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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김홍희 │ 김수자의 보따리
2021
이연재 │ 김수자, 문화인류학적 탐구를 이어가는 바늘 여인
보따리로 감싸고 자수로 엮어낸 여성성…공통된 키워드는 ‘관계맺기'
2021
김수자의 보따리 작업은 바느질과 같은 여성의 가사행위가 예술적으로, 동시에 세계 무대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함께하던 바느질 기억으로부터 천을 이어 붙이는 회화적 천 작업과 조각적 보따리 작업이 탄생했다. 그 보따리는 30년 창작활동과 국내외 전시를 거치면서 양식적·매체적으로 다변화되고 미학적·정치적으로 심화, 확장되고 있다.
지금은 전설이 된 역사적 전시회 ‘떠도는 도시들(Cities on the Move)’(1997~1999)은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즘 영향하에 아시아가 지리정치학적 요지로 부상하면서 신도시 건설붐과 새 도시문화가 부흥되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기획된 시의적인 전시회였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이정표가 된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를 발표했다.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장장 2727㎞를 달린 방랑의 여정을 기록한 이 비디오에서 작가는 스쳐가는 한국 풍경을 뒤로하며 보따리 위에 걸터앉은 채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내내 뒷모습만 보인다. 현대적 도시현상과 진보개념을 역행하듯 보따리와 쓸쓸한 여인의 뒷모습이 유랑민의 소외와 향수를 환기시킨다.
김수자는 1999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문화적 망명자”를 자처한 그는 이방인의 삶을 영위하는 “한계 상황” 속에서 ‘바늘 여인’과 같은 퍼포먼스 비디오를 탄생시킨다. 첫번째 ‘바늘 여인’(1999~2001)은 도쿄·상하이·런던·뉴욕 등 인구가 밀집한 8개 대도시에서 촬영한 다채널 비디오다. 작가는 여기서도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대도시 군중 물결 한가운데 부동의 자세로 서 있다. 내적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부동의 뒷모습, 그 특유의 이러한 미장센은 도쿄 시부야 번화가에서 느꼈던 실존적 경험에 근간한다. 행인 인파로 자신이 “지워지는” 느낌을 받는 순간, 그들과 하나 되는 일체감으로 “안도와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것이 무명의 군중을 보자기로 감싸는 연민·포용·환대의 감흥이 아니었을까?
두번째 ‘바늘 여인’(2005~2009)에서 작가는 정치적·종교적 분쟁, 내전·폭력과 빈곤으로 피폐해진 6개 도시인 파탄·예루살렘·사나·하바나·리우데자네이루·은자메나를 탐방했다. 착취되고 거세된 현장, 유토피아·디스토피아가 엇갈리는 혼란을 대면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찌르고 봉합하는 바늘이 돼 지구와 인류의 불행을 지우는 치유자가 되기를 염원했다.
우리를 각성시키는 바늘 여인의 메시지는 ‘실의 궤적’(2010~2019) 연작에서 다른 모습으로 계승된다. 인류학적·고고학적·문명사적 다큐멘터리이자, 유럽과 남·동아시아, 북·남미, 아프리카 등 다른 문화권을 이동하며 직물의 경로를 추적한 이 대하 서사시에서 작가의 모습은 사라지고 카메라 뒤에서 응시하는 눈이 직조문화의 원형적 장면과 어휘를 포착하며 다양한 직조문화에 내재한 인간 존재의 원형, 원초적 생명원리를 발견하게 한다.
김수자는 한편으로 자신의 몸을 매체화하는 숨소리 사운드 퍼포먼스를 수행해왔다. ‘직조공장’(2004)은 폴란드 우치의 공장 빈 건물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숨소리와 허밍 사운드로 공장을 재가동시킨다는 개념으로 발상됐다. 들숨·날숨의 반복되는 호흡을 씨줄·날줄로 교차되는 직물에 유비시키는 호흡 퍼포먼스는 2006년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발표한 ‘호흡: 보이지 않는 거울, 보이지 않는 바늘’로 본격화됐고, 같은 해 마드리드 크리스탈 팰리스 개인전 ‘호흡: 거울여인’에서는 건축물에 부착된 특수필름과 바닥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 반사되는 빛이 호흡 퍼포먼스와 어우러지는, 빛과 호흡이 공명하는 공감각적 보따리를 창출했다.
