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Lee Sunyoung │ Borders Crossed at Byways
2022
이선영 │ 김수자, 사잇길로 넘나든 경계
Lee Sunyoung (Art Critic)
2022
Even just a quick skim through Kimsooja’s career makes us wonder how a person could have possibly worked so hard. She made her debut on the international stage rather early, which was not all that large for Korean artists of her generation, and she gained domestic recognition, thanks to her success overseas. Yet that is not to say that she dives in for anything and everything; she refuses to show her work in exhibitions that do not align well with her philosophical and aesthetic beliefs or her sense of ethics, no matter how large and reputable they are. The long list of exhibitions and projects she participated in at home and abroad is the result of her enthusiasm about looking for opportunities to truly demonstrate her work and challenging herself through them. She took the decisive action to relocate not to settle somewhere, but solely for the sake of her work. Born in 1957, Kimsooja falls right in the middle of Korea’s baby boomer generation, which refers to those born between 1945 and 1965. Since this generation saw a surge in population, she had to live in an extremely competitive Korean society while compressed modernization was underway in the ashes of war. Opening a short critique of an artist’s work tritely with the generation theory is relevant to the questions about Kimsooja’s journey that seems close to impossible
In evolutionary terms, leaving the place one was born in and is familiar with is often due to the pressure for survival. This has been the case since ages ago when beings from the origin of our times moved from the waters to land and climbed down from the trees to dwell on land. Kimsooja is most widely referred to as the artist who globalized the very Korean object and concept of “bottari,” but nationality, ethnicity, school of thought, and school of art are typical
categories she wishes to avoid. The artist made clear judgments and had opinions about situations, but by nature, she was not aggressively vocal, which caused her to go on “cultural exile” in New York in the early 1990s when globalization was slowly starting to bud in Korea. Bottari, which had special meaning to the artist, was not so much about aesthetics to her, but rather a condition of life. In regards to her personal history, Kimsooja had to pack her bottari
often because her father was a soldier. Even today, where bottari is rare and due to the severance of tradition that has made hanbok material close to obsolete, bottari continues to occupy a place in the subconscious of Koreans that when someone tells us, “pack your bottari!” it strikes us like a bolt from the blue. Bottari sits between memory and expectation as well as between regrets and excitement. As in Cities on the Move - 2727 Kilometers of Bottari Truck (1997), through which the artist delivered an impressive performance of sitting on a bed of bottaris on a truck with her back facing us, the process is what’s important, not the starting point nor destination. Kimsooja’s bottaris paved the way for concepts and phenomena such as globalization, nomadism, and feminism that followed; however, an era is coincidentally encountered, not followed.
Meanwhile, Kimsooja’s work is transcendental and contemplative, as I noticed in her 2016 exhibition at the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Seoul. Her work appears distant from metaphysical idealism because she connects an understanding from trivial, everyday activities of a woman, like sewing, with performance, which has become “grammar” of contemporary art. She gives considerate amount of thought to the empty space that will come to be filled abundantly. Archive of Mind, a participatory installation where visitors are invited to roll clay balls, involves a large 19-meter-long oval wooden table, but the method it employs is simple. It resembles the scene of people gathering in circles during Korean holidays to roll mochi balls, and Kimsooja’s table of participation creates a structure like the Möbius band that naturally joins the opposites into one. Archive and mind seem like things that would not meet, but the artist brings the two together like fabric and needle. The meeting of fabric and needle creates something—the harmony of the soft and hard, the harmony of the opposites. This is
the fundamental and ultimate message of Kimsooja’s work.
The newest version of Kimsooja’s bottari project, presented in 2021, is an on-site installation of a shipping container painted in five cardinal colors called obangsaek, which expands the meaning of bottari to an industrialized module. Another recent work from last year that was installed at Leeum Museum of Art and filled the space with rainbow auroras reveals the existence of light that is omnipresent like the air that channels sound and breath. This light seems to fall in the mystic tradition, rather than have a metaphysical aspect to it as “a metaphor for truth” as said by Hans Blumenberg. Women have placed more importance on love and spirit than on doctrines and scriptures.
— Article from Public Art, No. 193, October, 2022, pp.82-89.
이선영 (미술평론가)
2022
김수자의 작업 이력을 대략만 훑어봐도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해왔나 싶다. 작가가 속한 세대로 볼 때, 국내파에게 그리 넓지 못했던 세계무대에서 일찍이 활동을 개시했고, 그 덕에 국내에서도 평가받은 경우다. 하지만 무작정 열심히 한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명망 있는 큰 전시라 해도 자신의 철학과 미학, 더 나아가 윤리의식에 맞지 않으면 거부 의사를 밝혀왔다. 가령 ‘한국 미술의 양극단인 현대미술 그룹과 민중미술 그룹을 조사하고 병치시켰던’ 쿤스트할레 빈(Kunsthalle Wien) 한국 전시에 대한 참가 거부가 그것이다. 이는 작가 스스로 특정 화파와 무관하게 독립된 길을 걸어왔던 아웃사이더 입장을 표명한 경우다. 국내외의 수많은 전시 및 프로젝트 이력은 작업을 제대로 펼칠 기회를 찾아 꾸준히 도전해왔던 적극적 선택의 결과라는 점이다. 정주를 위한 이동이 아닌, 오로지 작업을 위한 이동의 감행이다. 1957년생의 작가는 전후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인 1945년에서 1965년의 중간에 속한다. 그 나이대의 인구수가 많아 전쟁의 폐허에서 진행된 압축적 근대화 와중 엄청나게 경쟁적인 한국 사회를 통과해야 했다. 구태의연하게 세대론으로 한 작가에 대한 짧은 평문을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김수자의 여정에 대한 의문과 관련된다.
