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서영희 │ 세계 속에서 미술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작가, 김수자
2015
Jaeho Chong │ A Needle Woman: Galaxy was a Memory, Earth is a Souvenir
2015
정재호 │ A Needle Woman: Galaxy was a Memory, Earth is a Souvenir
2015
누구든지 김수자 작가가 제작한 작품들을 신속히 훑어보기로 한다면, 필자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그의 작품들이 매체별로 정리된 웹 홈페이지 www.kimsooja.com로 일단 들어가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썩 잘 분류된 이 홈페이지는 작가의 글, 인터뷰, 작품에 대한 생생한 포트폴리오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도 여느 감상자들과 마찬가지이다. 김수자의 예외적인 전시들을 보기 위해 수시로 해외로 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빈번하게 이 사이트에 링크를 걸곤 한다. 그럼 그때마다 간화선(看話禪)의 화두 같은 작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또렷이 드러나고, 이윽고는 일상에서 둔탁해진 의식의 벽이 얇은 필름처럼 예민해지는 묘한 기쁨을 느낀다.
김수자의 작품은 우리의 마른 감각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빠르고 격한 충격을 주거나 새뜻한 간질거림으로 자극하는 작품들과는 매우 다르다. 특이하게도 그의 작품들은 감상자의 몸과 의식을 동시에 사로잡고, 시각과 감성의 깊이(profondeur)를 파고든다. 그의 상상력과 정서도 그저 그렇고 그런 충동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그의 미적 상상력은 출렁이지 않고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과 여유로운 호흡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도 너 나 없이 부지불식간에 방치해왔던 깊은 생각들 속으로 가라앉는다. '나'를 질문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 혹은 세계 속 존재의 의미 내지 근원을 더듬어가는 사색의 느린 흐름을 타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감상자들의 이 같은 특별한 경험을 배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세우지 않는 편이다. 작품을 설치하고서는 에고의 흔적을 지운 채 조용히 물러난다. 예술가가 주관과 감정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음이 감상자에겐 흔치 않은 당혹스런 일이 되겠으나, 하지만 그렇기에 스스로 의식의 체험을 할 수 있는 넉넉한 사유의 자리를 얻음에야 ... 그러니 우리가 그의 작품 속으로 풍덩 빠져 볼만 하지 않겠는가.
천들을 바늘과 실로 꿰매어 연결한 1980년대의 <ㄱ, ㄴ, ㄷ, ㄹ> 연작과 <天, 地> 연작에서부터 최근의 비디오 설치작품인 <地水火風> 연작까지, 작가의 작품 구성은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 늘 단순하고 구조적이다. 초기작에서 수직선과 수평선 혹은 사선으로 이어진 사각형 천들은 조각조각마다 염색된 오방색들을 그대로 드러낸 채,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색조 구성을 보여준다. <지수화풍>에서도 세계를 구성하는 4 요소들인 흙, 물, 불, 바람의 자연 이미지들을 순열로 연결해 설치함으로서, 존재를 둘러싼 세계의 근원적 의미를 네 방향을 따라 구조적으로 사유하도록 한다. 작가가 스펙터클의 축으로 등장한 <바늘여인> 연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얼굴을 보이지 않는 침묵 상태로 그렇게 '수직'으로 멈추어 서있다. 그 대신 주변 도시와 다양한 면모의 사람들이 형형색색의 천 조각들처럼 '수평'으로 그를 감싸 흐르고 움직인다. 2010년을 전후해 등장한 일련의 비디오 작품들인 <뭄바이: 빨래터>과 <앨범: 허드슨 길드> 그리고 <실의 궤적> 연작들 역시도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이지 않는 작가의 몸은 여전히 지구 곳곳을 수평으로 흐르는 갖가지의 존재의 삶들, 그 조각과 편린들을 끌어 모았다가 때가 되면 우리 눈앞에 보따리를 풀듯 펼쳐놓고 주목하도록 손짓한다.