숨소리와 빛으로 공간을 감싸는, 탈물질화된 보따리를 ‘후기 보따리’로 명명한다면,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가 이를 명문화한다. 작가는 한국관의 유리 전면을 특수필름으로 덮어 무한대로 굴절되는 무지갯빛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바닥에 거울을 부착해 반사된 빛을 재투영시키는 만화경 같은 미러링 효과를 연출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시리즈 개인전 ‘마음의 기하학’에서도 관객이 점토를 구형으로 빚게 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후기 보따리’를 예증했다. 특수필름을 사용하는 빛 작업과 함께 ‘구의 궤적’이란 새로운 소리 작업으로 관객을 공명시켰다. 커다란 타원형 탁자 위를 굴러가는 찰흙 공의 마찰 소리와 작가의 가글링 소리가 뒤섞인, 어떤 언술보다 강력한 주술적 초성의 마력이 관객과의 일체감을 조성했다. 이로써 주객체를 연결하는 ‘마음의 기하학’이 완결됐다.
— The Kyunghyang daily news, March 2021
이연재 (서울시립미술관 수집연구과 학예연구사)
2021
보따리 오브제와 바늘 여인으로 2000년대 전후 세계 미술무대에서 명성을 얻은 김수자(1957∼)는 어머니와 이불보를 만들며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 온 우주적 에너지가 자신의 몸을 통과하여 바늘 끝에 모이는 느낌을 경험했다고 밝혀왔다. 손으로 직물을 짜고 만드는 행위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전담했고, 이는 예술(art)이 아닌 수공예(craft)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쓰여진 것’이라는 의미의 ‘텍스트(text)’의 라틴어 어원이 ‘짜여진 것(thing woven)’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김수자의 작업들은 여성적 행위를 환유하는 ‘바느질’로 만든 직물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것들이 인간에 의해 직조되고 기록되어 온 문화·역사적인 텍스트로 확장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작가의 작업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온 여성들의 서사가 사실은 인류의 문화·역사 기반 곳곳에 짙게 배어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김수자의 작업에서 역사의 주변부로 위치 지워진 영역들의 문화인류학적 전복을 읽을 수 있다.
김수자가 미술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 화단은 크게 단색화 계열과 민중미술 계열 작가들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다적인 오브제· 행위 미술, 개념미술 등 실험적인 작업을 탐구하는 작가들도 일군 존재했다. 그러나 김수자는 “정치적 미술이 내재한 공격적 측면에 공감할 수 없었고” [1] 그렇다고 단색화의 시류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미술대학을 다니던 당시 재료와 물성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아방가르드적인 설치나 퍼포먼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캔버스 회화의 구조와 이 세계의 내적 구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는 김수자는 우리 주변에 이미 존재하는 십자(十字)형의 기호에서 그 답을 찾고자 했다. 김수자는 이러한 수평·수직의 기하학적 기호는 역사 이전의 시간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며, 이것이 보이지 않는 우주의 질서와 본질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아이디어를 석사학위 논문으로 발전시켰다. [2]
김수자는 자신에게 불편하지 않고 익숙한 소재들인 실, 바늘 등을 사용하여 캔버스 틀을 벗어난, 콜라주 회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의 자신에 작업에 대해 서양의 현대미술에서 다루지 않았던 재료를 사용하여 “여성의 일상을 현대미술사의 문맥에서 재해석하고 펼쳐 보이려는” [3] 아방가르드적 접근이었다고 평가했다. 씨실과 날실이 종횡으로 엮인 비단 이불보, 그리고 이를 바늘이 수직으로 뚫고 들어가고 나가고를 반복하며 잇는 행위는 김수자가 구축해나가기 시작한 고유의 조형적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형식이었다. 김수자의 초기 ‘꿰매기’ 회화는 곧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입체적 보따리 오브제로 변주되었고, 이 꿰매기와 보따리 모티프는 이후 전개된 작가의 영상작업에서도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작가의 초기 ‘꿰매기’ 회화 작품은 사각형의 조각보들과 색동천을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여 이어붙인 것이다. 바느질 자국을 살펴보면 작가는 사실 이보다 더 규칙적이고 반듯하게 잘 꿰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지점은 바느질이 듬성듬성하고 또 어느 지점은 꽤 촘촘하다. 사용된 천의 모양도 정확하게 재단된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 아니고, 모서리 실밥이 드문드문 풀어헤쳐진 것이 보인다. 작가는 당시 수평·수직의 문제에 깊이 빠져있었다고 했는데, 김수자의 조각보 콜라주 회화에 드러난 수평·수직은 몬드리안의 기하추상 회화와 달리 정확하고 단단하게 각이 잡혀있지 않다. 천 조각들을 덧대어 성기게 이어붙인 마디를 들추면 미세하게 벌어지는 틈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어떤 조각보 면은 검은 잉크와 아크릴 물감이 거칠게 덧발라져 있다. 수평과 수직의 조형요소로 추출된, 균형 잡힌 완전함에 대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본디 우리의 삶은 아무리 계획하고 재단해도 엉성하며 때로는 암흑으로 뒤덮이기도 한다는 것을 은유하듯 말이다.
