다. 이렇게 나의 손과 타인의 손에서 파생하는 수많은 선, 지름과 반지 름이 일종의 드로잉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과연 그녀의 말처럼 그 곳에 앉아 구를 빚었을 때, 나는 누군가와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 다. 보따리를 싸고 펼치고 스스로 바늘이 되어 인파 사이를 걷는 등 의 몸과 예술을 잇는 보이지 않는) 기하학의 선들이 세상을 돌아 평 한사람들 그리고 나의 손끝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미술가를 인 터뷰하고 미술 기사를 쓸 때마다 대면하는 막연한 갈등, 과연 현대 미술이 인간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의 혼란한 질문에 대 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불세출의 철학자 푸코의 고향에서 그의 개념인 '현실화된 유토피아'를, 김수자를 통해 체험한 셈이다.

  • *2010년 2월호 『하퍼스 바자』, 2017년 8월호 『보그』, 2020년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인터뷰를 바탕으로 새로 작성한 글입니다.

─ 윤혜정,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을유문화사, pp. 4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