그의 비디오 작품들은 그 전에 선행된 <보따리> 연작의 연장선 위에 있다. 초기에 천들을 아상블라주하듯 꿰맨 작품들은 평면작업이지만, 1991년 뉴욕 PS1 작업실에서 발견한 <보따리> 연작은 천들을 꿰매지 않고 천 조각 하나하나의 단위를 독립된 기표로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천 조각들은 색과 문양 그리고 크기에 상관없이 각각 하나의 기호가 되며, 전시장 바닥 혹은 테이블 위에 펼쳐놓는 산포의 기호로 유연하게 변화된다. 그러다가 작가가 어느 순간에 이 천 조각들을 끌어 모아 보따리로 싸면서, 평면 작업(수평 구조, 정지 상태)이 입체 작업(수직 구조, 이동 상태)으로 이행되고, 보따리는 신체와 함께 여행하는 오브제로 변환된다. 펼치고 싸는 다시 그 반대로도 전환되는 <보따리> 연작은 그 가변성과 이동성(유목성) 덕분에 시, 공간을 통한 작품 구조의 열림을 가져온 그야말로 현대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후 작가는 세계 곳곳마다 보따리들을 들고 다니며 전시장마다 상이한 퍼포먼스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보따리를 열 때마다 존재와 삶의 다양한 상들을 풀어내는 작가의 행위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미술의 정체성이란 경계를 허물며 다른 영역으로 나아갔다. 새로운 출발점은 <보따리>의 무한한 구조적 가변성에 있었다. 그로부터 작가는 천 조각들 대신 비디오 영상 단편을 매재로 삼고 그리고 보따리를 펼치고 싸는 일 대신 필름을 편집해내는 일로 이행하며, 전혀 또 다른 이미지들을 펼쳐냈다. 필자는 비디오와 필름 영상의 선택이 그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생각할 때마다, 감탄과 환호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비단 작품 스케일과 구상에서 실현에 이르는 과정의 변화 뿐 아니라, 영상의 흐르는 시간성은 음양을 따라 오행하는 유동적 사태들 다시 말해 만물의 생성-변화-소멸의 변전을 근원적으로 설명해내는 최적의 방법적 조건을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들숨과 날숨의 호흡이나 실을 잣고 씨실, 날실을 직조하는 일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실의 궤적과 남미, 유럽의 바늘 여인들의 이중 구조 역시 그의 비디오 작품에서는 존재-삶의 구조적 양태에 대한 직관의 이미지들로 살아났다.
호흡(숨쉬기)은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이다. 첫 호흡으로 태어나며, 마지막 호흡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 보이지 않는 들숨, 날숨의 끝없는 반복은 우주의 보이지 않는 무한 에너지(氣, 光)의 맥동 그 자체이다. 다양한 삶들을 이루는 바탕이자 가장 근본적이고 통일된 존재 상징으로서 이 호흡을 김수자는 2006년 마드리드의 '크리스탈 궁전' 내부에 가득 채웠다(<호흡: 거울여인>). 이어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호흡: 보따리>란 설치작품을 통해, 전시장을 빛과 호흡으로 채웠다. 국내외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던진 두 설치작품들은 비시각적인 빛과 호흡을 특수 필름과 거울을 사용해 눈부시도록 찬란한 무지개빛과 확대된 호흡 소리로 즉 심장의 수축과 확장, 씨실과 날실의 직조처럼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촉각적, 청각적 맥동으로 전환시켰다. 그리하여 작가나 감상자의 존재/부재를 부각시키는 한편 생명과 환경의 연계에 더 주목하도록 하는 관계적 상황을 연출해냈다.
2015
A silent figure stands with its back facing the viewer, poised motionless against the ebb and flow of the anonymous crowd, unsheltered and without a want. Standing in front of A Needle Woman, a performance/video work (1999-2009) by the acclaimed artist Kimsooja, we see a body which, without doing anything, becomes a measure of time and space. As the artist's body weaves ceaselessly through the crowd, it shifts in and out of our field of vision. For a fleeting moment we experience our body transposed into hers, and through the borrowed gaze of the artist we confront our own impermanence in the face of time.