김수자는 전통 가옥의 문살에 이 형형색색의 조각보들을 덧대거나 휘감는 설치 작업을 지나 조각보 자체를 볼륨을 가진 입체적 오브제로 발전시킨다. 그는 1992년 뉴욕현대미술관 PS1 레지던시에 참여했을 때, 이불보로 만든 보따리 작업을 선보였다. 뉴욕 레지던시에서 보따리에 싸인 자신의 짐을 보고 영감을 얻었던 것이다. 지금은 세대교체와 생활양식의 변화로 보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물은 아니지만 당시 한국인에게 아주 익숙한 사물이었던 보따리는 그저 둥글게 말은 짐꾸러미였다. 그 꾸러미 안에는 귀한 선물이 들어있기도 하고, 장소를 옮겨가면서도 꼭 가지고 가야 하는 필수적이고 소중한 물건들이 싸매져 있었다. 불편한 이동 중에도 이고 지고 들고 간 짐꾸러미 보따리에는 낯선 곳에서 잘 뿌리내리고 살아가보겠다는 의지와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던 것이다.
보따리 오브제의 소재인 비단 이불보는 한국인이 겪는 생로병사의 흔적이 내재된 천이다. 우리는 이불 위에서 나고 죽으며, 잠들고 사랑한다. 한국 여성들은 여전히 인생의 큰 관문인 혼인을 준비할 때 혼수와 예단으로 이불을 준비한다. 김수자는 한국 전통색감의 이불보와 조각보를 사용한 것은 오직 오리엔탈리즘, 포스트식민주의, 한국의 지역적 미학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본인 삶의 큰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4] 또한 작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그 재료 자체가 현대미술의, 특히 회화의 평면성과 그 구조를 실험하는 유효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했고 만약 이것이 실존의 문제, 여성과 인간의 본질적 삶의 화두를 가져오는 재료가 아니었다면 쓰지 않았을 것” [5] 이라고 밝혔다. 1990년대에는 지구촌, 세계화가 화두였던 시기였다. 권력과 위계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경제적·문화적 패권을 쥐고 있던 미국과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나 주변부,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중심부에 편입되지 못하고 떠도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산과 유목주의)가 미술계의 하나의 거대 주제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작가가 의도하였든 아니든, 이러한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는 역으로 세계무대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보따리 오브제 설치는 영상작업으로 확장되었다. <떠도는 도시들 - 보따리 트럭 2727km>(1997)은 용달 트럭에 실린 보따리들 위에 올라앉은 작가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 트럭은 어린 시절 작가가 이사 다녔던 우리나라의 지역들을 찾아 이동하는데, 이렇게 이동하는 작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관객은 마치 작가의 뒷자리에 함께 앉아 이사가는 그 상황 속에 놓인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덜컹거리며 나아가는 보따리 트럭에 몸을 싣고서 멀리 앞을 응시하는 작가의 모습은 명상적이다. 이동하는 그 상황 속에 함께 놓인 관객은 경계를 넘어 새로운 영토에 들어가 그가 맞닥뜨릴 삶에 대한 두려움, 희망 그리고 잠시 익숙했던 곳을 떠나야만 하는 아쉬움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그리고 묶은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이 여성이 홀로 짐꾸러미를 싸고 이를 트럭에 단단히 동여맸을 모습을 짐작하게 된다. 결국, 김수자의 보따리 트럭 영상작업은 때로는 정착에 성공하였을 테지만, 대부분은 본 땅에 안착하지 못하고 가장자리를 배회했을 외부인·이민자들의 외로운 역사의 기억을 여성의 몸으로써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이 작업이 “나와 우리 가족의 뿌리에 관한 기록에 가까웠다”고 [6] 했다. 이 영상작업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하랄드 제만이 각각 기획했던 국제 전시에 출품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김수자는 세계 미술계에서 명성을 쌓아갔다.
김수자의 최초의 영상작업 <바느질하며 걷기 - 경주>(1994)는 돌과 낙엽이 쌓인 땅 위에 원색의 이불보들을 넓게 펼쳐두고, 작가가 그 위를 걸으며 이불보들을 손으로 하나씩 거둬들이는 퍼포먼스 영상이다. 바닥에 깔린 다채로운 이불보들을 발로 밟고, 손으로 거둬들이며, 이를 팔에 걸치는 작가의 행위는 스스로 바늘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퍼포먼스가 자연이라는 거대한 캔버스를 꿰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개념화 한 작업이었다. 또한 베틀을 이용해 실을 수평·수직의 엮어 손으로 삼베를 짜던 여성들의 전통적인 모습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전술하였듯, 생로병사의 흔적이 내재된 이불보를 긴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성이 바늘이 되어 그 속을 들고 나며 엮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작업은 이후 제작된 김수자의 영상작업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주제를 예고한다.
