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김수자 │ 작가노트

작가노트

김수자

1988

  • 내가 오래된 한복 천들을 모아 바느질 작업을 하기 시작한 것은 몇 가지 감성적, 논리적 필연성으로부터였다. 80년대 초반까지의나의 관심은 온통 사물의 내부구조와 그 관계에 집중되어 있었고,당시 나에게 있어 회화(繪畵)란, 자연에 대한 나의 인식을 표면화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로써의 천(天) · 지(地) · 인(人), 그리고 그 존재방식으로서의 수평 · 수직구조의 조형적 탐구를 의미했다. 평면을 통해, 혹은 오브제(object)나 신체를 통해 이러한 인식의 조형화를 시도하였으나 그러한 사고가 점차 관념화되면서 사고의 경직성을 낳았고, 구조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표현적인 요소가 점차 소거되어 결국 작업에서의 행위의 부재,내지는 무의미를 가져왔다. 또한 나 개인의 삶과 작업 사이에서도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구조 위에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넣는 인간화(人間化)의 작업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 끝없이 도전하는 평면 앞에서, 자기존재의 모순 앞에서, 또한 독창성(originality)에 대한 강한 욕구 앞에서 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방법론을 찾아 고심하던 중, 1983년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는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나의 사고와, 감수성과 행위 이 모두가 일치하는 은밀하고도 놀라운 일체감을 체험했으며, 묻어두었던 그 숱한 기억들과 아픔, 삶의 애정까지도 그 안에 내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이 가지는 기본구조로써의 날실과 씨실, 우리 천의 그 원초적인 색감, 평면을 넘나드는 꿰매는 행위의 천과의 자기동일성,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향수····· 이 모든 것들에 나 자신은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작업에서 보여지는 색면들은 하나의 천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하여 네모꼴의 단위 속에서 변주되고, 결국 이 단위들의 통합된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네모꼴의 각기 다른 천들이 유기적 관계 속에서 확산되면서 하나의 형태화된 평면으로써의 당위성을 얻고자 했다면, 다소 굴곡이 있지만 최근의 작업들은 원색적인 천의 소리들이 많은 부분 검정톤(tone)으로 가라앉으면서, 평면의 질(質)의 표현이 중요시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작업에서의 검정의 출현은 검정이 갖는 관념적인 의미 그대로 절망, 허무, 죽음 같은 침몰된 정신상태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수평과 수직의 만남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의 작업에는 일련의 십자형(十字形), 내지는 그 변형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형태의식은 우리가 피부로 접해온 한국의 건축공간의 격자형태나 문자 등, 우리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동질적인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으나, 무엇보다 존재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만남의 결과였던 만큼, 나에게는 절박한 자기구원의 의미로 남아있다.

─ 『Kim, Soo-Ja』, 갤러리현대 개인전 도록 수록 글, p.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