Her most recent work, similarly titled, A Needle Woman: Galaxy was a Memory, Earth is a Souvenir, carries this experience forward in a new form of practice. It is the result of a close collaboration between Kimsooja, the nanoscientist Ulrich Wiesner, and myself, an architect, on the occasion of the Cornell University's inaugural art biennial organized by Stephanie Owens, director of the Cornell Council for the Arts. Sited at the heart of the university's Arts Quad, the 46 foot high 4.5 foot diameter custom-fabricated steel structure is fleshed out with transparent acrylic panels that have been individually coated in iridescent nanopolymer. Under a raking light, each of these panels transforms the entire pavilion into a radiant spectrum of color as the molecularly engineered 'block copolymer,' produced by Hiroaki Sai and Ferdinand Kohle from the Wiesner Group, refracts various wavelengths of light dependent on the angle from which it is viewed. The interior of the floor is mirrored, doubling and extending the sky into the ground.
Cornell has a long history of commissioning site-specific art works. Perhaps those best known came out of the seminal 1969 Earth Art show curated by Willoughby Sharp, which brought together a group of young artists, including Hans Haacke, Richard Long, Robert Smithson, Dennis Oppenheim, and Günther Uecker, to produce new works on campus. Many of these artists treated the earth itself as a canvas and as sculptural material, just as today Kimsooja sees the earth as a "readyused" object – an idea akin to Duchamp's readymades, or Piero Manzoni's 1961 Socle Du Monde. In fact, much like Duchamp's attitude, Kimsooja's work resists human desire and adoration for visual pleasure, never making anything, but creating new thoughts for any given object or phenomenon. However, drawing such a formalistic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artists in using found objects has its limits. For instance, the idea of the needle employed by Kimsooja, in her own words, is "a medium, a mystery, a reality, a hermaphrodite, a barometer, a moment, and Zen," which is much closer to a state of empathy than to a rationale of apathy. It echoes the spirit of Arte Povera, whose attitude, according to Germano Celant, is "intent upon retrieving the factual significance of the emerging meaning of human life."
What then, led an artist who refuses to 'make' objects to conceive a 46-foot tall 'sculpture'? At the first meeting between the collaborators, Kimsooja was presented with a small vial containing an iridescent substance. Generally known as 'structural color,' and characterized by Ulrich Wiesner as 'block copolymer,' this chemically grown chain of monomers produce a continuous banding of molecules with light-refracting qualities similar to those found on the wings of butterflies or the shells of beetles. When examined under an electron microscope, it appears as a striated fabric. Needless to say, Kimsooja's sustained interest in used fabrics as a tableau of life finds another scale of reality here. Such a profound consistency between nanoscientific phenomena and her artistic practice allows her to work within an invisible realm outside the register of human senses and to bring reality closer to our own experience – a practice to which she has always been committed.
"Interconnected to observations in art-making," she says, "nano-techniques are an inverse expression of our perspective of the universe (cosmology)." The former constantly sharpens our gaze towards a single point, infinitely dividing and redefining space almost to the point of eliminating interiority, while the latter moves toward the limits of exterior space, beyond geometric imagination. Architecture, whose purpose includes the preservation of interiority through geometry, frames this vast scope of space at a scale conducive to a direct bodily experience. To this end, the physical form of the pavilion has little relevance as a sculptural object, but rises out of a necessity of finding an instrument to bridge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The form of a needle is not without its own architectural history. The Egyptian obelisk, for example, functioned as a religious axis between man and the cosmos for many centuries. Some known as 'Cleopatra's Needle,' these sacred structures embody early Egyptian creation myths that explained the rising and setting of the sun – the solar cycle – through the metaphor of birth and consummation of life closely associated with solar deities, namely the sun god Ra. As such, light and time had already emerged as symbolic channels between man and celestial order in the shape of a needle.