진화론적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익숙한 장소를 떠난다는 것은 생존의 압박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인류의 먼 시원의 어떤 존재가 물에서 육지로 올라왔을 때 그리고 나무에서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부터 있었던 경향이다. 김수자는 ‘보따리’라는 한국적 소재를 세계화한 작가로 흔히 말해지지만, 국가나 민족, 학파나 화파 등은 작가가 회피하고 싶은 전형적인 유형이다. 상황에 대한 판단과 주관은 뚜렷했지만 그리 투쟁적이지 못한 작가의 성향이 한국에서 세계화가 슬슬 시작되던 1990년대 초에 뉴욕으로 ‘문화적 망명’을 떠나게 했다. 김수자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 보따리는 미학이기보다는 우선 삶의 조건이었다. 자전적으로는 직업 군인인 아버지를 둔 탓에 어릴 때부터 보따리 쌀 일이 많았다. 한복 천이 소멸하다시피 한 전통의 단절 속에 보따리가 희귀해진 현재에도 ‘보따리 싸라!’라는 말이 청천벽력 같은 발언으로 다가올 만큼 한국인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존재다. 보따리는 기억과 기대, 회한과 설렘 사이에 있다. 트럭에 실린 보따리, 그 위에 앉아있던 작가의 뒷모습이 인상적인 작품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2727km>(1997)처럼, 출발과 목적지가 아닌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하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세계화, 유목주의, 페미니즘 등을 따라오게 했다. 하지만 시대와는 우연히 만나는 것이지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OO이즘’은 늘 작가를 불편하게 했다. 김수자는 1980년에 학부를 졸업했는데, 당시 미술계는 단색화로 대표되던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라는 ‘양대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화적 좌우익에 공히 적용되던 근대성은 문화적 성과이면서도 억압으로 다가왔다. 굳이 그 양대 산맥을 좌표로 설정하자면, 김수자의 작품은 단색이 아닌 다색이었고, 민중이 아닌 민주였다. 또는 고향 대구에서의 큰 전시 때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차라리 자신의 작업은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2011년, 대구미술관) 보따리나 퍼포먼스와 결합되는 천의 유치찬란한 색상은 한국뿐아니라 김수자가 연구하고 기록한 수많은 민속 전통에서의 아름다움과 같은 반열에 있다. 가령 2010년부터 진행 중인 ‘실의 궤적’은 아메리카 대륙을 비롯한 세계 곳곳 원주민들의 직물 관련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다. 작품 속에 담긴 그토록 아름답고 기이한 문화적 텍스트를 짜던 이들은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평범한 여성들이었다. 2021년에 발표한 최신 버전의 ‘보따리’는 컨테이너에 오방색을 칠한 현장 설치작품으로, 보따리의 의미를 산업화된 모듈로 확장한다. 지난해 리움미술관을 가득 채운 무지갯빛 작품은 소리와 호흡을 매개하는 공기처럼 편재하는 빛의 현존을 드러낸다. 이 빛은 ‘진리의 은유’(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로서의 형이상학적 차원을 가지기보다는 신비주의 전통에 속하는 듯이 보인다. 여성은 교리와 경전보다는 사랑과 영혼을 중시해왔다.
또한 김수자에게 ‘유목’은 느슨한 자유가 아니라 경계의 의식이 고조되는 치열한 실천이다. 낯선 장소에서 붐비는 군중 사이에서 홀로 사람들을 ‘만나는’ 작업 ‘바늘 여인’ 시리즈(1999-)는 세계의 주요 분쟁 지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된 것이 많다. 분단의 여파와 무관하지 않은 한국 문화에서 지금도 고질병인 이분법은 학업을 마치고 막 작업을 시작하려던 작가 에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단색화파나 민중미술로 나뉜 화단은 물론, 이후 하위문화와 결합된 키치 스타일의 세대와도 자신을 구별지었다. 대립보다는 차이였다. 물론 위계적인 인간 사회는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악습에 절어 있지만 말이다. 김수자에게 중요한 것은 차이를 위한 차이가 아니라, 유의미한 종합을 위한 전제로서의 차이였다. 가령 수직/수평은 좌/우처럼 극적인 차이를 대변한다. 김수자가 1980년대 초반에 쓴 논문은 수직 수평과 관련된 십자형 코드에 대한 것이었다.