<바늘 여인>(1999∼2001)에서 작가는 8개의 각 화면 가운데 등을 보인 채 부동의 자세로 서 있다. <보따리 트럭>에서처럼 관객은 긴머리를 하나로 묶은 작가의 뒷모습을 보게 되고, 작가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도쿄·상하이·멕시코시티·런던·델리·뉴욕·카이로·라고스 도심 속 수많은 군중들을 마주치게 된다. 8채널 영상 속 전 세계 군중들에 둘러싸인 관객은 그들의 바쁜 움직임과 강한 에너지를 함께 느끼게 된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영상에서 작가는 명확하게 바늘의 역할을 자처하며, 여기에 지켜보는 관객도 가담시킨다. 그렇다면 바늘에 꿸 실과 원색의 원단들은 어디에 있는가. 바늘 여인 옆을 스쳐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의 날실이자 직물이 되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날실에 축적된 각자의 시간과 기억들, 삶의 아우라가 바늘 여인과 관객의 곁을 통과하는 것이다. 결국, 이 작업은 자유롭게 흐르는 이러한 수많은 날실들이 서로 엮이고 상호 관계되어 그 도시 고유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바늘 여인인 작가는 이 과정에 관객이 적극 동참하도록 제안하면서 홀로 독창적이고 중심적인 모더니즘적 작가의 지위에서 벗어난다.
김수자의 비교적 최근 작업인 <실의 궤적>(2010∼2019)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경의가 담긴 문화인류학적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수 있다. 다양한 문화권의 직조문화를 다루고 있는 이 영상작업 시리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는 페루의 직물 문화(Ⅰ), 유럽의 레이스 문화(Ⅱ), 인도의 판목 날염 문화(Ⅲ), 중국의 자수 문화(Ⅳ), 미국 원주민의 직물과 바구니 문화(Ⅴ), 모로코의 모자이크 타일 문화(Ⅵ) 등을 기록하여 보여준다. 손으로 꿰매고, 엮고, 두드려서 만드는 각 민족 고유의 공예 방식과 그 민족이 살아온 대자연·고대 유적·건축물 등을 화면 속에 병렬한 것이다.
예를 들어, Ⅰ장에서는 페루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이 꽃과 식물의 잎으로 염색한 실을 손으로 감고 돌려가며 직물(textile)을 짜고 있다. 고대 페루 문화에서 직물짜기는 개인과 지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알파카·라마·양의 털 등 자연에서 온 원료가 여인의 손에서 실의 형태로 뽑혀 나와 텍스타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작가는 페루 여성이 입고 있는 전통의상의 자수 문양과 그의 뒤로 보이는 고대 페루 유적지의 기하학적 패턴, 그리고 여성의 손에 의해 돌고 있는 실패의 모양에서 형태적 유사성이 발견되도록 카메라 촬영 구도를 의도하였다. 유럽의 레이스 제작문화를 다룬 Ⅱ장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과 꽃을 보여주던 화면이 손으로 보빈 레이스를 만드는 유럽 여성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자연을 닮은 보빈 레이스의 문양과 유럽 건축물에서 발견되는 구조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김수자의 이 영상작업은 여성은 자연, 남성은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류학의 전통적인 이분법적 서술에 부드럽게 저항한다. 여성적 작업의 기호인 공예와 텍스타일이 각 민족·지역의 텍스트, 콘텍스트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자연, 전통의상, 직물, 공예, 음식, 건축을 화면 속에 병치하고 뒤섞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인류학자들이 특권적으로 규정해 온, 인간의 문화 및 사상의 발전사라는 거대 구조의 근저에는 젠더화 된 남성·여성적의 작업 모두 공존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느질에서 출발한 김수자의 작업은 여성적인 행위와 노동을 자연, 결혼, 가족 등 여성에게 허락되어온 영역 속에 종속시켜 묘사하지 않고, 젠더화 된 권력과 지식체계를 균형 있게 재구성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인류의 문화양식은 서서히 축적되어 변증법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 발전과정 속에는 언제나 역사의 승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김수자는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중심의 바깥에 위치한 사물, 기억, 존재들을 작업 속으로 끌고 와 탐구자의 시선으로 조명한다. 이를 통해 서구의 지배적인 이론과 지식으로 편중된 우리 사고체계의 틈새에 새로운 무게 추를 올려둔다.
[Note]
[1] 김수자·후한루 대담, 「새로운 빛을 밝히다」, 『김수자-마음의 기하학』(국립현대미술관, 2017), p. 46.
[2] 김수자, 「조형기호의 보편성과 유전성의 관한 고찰: 십자형 기호를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3] 김수자와의 메일 인터뷰, 2021년 5월 10일.
[4] 김수자·후 한루 대담(2017), p. 56.
[5] 김수자와의 메일 인터뷰, 2021년 5월 10일.
[6] 김수자·후 한루 대담(2017), p.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