In effect, it is neither the nanomaterial, the architecture, nor the artistic intention that reveals the invisible, but the subtle yet perpetual cosmic motion reflected in the change of light. Material seizes such an instance. The molecular structure on the skin of the pavilion physically unwraps light, enabling a person's gaze to weave through the undulating depths of visual surface – a phenomenon perfectly mirroring the dynamic reciprocity between the standing figure and the gazing subject in the artist's video work. The 'needle,' in turn, anchored perpendicular to the ground, parallels our bodies and emerges as an object of non-violence. A stream of consciousness that once took the form of a brushstroke on the surface of a canvas is abstracted over the years in Kimsooja's practice as first a needle, then a body, a camera lens, and finally a luminous void. A gaze is all that remains.
More than a symbol of, or a testament to, the confluence of art and science, A Needle Woman: Galaxy was a Memory, Earth is a Souvenir opens the ontological dimension between our fleeting existence and the cosmos by rendering all of our gaze – an emphatic gesture of human subjectivity – instrumental to the relational structure between distance, time, matter, and memory: a void at the tip of a needle point.
— Space, Seoul, Korea, January 2015, Issue 566, pp.114-118.
2015
한 사람이 고요히 서 있는 모습을 마주한다. 오고 가는 이름 모를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지도 않고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정갈한 부동의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다. 김수자의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인 〈바늘여인〉(1999-2009)에서 하나의 ‘몸’은 시간과 공간의 척도가 된다. 작가의 몸은 지나가는 군중과 겹치면서 우리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가 벗어나기를 반복한다.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몸이 그 인물에 전이돼 있음을 느끼고, 작가의 시선을 빌려 시간 앞에 선 덧없는 자기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
〈바늘여인 – 우주는 하나의 기억이었고, 지구는 하나의 기념물이다(A Needle Woman: Galaxy was a Memory, Earth is a Souvenir)〉. 비슷한 제목의 그의 최근작은 이전 작업의 연장선에서 건축적 형태로 관람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코넬 대학교 첫 비엔날레에서 발표될 이 작업을 위해 김수자, 나노 과학자 울리히 위즈너(Ulrich Wiesner), 건축가인 필자가 긴밀히 협업했다. 대학교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아트 쿼드에, 투명한 아크릴 패널로 감싼 높이 14m, 지름 1.3m의 강철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각각의 아크릴 패널은 무지갯빛 나노 폴리머가 코팅되어 있어, 밝은 빛을 받으면 파빌리온 전체에 연속적인 스펙트럼의 색을 입힌다. 위즈너 그룹(Wiesner Group)의 사이 히로아키(Sai Hiroaki)와 퍼디난드 콜(Ferdinand Kohle)이 나노 입자의 배열 방식을 설계해 만들어낸 이 ‘블록 폴리머’는 빛의 다양한 파장을 보는 각도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굴절시킨다. 파빌리온 내부의 거울로 된 원형 바닥은 하늘을 땅으로 반사해 양자를 무한 연장하는 역할을 한다.