작가는 2017년 후 한루(Hou Hanru)와의 대담에서 “당시 자연, 캔버스, 온갖 십자형의 시각적 요소에 자리한 수직과 수평의 구조에 대해 연구했고, 이를 토대로 대학원에서 고미술에서부터 동시대 미술에 나타난 십자가 형상에 대한 졸업 논문을 썼다”고 회고했다. 수직 수평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실크스크린으로 제작된 작품 <몸의 연구>(1981)에서 잘 드러나는데,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구조를 연상시키는 수직 수평의 구조를 매개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관념이 아닌 몸이라는 점이 기성의 기하학적 추상과 다르다. ‘바늘 여인’에서 수많은 군중 틈 사이로 요지부동한 작가의 자세 또한 수직적인 부분이 없지 않은지, 이후에는 와불처럼 누운 자세도 등장한다.
당시 여성 작가라는 주변적인 위치는 이항 대립적 사고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날카롭게 의식하게 했다. 1980년대 그리고 이후로도 한참을 더 그 양대산맥은 동 세대 남성 작가들의 차지였다. 끼고 싶지도 않고 낄 수도 없었던 그 시대 또한 다 나간 시점에서, 홀로 갈 수밖에 없었던 여정을 소급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간 길이 극소수의 진짜 예술가로 남게 한 셈이다. 하지만 김수자에게는 ‘예술’ 또한 지양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한 해법은 다소간 역설적이다. 김수자는 2013년 프랭크 고테로(Franck Gautherot)와의 인터뷰에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나의 연습은 점점 비물질화되어 왔다. 예술가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내 몸을 포함해 물질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급자족하고 욕망에서 해방되는 것은 제 예술에서 가장 큰 성취다. 예술적 에너지를 한계까지 소멸시켜 예술을 하거나 예술을 하는 것에서 해방되고 싶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을 하는 행위를 멈추는 것으로는 달성될 수 없으며, 역설적으로 그것은 가장 심오하고 신랄한 방식으로 충만하게 살고, 예술을 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몸의 기하학>(2006-2015)은 작가가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요가 매트를 사용한 작품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몸의흔적을 그대로 담은 ‘회화’로 제시되었다.
김수자는 자신을 ‘천’이 아닌 ‘바늘’자리에 위치시킨다. 바느질을 마친 후에 바늘은 결과물에서 사라진다. 바늘은 마치 샤먼(shaman)처럼 매개자일 따름이다. 바늘 되기는 몸 또한 포함하기에 현존한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 때 느낀 바지만, 김수자의 작품은 초월적이고 관조적이다. 거의 고정되다시피 한 금욕적 차림새 또한 그런 인상을 더 한다. 하지만 김수자의 작업이 형이상학적인 관념주의와 거리를 두는 지점은 바느질 같은 사소한 여성의 일상으로부터의 깨달음을 현대미술의 한 문법이 된 수행성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충만하게 채워질 빈 부분이 최대한 고려된다. 전시의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전시 부제와 같은 <마음의 기하학>(2016)은 관람객이 흙을 주물러서 구를 만드는 체험형 작품으로 제시됐다. 19m 길이의 타원형 나무 탁자는 규모는 크지만, 방식은 소박하다. 우연찮게 그 작업에 참여한 이들은 일시적인 공동체만을 이룰 따름이다. <마음의 기하학>은 명절 때 모여 새알심을 빚는 듯한 느낌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이며, 반대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뫼비우스띠 같은 구조다.
우유니 소금사막을 떠올리게 하는, 건축적 규모를 가지는 거울반사형 시공간의 연출 또한 유일한 세계를 반영하거나 변형하는 차원이 아닌, 평행하게 존재하는 우주에 대한 신비로운 상상을 담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면서 그리고 낯선 도시들에서 자신을 바늘 삼아 서 있던 경험을 말하는 대목에서 사물 또는 사람들과 하나가 된 준종교적인 체험을 이야기한다. 여러 가지로 실망을 안겨주었던 한국에도 관심을 가질만한 샤머니즘이 있었다. 마음과 기하학은 연결될 것 같지 않지만, 작가는 그것을 천과 바늘처럼 잇는다. 천과 바늘의 만남이 무엇인가를 만든다. 부드러운 것과 단단한 것의 만남이다. 반대되는 것의 조화다. 여기에 김수자 작품의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메시지가 있다. 작가가 선택한 소재인 보따리 자체가 융통성 있는 기하학에 바탕한다. 보따리는 가방처럼 빈 상자가 아니라, 접고 펼칠 수 있는 적극적인 공간-시간을 전제하는 현대적 기하학이다. 보따리는 진화를 거듭하여 작품 <연역적 오브제>(2016)처럼 우주의 알처럼보이는 괴물체가 되기도 한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무엇이든 쌀 수 있고 그래서 무엇이라도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
— Public Art, No. 193, October, 2022, pp.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