코넬 대학교는 장소 특정적 예술에 관한 오랜 역사가 있다. 1969년 윌러비 샤프(Willoughby Sharp)가 큐레이팅한 ‘대지예술(Earth Art)’ 프로젝트에서 한스 하케(Hans Haacke), 리차드 롱(Richard Long),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 귄터 우커(Günther Uecker)가 캠퍼스에 새롭게 설치한 작업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이 작가들은 대지 자체를 하나의 캔버스이자 작업의 질료로 받아들였다. 김수자가 지구를 하나의 ‘레디유즈드(readyused)’ 오브제로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는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readymade)’, 피에로 만조니(Piero Manzoni)의 1961년 작 〈세계의 주추(Socle du Monde)〉와 유사하다. 뒤샹의 태도에 더 가깝게, 김수자의 작업은 시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경배를 경계한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사물이나 현상, 비물질적인 것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끌어낸다. 하지만 두 작가가 형식적으로 동일한 오브제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김수자에게 바늘은 “하나의 매개체, 신비, 현실, 자웅동체, 하나의 지표와 순간, 그리고 하나의 선(Zen)”이다. 이는 이성적 지각이라기보다는 자각과 통찰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가 말하는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정신과 더욱 유사하다. 다시 말해 이는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는 특정 사실의 본질과 의미를 탐색하려는 의지”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브제를 ‘만드는 것’을 거부해 온 작가로 하여금 14m의 ‘조각’을 잉태하도록 이끌었을까? 협업자들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김수자는 무지갯빛 물질을 담고 있는 작은 유리병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구조색’으로 알려져 있고 울리히 위즈너가 ‘블록 혼성 중합체’로 구현한 이 물질은 화학적으로 단일 구조의 단위체를 발전시킨 것으로, 분자의 연속적인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빛을 굴절시키는 속성은 나비의 날개나 딱정벌레의 껍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하며, 전자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실로 짜인 직물처럼 보인다. 천을 통해 삶과 세계의 진실을 탐구해 온 김수자의 한결같은 관심사가 여기서 또 다른 스케일의 현실을 찾은 것이다. 이 같은 나노과학의 현상과 그의 예술적 실험 사이의 깊은 일관성이 그가 인간의 감각과 지각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현상을 작품화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업을 경험하며 새로운 현실을 마주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속해 온 탐구의 태도이다.
김수자는 “나노기술은 천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외향적, 거시적 관점과 상반되는 내향적, 미시적 방향성을 갖는 표현 방식”이라고 말한다. 전자는 하나의 소실점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예리하게 하고, 내부 공간이 최대한 소거될 만큼 공간을 무한으로 나누고 재정의한다. 동시에 후자는 기하학적 상상력을 넘어 외부 공간의 한계를 확대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기하학으로 공간의 내구성을 유지하는 건축은, 인간의 경험으로 가늠하기에 너무 큰 공간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스케일의 틀을 제공한다. 완성된 파빌리온의 형태가 조각물처럼 보이지만, 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를 잇는 구조물로서 도출된 결과일 뿐이다.
바늘이라는 형태는 건축 역사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수 세기 동안 인간과 우주 사이의 종교적 중심축의 역할을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도 알려진 이 기념물은 이집트 신화에서 신성한 구조물로 등장하고, 뜨고 지는 해를 상징한다. 이는 탄생과 완성의 은유로서 태양의 신 ‘라(Ra)’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바늘의 형태를 통해 자신과 우주를 잇는 매개인 빛과 시간을 드러내 왔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김수자의 바늘이 갖는 시각적 현상은 나노물질이나 건축 구조, 또는 예술적 의도로 구현되기보다는, 미묘한 빛의 변화에서 인지할 수 있는 끊임없는 천체의 운동 안에서 이루어진다. 파빌리온의 표면을 감싸고 있는 분자 구조는 물리적으로 빛을 굴절시켜 가시적인 파장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표면을 만들고, 우리가 그것을 응시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현상은 김수자의 퍼포먼스 비디오 작품에서 보듯, 서 있는 작가와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과도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또한 ‘바늘’은 대지와의 수직적인 관계와 달리 우리 몸과는 평행한 대상으로 마주하게 된다. 캔버스 표면의 붓질로 이루어지던 의식의 흐름은 오랜 기간 김수자의 작업에서 개념화되어 왔다. 붓에서 바늘로, 바늘은 몸으로, 몸은 시선으로. 결국 빛의 공간으로서의 시선만 남을 뿐이다.
이로써 우리 시선은 거리, 시간, 물질, 그리고 천체에 내재한 기억을 잇는 하나의 바느질 행위로 전환된다. 바늘 끝이 닿는 찰나와 영원의 교차점을 끊임없이 오가며.
— 『공간』, 2015년 1월, 114–118.